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정의’는 왜 분노를 부르나

● 칼럼 2021. 3. 26. 13:1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손원제 / 논설위원

 

“윤석열이 처음 만난 사람이 왜 101살 철학교수였을까?”

“글쎄.”

“그것도 못 읽고 뭔 신문 글을 쓰냐.”

“음….”(분하다.)

“윤석열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뭘까?”

“뭔데?”(그냥 말하란 말이다!)

“철학이지 뭐겠어.”

씹던 냉면 몇 가닥을 내뿜을 뻔했다. 철학이 없어서 철학교수를 만났다니, 멋진 농담이군.

“웃을 일이 아니야. 대중적으로 상당히 어필하는 행보라고 나는 봐. 전문가들이 붙었다고 봐야지.”

대학 연구소에 적을 둔 친구 ‘고 박사’는 유명 정치 컨설턴트까지 거론하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윤 전 검찰총장이 꽤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거다.(음, 내 주변에선 그래도 제일로 가방끈이 긴데, 신뢰해도 될까.)

윤 전 총장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하는 언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이후 중간지대와 보수진영을 아우르며 정치적 위상이 확고해질 것이다, 아니다, ‘검찰주의자’로서 철학의 빈곤과 정치 초짜의 한계를 드러내며 거품이 빠질 것이다, 말들이 분분하다. 정치공학적 분석을 더 얹고 싶진 않다. 그가 야기한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의 훼손에 대해 돌아보고 싶다.

 

‘윤석열 검찰’이 남긴 가장 큰 부정적 유산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에 전례 없는 거대한 균열을 낸 것이라고 본다. 윤 전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검찰이 추구하는 정의의 본질인 양 제시해왔다. 그러나 민주화된 국가에서 살아있는 권력은 정권만이 아니다. 의석을 분점한 야당, 자율성을 쥔 관료기관도 국가권력을 나눠 갖고 있다. 법적 권위를 부여받진 않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 재벌 등도 빠트릴 수 없다. 오랜 집권을 통해 뿌리내린 검찰·수구매체·보수야당 ‘기득권 동맹’의 총체적 영향력이 정권보다 약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이 모든 다원적 권력의 비리를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수사할 때 검찰의 정의가 작동한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은 특이하게도 정권을 겨냥해 ‘선택적 수사’의 칼을 휘둘렀다. 정권 대상 수사는 하나같이 과잉 수사 논란을 빚었다. 보수야당과 수구매체, 검찰 내부 수사에선 한결같이 봐주기·감싸기 의혹이 불거졌다. 김학의 사건을 뭉갠 검사, 룸살롱 접대를 받은 검사, 위증을 교사한 혐의를 받는 검사들은 대놓고 또는 교묘하게 봐주면서, 김학의 도피 출국을 저지한 소수 검사에겐 가혹한 칼날을 들이댔다. 이 부조리를 ‘선택적 정의’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다. 마치 선택된 일부 영역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선택적 정의’는 사실 ‘총체적 불의’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는 공정과 공평을 본질로 삼는데, 선택적으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 본질을 산산조각 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정의론을 확립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의 기준을 합의하는 방식으로 ‘무지의 장막’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신이 부자인지 빈자인지, 주인인지 노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원칙을 택할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검찰 수사에 적용하면, 특정 대상에게만 가혹한 ‘선택적 정의’란 정의일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야말로 윤 전 총장에게 결여된 철학이다.

게임이론에 ‘최후통첩 게임’이 있다. 어쩌면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정의의 본질을 좇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 둘 중 한명(제안자)에게 10만원을 주면서 다른 한명(반응자)에게 임의대로 금액을 나눠주라고 한다. 제안자가 주는 돈이 얼마든 간에 반응자가 받기만 하면 둘 다 돈을 갖고, 거부하면 둘 다 못 갖는다. 합리적 선택 가설에 따르면, 제안자는 9만원 이상 갖는 게 가장 이익이다. 반응자도 1만원, 아니 100원이라도 받는 게 이익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안자 상당수가 5 대 5를 제시한다. 반응자도 8 대 2 이하 배분 제안은 다수가 거부한다. 뇌과학자들은 불공정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이 금전적 이득마저 걷어차게 만든다고 본다. 사람은 정의가 없으면 불편하게끔 프로그램된 존재일지 모른다. ‘윤석열의 정의’가 왜 그토록 큰 분노를 촉발했는지도 짐작하게 한다.

