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칼럼] 징역 7, 벌금 9억원, 그리고 국정농단 유사

박성민 작가

징역 7, 벌금 9억 원 그리고 국정농단 유사. 이 것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내인 정겸심 교수에게 검사가 내린 구형이다. 표창장 위조 외에 증거인멸 등 비슷한 죄목으로 엮어서 만든 14개의 범죄에 대한 형벌이다. 물론 마지막 판결은 판사가 내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위조를 했는지 조차 증명되지도 않은 일인데,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봉사활동에 대한 표창장 위조가 그렇게 대단한 범죄인가? 그것이 국정농단 운운 할 문제인가? 내 개인적으로는 지난 한 해 우리나라가 그 문제로 떠들썩했던 사실도 이해가 안간다. 특히 보수 언론에서는 틈만 나면 온갖 추측 기사로 떠들었는데,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가? 우리 나라에서는 뉴스거리가 없었는가? 더욱이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죄인인 것처럼 단정을 내려 말하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기꾼 가족이라 단정짓는 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온 가족을 파헤칠 뿐 아니라 친인척까지 까발기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였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고 그렇게 저인망처럼 수사하여 안걸릴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더욱이 검사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게 진리였다.

 이번 사건의 상징적인 사건인 표창장만 해도 그렇다. 부산대나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기 위하여 동양대 표창장을 위조하여 제출했다. 얼핏 그런 착각을 들게 만드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동양대 표창장이 꼭 필요한가? 한국은 아직도 대학에 서열이 있다. 그 대학 사이에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있는데, 동양대 표창장이 서울대나 부산대 의대를 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 필요한 것인가? 어쩌면 입학하기 위해 전혀 필요없는 표창장이다. 그걸 위해서 위조까지 했을까? 그래도 제출한 것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봉사활동, 사회활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왕 있는 것 같이 제출하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곡해시켜, 일반 독자들에게 입학을 위해 위조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실이 우습지 않은가? 그리고 여기식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한 개인이 서류 한 장 입학을 위해 위조했다면, 그 정도의 범죄는 학교 자체 내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위조 표창장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학교다. 동시에 위조를 가려내지 못한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 그리하여 그 것이 개인이 아닌 조직적인 범죄 단체가 개입되고 수많은 피해자가 있었다면, 그 걸 경찰이나 검찰에 신고해야 할 것이다. 입학서류에 대한 위법행위가 있었다면, 그걸 제일 먼저 처벌해야 하는 곳은 학교다. 그 정도의 권위는 학교가 가지고 있다. 위조행위가 조국 전 민정수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게 왜 국정농단과 상관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정말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데, 이 모든 어마어마한 책임을 정경심 교수 혼자 떠맡으라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무엇보다도 나를 이해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검찰의 수사과정 그 자체다. 70차례의 압수 수색과 수 십 명의 검찰이 매달려 조사를 했다. 1심 재판만 해도 30변이 넘었는데.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음모 죄보다 더 많았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형량을 구형하는데도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봉사활동 표창장이 누구에게 육체적 피해를 주었는지, 금전적으로 피해를 주었는지(많은 사람에게), 정말 국정을 농단했는지, 이 모든 점을 판단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 수사과정을 통해 개인의 인격이 너무 침해 당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사실 난 검찰의 구형대로 형이 확정 되리라 믿지 않는다. 당연히 무죄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를 하여 대법원까지 판결을 끌고 가리라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의 억지 수사가 나름대로 명분이 있고,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했던 조국 교수를 괴롭힐 수 있지만, 국민이 보고 있다.

박성민 작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한마당 칼럼] 자기의, 자기에 의한, 자기만을 위한


 

11.3 미국 대통령선거는 코로나19 창궐은 차치한다 해도 오늘의 미국이 안고있는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최첨단을 달린다는 나라의 선거 시스템과 운영이 수준이하라는 것에서부터, 세계의 모본(模本)국이라고 자부해온 민주주의가 기실은 허울이 아니었느냐는 의구심 마저 던져준다.

괴물 정치인트럼프가 선거를 전후해 보여주고 있는 좌충우돌의 원맨쇼를 통해 미국이 얼마나 속빈 강정의 나라인지, 미국식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하지를 전세계인이 생생히 구경하고 있는 요즘이다.

1억명이나 했다는 사전투표와 우편투표를 트럼프는 사기요 부정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자기가 이긴 곳은 괜찮고 진 곳은 개표가 잘못돼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패한 선거구마다 소송을 걸겠다고 나섰다. 참 기이한 승부욕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그의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이유와 그가 만족하는 바를 살피면 사람됨을 알 수 있고, 숨길 수도 없다”(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라고 했다. 재임 4년 간 쉴새 없이 쏟아낸 거짓과 혐오의 발언으로 이미 본색이 드러났지만, 선거 후 불복과 마이웨이 독불장군 행보를 보면 그를 떠난 측근들과 심지어 조카까지도 사이코라고 비판한 이유를 알 만하다.

