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인 신년논설 ]

이 팬데믹 역사의 고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새해 아침의 화두 역시 어김없는 코로나 바이러스다.

이제 백신접종이 시작됐고 치료제도 곧 나온다니, 머잖아 수그러들겠지요. 막바지 확산세가 무섭지만,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이 짙다고 했잖아요. 건강 잘 지키며 이겨내시고 맘껏 돌아다닐 날이 오면 우리 맛깔스런 식당에 들러 청국장이라도 같이 맛보자구요”.

자유를 기다리며 그럴 듯한 플랜을 나눠보지만, 마음만 앞설 뿐 답답과 불안은 여전하다.

새로운 포부로 맞이하며 해피 뉴 이어를 주고받아야 할 새해 아침이 이렇게 암울하게 다가올 줄이야.

사방이 캄캄한 장벽이다. 전화나 SNS로 주고받는 소식도 반복이다 보니 한계에 다다랐고, 재택에 안주한 일상은 늘어지고 지루해져 몸이 뒤틀린다. 이가 아파도, 병이 도져도 병원은 멀기만 하다. 감기에 기침이라도 할 양이면 코로나 아닌가 겁부터 난다. 사라진 일감의 불안을 정부가 돕는다지만, 조여드는 살림살이 압박에 밤잠을 설친다. 생활고에 목숨을 버린 이들의 소식은 가슴에 아리다. 이 환란도 지나가겠지, 이제 곧 달라지려니

 

그런데, 이게 정말 간단치가 않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말 놀랍고도 숨가쁜 역사의 한 고비를 넘고 있는 것이다. 인류사에 언제 지금과 같은 전 지구적 팬데믹과 격리의 시대가 있었던가. 중세 페스트와 스페인 독감이 거론되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다지만, 어디 지금처럼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 모두가 한꺼번에 같은 시기 같은 대환란에 빠져 전전긍긍한 적이 있었던가. 전세계인이 한 마음으로 백신과 치료제에 승부를 건 일부 과학자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어서 어둠이 걷히기만을 기다리는, 참 가련한 처지들로 일심동체가 되어 동병상련에 빠지다니!

그러면 과연 이 코로나 블루가 걷히면 말끔히 회복될 것인가. 모든 일상이 예전처럼 되돌아 갈 수 있을까?.

아니다, 같아질 수가 없다. 벌써 모든 게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 비즈니스와 경제 사회 정치, 모두가 이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독감처럼 이젠 일상을 맴도는 질병으로 남아 코로나 뉴 노멀의 삶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례없이 초고속으로 백신을 개발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다. 벌써 몇 차례 변이가 확인됐는데, 최근 급속히 번지는 영국발 변종‘, 그리고 남아공 변종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독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영국 변이종은 전파력이 50~70%나 강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대유행의 전조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염병은 인류의 기원과 사실상 함께 해왔다. 고대 천연두와 나병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나라가 망했거나 문명이 바뀐 기록들도 전해온다. 수천만 명씩 죽어갔던 유행병의 계보는 근래들어 사스와 메르스, 이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발전했다. 갈수록 주기는 짧게 잦아지면서 위력은 강하고 교활해지는 슈퍼 종들로 변해 간다. 급조 백신과 치료제로 당장은 사태가 누그러질지 모른다. 그러면 앞으로는 없다. 더 강하고 센 놈은 오지 않을거야라고 큰소리 칠 수 있나.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능히 극복한다고 큰소리 치지만, 뛰는 사람 머리 위를 날으는 슈퍼 독종들이 쉬이 굴복하리라는 장담이야말로 인간의 자만과 오만에, 오판이 아닐까.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무섭게 신종으로 공격해오는 저들에게 인간은 한 수 아래인 듯 하다. 미증유의 전 지구적 팬데믹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인간은 이미 패배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는 껴안고 같이 살아야 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견은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다.

알고보면 어디 코로나 뿐인가. 암이 그렇고, 루게릭·파킨슨·에이즈불치의 질환은 너무 많다. 당뇨, 백혈병, 고혈압, 감기, 아토피 등등 그냥 품고 살지 않는가.

