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학의 출금과 정의의 형평

● 칼럼 2021. 2. 3. 05:08 Posted by SisaHan

박용현 논설위원

1.

지난 2004년 독일에서는 경찰이 유괴범에게 아이를 숨겨놓은 장소를 말하지 않으면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한 사건이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사흘째 어딘가에 감금돼 있는 아이를 구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면 정당한 조처였다는 주장과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고문 위협은 어떤 상황에서도 허용돼선 안된다는 주장이 부딪쳤다. 여론은 경찰관 쪽에 우호적이었고, 법원은 유죄를 인정했지만 벌금형에 집행유예라는 ‘상징적 처벌’을 내렸다.

내가 저 논쟁에 참여했다면 경찰관의 반대 편에 섰을 것이다. 수사기관이 추구하는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적법절차를 지켜야 하고, 특히 고문이나 사찰, 자의적인 구금 등은 그로 인한 인권 침해의 심각성에 비춰볼 때 절대적이고 양보불가능한 금지 영역이기 때문이다. 실체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의 충돌은 이런 사례에선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어떤가.

열살 소녀를 납치한 용의자를 체포한 경찰은 변호사가 입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조를 진행해 소녀의 주검이 묻힌 장소를 알아냈다. 그 즈음 경찰 수색팀이 주검이 묻힌 장소에 접근하고 있었는데, 범인의 자백 직후 경찰은 수색을 중단하고 범인을 앞장세워 주검을 찾아냈다. 그런데 이후 범인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침해당했고 그 결과로 발견한 소녀의 주검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석방해달라고 주장했다.(미국에서는 1966년 ‘미란다 판결’ 이후 변호사의 조력을 받지 않는 조사는 원칙적으로 위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에야 검찰 조사 때 변호사가 입회할 권리가 인정됐고 변호사가 피의자와 떨어진 뒷자리가 아니라 바로 옆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은 2017년부터다. 아직도 변호사는 조사가 끝난 뒤에야 또는 검사의 승인을 얻어야 진술할 수 있는 등 변호사 조력권의 실질적 보장은 여전히 미흡하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는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적법절차다. 이를 위반했으니 범인은 무죄 방면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의 관념을 자극하는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사건(닉스 대 윌리엄스·1984년)에서 만장일치로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경찰의 적법절차 위반(변호사 없는 취조)이 없었더라도 합법적인 다른 방법(수색팀의 수색)을 통해 같은 결과(주검의 발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므로, 이 경우에까지 적법절차 위반의 책임을 물어 증거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실체적 진실을 덮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방대법원은 ‘불가피한 발견 원칙’(inevitable discovery rule)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법원칙을 세움으로써 실체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의 균형과 조화를 꾀했다.

우리 대법원도 “실체적 진실 규명을 통한 정당한 형벌권의 실현도 형사소송 절차를 통해 달성하려는 중요한 목표이자 이념이므로, 형식적으로 보아 정해진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한 증거라는 이유만을 내세워 획일적으로 그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 역시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형사소송에 관한 절차 조항을 마련한 취지에 맞는다고 볼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즉 “절차 조항의 취지와 그 위반의 내용 및 정도, 구체적인 위반 경위와 회피 가능성, 절차 조항이 보호하고자 하는 권리 또는 법익의 성질과 침해 정도, 수사기관의 인식과 의도 등을 전체적·종합적으로 살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대법원 2007도3061 전원합의체 판결)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2019년 3월22일 밤 해외 도피를 시도하고 긴급 출국금지가 이뤄진 시간대별 상황.

2.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금지 절차 위반을 두고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는 것을 보며 위의 사례와 법원칙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외 도피를 방치하는 게 정의에 부합하는가’, ‘봐주기 수사를 한 검사들은 놔둔 채 본말전도 아닌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출국금지 과정에 절차 위반이 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출국금지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는 출국금지의 필요성, 절차 위반의 심각성 정도, 그로 인한 기본권 침해의 정도 등 여러 요인을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김 전 차관의 출국금지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고위 검찰 공직자가 사람의 성을 뇌물로 주고받으며 인권을 유린한 범죄의 심각성으로 보나, 검찰이 두차례나 봐주기 수사로 국가 형벌권을 무력화시킨 전비로 보나 해외 도피를 허용할 경우 형사사법 정의에 끼칠 해악은 너무나 컸다.

