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재용 부회장의 유니콘 리더십

 

< 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은 유니콘과 같다. 사람들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얘기하는데 정작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어쭙잖은 농담을 던진 이유는 대검 수사심의위원회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이런 결정에는 이 부회장에 대한 기소가 삼성과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고려가 있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의 감옥행이 리더십 공백을 낳고 이것이 기업과 국민 경제에 큰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놀랍다. 시장에서도 반신반의하는 이 부회장의 리더십을 14명의 위원들이 보았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나의 판단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판단 근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2000년대 초반 이 부회장은 삼성의 미래를 위해 이(e)비즈니스를 시작한다며 이(e)삼성과 그 계열사들을 설립했다. 그룹 차원의 전폭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투자는 실패했다. 물론 이 부회장은 손해를 보지 않았다. 실패로 인해 불거질 자질 논란을 피하기 위해 삼성 계열사들이 그 손실을 다 떠안았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은 이 부회장은 투자만 했을 뿐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삼성 투자는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이었기에 성공의 공은 모두 이 부회장에게 돌려졌을 것이라는 점을. 이처럼 이 부회장에게 있어 기업경영은 마치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자신이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상대방이 지는 게임과도 같다. 어떤 결과이든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과는 넘기고 공만 가져가는 리더십이다.

이 부회장의 그룹 내 역할에 대한 스스로의 진단은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나왔다. 청문회에서 그는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다. 수사 과정도 비슷했다. 언론에 공개된 진술조서에 따르면 그는 삼성전자 부회장인데 결재를 지금까지 한번도 한 적이 없()”, “회장님께서 결재 라인에 끼워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대주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았다. 마치 영국 여왕처럼.

하지만 그는 영국 여왕보다 더 신비주의에 싸여 있다. 이처럼 외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 부회장의 리더십은 위기 시에는 달라진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 시기가 회사가 어려울 때가 아니라 자기가 어려울 때라는 데 있다. 평상시에는 결재조차 하지 않는다던 이 부회장은 정작 자신의 재판을 앞두고는 방진복을 입은 채 작업장을 순회하거나 공장을 방문한 대통령의 옆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장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시장이 한 산업의 선도기업의 리더에게 바라는 것은 그 기업과 산업의 미래에 대한 식견과 전망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 부회장이 공개된 자리에서 투자자들에게 반도체나 정보기술(IT) 산업의 비전을 밝혔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이 부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는 이미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실형을 받은 1심 판결 뒤 삼성전자의 주가는 오히려 올랐다. 반대로 집행유예가 나왔던 2심 판결 뒤 주가는 하락했다. 이는 비단 이재용 부회장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필자는 재벌 총수의 리더십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이창민 한양대 교수와 함께 2000년부터 2018년 사이에 유죄 판결을 받은 35명의 재벌총수와 관련된 319개 계열사의 주가 반응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가 주가에 부정적인 경우는 실형이 아니라 오히려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진 경우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는 시장이 재벌총수에 대한 실형 선고가 해당 기업의 의사결정의 공백을 가져와 기업가치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기각했음을 의미한다. 투자자 입장에서 재벌총수의 리더십은 회사에 꼭 필요한 자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주요한 결정을 전문경영인들이 내리고 있는 현실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총수가 부재하여도 기업과 국가 경제가 망가지는 일은 없다. 에스케이(SK) 최태원 회장이 감옥에 있었던 926일 동안 에스케이텔레콤(SKT)과 우리 경제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권고는 배척되어야 한다. 검찰의 신속한 기소 결정을 촉구한다.

