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 칼럼 2020. 9. 30. 03:27 Posted by SisaHan

[칼럼]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말에 또 속지 마라. 의대를 떠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 좋고, 무엇보다 당신들에게 좋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돈이 아니라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의 돈으로 되라. 떠나기 싫으면 의과대학을 좋은 의사를 키우는 곳으로 바꿔라. 기성세대는 틀렸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의과대학에서 20여년 교수생활 한 이가 의대생들에게 전하는 충심의 조언이다. 현재의 의과대학 교육은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데 실패했다. 젊은 의사들이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떠나기로 결정하여 응급환자가 거리를 헤매고, 중환자 수술이 미뤄졌을 때, 한국 의학교육은 조종을 울렸다. 의과대학생들의 집단행동 유보선언이 국가시험 응시라는, 선배들의 통역이 그 실패를 다시 확인해주었다. 며칠 전 본과 4학년 학생들이 의사국가시험 재응시를 표명한 이유가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국민건강권이 위협받고있어서라면, 똑같은 이유로 응급실과 중환자실 철수에 동조하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이런 의학교육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기성세대와 그 위 선배들에게 있다. 이들의 주요 죄목은 다음과 같다. 공부만 잘하면 집안일, 학교 청소까지도 면제해 준 죄, 한 반에서 대학 가는 몇 명을 위해 수십 명의 학생들을 엑스트라로 만든 죄, 체육·음악·미술 시간을 빼앗은 죄, 새벽까지 학원 뺑뺑이 돌리고 잠 못 자게 한 죄,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오래 참은 아이가 성공한다고 거짓말 한 죄, 사춘기조차 심하게 앓지 못하게 한 죄, 장편소설 요약본만 읽게 한 죄, 3등급 이하의 아이와는 놀지도 말라고 한 죄, 가고 싶던 수학과·천체물리학과 못 가게 한 죄, 부실한 예과 교육과정 운영한 죄, 편법과 불법으로 큰돈 번 의사들을 성공한 선배로 소개한 죄, 인턴과 전공의를 피교육자가 아니라 임금 싼 노동자로 대한 죄, 괜스레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 부추겨 파업하고 자신들은 쏙 빠진 죄.

하지만 정부도 이에 못지않은 잘못이 있다. 학교와 국립병원까지 돈벌이 기관으로 육성한 죄, 규제 프리존, 규제 샌드박스 시행으로 영리유전자 검사 등, 과학적 근거도 없는 각종 검사를 돈 벌라고 허용한 죄, 데이터 3법 개악으로 환자 정보를 영리기관에 넘기는 것을 합법화한 죄, 해외환자는 유인 알선을 독려한 죄, 공공의료 강화하겠다고 하면서 예산은 쥐똥만큼 배정하여 국민을 기만한 죄, 그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죄는, 자기네들은 이렇게 의료 영리화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파업한 의사들한테 공공성운운하는 죄일 것이다.