출국금지라는 조처의 법적 성격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하는 체포·구금·압수수색 등 형사소송법상 절차와 달리, 출국금지는 법무부 장관이 “범죄 수사를 위해 출국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하면 내릴 수 있는 행정조처다. 세금·벌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출국을 금지시킬 수 있다. 해외로 출국할 자유 또한 보장돼야 할 기본권이지만 체포·구금·압수수색 등으로 침해되는 기본권과는 차이가 있다는 입법적 판단이 깔려있는 셈이다. 그래도 김 전 차관이 외국에 사는 가족을 만날 목적이나 사업상 필요로 출국하다 제지당했다면 권리 침해에 더 무게를 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해외여행 목적이었다면 여행의 자유가 침해됐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심야에 위장까지 해가며 공항에 나타난 김 전 차관이 출국금지로 침해당한 법익은 ‘해외 도피의 자유’ 외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문제가 되고 있는 출국금지는 밤 11시가 넘어 김 전 차관의 출국 시도가 알려지는 등 긴박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검사가 출국금지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사건번호나 내부 결재 등 필요한 절차를 위반했다는 게 논란의 주된 이유다. 그러나 출입국관리법상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법무부 장관이 직접 출국을 금지키는 방법도 있었다. 앞서 살펴본 ‘불가피한 발견 원칙’에 비춰보면 어떤가. 절차 위반(요건을 갖추지 못한 검사의 출국금지 요청)이 없었더라도 합법적인 다른 방법(장관의 출국금지 조처)을 통해 같은 결과(김 전 차관의 출국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대법원도 출국금지 처분의 위법성 판단과 관련해 “출국금지 요청이 있는 경우에도 법무부 장관은 이에 구속되지 않고 출국금지의 요건이 갖추어졌는지를 따져서 처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며 “따라서 출국금지 요청이 요건을 구비하지 못 하였다는 사유만으로 출국금지 처분이 당연히 위법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출국금지 처분의 요건이 (실제로) 갖추어졌는지 여부에 따라 그 적법 여부가 가려져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대법원 2012두18363 판결)

2019년 3월22일 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해외 도피 시도를 보도한 사진.

3.

거듭 말하지만 김 전 차관 출국금지 과정에서 위법이 확인되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물으면 된다. 다만 이 사안을 어떤 수위와 방식으로 다룰지는 제반 상황을 “전체적·종합적으로 살펴” 결정할 필요가 있다. 압수수색 등의 과정에서 형사소송법 절차를 어긴 검사에 대해 검찰이 수사팀을 꾸려 대대적인 수사에 나선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다. 김학의 전 차관 출국금지 사안만 유독 심각하게 절차 위반에 대한 ‘응징의 시범 케이스’로 삼는 건 아무리 봐도 형평성과 공정성의 원칙에 반한다.

검찰이 김 전 차관 출국금지 과정의 문제점을 따져보겠다면, 출국금지를 주도한 검사와 법무부 관계자만 겨냥할 게 아니다. 해당 검사가 대검찰청에 출국금지 요청을 해달라고 했지만 “소명이 더 필요하다”며 거부당했다고 한다. 과거에 검찰이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덮어버린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상황에서 어떤 소명이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법원은 이후 김 전 차관 재판에서 성접대 혐의의 유죄가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대검이 보인 소극적인 태도가 적절했는지, 당시 대검 지휘부는 어떤 입장이었으며 어떻게 관여했는지도 밝힐 필요가 있다. 또 당시 법무부·검찰 내부자가 김 전 차관에게 출국금지 관련 상황을 알려줘 도피 시도를 도왔다는 의혹도 함께 규명해야 한다. 당시 법무부가 이런 의혹에 대해 수사 의뢰를 했으나, 검찰은 공익법무관 2명이 호기심에서 정보를 조회했을 뿐 김 전 차관 쪽에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며 수사를 종결한 바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김 전 차관을 두차례나 봐준 검사들과 그를 출국금지시킨 검사를 대하는 검찰의 이중성에 있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얼굴이 드러난 동영상을 보고도 덮어버린 수사 검사들과 그 윗선에 대해 형사처벌은커녕 징계 등 최소한의 책임 묻기도 시도한 적이 없다. 김 전 차관 출국금지의 적법성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다면 앞선 두 차례의 무혐의 처분에 대해서도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본말전도’라는 의문을 풀어줄 도리가 없다. 상식의 잣대로 보나 법적 잣대로 보나 ‘수사 농단’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진다.