 

정의의 원칙을 깬 윤 전 총장이 사회를 통합하고 이끄는 정치의 영역에 착근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격 미달’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손원제 한겨레 논설위원

전작권 없는 서글픈 한국군, 언제까지?

● 칼럼 2021. 3. 22. 02:0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언제쯤 온전한 주권 국가의 군대가 될 수 있을까.

 

신승근/ 논설위원

 

“자기 나라 군대 작전 통제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2006년 12월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예비역 군 장성을 “직무유기자”라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북한 핵 개발에 북폭론을 제기한 미국의 강경파, 북한 정권 붕괴 등에 대비해 독자적 작전권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노 전 대통령은 천신만고 끝에 2006년 9월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과 ‘전작권 환수 추진’에 합의했다. 그런데 예비역 장성들이 결사반대하자 폭발한 것이다. 결국 2007년 2월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17일에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작권을 환수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주권국 군대의 면모를 갖추려는 결단이었다.

보수세력은 합의를 뒤엎으려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전쟁 억지가 어렵고, 핵우산 보장도 곤란하고, 미군 지원이 불투명하다는 등 온갖 핑계를 동원했다. 한국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비하의 극치였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계기로 2010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2015년 12월1일’로 환수 시기를 3년 늦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초까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과 ‘2015년 전작권 환수’도 거듭 확인했다. 그런데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을 이유로 2014년 10월 미국과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에 합의하며 재연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19일 만인 1950년 7월14일 작전지휘권을 유엔사로 이관했다. 일부 장성이 전선을 이탈한 당시 국군의 현실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을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떠날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1954년 11월17일 한-미 합의의사록 제2항에 “국제연합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위해 책임을 분담하는 동안 국군을 연합사의 작전통제하에 둔다”고 명시했다. 전시·평시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것이다.

국력이 성장하면서 작전권 환수 요구도 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12월1일 60년 만에 평시작전권을 환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석달 뒤인 지난 2017년 8월 국방부 핵심정책 토의에서 “막강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독자적 작전능력에 대해서 아직 때가 이르다고 하면 어떻게 군을 신뢰하겠는가”라고 군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똥별 비판’을 11년만에 소환한 듯했다.

‘임기 내 환수 조건 확보’를 위해 지난 4년간 막대한 국방비를 쏟아부었다. 그런데 지난 18일 한국을 찾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조건을 충족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 임기 내 전작권 환수는 사실상 어렵다는 미국의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에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19일 “진정한 주권국가가 되기 위해선 전작권을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며 “문재인 정부 임기 내 환수가 사실상 어려워졌다면 전환요건을 추상적인 ‘조건’이 아니라 ‘기한’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 때 처럼 미국에 환수 날짜를 못 박자고 요구한 것이다. 서글픈 한국군, 언제쯤 온전한 주권 국가의 군대가 될 수 있을까.

신승근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그래서 남은 검사들은 이제 어쩌겠다는 것일까

● 칼럼 2021. 3. 9. 02:4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교조적 검찰 소아병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남일 ㅣ 디지털콘텐츠부장

 

그래서 남은 검사들은 이제 어쩌겠다는 것일까. 검찰조직을 지켜주겠다던 검찰총장이 대차게 직을 던지고 나갔다. 대선 출마 얘기가 나온다. 그건 더 이상 같이 자장면 먹던 검사 윤석열이 아닌 정치인 윤석열의 일이다. 다 같이 조국·추미애와 싸울 때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정치인과 검사가 한배를 타는 건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1년, 남은 검사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사실상 정치를 택한 검찰총장을 박수 치며 떠나보내고 여전히 응원하는 검사들은 아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전직 검찰총장이 하려는 정치, 그의 대권가도를 알게 모르게 지원하겠다는 것인가. 새 검찰총장이 와도 윤석열만이 진정한 총장이라며 상왕으로 모시겠다는 것인가. 대통령이 돼서 지금 정권이 추진하는 검찰개혁을 없던 일로 만들어달란 것인가.

앞으로 검찰이 하는 수사마다 정치적 꼬리표가 붙게 될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생각 있는 검사라면 말장난을 상소문이랍시고 검찰 게시판에 올릴 시간에 제발 그 뜻 거둬달라며 전직 총장 집 앞에서 짧은 목을 내놓고 지부상소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은 거창하나 지켜진 적 없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니 이제부터는 아예 없는 셈 치겠다는 것인가. 정치가 검찰을 흔든다며 호기롭게 실명 비판하던 검사들은, 저런 정치로는 안 된다며 직접 정치에 나서려는 검찰총장에게는 왜 아무 말 안 했던 것인가. 검찰이 정치를 흔드는 건 괜찮은가. 이 또한 내로남불인가.