하여 의대생들이여, 기성세대를 마음껏 욕하라(하지만 조심하라! 우리도 한때는 당신들처럼 젊었다). 무엇보다 기성세대에 속지 말라. 의사란 직업은 기성세대가 알려준 것과는 전혀 다른 직업이다. 의사란 평생 환자들의 피, 고름, 대소변 속에서 뒹굴어야 하는 직업이다. 종종 허벅지를 꼬집으며 졸음을 참아야 하고, 식사를 하다가도 뛰쳐나가야 하며, 모처럼 떠난 휴가길에서도 입원 환자의 혈압을 틈틈이 확인하고 어쩌면 가족들을 놔두고 먼저 돌아와야 하는 직업이다. 8시간 넘는 대수술을 마치고 탈진해 수술실 바닥에 벌렁 누웠을 때 죽을 듯 밀려오는 피곤 섞인 희열을 반복적으로 즐겨야 하는 이상한직업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져도 환자를 두고서는 중환자실을 떠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직업이다. 무엇보다 환자보다 먼저 아프고 더 오래 아파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그런 직업을 갖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의대를 떠나라.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말에 또 속지 마라. 의대를 떠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 좋고, 무엇보다 당신들에게 좋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돈이 아니라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의 돈으로 되라. 떠나기 싫으면 의과대학을 좋은 의사를 키우는 곳으로 바꿔라. 기성세대는 틀렸다. 하지만 여러분이 뭉치면 바꿀 수 있다. 아주 떠날 결심을 하기 어렵다면, 잠시라도 의대를 떠나라. 1, 2년 빨리 의사 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70년 전, 졸업을 6개월 앞둔 한 의대생도 낡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학교를 떠났다.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국경을 넘으며 그는 마음의 경계를 하나하나 지워 나갔고 마침내 생각이 온 세계만큼 커졌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진짜 의사가 되어 있었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불렀다. 그를 진짜 의사로 만든 건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 담요 한 장으로 지새운 가장 추운 밤이었고,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손에 막대기를 달고 하는 연주에 맞춰 앞 못 보는 한센병 환자가 부른 노래였다. 당연히 그것은 결코 학교가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의대생은 의대를, 공대생은 공대를, 법대생은 법대를 떠나 용감하게 낡은 오토바이에 올라라. 그 오토바이에 포데로사 II’보다 더 멋진 이름을 붙여도 좋다. 함께할 친구가 있다면 더욱 좋다. 떠나거든 부디 이 위선, 탐욕, 거짓으로 가득 찬 기성세대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 혹시 돌아온다면, ‘진짜가 되어 오라.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로 오라.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목사님, 왜 벌써 은퇴하나요?“

임수택 목사 (갈릴리 장로교회 담임)

 요즘 내가 많이 듣는 질문들이 있다. 첫째는 "목사님 왜 벌써 은퇴 하나요?" 하는 질문이다. 주변 교회에 은퇴하는 목회자들을 둘러보면 보통 내 나이보다 더 들어서 은퇴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니까 나를 보면 은퇴하기에 좀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위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내가 나이 많아 목회가 힘들어서 은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금년에 환갑을 지낸 내가 젊은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웬만한 스포츠 종목에서 젊은이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는 체력과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은퇴를 결심한 것은 선교를 향한 새로운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한 방법으로 소명하지 않으셨다면 나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담임목회를 좀 더 하다가 은퇴하였을 것이다.

내가 선교사로 니카라과에 가능한 한 살이라도 더 젊고 건강할 때에 가려고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매년 여름마다 니카라과 단기선교단을 구성하여 현지 여러 도시에 가서, 사역을 하고, 돌아 온 경험이 20차례나 있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곳은 기후가 매우 덥고, 생활하는 환경이 여러 면에서 매우 열악하여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땅에서 선교하며 산다는 게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 째 많이 듣는 질문은 "왜 하필 니카라과 선교사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민목회지에는 내가 아니어도 목회할 좋은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니카라과에는 그렇지 않다. 거기엔 자생적으로 발생한 많은 교회와 교회를 맡은 많은 교역자가 있으나 그들 가운데 다수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운 경험도 없고, 또한 배울 수도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나처럼 신학을 공부한 후 일생동안 성경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설교하며 목회했던 경험자가 찾아가서 도와주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온 세계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와 좋은 강의들을 들을 수 있으나 니카라과의 거의 모든 성도들은 인터넷도 안되고, 컴퓨터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선교사가 직접 찾아가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세 번 째로 많이 듣는 질문은 "코로나19 때문에 어떻게 선교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세계 곳곳의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분들도 코로나19 때문에 선교를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의료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곳에 들어 갈 수가 없다. 하루 빨리 백신과 치료약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나카라과 선교와 교회를 위해서 뿐 아니라 캐나다와 한국과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루빨리 이 팬데믹 전염병 사태가 해결되어야 한다.