사실 인간이 아는 범위보다 모르는 원인불명의 질병이 더 많을 수 있다. 그런 미지의 질병과 병원균들은, 인간이 규명해 들어 갈수록 더 많아지고 교묘하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가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면서, 과학자들은 원죄와 업보의 창조주 섭리와 자연질서에 숙연해짐을 고백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번 전염병 창궐의 연원도 우리네 인간으로 귀결됨을 경고했다. 고도화한 인류문명은 창조질서 교란과 자연파괴, 생명 경시와 인간성 훼손의 모래터 위에 세운 탐욕의 바벨탑이라는 사실이 이번 팬데믹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뻔뻔하고 사악한 정치인들은 방역을 희롱하며 감염을 경시하는 언행으로 확산을 부추겼다. 코로나에 초토화된 문명 선진국들의 민낯이었다, 그런 인간의 오만방자를 견디다 못한 자연의 섭리와 더럽고 추악함을 싫어하는 생명의 기운이 글로벌 반격에 나선 셈이니, 설령 이번은 넘길지라도 다시 또 다시 파도처럼 엄습해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떻든 이제 COVID-19 팬데믹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등장했다. 우리는 그 페이지의 무대인물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죄도 없이 당하기만 한 피해자들로, 불안 속에 멍 때리며 백신순서에 안달하고, 어서 먹구름 걷히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엑스트라들로 남을 것인가. 발원지 중국인들을 원망하고, 확산을 방조하며 대처하지 못한 나쁜 지도자들을 규탄하는 조연그룹에 끼어있기만 하면 안심인가. 대면이 금지된 봉쇄 속에서 집안을 맴돌며 온라인에 빠져 낙을 찾아내는 적응력에 만족하면서 세월 덧없음을 탄식하는 방콕족으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모든 인생들의 이같은 기이한 공동체험은 전례없는 일이다. 불행의 공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경이로운 체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면 어떨까.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무슨 기록을 남길 것인가. 우리의 발자취가 어떻게 기억될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 아닌가.

우리 민초들에게 코로나를 초래한 직접적 책임은 없을지 모르나, 문명과 자연을 향유하며 푸른 지구를 병들게 한 인류 공통의 책임마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갈수록 심각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교란의 현실에서 어느 누가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엄청난 팬데믹을 불편과 불안만으로 어서 떠나 보내려 한다면 정말 역사에 무책임한 사람들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앙 중에 다시 시작하는 새해 새날에 우리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되새기며, 기억하고 남길 것인가.

설령 나 한사람 별 볼일 없는 방구석의 소인배 일지라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통의 명제와 삶의 지표 하나쯤은 동참하고 공유를 해볼 일이다. 가령 이 팬데믹이 수월하게 마무리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단단한 각오아래 우리들의 오만과 방자를 깊이 성찰하며, ‘기본을 하나씩 챙겨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겸허하게 준비하고 절제있게 살아 갈 슬기로운 결단과 실천의 출발일 수 있다.

18살 가냘픈 소녀 툰베리의 지구 살리기 호소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 후손들을 위해 작은 일부터 챙겨보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쓰레기 한 조각 조심스레 버리고, 플라스틱 봉지 하나라도 아끼는 자세, 냉난방과 에너지 절약, 경제적인 자동차 운행도 신경 쓸 일이다. 이웃을 살피고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 나아가 자원낭비와 무차별 개발, 환경파괴에 무감각한 정치세력, 석탄과 원자력을 고집하는 지도자와 정부를 퇴출하는 데 앞장서는 일은 의롭고 장한 실천들이다.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 작지만 소중한 지혜를 모으고 행동에 나선다면 정말 의미있고 값진 COVID-19 팬데믹의 교훈이고 퇴치법이 되지 않을까     < 김종천 편집인 >

내부자는 모르는 검찰개혁의 핵심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

 

판사, 변호사 생활을 모두 해본 외부자로서 지난 14개월 남짓 검찰 조직과 운영실태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검사동일체 원칙으로 대표되는 검찰의 조직문화와 내부 의사결정 구조 및 그 문제점을 뼈저리게 체감했고, 반드시 해결돼야 할 개혁 과제로 판단하게 됐다.