이런 논란과 의구심을 해소하는 방법은 객관적인 공수처가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다. 검사의 직무상 위법 혐의를 다루는 이 사건은 공수처 관할일 뿐만 아니라, 다른 고위공직자 사건과 달리 검사 관련 사건은 공수처장의 이첩 요구와 무관하게 무조건 공수처에 넘기도록 돼 있다. 물론 공수처는 아직 검사와 수사관 선발이 이뤄지지 않아 수사를 곧바로 진행할 수 없다는 사정이 있다. 하지만 법 규정대로라면 검찰이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것은 위법인 상태다. 이 또한 절차 규정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사안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사회적 책임감으로 정치 능가하는 빈곤복지 운동 위력보인 래시퍼드 선수

 

 

티모 플렉켄슈타인

런던정경대 사회정책학과 부교수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백만장자 축구 선수들과 사회 최하층 사람들 사이 삶의 격차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더 극심하게 커졌다. 영국 어린이 3명 중 1명꼴(410만명)로 빈곤 속에서 자라고 있으며, 아이들 250만명을 포함해 약 800만명의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한다. 빈곤가구의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무상급식은 말 그대로 굶주림에서 구해주는 생명선이지만, 이조차 학교 문이 닫히면 끊어진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젊은 공격수 마커스 래시퍼드는 가난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안다. 이 스물세살의 선수는 맨체스터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식구 부양을 위해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했던 래시퍼드의 엄마는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때로 자신의 끼니를 걸러야 했다. 이런 경험은 코로나19 대유행 사태에서 래시퍼드를 매우 유능한 사회운동가로 만들었고, 보리스 존슨의 보수당 정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수년 전부터 노숙자 지원 캠페인을 주도해 주목받았던 래시퍼드는 지난해 3월 영국 정부의 첫번째 봉쇄로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자신의 명성을 무료급식 지원 캠페인을 돕는 데 썼다. 이 캠페인은 신속하게 2천만파운드(300억원)를 모금했고, 맨체스터 지역 아이들 40만명을 지원하려던 목표는 전국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1200만끼 이상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발전했다.

래시퍼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난해 6월 보수당 정부에 공개편지를 보내 학교가 문을 닫는 여름 방학에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료 바우처 제도를 계속 시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총리실은 여름 방학 동안 한주 15파운드씩 바우처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즉각 거부했고, 장관들은 방어에 나섰다. 정부가 래시퍼드의 인기와 그의 트위터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마커스 래시퍼드

보수당 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분노가 커지면서, 정부는 당혹스럽게도 24시간도 안 돼 유턴을 해야 했다. 여름급식 기금이 조성되고, 존슨 총리는 래시퍼드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19 사태 속에 힘든 이들을 도우러 나선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해야 했다. 평론가들은 래시퍼드의 캠페인이 정치적 마스터클래스(최상급 수업)”라며 강력한 사회운동가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래시퍼드는 계속해 아동들의 결식 문제를 퇴치하고자 주요 슈퍼마켓 체인 등과 함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는 한편, 정부의 추가 지원을 촉구했다. 래시퍼드는 빈곤가정에 대한 정부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며 실망감을 표시했고, 정부에 대한 압박을 높이기 위해 아동 빈곤을 종식하기 위한 포괄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이 청원에 110만명 이상이 서명했다.