그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는데도, 절대 아니라고 억지다. 경쟁상대를 적대시하며 접촉조차 꺼리면서 정권인계 인수의 자도 꺼내지 못하게 어깃장을 놓는다. ‘한강에 화풀이 한다더니, 느닷없이 국방장관을 트윗 한방에 날리는 인사권 횡포로 국가안보는 안중에 없는 신경질적 감정만 드러냈다.

트럼프는 인권과 민주의 보루라고 여겨졌던 세계 최강의 자유 민주체제에서 독재와 전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실증해주고 있다. 그는 또한 비정상적인 일개 정치가가 국가사회와 법치의 질서를 어떻게 뒤흔들고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뼈져리게 깨우친다.

트럼프식 정치, 이른바 트럼피즘미국 제일이라는 미명하에 충동적 대응으로 국제질서를 망가뜨렸고 미국마저 결과적으로 쇠락을 가속시켰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치를 오직 자기의, 자기에 의한, 자기만을 위한정치로 삼았다. 분열과 적대, 이기의 정치가 빚어낸 극심한 차별과 대립구조가 이번 선거에서 선명히 노출된 것만으로도 그 해악은 확연하다.

트럼프를 보며 정치지도자의 덕목과 자질을 다시금 되새김질하게 된다. ‘적재적소는 그야말로 합리이고 진리이다. 그릇에 맞게 음식을 담아야 한다.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앉아야 자리도 빛나고 능력이 발휘되고 배가되는 법이다. 분에 넘치는 직책, 인성과 품성, 그리고 지성의 그룻이 안되는 졸장부들이 항상 일을 내고 부작용을 낳는다. 제 잇속만 챙기는 사업가 장사꾼이 정치를 하면 세상이 온통 시장바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친의 후광만 덮어 쓴 어리석은 인물이 국정농단의 죄과로 옥살이를 하고, 기업가 출신이 나라를 사기업처럼 운영했다가 사달이 나 철창신세가 된 것을 보았다. 모두가 자질에 비해 자리가 과분했던 연유다.

그러면 그런 허장성세가 언제까지 용인될까. 에덴동산에서 따먹은 선악과는 불행하게도 선함만 알면 되던 인간에게 악을 분별할 능력을 주었다. 사람들은 잠시 환호해도 이내 그 정체를 알아차리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포퓰리즘이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다. 곳곳에 트럼프를 아쉽게 지켜보는 트럼피스트들이 많다, 유럽의 극우 정치인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북한의 김정은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 존스홉킨스대의 정치학자 야스카 마운트 교수의 말처럼 트럼프의 패배는 그들이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섰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브라질의 한 신문도 트럼프의 패배는 문명을 공격한 데 대한 심판이라며 보우소나루에게 교훈을 줄 것이라고 비꼬았다.

트럼프의 요즘 몽니는 그야말로 뒤끝 작렬이다. 하지만 역류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아무리 미국이 늙은 호랑이라 해도, 바이든에, 그리고 해리스에 열광하는 깨시민 미국인들을 보면 상식과 정상의 복원력이 없을 리 없다.

인간사를 보면 독재자들 폭군들, 곧 해악의 정치인들 생명은 길지 못했다. 말로도 대부분 불행했다. 문제는 그들의 정치가 잠깐에 그친다 해도 할퀸 상처와 폐해는 간단치 않아 오래간다는 사실이다. 나치와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 친일과 군사독재의 적폐가 뿌리깊게 살아 꿈틀대는 오늘을 보면 그 질긴 생명력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가도 트럼피즘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 현상은 아니라는 어두운 전망이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 김종천 편집인 >


[기쁨과 소망] 무서운 무증상 감염자

● 칼럼 2020. 10. 18. 11:56 Posted by SisaHan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무서운 무증상 감염자

           