윤 전 총장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했다. 미리 준비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누구로부터가 없다. 정치의 언어는 한없이 헐렁해 보이지만 막상 뱉어놓으면 주어 하나가 없다고 몇날 며칠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체제와 국민을 위협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공소장에 흔히 쓰듯 성명불상자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검찰총장이 이런 첩보를 유훈으로 남겼으니 박수 쳤던 검사들은 체제 위협 세력 발본색원에 나서지 않겠는가.

정치는 엉망이고 사회는 혼란스럽다며 무력을 쥔 이들이 직접 나서면 쿠데타가 된다. 지금 미얀마가 그렇고 5·16, 12·12가 그랬다. 민주화 이후 가장 센 권력기관은 검찰이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검사들이다. 검사들은 구국의 심정으로 떠난다는 검찰총장을 따라 노도와 같이 들고일어나겠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현직 검사들이 답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검찰총장이 사상 초유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며 직을 던졌기 때문이고, 그렇게 떠난 총장에게 잘하신다며 박수 치는 검사들이 있기 때문이며, 검찰을 이용해 정치하려는 이를 교조적으로 따르는 검사들이 많아서고, 당면한 조직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검사들은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억울해하는 피의자가 있다면 검사 당신은 무어라 하겠는가. 박수 칠 때 어서 조사실을 떠나라 하겠는가. 누가 괴롭히면 정치로 갚아주겠다며 옷을 벗는 게 검찰수사실무인가. 수사가 막히니 별건정치를 하겠다는 것인가. 하긴 몇몇 검사는 그렇게 금배지를 달았다. 검찰의 생존전략은 정권 페이스에 맞춰 충성과 배신의 스톱워치를 누르는 데 있지 않았던가. 힘 빠진 정권이 막판 내달려 등을 보인 것이 그리 억울한가. 솔직히 이번 정권은 다를 거라 믿었는가. 공익의 대표자라면서 내심 무엇을 바랐길래 그리 배신감을 토로하는가.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윤 전 총장이 정치를 안 하면 된다. 이 간단한 답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이러할 것이다. 윤석열이 정말로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아니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 신기할 뿐이다. 후배 검사들이 앞으로 하게 될 정의로운 수사마저 정치수사, 표적수사라는 기본값에서 출발하게 만든 검찰지상주의자 윤석열의 행보가 황당하고, 조직으로 뭉쳐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검사들이 기이하기 때문이다.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의 사의를 한 시간여 만에 즉각 수용했다. 연합뉴스


[칼럼]  윤석열 총장, 정치 하지마라

 

대선주자로 나서려면 ‘왜 내가 대통령을 해야 하는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두 가지가 없으면서 대선주자로 나서는 것은 사기와 다름이 없다. 유권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때문에 사퇴했을까? 아니면 내년 3월9일 치러지는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 사퇴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검찰 수사권 박탈에 대한 반발은 명분이고, 대선 도전은 실리다. 명분과 실리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사다.

보통은 명분을 내걸고 실리를 취한다. 정치인에게 애국은 명분이고 당선은 실리다. 애국과 당선을 선명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문제도 있다. 검찰총장 사퇴는 과거의 일이고, 대선 출마는 미래의 일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 대선에 출마하지 않으면 명분이 부각될 것이고 출마하면 명분은 사라질 것이다.

양자역학에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상자를 열어서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다.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는 가능성의 상태로 병존한다.

윤석열 전 총장의 지금 상태가 바로 그렇다. 검찰 직접 수사권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특수부 검사들의 영웅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검찰 조직 전체의 명예를 팔아먹은 파렴치한일 수도 있다.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은 윤석열 전 총장에게 ‘정치 바람’이 들어간 이유가 뭘까?

첫째, 여론조사 때문일 것이다.

2019년 조국 사태, 2020년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의 충돌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윤석열 전 총장을 대선주자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서 뜨면 멀쩡했던 사람도 눈이 돌아간다.

2011년 청춘콘서트에 나섰던 안철수 교수가 그랬다. 고건 전 국무총리가 그랬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그랬다. 그래도 고건·반기문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둘째, 수사 경험 때문일 것이다.

