[칼럼] ‘민주주의 허울 쓴 독재’? 라는데

 

대한민국 70년 세월의 노멀이야말로 보수, 극우, 독재였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13년은 그 세월에 비하면 뉴노멀이고 비정상이며 가보지 못한 나라. 보수는 13년 동안 색깔론과 독재론으로 딴지걸기를 해왔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민간독재, 파시즘, 전체주의, 광기.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일제히 나서 현 정권을 몰아붙인다.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검찰총장마저 교묘한 언사로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라는 표현을 들이댄다. 독재 치하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권력 비판이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모두들 독재몰이에 여념이 없다.

이런 모습은 4·15 총선을 몇달 앞둔 올해 초에도 있었다. 지난해 말 더불어민주당이 정의당 등과 함께 선거법과 검찰개혁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한 직후다. 그즈음에도 독재니 사회주의니 동물농장이니 하는 험한 말이 넘쳐났다. 독재의 망령이, 파시즘의 망령이 우리 사회를 떠돈다는데, 정말 그런가.

총선을 앞두고 보수 야당이 그렇게 독재라고 외쳤지만 국민들은 집권 여당에 180석 가까운 의석을 몰아줬다. 적어도 독재라는 비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게 총선에서 판명난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해온 진보개혁 세력에게 독재 비판은 뼈아프다.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을 든 시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라면 존립 근거가 무너지는 일이다. 하지만 보수 일각의 독재 주장은 번지수가 틀렸다.

현재의 미래통합당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3분의 1을 조금 넘는 의석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개원 협상 과정에서 상임위원장 할당분을 걷어찬 건 최소한의 저지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선 아예 여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긴 뒤 독재로 몰아붙이는 게 쉬운 선택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로 보면 지금 정국은 분명 뉴노멀’, 비정상이다. 대한민국 70년 세월의 노멀이야말로 보수, 극우, 독재였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3년은 그 긴 세월에 비춰보면 뉴노멀이고 비정상이며 가보지 못한 나라인 셈이다. 지난 13년간의 뉴노멀 시대에 보수는 색깔론과 독재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며 딴지걸기를 해왔다.

도대체 무엇이 독재인가. 합법적 독재라는데, 이 정도의 입법 독주를 놓고 파시즘이라는 건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가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뒤 모든 권력을 차지한 걸 갖다대지만 경우가 다르다. 알다시피 히틀러의 파시즘은 인종 말살, 침략주의 등 반휴머니즘으로 점철됐다.

부동산시장이 시시각각으로 출렁이는 상황에서 임대차 3, 부동산 3법을 야당 반대를 뚫고 단독 처리했다고 해서 독재라는 건 너무 나갔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을 시급히 해소하기 위해 35조원의 3차 추경을 밀어붙인 게 어떻게 독재가 되나. 차라리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처럼 나는 임차인이라며 정부 정책의 허점을 매섭게 파고드는 게 좋다.

입법 강행에 따른 정책적 성패에 대해선 정부여당이 책임을 질 일이다. 부동산 정책이 잘못됐다면 내년 봄 보궐선거나 내후년 대선에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정책적 문제들을 독재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건 이념의 과잉이고, 과거 민주 대 반민주론의 보수 버전일 뿐이다.

적어도 노무현 정부 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총선에서 이겨놓고도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이번엔 어찌됐든 의도한 정책들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엔 이념형 정책을 밀어붙이다 실패했지만 지금은 민생형 입법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 감사원장 소신을 둘러싼 논란은 어찌 보면 민주주의 틀 안에서 벌어지는 불필요한 소모전이다. 독재 정부가 눈 밖에 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자리보전 시키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일은 없다. 검찰총장이 사실상 정권을 상대로 독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지금이 독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반증이다. 대통령 임명직인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궤도이탈적 행태는 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정 운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갈등 구조는 어떻게든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그냥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다. 그 의석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180석을 헌 칼 쓰듯 휘두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건 더 큰 문제다.

4·15 총선 이후 시대적 과제는 16년 만에 다시 들어선 진보개혁세력 우위의 권력구도를 토대로 70년 세월의 잔재를 극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부분적 쏠림과 과속은 오랜 세월 동안 한쪽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를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인지도 모른다.

< 백기철 한겨레신문 편집인 >

 

 


자가격리에서 해방된 모녀를 응원하며.

임순숙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어머니이이이. 오늘 격리 해제에요. 자유에요.”

드디어 기다리던 낭보가 가족 카톡방에 올라왔다. 소식을 접한 식구들이 축하 메세지며 덕담을 보내느라 조그만 공간이 한동안 꽤나 바삐 움직였다. 격리 기간 시작과 해제 즈음 실시하는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여 기다리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손녀와 며느리의 상기된 얼굴을 떠올려본다.