지난달 12일 래시퍼드는 무상급식 바우처 대신 제공되는 먹거리 바구니가 매우 부실하다고 지적해, 다시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보리스 존슨 정부의 정책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물론 전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공격수에 의해 번번이 결정됐다. 소셜미디어의 사용에 능숙한 래시퍼드는 경기장에서 상대를 압도하듯, 정부보다 몇번이나 앞서갔다. 현재 그의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프리미어리그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보수당 의원들은 축구선수 한명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에 분개하고 있다. 야당인 노동당과 당수 키어 스타머에겐 억울할 수 있겠지만, 래시퍼드가 야당이 관철하지 못한 정책 변화를 이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스물세살의 축구선수가 자신의 경험과 사회 정의를 바탕으로 영국 정치에서 권위를 키우고,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상대에게 성공적으로 도전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는 분명히 슈퍼카와 호화로운 파티와 관련된 직업군에서는 보기 힘든 예외적인 사회적 책임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요즘 유명인들의 생활과 소셜미디어 문화를 다소 회의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유명세를 상업적 이익에 이용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참신하다. 다른 이들도 래시퍼드의 모범을 따를 만하지 않은가.

 

 

[ 편집인 신년논설 ]

이 팬데믹 역사의 고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새해 아침의 화두 역시 어김없는 코로나 바이러스다.

이제 백신접종이 시작됐고 치료제도 곧 나온다니, 머잖아 수그러들겠지요. 막바지 확산세가 무섭지만,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이 짙다고 했잖아요. 건강 잘 지키며 이겨내시고 맘껏 돌아다닐 날이 오면 우리 맛깔스런 식당에 들러 청국장이라도 같이 맛보자구요”.

자유를 기다리며 그럴 듯한 플랜을 나눠보지만, 마음만 앞설 뿐 답답과 불안은 여전하다.

새로운 포부로 맞이하며 해피 뉴 이어를 주고받아야 할 새해 아침이 이렇게 암울하게 다가올 줄이야.

사방이 캄캄한 장벽이다. 전화나 SNS로 주고받는 소식도 반복이다 보니 한계에 다다랐고, 재택에 안주한 일상은 늘어지고 지루해져 몸이 뒤틀린다. 이가 아파도, 병이 도져도 병원은 멀기만 하다. 감기에 기침이라도 할 양이면 코로나 아닌가 겁부터 난다. 사라진 일감의 불안을 정부가 돕는다지만, 조여드는 살림살이 압박에 밤잠을 설친다. 생활고에 목숨을 버린 이들의 소식은 가슴에 아리다. 이 환란도 지나가겠지, 이제 곧 달라지려니

 

그런데, 이게 정말 간단치가 않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말 놀랍고도 숨가쁜 역사의 한 고비를 넘고 있는 것이다. 인류사에 언제 지금과 같은 전 지구적 팬데믹과 격리의 시대가 있었던가. 중세 페스트와 스페인 독감이 거론되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다지만, 어디 지금처럼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 모두가 한꺼번에 같은 시기 같은 대환란에 빠져 전전긍긍한 적이 있었던가. 전세계인이 한 마음으로 백신과 치료제에 승부를 건 일부 과학자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어서 어둠이 걷히기만을 기다리는, 참 가련한 처지들로 일심동체가 되어 동병상련에 빠지다니!

그러면 과연 이 코로나 블루가 걷히면 말끔히 회복될 것인가. 모든 일상이 예전처럼 되돌아 갈 수 있을까?.

아니다, 같아질 수가 없다. 벌써 모든 게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 비즈니스와 경제 사회 정치, 모두가 이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독감처럼 이젠 일상을 맴도는 질병으로 남아 코로나 뉴 노멀의 삶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례없이 초고속으로 백신을 개발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다. 벌써 몇 차례 변이가 확인됐는데, 최근 급속히 번지는 영국발 변종‘, 그리고 남아공 변종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독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영국 변이종은 전파력이 50~70%나 강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대유행의 전조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염병은 인류의 기원과 사실상 함께 해왔다. 고대 천연두와 나병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나라가 망했거나 문명이 바뀐 기록들도 전해온다. 수천만 명씩 죽어갔던 유행병의 계보는 근래들어 사스와 메르스, 이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발전했다. 갈수록 주기는 짧게 잦아지면서 위력은 강하고 교활해지는 슈퍼 종들로 변해 간다. 급조 백신과 치료제로 당장은 사태가 누그러질지 모른다. 그러면 앞으로는 없다. 더 강하고 센 놈은 오지 않을거야라고 큰소리 칠 수 있나.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능히 극복한다고 큰소리 치지만, 뛰는 사람 머리 위를 날으는 슈퍼 독종들이 쉬이 굴복하리라는 장담이야말로 인간의 자만과 오만에, 오판이 아닐까.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무섭게 신종으로 공격해오는 저들에게 인간은 한 수 아래인 듯 하다. 미증유의 전 지구적 팬데믹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인간은 이미 패배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는 껴안고 같이 살아야 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견은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다.