검사동일체 원칙은 본래 독일에서 검사 간의 직무 이전, 승계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된 도구 개념이었으나, 우리 검찰에서는 실무상 이런 개념으로 활용된 사례가 거의 없다. 반면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그 내용 중 상급자의 지휘 감독에 따른다는 부분만 크게 부각됐다. 검찰 조직의 최정점인 검찰총장 또는 그 위임을 받은 대검 차장 등이 특정 사건에 관해 일일보고를 주문하면, 전국 모든 검사는 총장에게 매일 모든 것을 보고하고 지시받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조차 총장이나 상급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건을 빼앗아 다른 부서, 다른 검사에게 줄 수도 있다. 총장은 결재권자가 아니면서도 지휘감독권을 앞세워 이른바 주임검사와 직거래 등을 할 수도 있고, 이는 일선 기관장과 부서장의 지휘계통에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검사들은 “~검사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주로 형님”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검찰의 서열화된 위계질서와 한 식구라는 독특한 폐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관행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니 선배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규율이 세워지고, 나아가 검찰 조직 안에 있을 때는 범죄와 비위를 저질러도 제 식구 감싸기, 밖에 나가서는 전관예우로 잘 모시는 것이 가능한 조직이 되는 것이다.

검사동일체를 떠받치는 장치로는 검찰청법의 규정 이외에도 현실에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수많은 업무 행태와 관행이 존재한다. 보고와 지시로 이어지는 결재제도, 사건 배당과 사무 분담, 검사장 등의 인사 추천과 상훈, 특수활동비의 수시 집행, 정보부서에 의한 검사 세평 동향정보 수집, 소수 특수·기획 라인의 내부여론 형성, 퇴직 후의 변호사 영업과 직결되는 전관예우, 인사권에 대한 영향력 행사 등이 검사동일체를 지탱하는 주요 요소들이다.

반면 검사동일체가 위법·부당하게 작용할 때 직무를 정당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검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많지 않다. 이의제기권 행사 상급자의 직권남용죄에 대한 형사고발 대검훈령의 위임규정에 따라 독립적 감찰개시 권한을 가진 대검 감찰부에 내부제보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검찰의 조직문화와 내부 규정하에서는 그 어떤 수단도 하급자가 마음 편하게 행사할 수 없다.

검찰이 더는 뉴스의 전면에 나오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정치권이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등을 선택해 고발장을 접수하면 검찰총장 등이 형소법상 관할보다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누가 있는 어디로 사건을 보낼 것인지 고민하지 않기를 바란다. 수사 상황과 피의사실, 감찰 정보, 검토보고서 등 내밀한 정보가 정치적 목적이나 자본의 이해관계, 재판 영향을 위한 불순한 목적 등으로 특정인, 특정 언론으로 유출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피의자와 피고인, 피해자가 공정과 정의에 대한 신뢰 없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 무력감을 겪지 않기를 희망한다. 잘못된 수사, 기소로 피해받은 분들께는 진심으로 사과하여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씻어드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검사들은 처음 임관할 때 가졌던 직업적 양심과 인권 감수성도 새롭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대검 감찰부장으로 근무하면서 검찰권의 분산과 견제가 바로 검찰개혁의 핵심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검찰은 기득권, 보수권력과 맺어온 오래된 카르텔을 깨고 오로지 실체 진실과 적법절차에 따라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투명하고 겸손한 기관이 되어야 한다. 오랜 세월 드러나지 않던 어둠이 때가 되어 밝음 안으로 들어왔으니, 신축년 이후 결국 빛이 어둠을 이길 것이다.

세상의 민낯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

 

백낙청 교수 송년 특별기고

 

백낙청 <창작과 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2020년은 정말 길고 힘든 한해였다. 유달리 어수선한 정국에다 전에 없던 코로나19 대유행까지 겹쳐 살림살이가 극도로 힘들어진 세월이었다. ‘세상이 왜 이래?’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세상은 늘 이랬고 여러 면에서 더 나쁘기도 했다. 물론 감염병 대유행이 겹친 점이 새롭지만, 이 경우도 주로 예전에 힘들었던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진 사례가 대부분이다.

촛불이라는 화두와 표준

따라서 세상이 왜 이래?’라는 물음도 그냥 탄식에 그칠 것이 아니다. 지난해 신년칼럼에서 나는 촛불혁명을 섣불리 정의해서 찬반 어느 쪽을 고집하기보다 이를 화두 삼아 연마할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졸고 촛불혁명이라는 화두’, <한겨레> <창비주간논평> 20191230), ‘이런 세상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그렇다. 민낯들의 드러남이 촛불혁명의 성과인 동시에, 드디어 민낯을 보여준 세력이 이제는 그야말로 안면몰수하고 나설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으로 가장 일찍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 거대 수구정당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크게 변한 집단이다. 국민을 속여서 집권하는 게 목적이었고 2007년과 2012년 모두 그 목적을 너끈히 달성했던 정당이 촛불 이후 국민을 속이는 능력뿐 아니라 속이려는 성의마저 상실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최근에는 2012년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공약을 입안했던 분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돌아와 다시 국민을 속일 수 있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분투하고 있지만, 그사이 국민의 의식수준이 엄청 높아진데다 당내에 솔직한 인사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끼리 손발을 제대로 맞춰갈지도 의문이다. 일시적으로 여론의 지지도가 좀 오르더라도 반촛불세력의 지휘부라기보다 누구든 앞장서 정부를 흔들어대는 인사의 서포터스 역할에 머무는 형국이다.