세상을 뒤흔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국에서 진정되어 간다는 소식이 들릴 즈음, 며느리가 손녀와 함께 친가가 있는 대구를 다녀오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세기의 불청객에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대구의 소식이 들릴 때 마다 가슴 졸였을 며느리를 생각하면 흔쾌히 승낙하고 싶었지만 현실이 녹녹하지 않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런 나의 마음을 읽은 아들이, 지금은 캐나다보다 한국이 더 안전하다며 거들고 나섰다. 캐나다 전역에서 확산 중인 이곳 상황도 그렇지만 누구보다 처의 간절함을 잘 알기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읽혔다.

지난 유월 하순 경, 모녀는 가족의 우려 속에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한 직후부터 그들이 겪은 경험들이 속속 전해져 왔다. 예전 같으면 상상조차 안 되는 일들이 단 몇 달 만에 완전히 바뀌었으니, 비행기 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그 비싼 비행기 좌석을 한 칸씩 띄어 앉게 한 조치며 비행하는 열 댓시간 동안 마스크를 착용 해야 했고, 기내 서비스 받는 것은 꿈도 못 꿀 상황에다 샌드위치 하나로 식사를 대신하게 했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서글프면서도 그나마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어 감사했다. 사방으로 막혔던 하늘길이 이렇게라도 열린 게 얼마나 다행인가.

모녀의 도착과 함께 양가의 가족들은 새로운 걱정에 쌓였다. 제한된 공간에서 2주일이라는 자가격리 기간을 어떻게 버텨낼지, 그토록 가고 싶어 애태우던 그들을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했다. 설상가상 한국의 뉴스에서는 바이러스 확진자가 증가 추세이며 해외에서 유입된 확진자 수가 국내에서 발생한 수 보다 곱절 이상이라는 보도를 연일 했다. 거기다가 자가격리 중이던 사람이 격리지를 이탈하여 추방위기에 놓였고 또 어떤 이는 가까운 편의점에 갔다가 주민의 신고로 발각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우리 아이들에겐 그런 일은 없으리라 예단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가격리 첫날, 모녀는 동생의 빈 아파트에서 임시둥지를 틀었다. 그리던 혈육을 힘껏 안아보지도 못한 채 서로 그림자되어 주변을 맴돌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선 경험자들의 조언을 위안삼아 무난한 출발을 한 모녀는 초기의 시차적응과 혼동의 시기가 지나자 집보다 더 편하다는 반가운 소식을 보내왔다. 한동안 잊고 지낸 자유를 작은 공간에서 만끽하는 중이라며, 가정주부의 빡빡한 일상을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휴식기를 누린다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이후 몇 차례 감정의 기복이 읽혀졌지만 그 속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 걸어나왔다.

어떤 환경이 도래할 지 미래가 불투명한 이 시대에 강한 정신력만이 살 길인 듯 싶다.

몇 주 만에 부쩍 성숙해진 손녀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의 시름을 내려놓는다.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영원히 간직할 것들

송민호 목사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목사)

 

황금의 입을 가진 투쟁가로 알려진 4세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349-407)세상에서 진정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현재 소유물을 하나씩 들여다 보았습니다. ‘내가 사는 집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영혼을 담고 있는 내 몸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못했습니다. ‘지금 사는 집은 언젠가는 반납해야 하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역시 해어져 버리거나 남을 줄 것이며, 이 몸도 태어날 때 빌려주셨다가 죽는 날 도로 가져가실 것이니, 진정 나에게 속한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진정으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크리소스톰의 판단이 맞습니다. 영원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젊어서는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우표나 동전을 모으고, 여행에서 기념품을 사 오고, 책이나 음반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차피 죽으면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래도 크리소스톰은 내 것이 있다는 긍정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살아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하며 믿음으로 성숙해진 나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가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이전보다 성숙해졌다면, 변화된 믿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소망과 사랑도 마찬가지로 성숙해진 만큼,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덕목들, 그것들은 내 것입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구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물질의 유혹과 욕심을 경계하십시오. 대신 하늘의 보물을 쌓으려 노력하십시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코로나 팬더믹 기간 동안 우리는 귀한 진리를 깨닫고 있습니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비정한 사실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보게 합니다. 진정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한마당- 포스트 코로나, 불안한 징조

 