알고보면 어디 코로나 뿐인가. 암이 그렇고, 루게릭·파킨슨·에이즈불치의 질환은 너무 많다. 당뇨, 백혈병, 고혈압, 감기, 아토피 등등 그냥 품고 살지 않는가.

사실 인간이 아는 범위보다 모르는 원인불명의 질병이 더 많을 수 있다. 그런 미지의 질병과 병원균들은, 인간이 규명해 들어 갈수록 더 많아지고 교묘하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가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면서, 과학자들은 원죄와 업보의 창조주 섭리와 자연질서에 숙연해짐을 고백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번 전염병 창궐의 연원도 우리네 인간으로 귀결됨을 경고했다. 고도화한 인류문명은 창조질서 교란과 자연파괴, 생명 경시와 인간성 훼손의 모래터 위에 세운 탐욕의 바벨탑이라는 사실이 이번 팬데믹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뻔뻔하고 사악한 정치인들은 방역을 희롱하며 감염을 경시하는 언행으로 확산을 부추겼다. 코로나에 초토화된 문명 선진국들의 민낯이었다, 그런 인간의 오만방자를 견디다 못한 자연의 섭리와 더럽고 추악함을 싫어하는 생명의 기운이 글로벌 반격에 나선 셈이니, 설령 이번은 넘길지라도 다시 또 다시 파도처럼 엄습해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떻든 이제 COVID-19 팬데믹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등장했다. 우리는 그 페이지의 무대인물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죄도 없이 당하기만 한 피해자들로, 불안 속에 멍 때리며 백신순서에 안달하고, 어서 먹구름 걷히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엑스트라들로 남을 것인가. 발원지 중국인들을 원망하고, 확산을 방조하며 대처하지 못한 나쁜 지도자들을 규탄하는 조연그룹에 끼어있기만 하면 안심인가. 대면이 금지된 봉쇄 속에서 집안을 맴돌며 온라인에 빠져 낙을 찾아내는 적응력에 만족하면서 세월 덧없음을 탄식하는 방콕족으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모든 인생들의 이같은 기이한 공동체험은 전례없는 일이다. 불행의 공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경이로운 체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면 어떨까.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무슨 기록을 남길 것인가. 우리의 발자취가 어떻게 기억될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 아닌가.

우리 민초들에게 코로나를 초래한 직접적 책임은 없을지 모르나, 문명과 자연을 향유하며 푸른 지구를 병들게 한 인류 공통의 책임마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갈수록 심각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교란의 현실에서 어느 누가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엄청난 팬데믹을 불편과 불안만으로 어서 떠나 보내려 한다면 정말 역사에 무책임한 사람들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앙 중에 다시 시작하는 새해 새날에 우리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되새기며, 기억하고 남길 것인가.

설령 나 한사람 별 볼일 없는 방구석의 소인배 일지라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통의 명제와 삶의 지표 하나쯤은 동참하고 공유를 해볼 일이다. 가령 이 팬데믹이 수월하게 마무리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단단한 각오아래 우리들의 오만과 방자를 깊이 성찰하며, ‘기본을 하나씩 챙겨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겸허하게 준비하고 절제있게 살아 갈 슬기로운 결단과 실천의 출발일 수 있다.