 


[칼럼]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확성기

● 칼럼 2020. 7. 10. 02:11 Posted by SisaHan

[칼럼]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확성기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대북 제재조치로 전방에서 확성기 방송이 시작된 20161.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확성기 방송을 듣고 전방에서 많은 탈북 귀순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면서 이를 진실의 힘이라고 했다. 신년사 발표 후 열흘 뒤인 1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안보부처 업무보고 자리에 참석한 탈북 군인이 확성기 방송을 듣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발언하자 박 대통령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우리가 북한의 급소를 제대로 찔렀다는 확신의 표정이었다. 국방부는 160억원을 투입하여 고성능 확성기를 전방에 설치하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방송을 했다. 이 정도면 전방에서 귀순자가 넘쳐나야 하는데, 도대체 넘어오는 자가 없었다. 어떤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그해 총선을 1주일 앞두고 국가정보원은 중국에서 북한이 운영하는 류경식당에서 영문을 모르던 12명의 종업원과 지배인을 단체로 싣고 와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전방에서 탈북자가 나타나지 않고 시간만 허비하자 10월 국군의 날에 대통령은 북한 주민과 군인은 자유의 터전으로 넘어오라며 공개적으로 탈북을 촉구했다. 확성기 방송도 북한 정권에 대한 공세를 날로 높여갔다.

20175월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는 전방의 확성기가 골칫덩어리였다. 없애자니 보수언론이 북한 눈치 본다며 반발할 것이 뻔하고, 놔두자니 전방에 분란만 일으킬 이 물건을 어찌할 것인가. 아주 창의적인 대안이 나왔다. 기존의 확성기 방송은 북한의 체제의 열등함을 지적하고 지도부의 존엄을 공격하거나 주민과 군인의 탈북을 권유하는 내용이 주종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정치적 내용을 다 빼버리고 아이돌 공연과 날씨와 건강과 같은 생활 정보, 그리고 라디오 연속극으로 편성을 몽땅 바꿔버렸다. 박근혜 정부가 만든 대북 심리전 도구에 문재인 정부는 존중과 배려, 유용성과 즐거움을 실어 보냈다. 이때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방에서 탈북 주민과 군인이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에만 북한군 귀순이 중부전선에서 두차례 있었고, 8월에 서해 교동도에서 주민이 귀순했다. 이후로도 매달 전방 귀순이 이어져 11월 초에는 11명에 달했다. 그 이전의 2년간 전방 탈북자를 추월하는 숫자다. 한 북한 병사는 합동신문 과정에서 연속극을 진행하던 여성 동무를 만나고 싶다며 팬심을 드러냈다. 병사의 소원대로 당시 연속극을 낭독하던 국군정보사령부 여군 상사가 이후에 병사를 만났는지, 필자는 그게 몹시 궁금하다.

그토록 탈북을 촉구할 때는 요지부동이다가 탈북하지 말고 방송이나 즐기시라고 할 때는 마구 넘어오는 북한 병사는 대다수가 90년대 이후 출생한 신세대다. 새로운 유행에 민감하고 물질적 풍요와 행복을 갈구하는 성향의 새로운 북한의 세대에 박근혜식 심리전은 먹혀들지 않았다. 북한의 체제를 붕괴시키겠다고 으르렁거리던 국군정보사령부가 어느 날 친절한 안내자로 얼굴을 바꾸자 정작 북한 체제에 미세 균열이 발생하는 역설이 엄연한 한반도의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너무 친절하게 배려하고 존중해왔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이런 문재인이 과거 냉전의 전사처럼 으르렁거리던 박근혜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더 나아가 위협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기들 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냉전식 봉쇄정책이 아니라 적응이 어려운 친절한 안내자들이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입장을 고려해서 20184·27 판문점 합의에 따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그 직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방에서 북한군 병사의 탈북 행렬이 멈췄다.