특수부 검사는 프레임을 짜는 사람이다. 프레임을 짜서 피의자를 악당으로 선언하고 구속영장과 중간 수사 발표를 통해 ‘여론재판’에서 성공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뒷날 법원에서 유죄 판결까지 받아내면 금상첨화다.

무죄가 나와도 괘념치 않는다. “범죄 방식이 전형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서 입증이 어려웠다”고 치부하면 된다. 프레임을 짜서 상대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전 총장은 정치하면 안 된다. 대선주자로 나서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잘할 수 없다.

‘치국경륜’의 핵심은 경제와 외교다. 정치 경험과 국정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통령을 할 수 없다. 윤석열 전 총장이 경제와 외교를 알까?

부패가 만연한 부패 공화국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부패 공화국이 아니다. 범죄율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둘째, 될 수 없다.

지금 여론조사 수치는 반문재인 성향 유권자들의 화풀이에 불과하다. 거품이라는 얘기다. 진짜라고 믿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대선주자로 나서려면 ‘왜 내가 대통령을 해야 하는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두 가지가 없으면서 대선주자로 나서는 것은 사기와 다름이 없다. 유권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다.

윤석열 전 총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우리 사회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지 퇴임 후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좋은 방법이 있다. 그가 평생 쌓은 특수 수사 경험을 살려서 대한민국 수사 기관의 반부패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면 된다. 그러면 평생 존경받으며 살 수 있다.

윤석열 전 총장의 검찰 후배였던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여권의 개들’을 비판하며 “살아 있는 권력과 싸우다 사그라지는 것이 정치 행보인가. 만약 그렇다면 사육신도 정치 행보를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윤석열 검사가 사라져도 우리에게는 수천명의 검사와 판사들이 남아 있다”며 “그 소중한 직분을 민주주의와 헌법 정신을 위해 불꽃처럼 태우라”고 촉구했다.

김웅 의원의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윤석열 전 총장이 새겨들어야 한다.

‘천하의 윤석열 검사’가 거악 척결이라는 풍운의 꿈을 안고 검사가 된 수많은 후배 검사들을 쪽 팔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콘페이트 살인사건과 수사·기소 분리, 그리고 윤석열

● 칼럼 2021. 3. 5. 05:2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칼럼]  박용현ㅣ논설위원

 

1972년 어느 새벽, 영국 런던의 한 주택에 불이 났다. 소방관들은 2층에서 성노동자인 맥스웰 콘페이트가 목졸려 숨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틀 뒤 인근에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 경찰은 방화 용의자로 붙잡은 청소년 3명을 조사한 끝에 콘페이트 살해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 중 살인 혐의를 자백한 콜린 래티모어(18)는 심한 학습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들은 강압적인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됐다.

1974년 반전이 찾아왔다. 새 내무장관과 해당 지역 국회의원 등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콘페이트의 사망 추정 시각이 애초 경찰의 결론과 다르다는 법의학적 소견이 제출됐다. 결국 소년들은 다시 재판을 받게 됐고 1975년 무죄로 풀려났다.

 

여기까지 보면, 억울한 피고인이 누명을 벗은 이야기 또는 수사기관의 무리한 강압 수사를 드러내는 한 사례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오히려 더 극적인 사례를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무장관은 재수사 지시에도 경찰이 뭉기적거리자, 전직 고위 법관이 이끄는 조사팀을 구성해 사건의 전 과정을 들여다보게 했다. 1977년 조사팀은 엉터리 수사·기소의 문제점을 밝히고 전면적인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필립스위원회’로 불리는 왕립형사절차위원회(1979~81)가 구성됐다.(위원회가 활동 중이던 1980년 경찰은 콘페이트 사건의 진범을 찾아냈다. 사건 초기에 경찰이 수사 초점을 소년들에게 맞추지 않았더라면 어렵지 않게 수사선상에 올랐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곧 자살했다.) 필립스위원회는 백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을 깨고 경찰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수사·기소권을 분리하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당시까지 기소는 경찰에 소속되거나 고용된 법률가가 담당했는데 기소의 주도권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들이 쥐고 있었다. 위원회는 ‘수사 주체는 불가피하게 피의자가 유죄라는 심증을 갖게 되고 이에 반하는 증거에는 눈감게 된다’고 지적했다. 기소는 수사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범죄 대응의 비효율화 등을 두고 사회적 논쟁도 벌어졌지만 결국 독립된 기소기관인 기소청(CPS)을 설치하는 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영국이 1986년 수사·기소 분리를 단행한 전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로스킬위원회’(1983~86)도 구성됐다. 급증하는 금융·기업 범죄에 대한 대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위원회는 사건의 복잡성과 신속한 수사 필요성을 감안해 ‘예외적으로’ 수사·기소 기능이 통합된 기관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이로써 특화된 수사 영역을 갖는 중대범죄수사청(SFO)이 1988년 발족했다. 주요 사건 위주로 연평균 12건 정도의 사건을 처리하는 이 기관은 수사관, 변호사, 회계사, 디지털 전문가 등 다양한 직역으로 구성됐고 내부적으로는 수사·기소 기능을 분리하고 있다.