18살 가냘픈 소녀 툰베리의 지구 살리기 호소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 후손들을 위해 작은 일부터 챙겨보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쓰레기 한 조각 조심스레 버리고, 플라스틱 봉지 하나라도 아끼는 자세, 냉난방과 에너지 절약, 경제적인 자동차 운행도 신경 쓸 일이다. 이웃을 살피고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 나아가 자원낭비와 무차별 개발, 환경파괴에 무감각한 정치세력, 석탄과 원자력을 고집하는 지도자와 정부를 퇴출하는 데 앞장서는 일은 의롭고 장한 실천들이다.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 작지만 소중한 지혜를 모으고 행동에 나선다면 정말 의미있고 값진 COVID-19 팬데믹의 교훈이고 퇴치법이 되지 않을까     < 김종천 편집인 >

내부자는 모르는 검찰개혁의 핵심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

 

판사, 변호사 생활을 모두 해본 외부자로서 지난 14개월 남짓 검찰 조직과 운영실태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검사동일체 원칙으로 대표되는 검찰의 조직문화와 내부 의사결정 구조 및 그 문제점을 뼈저리게 체감했고, 반드시 해결돼야 할 개혁 과제로 판단하게 됐다.

검사동일체 원칙은 본래 독일에서 검사 간의 직무 이전, 승계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된 도구 개념이었으나, 우리 검찰에서는 실무상 이런 개념으로 활용된 사례가 거의 없다. 반면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그 내용 중 상급자의 지휘 감독에 따른다는 부분만 크게 부각됐다. 검찰 조직의 최정점인 검찰총장 또는 그 위임을 받은 대검 차장 등이 특정 사건에 관해 일일보고를 주문하면, 전국 모든 검사는 총장에게 매일 모든 것을 보고하고 지시받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조차 총장이나 상급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건을 빼앗아 다른 부서, 다른 검사에게 줄 수도 있다. 총장은 결재권자가 아니면서도 지휘감독권을 앞세워 이른바 주임검사와 직거래 등을 할 수도 있고, 이는 일선 기관장과 부서장의 지휘계통에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검사들은 “~검사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주로 형님”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검찰의 서열화된 위계질서와 한 식구라는 독특한 폐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관행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니 선배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규율이 세워지고, 나아가 검찰 조직 안에 있을 때는 범죄와 비위를 저질러도 제 식구 감싸기, 밖에 나가서는 전관예우로 잘 모시는 것이 가능한 조직이 되는 것이다.

검사동일체를 떠받치는 장치로는 검찰청법의 규정 이외에도 현실에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수많은 업무 행태와 관행이 존재한다. 보고와 지시로 이어지는 결재제도, 사건 배당과 사무 분담, 검사장 등의 인사 추천과 상훈, 특수활동비의 수시 집행, 정보부서에 의한 검사 세평 동향정보 수집, 소수 특수·기획 라인의 내부여론 형성, 퇴직 후의 변호사 영업과 직결되는 전관예우, 인사권에 대한 영향력 행사 등이 검사동일체를 지탱하는 주요 요소들이다.

반면 검사동일체가 위법·부당하게 작용할 때 직무를 정당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검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많지 않다. 이의제기권 행사 상급자의 직권남용죄에 대한 형사고발 대검훈령의 위임규정에 따라 독립적 감찰개시 권한을 가진 대검 감찰부에 내부제보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검찰의 조직문화와 내부 규정하에서는 그 어떤 수단도 하급자가 마음 편하게 행사할 수 없다.

검찰이 더는 뉴스의 전면에 나오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정치권이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등을 선택해 고발장을 접수하면 검찰총장 등이 형소법상 관할보다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누가 있는 어디로 사건을 보낼 것인지 고민하지 않기를 바란다. 수사 상황과 피의사실, 감찰 정보, 검토보고서 등 내밀한 정보가 정치적 목적이나 자본의 이해관계, 재판 영향을 위한 불순한 목적 등으로 특정인, 특정 언론으로 유출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피의자와 피고인, 피해자가 공정과 정의에 대한 신뢰 없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 무력감을 겪지 않기를 희망한다. 잘못된 수사, 기소로 피해받은 분들께는 진심으로 사과하여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씻어드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검사들은 처음 임관할 때 가졌던 직업적 양심과 인권 감수성도 새롭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대검 감찰부장으로 근무하면서 검찰권의 분산과 견제가 바로 검찰개혁의 핵심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검찰은 기득권, 보수권력과 맺어온 오래된 카르텔을 깨고 오로지 실체 진실과 적법절차에 따라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투명하고 겸손한 기관이 되어야 한다. 오랜 세월 드러나지 않던 어둠이 때가 되어 밝음 안으로 들어왔으니, 신축년 이후 결국 빛이 어둠을 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