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목사님, 왜 벌써 은퇴하나요?“

임수택 목사 (갈릴리 장로교회 담임)

 요즘 내가 많이 듣는 질문들이 있다. 첫째는 "목사님 왜 벌써 은퇴 하나요?" 하는 질문이다. 주변 교회에 은퇴하는 목회자들을 둘러보면 보통 내 나이보다 더 들어서 은퇴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니까 나를 보면 은퇴하기에 좀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위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내가 나이 많아 목회가 힘들어서 은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금년에 환갑을 지낸 내가 젊은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웬만한 스포츠 종목에서 젊은이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는 체력과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은퇴를 결심한 것은 선교를 향한 새로운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한 방법으로 소명하지 않으셨다면 나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담임목회를 좀 더 하다가 은퇴하였을 것이다.

내가 선교사로 니카라과에 가능한 한 살이라도 더 젊고 건강할 때에 가려고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매년 여름마다 니카라과 단기선교단을 구성하여 현지 여러 도시에 가서, 사역을 하고, 돌아 온 경험이 20차례나 있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곳은 기후가 매우 덥고, 생활하는 환경이 여러 면에서 매우 열악하여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땅에서 선교하며 산다는 게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 째 많이 듣는 질문은 "왜 하필 니카라과 선교사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민목회지에는 내가 아니어도 목회할 좋은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니카라과에는 그렇지 않다. 거기엔 자생적으로 발생한 많은 교회와 교회를 맡은 많은 교역자가 있으나 그들 가운데 다수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운 경험도 없고, 또한 배울 수도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나처럼 신학을 공부한 후 일생동안 성경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설교하며 목회했던 경험자가 찾아가서 도와주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온 세계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와 좋은 강의들을 들을 수 있으나 니카라과의 거의 모든 성도들은 인터넷도 안되고, 컴퓨터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선교사가 직접 찾아가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세 번 째로 많이 듣는 질문은 "코로나19 때문에 어떻게 선교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세계 곳곳의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분들도 코로나19 때문에 선교를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의료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곳에 들어 갈 수가 없다. 하루 빨리 백신과 치료약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나카라과 선교와 교회를 위해서 뿐 아니라 캐나다와 한국과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루빨리 이 팬데믹 전염병 사태가 해결되어야 한다.

바라건대 금년 안에 믿을 만한 백신이 나와 우리 모두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회복하고, 내년엔 내가 꿈꾸던 니카라과 선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을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 임수택 목사: 갈릴리장로교회 담임 >

[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 칼럼 2020. 9. 15. 12:44 Posted by SisaHan

[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장 계 순

 

 지난 8월에는 주말이 다섯 번이나 있었다.

 그 반가운 휴일도 외출다운 외출을 못한 채 지나갔다. 마치 봄이 훌쩍 건너뛴 낯선 세상에서 여름을 맞이했던 것 같다. 분명 그곳에 있었을 텐데, 한창 벚꽃이 만발한 하이파크(High Park)에도 다녀갔을 아지랑이 봄날은 내 기억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다. 도시의 폐쇄(Lockdown)가 시작된 늦봄, 옅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이름 모를 우울이 몰려오곤 했다. 생명체도 아닌 COVID19이 창궐하던 계절 한가운데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확진자와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코로나에 전염된 시체를 거두어 들이는 냉장 트럭이 매일 질주한다는 뉴욕 거리를 상상하노라면 책 읽는 내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했다.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계절에 책을 읽은 들 무슨 소용인가, 내 일기장에도 회의에 찬 무력감이 묻어난다.

 처음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두어 달 만에 세계적 유행병이 된 이후로 오직 세 단어만 무성했다.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자주 씻기. 어린이 놀이터에서부터 내가 즐겨 찾던 산행길 마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거의 다 닫혔다. 노마드적인 내게 갈 곳이 없어 졌다. 도심의 공원길을 찾아 나섰다.

 모처럼 맑아진 공기와 새소리 냇물 소리에 갑갑했던 마음을 씻고 돌아오곤 했다.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경계의 빛으로 걷는 사람들에 비해 밀착한 채로 노니는 오리들이 부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 두기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 거리를 두다 보니 내 자신에 집중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런 만큼 상대방도 더 잘 보였다.