중국과 유럽의 뿌옇던 하늘이 맑고 푸르게 변했다. 탁했던 강물과 도시의 하천은 몰라보게 맑아졌다. 코로나-19로 변하고 달라진 것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한산한 거리, 문을 닫아걸고 텅빈 가게들, 공원조차 사람의 발걸음이 뜸해 쓸쓸했던 뒤안길에 동물들이 대신 살판나서 제 세상을 만난 것 같다는 지난 몇 개월

하지만, 도심엔 마스크를 쓰거나 혹은 쓰지 않은 사람들이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고, 문을 연 식당들도 손님 발길이 돌아오고 있다. 트래픽이 사라졌던 도로의 뜸했던 차량들은 차츰 불어나 밀리는 시간대가 늘고 있다. 코로나 방역이 효과적으로 이뤄지면서 새 감염자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세상은 단단히 쌓았던 벽을 차츰 허물기 시작해 하나 둘씩 예전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자연환경과 사회현상의 변화뿐 만이 아니었다. 우울증 환자가 늘고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의 심성과 정신건강에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바이러스 공포와 사람 접촉에 대한 불신, 생계를 위한 일과 수고의 한계와 무력감,

집안에 쳐박혀 인터넷과 스마트폰, TV에 의지해 살게 되면서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비대면의 일상화라는 전혀 달라진 생활방식을 강요당해야 했다. 오프라인 삶의 격리, 사람들과의 관계단절, 활동제약에 따른 불안과 강박은 하루하루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적자생존의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인간이 변화된 환경에 패배로만 머물러 있을 리는 없다. 상상 이상의 코로나 재앙이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새로운 삶의 방편들을 모색하게 만들었으니, 앞으로의 세상, 인간의 사고와 삶의 모습은 어떻든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시대는 어떤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 변화되고 달라진 사람들은 단절을 딛고 일어나 어떤 멋지고 정감있는 관계를 만들어 갈까. 생활은 얼마나 절도있는 편리와 안락을 추구해 나갈 것인가.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고 아름답고 안전하며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 가게 될까?


중세의 페스트 이후 전염병은 거의 방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오만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보란 듯 핵주먹을 날렸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라는 괴물, 전자현미경에 드러낸 모습은 꽃송이로 위장한 듯 신비스럽기까지 한 미물이 무려 17백만 명을 병고에 몰아넣고, 7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고있는 상태다. 전 지구적 차단과 격리, 나아가 마비를 부른 이 병원체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이기와 오만, 무능과 무력을 절감시켜 주었다.

여기까지 이른데는 사람들의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대자연의 생태계 질서, 생명의 섭리를 무너뜨린 이기적이고 방만한 행태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심상치 않은 기후변화의 징후들, 지구전체에 퍼진 미세플라스틱의 폐해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모르는 게 아니요 잘 알면서도 고치고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오기와 타락에 준엄한 채찍을 들이댄 게 바로 이 엄청난 코로나 재앙이라는데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코로나 사태 속에 겪는 불편과 자책이 그런 되새김과 교훈을 주는 것은 아마도 창조주의 선한 의도일지 모른다. 너희들로 인해 아프고 병든 지구를 보라, 이기와 교만에 빠져 허우적대는 너희 인간세상의 타락과 사악함의 끝은 어디냐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고 당부했던 그 분의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안타까운 눈물을 삼키며 사랑의 회초리를 든 부모의 심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그런 성찰 위에 긍정적인 새로움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자신이 없어서 우울하다. 하늘과 바다가 앞으로도 계속 깨끗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탐욕스럽던 사람들의 삶이 절제와 청렴으로 바뀔 조짐도 발견할 수 없다. 이전과 달라져 사람들의 악독과 패악이 선하고 착하고 진실된 모습들로 변하리라는 전망도 흐려서 암담하다.

코로나 와중에 차별과 학대의 뉴스들은 더 많아졌다. 지구촌 곳곳에서 서로 할퀴며 죽기살기 극한대립의 행태는 더 심화되어 가는 듯하다. 감염을 방치하던 자들이 백신 선점 경쟁에는 눈에 불을 켠다. 함께 고통과 사랑을 나누자 오염을 줄여보자 지구를 살리자는 외침은 공허하다. 흐뭇한 미담보다 가슴 아픈 소식들이 더 많이 들린다.

하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수많은 단죄와 심판에도 다시 죄악의 늪으로 돌아가곤 하는 인간의 죄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삯꾼 성직자들이 참회는커녕 오히려 때를 만난 듯 혹세무민하는 세태가 정말 세상 종말의 때가 아닌지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다신 생각하기도 싫고 욕먹을 망발인지도 모르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2 3의 코로나 사태는 또 오고, 오고야 말 것이라는.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