강성철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말입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거리를 두라는 말인 것입니다. 2미터이상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작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온 세계가 벌이고 있는 이 때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증상 감염자라는 말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했을 초기에만 해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감염도 없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바이러스의 특성상 기침이나 재채기, 가래, 객혈, 설사 등 증상이 나타나야 퍼진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확진자가 급격히 늘면서 무증상 감염(asymptomatic infection)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증상 감염은 말 그대로 대부분의 환자가 보이는 증상인 고열과 기침 등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감염'을 말합니다. 본인은 바이러스를 보유한 보균자이지만 자각 증상이 없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고 마음껏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여 병을 일으키는 사람이기에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라고 봅니다. 또 가까이 있는 사람도 그가 증상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으로 생각하여 조심하지 않고, 또 거리를 두지 않고 지내기 때문에 쉽게 감염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직접 검사를 받기 이전까지는 그가 감염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쉽게 바이러스를 퍼뜨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무증상 감염자는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자각 증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바이러스를 퍼뜨려 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신앙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말로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며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전혀 잘못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아파합니다. 한국에서 악플을 다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자신은 무심코 던진 말이지만 상대는 엄청 힘들어 합니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지각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악플로 인해 생영을 잃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숨겨진, 감추어진 살인자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무증상 감염자로 인해 팬데믹(pandemic) 현상을 불러일으킨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 이야기입니다.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준 것입니다. 보통 한 지파에서 뽑은 장정이라면 건강하고, 날렵하고, 똑똑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족장들이었습니다. 그 족장 중 10명의 정탐꾼이 한 목소리로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비하면 저들은 엄청난 장수들이며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는 절망적이며 부정적인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팬데믹 현상이 온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건강하고 믿음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바이러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불신앙의 바이러스입니다. 그 바이러스가 온 백성에게 퍼지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하는 이 시대에 내가 무증상 감염자가 아닌지를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는 증상이 없어 보입니다. 나 자신이 생각할 때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죄성이 오늘도 남에게 악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강성철 목사

우리장로교회 담임

 


[1500 칼럼] 아이들은 지금

● 칼럼 2020. 10. 18. 11:52 Posted by SisaHan

[칼럼]  아이들은 지금

 

임순숙 수필가

 

아침, 커튼을 젖히며 습관적으로 눈길이 닿는 곳은 이웃의 주차장들이다. 늘 첫 새벽에 출근하던 옆집엔 오늘도 이슬 맺힌 차 두 대가 망부석처럼 서 있고, 어린 아이들을 떼어놓느라 아침마다 출근전쟁을 벌이던 건넛집 주차장도 조용하긴 마찬가지다. 오늘처럼 집집마다 빼곡히 서있는 차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다가 어느 날은 듬성듬성 빠져나간 흔적이 읽혀지면 실낱 같은 기대가 꿈틀거린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이 온통 엉켜버린 지 십여 개월, 언제쯤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지 가늠조차 안 되는 요즘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자기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모 곁에서 신학기가 시작된 아이들은 또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그들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꽃 보다 더 예쁜 손녀들의 방문은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주중이라 등교는 어떡하나 내심 걱정되었다. 세 식구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서두를 것이 염려되어 물었더니 아들은 태연하게 어머니 집에서 등교하면 된단다.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아들의 여유로운 답변에서 감을 잡았다. 신학기부터 아이들은 등교수업이 아닌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곤 온라인 수업도 등교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곱씹으며, 아이들의 수업참관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다.

 

얘들아, 얼른 일어나 학교 늦었어.’ ‘빨리 씻고 밥 먹어.’ 애비는 아이들을 채근하면서 각 방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간식과 물컵도 비치해 준다. 느긋한 아이들에 비해 혼자 동동거리는 아들의 모습이 예전의 우리와 흡사하면서도 또 다른 느낌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 리아의 방을 들여다봤다. 쾌활한 성품인 평소와 달리 집중 모드인 리아, 그 앞 모니터엔 여섯 명의 아이들과 교사가 올라와 있었다. 아마도 출석체크를 하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good morning, Lia.’ 하고 호명하니 조그만 손으로 마이크 버튼을 누르더니 ‘Good morning Mrs. Thomas’ 하고는 익숙한 듯 다시 버튼을 눌러 마이크를 끈다. 이 과정조차도 아이들에겐 벅차서 어느 학교에서는 40명 출석체크 하는데 한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신학기 들어서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알아가야 할 시기에 아이는 컴퓨터 작동법을 배우고 익히며 온라인 수업에 매진하고 있다. 실체가 없는 교실에서 영상으로만 접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훗날 아이는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무궁무진한 아이의 상상력이 모니터 속에 갇힌 그들을 훨훨 날아다니게 하지 않을까 싶다.

 

4학년 서현이의 방을 살짝 들여다 봤다. 교사와 학생들 모두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등교수업처럼 서로 교감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진 못해도 반 토막이나마 가정에서 학교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읽거나 전자게임을 하며 자매끼리 깔깔거렸다. 등교수업을 받는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한창 친구들과 뛰어 놀 시간인데, 애잔한 마음에 먹거리에 더 신경이 쓰였다.

 

오후 수업시간이 채 끝나기 전에 서현이 방에서 나왔다. 선생님이 바빠서 과제만 주셨단다. 자주 이런 수업을 받고 있다며 제법 서운해 하는 눈치다. 그리곤 프랑스어 선생님은 며칠째 결근이란다. 그 부분은 내가 더 서운했다. 무엇보다 아이의 프랑스어 수업을 꼭 참관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비상시국이다. 학교는 온라인수업과 등교수업으로 나뉘고 교사들은 양쪽으로 오가며 최선을 다한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비록 결근이 잦더라도 건강한 몸으로 아이들 곁을 지켜주십사 간곡히 간청 드린다.

임순숙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에세이스트'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