바라건대 금년 안에 믿을 만한 백신이 나와 우리 모두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회복하고, 내년엔 내가 꿈꾸던 니카라과 선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을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 임수택 목사: 갈릴리장로교회 담임 >

[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 칼럼 2020. 9. 15. 12:44 Posted by SisaHan

[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장 계 순

 

 지난 8월에는 주말이 다섯 번이나 있었다.

 그 반가운 휴일도 외출다운 외출을 못한 채 지나갔다. 마치 봄이 훌쩍 건너뛴 낯선 세상에서 여름을 맞이했던 것 같다. 분명 그곳에 있었을 텐데, 한창 벚꽃이 만발한 하이파크(High Park)에도 다녀갔을 아지랑이 봄날은 내 기억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다. 도시의 폐쇄(Lockdown)가 시작된 늦봄, 옅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이름 모를 우울이 몰려오곤 했다. 생명체도 아닌 COVID19이 창궐하던 계절 한가운데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확진자와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코로나에 전염된 시체를 거두어 들이는 냉장 트럭이 매일 질주한다는 뉴욕 거리를 상상하노라면 책 읽는 내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했다.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계절에 책을 읽은 들 무슨 소용인가, 내 일기장에도 회의에 찬 무력감이 묻어난다.

 처음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두어 달 만에 세계적 유행병이 된 이후로 오직 세 단어만 무성했다.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자주 씻기. 어린이 놀이터에서부터 내가 즐겨 찾던 산행길 마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거의 다 닫혔다. 노마드적인 내게 갈 곳이 없어 졌다. 도심의 공원길을 찾아 나섰다.

 모처럼 맑아진 공기와 새소리 냇물 소리에 갑갑했던 마음을 씻고 돌아오곤 했다.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경계의 빛으로 걷는 사람들에 비해 밀착한 채로 노니는 오리들이 부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 두기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 거리를 두다 보니 내 자신에 집중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런 만큼 상대방도 더 잘 보였다.

  정상적인 삶이 뒤바뀐 그 계절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슬픔을 발견했다. 코로나에 전염된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딸의 통곡 소리에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코에 호스를 낀 아버지가 아이패드 화면을 통해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도 온통 슬픔이 배어 있었다. 서로 부둥켜 안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불현듯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리운 마음은 더 애절했을 거라고, ‘아름다운 슬픔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그런 경황 가운데서도 나 우선이 아닌, 따뜻하게 내민 손길이 항상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독거 노인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젊은이들과 장애인들의 집집을 돌면서 식품을 배달해 주는 숨은 봉사자들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던 코로나였지만 이 아름다운 모습만은 앗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서로 양보하면서 타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코로나가 설 곳이 없을 거라는, 마침내 왕관을 벗고 시나브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계절이 올 것이란 믿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누구나 각자의 생애에서 한 번쯤은 빼앗긴 계절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전쟁터에 불려간 젊은이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로부터 학대받은 원주민이나, 어린 나이에 납치범에게 유괴당해서 유년 시절을 강탈당한 여인에 이르기까지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운명적으로 자신의 계절을 빼앗긴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진리 아닌 진리를 전파하는 거짓 종교에 세뇌 당한 사람들 역시 생애의 중요한 계절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 또한 내 생애 절반을 타인의 시선에 구속당한 나 아닌 나로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우리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가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 <좋든 나쁘든 고난과 역경까지도 받아들이라, 달라진 운명 앞에서 비관이나 증오에 앞서 삶의 주체인를 창조적으로 바꾸라, 고통, 상실 같은 불운을 탓하지 말라, 앞으로 나아갈 책임은 바로 에게 있다>는 개념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생계의 위협에 휘말린 사람들, 일상이 허무가 되어버린 계절을 맞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지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장미 넝쿨 아래 흐트러진 꽃잎에서 여름의 끝을 본다. 

그 어떤 비극적인 일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시대에 사는 현대인, 백신도 낫게 할 수 없는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amor fati “. 빼앗긴 계절에 연연치 말자. 이것 또한 지나 가리라

< 장 계 순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세계의 창]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기는 방법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대선 연기의 이유로 주장하는 우편투표가 지난 6월 지방선거 때 워싱턴주 렌턴에서 처리되고 있다. 렌턴/로이터 연합뉴스

        

전당대회가 끝나고 미국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여론조사들을 보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현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큰 차이로 이길 거로 보인다.