검찰의 민낯도 온 천하에 드러났다.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전부터 꾸준히 늘어왔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개혁을 추진한 대통령과 정부도 잘 몰랐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윤석열 총장이 이끈 대대적 반항사태를 지켜보면서 철저한 검찰개혁이 수구정당 제압에 못지않은 시대적 과제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검찰처럼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뿐이지 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최종적 권한을 가진 법관들의 정체도 드디어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 동네야말로 설마가 사람 죽이는 곳인데, 사실 설마는 배부른 계층들 얘기이고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일찍부터 그곳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본고장임을 실감해왔다. 아무튼 학습의 소중한 기회를 얻었는데, 이럴 때일수록 관성적인 개탄이나 옥석을 안 가리는 과격한 공격이 아니라 촛불을 표준 삼은 냉정한 형세판단과 착실한 제도개혁으로 대응할 필요가 절실하다.

아직 덜 드러난 민낯들

경제관료들, 특히 예산권을 틀어쥔 관료들의 실상도 드러나는 중이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매우 양호한 축인데도 코로나 사태로 거의 사경에 처한 사람들 도와주자고 할 때마다 재정건전성을 들고나와서 한푼이라도 덜 주려고 한다. 케이(K)방역이 진단과 추적에서 모범적인 성과를 내면서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협조를 얻는 데 한계를 보이는 것도, 정부 관료가 서민을 죽게 내버려두는속마음으로 재난 극복에 임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신을 사기 때문은 아닐까.

이 밖에도 우리 사회의 숨겨졌던 진실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언론계가 정직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대중이 직접 참여한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이 실상을 보도하지 않음을 체득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계의 문제가 일부 기자들의 타락, 또는 특정 언론사들의 진실 왜곡에 국한되지 않은 현상임을 더 깊이 연마할 시점에 왔다. 이제는 저들의 왜곡보도가 단순한 사실 왜곡의 수준을 넘어 촛불정부의 실패를 위한 면밀한 작전의 일환이며 그런 점에서 제1야당보다 대형 수구언론이 반촛불세력의 전략본부로 기능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소위 진보신문이 이에 효과적인 대응을 못 하는 것이 단지 물적 자원의 부족과 발행부수의 열세 탓이 아니라, 손쉬운 양비론에 안주하면서 포털의 클릭 수에 누구 못지않게 집착하는 자세에 기인하기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 배경에는 정권보다 금권이 우위에 선 지 오래된 우리 사회에서 언론인 집단 자체의 체질에 일어난 변화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미진한 공부거리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으나 여당에 대한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당이 수구야당과 동일한 수준의 적폐세력은 아니지만 줄곧 우리 사회 기득권 구조의 일부로 기능해왔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의석 180석을 동원할 수 있는 지금도 툭하면 말을 뒤집고 개혁에 발을 끄는 모습은 결코 대충 넘길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자신은 여전히 촛불정부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믿기에 나는 계속 지지를 보내는 축이지만, 촛불혁명의 개념조차 희박한 고위관료와 여권 정치인들을 제대로 통어하지 못하는 책임마저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 이는 정치적 개인기의 문제라기보다 촛불시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선한 기운을 북돋우는 노력의 문제인 것이다.

근대세계와 중근고비

이런저런 민낯들을 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할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추론해도 세상이 온통 이런데자신만 온전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각자가 스스로 해온 몫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한민국을 기후악당국가로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한 바 있을 것이고, 노동을 멸시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무심코 살아왔다면 그것도 반성하고 참회할 대목이다. 나는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 내부에도 괴물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라는 주장을 펴왔는데, 분단체제를 포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괴물스러움 또한 팬데믹 시대를 맞아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교화를 받을 능력과 소질을 근기(根機)라 하고 상··하 등급으로 나누곤 한다. 물론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상근으로 진급할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中根)의 고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으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병자들을 식별하기는 어렵지 않다. 반면에 자신이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한결 어렵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은 중근기일수록 하지 못한다. 이런 때야말로 스승이나 목자, 도반의 일깨움이 필요한데, 우리 시대에는 어떤 스승의 존재보다 촛불혁명의 거대한 흐름을 마음에 모시고 정진하는 것이 중근 고비 넘기의 관건이다.