  정상적인 삶이 뒤바뀐 그 계절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슬픔을 발견했다. 코로나에 전염된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딸의 통곡 소리에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코에 호스를 낀 아버지가 아이패드 화면을 통해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도 온통 슬픔이 배어 있었다. 서로 부둥켜 안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불현듯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리운 마음은 더 애절했을 거라고, ‘아름다운 슬픔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그런 경황 가운데서도 나 우선이 아닌, 따뜻하게 내민 손길이 항상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독거 노인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젊은이들과 장애인들의 집집을 돌면서 식품을 배달해 주는 숨은 봉사자들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던 코로나였지만 이 아름다운 모습만은 앗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서로 양보하면서 타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코로나가 설 곳이 없을 거라는, 마침내 왕관을 벗고 시나브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계절이 올 것이란 믿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누구나 각자의 생애에서 한 번쯤은 빼앗긴 계절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전쟁터에 불려간 젊은이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로부터 학대받은 원주민이나, 어린 나이에 납치범에게 유괴당해서 유년 시절을 강탈당한 여인에 이르기까지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운명적으로 자신의 계절을 빼앗긴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진리 아닌 진리를 전파하는 거짓 종교에 세뇌 당한 사람들 역시 생애의 중요한 계절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 또한 내 생애 절반을 타인의 시선에 구속당한 나 아닌 나로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우리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가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 <좋든 나쁘든 고난과 역경까지도 받아들이라, 달라진 운명 앞에서 비관이나 증오에 앞서 삶의 주체인를 창조적으로 바꾸라, 고통, 상실 같은 불운을 탓하지 말라, 앞으로 나아갈 책임은 바로 에게 있다>는 개념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생계의 위협에 휘말린 사람들, 일상이 허무가 되어버린 계절을 맞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지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장미 넝쿨 아래 흐트러진 꽃잎에서 여름의 끝을 본다. 

그 어떤 비극적인 일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시대에 사는 현대인, 백신도 낫게 할 수 없는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amor fati “. 빼앗긴 계절에 연연치 말자. 이것 또한 지나 가리라

< 장 계 순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세계의 창]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기는 방법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대선 연기의 이유로 주장하는 우편투표가 지난 6월 지방선거 때 워싱턴주 렌턴에서 처리되고 있다. 렌턴/로이터 연합뉴스

        

전당대회가 끝나고 미국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여론조사들을 보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현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큰 차이로 이길 거로 보인다.

그러나 이건 정상적인 선거가 아니다. 가장 큰 의문부호는 트럼프 자신이다. 트럼프는 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쓸 것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보여줬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고자 시도할 방법들은 아래와 같다.

옵션 1: 거짓말

올여름 트럼프는 2만번째 거짓말을 했다. 미국 대중과 언론을 끊임없는 거짓말에 익숙하게 만든 트럼프는 거짓말을 새로운 차원으로 가져가고 있다. 그는 민주당 후보가 바이든이 아니라 버니 샌더스인 것처럼 이번 선거를 미국인 대 사회주의자의 대결이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사실과 다르게, 바이든이 경찰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해왔다. 대통령이 진실을 잘못 묘사할 수는 있지만, 느닷없이 지어내는 것은 다른 얘기다. 트럼프는 진실과 완전히 따로 논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것이다.

옵션 2: 폭력 선동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몸을 쓰도록 반복적으로 독려했다. 2016년 대선 때 그는 기자를 들어 던진 친트럼프 정치인을 내 타입이라며 칭찬했다. 그는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시위대를 두들겨 패라고 하면서 법적 비용을 자신이 대겠다고 했다. 대통령으로서 트럼프는 폭력 경찰과 신나치를 옹호했다. 그는 연방수사국(FBI)이 테러 위협으로 간주하는 큐어넌(QAnon) 음모론을 칭찬했다. 선거 60일을 앞두고 트럼프는 사실상 지지층에게 내전을 시작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는 위스콘신주 커노샤에서 두 사람을 죽인 자경단원이자 트럼프 지지자인 카일 리튼하우스를 옹호했다. 언론인 존 캐시디가 <뉴요커>에 썼듯이, 트럼프는 지금 파시스트 지도자의 특징인 군중 폭력 선동의 문턱을 넘어섰다.

옵션 3: 선거 훔치기

트럼프는 법치에 관심이 없다. 그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법을 어기는 데에 죄책감이 없다. 공화당은 사람들이 유권자 등록하는 것을 막고 투표소를 폐쇄하는 등 광범위한 투표 억제 활동을 벌여왔다. 트럼프는 우편투표를 폄하함으로써 투표 절차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유권자들은 우편투표를 할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우체국이 투표용지를 처리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려 하고 있다. 그는 우편 시스템이 수요에 맞추지 못하도록 추가 자금 지원을 막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런 투표 억제의 결과는, 트럼프가 대선 당일에는 이기지만 우편투표가 개표되는 하루 이틀 뒤에는 패배하는 붉은 신기루일 수 있다. 트럼프는 그때 선거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옵션 4: 백악관에서 버티기

다른 모든 것이 실패하면 트럼프는 그저 백악관을 비워주는 걸 거부할 수 있다. 그는 선거가 조작됐고 자신이 실제로 이겼으며 지지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자신의 승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트럼프는 거짓말, 도둑질, 폭력 선동 등 모든 옵션을 하나로 묶어서 민주주의를 독재로 바꿀 수 있다. 지난 몇달 동안 트럼프는 긴급상황에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군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봤다. 미군은 행정부의 시위대 진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주방위군은 워싱턴디시(DC)를 제외하고는 주지사들이 통제한다. 이것이 트럼프가 시위 진압을 위해 포틀랜드에 국토안보부, 연방보안관, 관세국경보호청 소속 연방 요원들을 보내는 이유다. 트럼프는 이들 부대에 더해 친트럼프 무장단체와 자경단에 자신의 정부 전복 시도를 지원하라고 호소할 것이다. 다행히도 미군의 지원 없이는 트럼프는 헌법을 중단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화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11월 투표로 퇴임하지 않는다면 그는 백악관에서 끌려나오게 될 것이다.