영국은 하나의 실패한 사건에서 ‘지금의 형사사법 시스템으로는 안 된다’는 성찰을 끌어내고 과단성 있게 제도를 변화시켰다. 그러면서 실용적인 예외도 도입했다. 1980년대는 영국 형사사법 역사에서 일대 개혁의 시기였던 셈이다.

 

우리도 지금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다. 개혁은 당위의 이식보다는 절절한 현실의 요구에 응답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형사사법체계를 몇번이고 갈아엎을 만큼의 비극적 사건과 뻔뻔한 횡포를 목도해 왔다. 수사기관은 살인범을 조작하고 간첩을 조작했다. 객관적인 법률전문가로서 수사를 감시해야 할 검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수사기관이라는 그릇된 정체성에 갇혀 조작을 방조하거나 무능하게 간과했다. 검찰이 정치적·조직적 이해관계에 따라 직접 사건을 비틀고 덮고 만들어낸 것도 숱하다.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한 이들도 부지기수다.(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에만 83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드러난들 대부분 철저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근본적 제도 개혁에는 더더군다나 이르지 못했다.

영국 사례에 비춰보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뇌물 사건을 검찰이 축소·은폐한 것 하나만 갖고도 검찰의 직접수사 기능을 폐지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최근의 검사 룸살롱 접대 사건은 어떤가. 수사·기소가 분리돼 있다면,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소기관이 ‘다른 산수’만 적용했어도 기소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은 검찰의 수사·기소권 독점과 그 폐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례다. 검찰이 한 전 총리의 혐의를 뒷받침할 거짓 증언을 재소자인 증인들에게 사주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기소권까지 움켜쥔, 견제받지 않는 수사기관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검찰의 부적절한 수사 방식이 지적됐던 사건이다.

그런데 수사·기소권 분리에 강력 반발하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언론 인터뷰가 보도된 바로 그날, 한명숙 전 총리 수사 과정의 비위 의혹을 조사해온 임은정 대검찰청 감찰정책연구관이 이 수사에서 배제된 사실이 공개됐다. 의혹을 뭉개겠다는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윤 총장은 “검찰 수사권의 완전한 박탈은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힘 있는 세력들에게 치외법권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이야말로 수사·기소권 독점을 통해 치외법권을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윤 총장의 요란한 반발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검찰의 특권 유지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수사·기소 분리가 반부패 수사 역량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폄훼다. 오히려 과거 보수정권들은 검찰이라는 독점적 수사·기소기관 하나만 장악하면 손쉽게 부패·비리를 은폐·축소할 수 있었다. 다양하게 분화된 수사기관이 전문 역량을 쌓고 서로 경쟁·견제한다면 수사기관이 멋대로 사건을 주무르거나 덮어버리는 일은 되레 어려워진다. 복잡한 경제범죄 대응이 중요하다면 특화된 수사기관을 만들고, 필요하면 관련 전문성을 쌓은 검사들을 데려가면 된다. 독립된 기소기관으로서 검찰은 이들 수사기관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동시에 권한 남용과 인권 침해를 제대로 감독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수사·기소를 한 기관에 귀속시킬 필요가 있다면 지금껏 드러난 폐해를 방지할 장치가 분명히 병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단일한 기관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허용돼선 안된다.(영국은 2000년 기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의 기소 기능을 감시·감독하는 기관인 기소감찰청까지 별도로 설립해 2중, 3중의 견제장치를 마련했다.) 이것이 권력분립과 인권과 투명성을 중시하는 민주국가에서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원칙이다.

멀게는 일제 강점기에 원형이 형성돼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후만도 67년이나 묵은 형사사법체계, 그것도 검찰의 특권화를 비롯한 숱한 부작용을 일으킨 제도를 21세기에도 유일한 선택지라고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퇴보요, 헌법 정신의 파괴다. 윤 총장의 비장한 사퇴가 과장된 몸짓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박용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