주초에 미국의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이 서울에 왔다. 다시 북미 대화가 재개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자 북한은 최선희 제1부상과 권정근 미국국장이 사흘 간격으로 미국과 마주하는 일은 없다는 성명을 내보냈다. 반복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건 실제로는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정말로 관심이 없다면 비건이 서울에 오건 말건 신경 끄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반어법 공세를 지속하는 북한식 확성기의 문법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친절하고 세심하게 북한에 안내자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문재인식 대북 확성기의 아주 뛰어난 효능이다. 북한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 김종대 전의원, 정의당 한반도 평화본부장 >


 

[특파원 칼럼]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은 여러모로 씁쓸하다. 세 차례 이뤄진 북-미 정상의 만남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에 대한 양쪽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거듭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체제의 생존이, 한국에는 한반도 평화가 걸린 절박한 문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언론에 얼마나 멋지게 비칠지, 재선에 도움이 될지의 관점에서 주로 다뤄졌다. 더구나 이 과정을 낱낱이 폭로한 이가 2000년대 북-미 제네바 합의를 깨뜨린 뒤 퇴장했던 초강경파 볼턴이라는 점에 또 한 번 씁쓸하다. 북한이 인간쓰레기로 부를 정도로 혐오하는 볼턴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에 훼방꾼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볼턴의 책에서 남··미 정상의 관계가 눈길을 끈다. 우선,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미 행정부 내의 강력한 회의론 속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개인적 친분까지 깨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요구대로 합의하면 선거에 질 수 있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다치는 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볼턴은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노 딜이후에는 재무부의 대북제재 관련 발표를 철회하라고 트위터에 올려 혼란을 일으켰는데, 참모들에게 오직 한 사람(김 위원장)”을 위한 트위트라고 하는 등 김 위원장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썼다.

-미 정상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당장 마주 앉을 여건은 못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 여념이 없고, 뚜렷한 비핵화 성과 없이 또 만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모습이다. 북한이 기존 태도에서 양보하면서 미국과 대화를 시도한다 해도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북한의 쇼에 속지 마라는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눈에 띄는 두 번째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다. 미국의 금전적 이득과 자신의 재선 유불리를 최우선에 둔 트럼프 대통령, 한반도 평화 노력을 한국 통일 어젠다로 치부하는 볼턴 같은 강경파, 미국의 귀를 붙들고 끊임없이 최대한의 압박을 속삭이는 일본 사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 딜로 끝난 뒤, 문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장소로 판문점이나 미 해군 함정을 예시하며 북-미 대화를 되살리려 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편에 서 있다고 북한이 보기 때문에 남북 사이에 의미 있는 대화가 그동안 이뤄지지 못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제를 돌리는 와중에도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안전보장을 원한다는 점을 집요하게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점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백악관에 강조했다.

이런 한국의 노력을 볼턴은 책에서 사진찍기에 끼어들려는 시도라거나 조현병 환자 같은 생각이라고 비하했다. 백악관 참모한테 이런 냉소를 받으면서까지 문 대통령은 중재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최근 문 대통령을 향해 자기변명과 책임 회피, 뿌리 깊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했다. 볼턴 책은 북한이 존중하며 협력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명확히 보여줬다. 대남 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한 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 황준범 워싱턴 특파원 >


[한마당 칼럼] 사람 값과 코로나

● 칼럼 2020. 6. 20. 08:40 Posted by SisaHan

[한마당 칼럼]  사람 값과 코로나

       

사고로 사망한 사람에게는 피해 보상금이 주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측 사이의 합의에 의해 거액이 보상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형편없는 금액에 유족들이 반발해 격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 값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느냐?, 인간을 무시하느냐!”는 격앙된 항의에 죽은 사람 가지고 장사 하려느냐!”는 반박이 나온다. 그러다 결렬되면 법원에 맡기는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간다. 하지만 법적 기준선과 산정은 항상 흡족할 리가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제도화 된 나라에서는 하찮은 잘못에도 천문학적인 보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40년간 담배를 피운 폐암 환자에게 1억 달러를 물어준 담배회사, 추돌사고로 불이 나 죽은 4살 아이에게 미국법원은 SUV의 기름탱크 위치 잘못으로 사망했다며 15천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크라이슬러에 명하기도 했다. ‘사람 값을 따지면 수백에서 수천 배의 차이가 난다.