<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


[칼럼] ‘가 아닌 사람을 목표 삼는 수사

박용현 논설위원

어느 검찰총장의 연설 중 일부다.

검사라는 직책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사건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가 사건을 고른다는 것은 곧 피고인을 고를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검사의 권한에 내포된 가장 큰 위험이다. 즉 처벌할 필요성이 있는 사건을 고르기보다 잡아넣고자 하는 사람을 고르게 된다는 점이다. 법전에는 수많은 범죄가 규정돼 있으니 검사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작은 법 위반 행위라도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을 선택한 뒤 그에게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 법전을 뒤지거나 수사관에게 조사를 시키는 식이 된다. 검사가 싫어하거나 괴롭히고 싶은 사람 또는 사회적 혐오 대상을 선택하고 그들의 범죄 혐의를 찾는 방식이야말로 검찰권의 가장 큰 남용 위험이 도사린 지점이다. 여기에서 법 집행은 사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기득권·지배층이 싫어하는 사람, 잘못된 정치적 태도를 지지하는 사람, 검사에게 혐오스럽거나 방해가 되는 사람 들이 진짜 범죄자를 대체하는 것이다.”

연설을 한 사람은 미국 연방 검찰총장을 지낸 로버트 잭슨(1892~1954)이다. 2차 세계대전 뒤 전범재판에 미국을 대표하는 검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0년 검찰총장에 임명된 뒤 연방검사라는 제목으로 검사들에게 한 이 연설은 검사의 권한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 통찰을 담은 명연설로 평가받는다. 검사의 막강한 재량권을 어떻게 독립적이면서도 책임있게 행사할 것인가. 이 질문에 잭슨은 사람이 아닌 를 봐야 한다고 답한다.

며칠 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소되자 변호인단은 증거에 따라 실체적 진실을 찾아가기보다는 처음부터 삼성그룹과 이재용 기소를 목표로 정해놓고 수사를 진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인지는 별도로 살펴보겠지만, 그 자체로 눈길을 끈다. 내로라하는 전직 특수통 검사들이 포진한 변호인단에서 검찰이 죄가 아닌 사람을 목표로 수사한다는 인식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검찰의 집단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인식이 아닐까 싶다. 이제껏 무수한 사건에서 검찰이 보여온 행태가 그렇기 때문이다. 멀게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부터 가깝게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까지 왜곡·조작된 공안사건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비롯해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사건, ‘피디수첩사건, 미네르바 사건 등 정권의 눈엣가시를 표적 삼은 사건들.

이와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게 검찰의 봐주기 수사. 죄가 아닌 사람을 기준으로 사건 처리가 달라진다는 점에선 본질상 같다. 현직 시절 후배 검사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3일 법정구속된 진아무개씨처럼 검사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감찰을 받고도 징계 없이 퇴직해 대기업에 임원으로 취직까지 했다가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2018미투국면에서야 기소됐다.

죄가 아닌 사람을 겨냥한 수사는 잭슨이 지적한 삿된 동기들이 작동하는 점, 그러다 보니 수사가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비례성을 잃어버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럼 이재용 부회장 수사는 어떤가. 삼성 변호인단은 무엇보다 검찰이 이 부회장을 목표물로 삼은 동기를 적시하지 못한다. 변호인단뿐 아니라 그 누구도 검찰의 부당한 동기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50여차례의 압수수색과 몇백차례의 임직원 소환조사를 과잉수사라고 주장하는 축도 있는데, 사건의 중대성과 복잡성에 비춰보면 최선을 다한 수사였을 뿐이다.

잭슨의 연설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은 그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다.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기 분석이 나오고, 70여차례 압수수색으로 상징되는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아무리 봐도 기소된 혐의와 수사 규모·강도가 비례하지 않는다.

잭슨의 통찰은 검찰의 독립성·중립성·공정성 같은 추상적 원칙들을 하나의 표지로 쉽게 갈무리했다. 죄냐 사람이냐. 이 시선으로 검찰을 감시하다 보면, 검찰이 잭슨이 말한 두 극단의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검사는 본래 역할을 다할 때 사회에 최선의 기여를 하는 권력이지만, 악의나 비열한 동기로 행동할 때는 최악의 권력이 될 수 있다.”

< 박용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