굳이 불교 용어를 빌려온 것은 근대세계체제야말로 중근병자를 대량생산하도록 설계된 체제라는 생각에서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정보기술의 극대화로 하근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아니, 자기 몸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촛불혁명을 화두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엄청난 도전이다. 2020년의 고난과 혼란 속에서도 이런 작업이 멈추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감염병 대유행에 대처해온 공동체의 분투, 사회운동, 시민정치, 학문, 예술, 기술 등의 수많은 현장에서 촛불을 화두로 삼은 창의적 노력들이 계속 벌어져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론] 이제 판사를 선거로 뽑아야 할까?

 

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법관은 어떻게 판결을 내릴까? 법현실주의에 따르면 판사 역시 여느 일반인처럼 특정 목적을 위해 판결을 내린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일본 사법부에 대한 분석에서 하버드대학의 마크 램자이어 교수는 그것은 판사들의 승진에 대한 열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사법부의 연공서열주의에 기반한 승진제도가 판사들의 이러한 열망을 이용하여 정치적 판결을 내리게 만드는 통로라고 보았다. 실제 램자이어 교수는 자민당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린 판사들이 이후 좋은 보직을 거쳐 더 빠르게 고위 법관으로 승진했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통찰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사법농단에서 보듯 한국의 사법부에도 적용된다. 이 사건은 인사권을 이용하여 권력집중을 꾀한 대법원장과 엘리트 코스에 있던 몇몇 행정처의 비윤리적 판사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런데 재판 농단보다 더 유감스러운 사실은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이 제대로 된 징계나 유의미한 제도 개선을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법원이 자정 능력이 있는 조직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국회가 판사를 탄핵하지 않는 한 주권자가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단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불신은 더 커져갔다. 자율성은 높아졌는데 책임성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눈에서 보면 판사는 권한만 누리되 책임은 지지 않는 법조 귀족이다. 혹자는 자율성은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겠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을 통해 임용된 법관에게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수준의 정당성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자가 법원에 거는 최소한의 기대는 사법적 자제다. 행정부의 재량이 인정되는 사항에 대해 그 정당성을 존중하는 절제의 모습이 있을 때 법원의 자율성 역시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의 법원의 모습은 이와 거리가 멀다. 법원은 충분한 근거도 없이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있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의 2개월 정직에 대한 집행정지를 인용하였다. 이로써 권한을 남용하고 있는 검찰총장에 대한 통제수단인 대통령의 징계권은 사문화되었다. 법원 논리에 따르면 이제 검찰총장에 대한 대통령에 의한 인사권의 통제는 감봉과 견책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인사상 통제는 이제 모두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의 정치적 독립성이 개인의 권한 남용까지 면책할 정도로 중요한 헌법적 가치이며 그 직위 역시 대통령에 비할 만한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기관인가?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본안 재판이 아닌 집행정지 결정에서 내리는 것이 옳았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 환송심은 집행유예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달려가고 있다. 재판 초기에는 미국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권하더니만, 이제는 수박 겉핥기 식의 전문심리위원 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여러 법률 전문가들은 내년 2월 선고에서 이를 근거로 재판장이 집행유예를 선고할 것이라 예측한다. 재판장의 소신에 따른 치료적 사법? 이는 그냥 원색의 유전무죄.

이처럼 법원이 파워엘리트의 입장을 자율성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할 때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장 티롤과 에릭 매스킨이란 두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2004판사를 언제 언제 선거로 뽑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판사 선거제도가 사회적으로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판사로 하여금 당선을 위해 유권자의 입맛에 맞는 잘못된 판결을 내릴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법관이 특별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할수록 선거제도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국민에게 공익의 수호자가 되기를 포기한 법관을 징벌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이 판결을 법관 3200명의 손에만 남겨둘 수 없는 이유다. 국민은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는 비판할 권리가 있다. 또한 잘못된 판결이 법원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것이 선거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주권자에게 이 문제를 교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은 국회의 몫이자 의무다. 그 전이라도 법원 또한 이러한 불신과 우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