이처럼 금액으로 따지는 사람 값은 돈이 우상이 된 황금만능 세상에서 사람들의 속물적이고 육적인 욕망의 척도를 드러낸다. 그런, 사람 값 비싸다고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525일 미국 미네소타의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 무릎에 846초간 목이 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46)사람 값을 다른 각도로 상기시켰다. 세계 1등국 미국에서 사람을 개 돼지처럼 압살한 경찰의 만행에 흑인들은 물론 세계인이 규탄하며 인종차별 반대시위로 번진 이유다. 살인 경찰관 앞에서 플로이드의 사람 값은 얼마로 여겨졌던 것일까.

영화 뿌리(ROOTS)’를 보면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해 미국 땅에 끌려온 쿤타킨테는 한 마리의 가축이나 사고파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렇게 삶이 나락에 떨어진 흑인들은 1863년 링컨의 노예 해방선언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 운동, 1964년 연방 민권법 제정, 그리고 2009년 대통령에 흑인 오바마가 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별의 대상이고, ‘사람 값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어디 흑인 뿐인가. 이민자들의 나라, 다민족 국가의 나라라고 자랑하는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때로는 눈에 선명한 유색 차별의 실상이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단속 경찰이 백인은 부드럽게 대하면서 유색인들은 함부로 대한다는 암묵적 인식부터, “꺼져라, 너희 나라로 가라!”고 대놓고 박대를 하는 거리의 사례까지. 얼마 전 어느 하원의원이란 자가 아시안계 연방 보건책임자에게 비슷한 막말을 했다는 보도가 바로 그런 증거다.

너희들도 원주민 쫓아낸 이민자 주제에 주인행세냐!”는 말이 치밀어도 통할 리가 없으니 대부분 삼키는 현실. 돈이나 물질로 따질 수 없는, 또한 따져서도 안될 진정한 사람 값은 인간적 예우와 가치에 대한 존중 여부, 삶의 질에 연결된다.


흑백이나 유색에 대한 차별을 떠나 사람 값의 귀천은 지금 전세계적으로 8백만 명을 넘어선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에서 중증 확진자로 62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던 70세 노인이 무려 11225백 달러(135천만원)의 치료비 청구서를 받았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한국에서는 건강보험 부담 치료비가 평균 489만원이라니 무려 270배가 넘는다.

이 엄청난 치료비는 사람 값이 높다는 것과는 상반되는 이야기다. 오히려 비싼 의료비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통을 견디며 병을 껴안고 사는수많은 서민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사람 값이 너무 하찮은 곳이 세계 1등국 미국이라는 역설을 입증한다.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 '선진'을 자랑하던 나라들의 민낯과 허상이 드러났다.

코로나19 최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나온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서 가장 피해가 큰 브롱크스 지역에는 백인이 9%에 불과하고, 영어를 쓰지않는 가구가 60% 정도라고 한다. 유색인종의 사람 값 저평가문제 만이 아니다. 온통 대선에 정신이 팔린 트럼프 대통령은 국민들이 코로나에 걸리든 말든, 빨리 경제활동을 재개하라고 핏대를 올린다.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보소우나루 대통령 역시 케 세라 세라(Que Sera)‘ 식 대응으로 확진자 10만명에 가까운 2위 국가가 됐다.

감염자 18천여명인 일본의 아베는 어떤가. 올림픽이 무산될 세라 감염을 쉬쉬하며 추적도 검사도 피하더니, 크게 늘렸다는 지금도 하루 4천건 정도의 진단검사만 한다. 인구 13천만 명인 나라의 총 검사수가 34만여 건으로, 1억 필리핀의 51만건, 16천인 방글라데시 53만 건에도 미치지 못하며 한국 120만 건에는 3할이 채 안된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의 수준이 높아서 감염이 적다고 자랑하는 정치인이 설치는 그들의 사람 값, 단 한명이라도 찾아내 책임지고 고치겠다며 보건책임자들이 밤을 새우는 한국인들의 사람 값보다 과연 비싼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기록했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값싼 짐승처럼 취급하는 곳 이야말로 신의 형상을 차별하고 비하한 죄인들의 지옥에 다름 아니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