그러나 이건 정상적인 선거가 아니다. 가장 큰 의문부호는 트럼프 자신이다. 트럼프는 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쓸 것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보여줬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고자 시도할 방법들은 아래와 같다.

옵션 1: 거짓말

올여름 트럼프는 2만번째 거짓말을 했다. 미국 대중과 언론을 끊임없는 거짓말에 익숙하게 만든 트럼프는 거짓말을 새로운 차원으로 가져가고 있다. 그는 민주당 후보가 바이든이 아니라 버니 샌더스인 것처럼 이번 선거를 미국인 대 사회주의자의 대결이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사실과 다르게, 바이든이 경찰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해왔다. 대통령이 진실을 잘못 묘사할 수는 있지만, 느닷없이 지어내는 것은 다른 얘기다. 트럼프는 진실과 완전히 따로 논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것이다.

옵션 2: 폭력 선동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몸을 쓰도록 반복적으로 독려했다. 2016년 대선 때 그는 기자를 들어 던진 친트럼프 정치인을 내 타입이라며 칭찬했다. 그는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시위대를 두들겨 패라고 하면서 법적 비용을 자신이 대겠다고 했다. 대통령으로서 트럼프는 폭력 경찰과 신나치를 옹호했다. 그는 연방수사국(FBI)이 테러 위협으로 간주하는 큐어넌(QAnon) 음모론을 칭찬했다. 선거 60일을 앞두고 트럼프는 사실상 지지층에게 내전을 시작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는 위스콘신주 커노샤에서 두 사람을 죽인 자경단원이자 트럼프 지지자인 카일 리튼하우스를 옹호했다. 언론인 존 캐시디가 <뉴요커>에 썼듯이, 트럼프는 지금 파시스트 지도자의 특징인 군중 폭력 선동의 문턱을 넘어섰다.

옵션 3: 선거 훔치기

트럼프는 법치에 관심이 없다. 그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법을 어기는 데에 죄책감이 없다. 공화당은 사람들이 유권자 등록하는 것을 막고 투표소를 폐쇄하는 등 광범위한 투표 억제 활동을 벌여왔다. 트럼프는 우편투표를 폄하함으로써 투표 절차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유권자들은 우편투표를 할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우체국이 투표용지를 처리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려 하고 있다. 그는 우편 시스템이 수요에 맞추지 못하도록 추가 자금 지원을 막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런 투표 억제의 결과는, 트럼프가 대선 당일에는 이기지만 우편투표가 개표되는 하루 이틀 뒤에는 패배하는 붉은 신기루일 수 있다. 트럼프는 그때 선거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옵션 4: 백악관에서 버티기

다른 모든 것이 실패하면 트럼프는 그저 백악관을 비워주는 걸 거부할 수 있다. 그는 선거가 조작됐고 자신이 실제로 이겼으며 지지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자신의 승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트럼프는 거짓말, 도둑질, 폭력 선동 등 모든 옵션을 하나로 묶어서 민주주의를 독재로 바꿀 수 있다. 지난 몇달 동안 트럼프는 긴급상황에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군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봤다. 미군은 행정부의 시위대 진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주방위군은 워싱턴디시(DC)를 제외하고는 주지사들이 통제한다. 이것이 트럼프가 시위 진압을 위해 포틀랜드에 국토안보부, 연방보안관, 관세국경보호청 소속 연방 요원들을 보내는 이유다. 트럼프는 이들 부대에 더해 친트럼프 무장단체와 자경단에 자신의 정부 전복 시도를 지원하라고 호소할 것이다. 다행히도 미군의 지원 없이는 트럼프는 헌법을 중단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화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11월 투표로 퇴임하지 않는다면 그는 백악관에서 끌려나오게 될 것이다.

<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