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터널의 끝은...

● 칼럼 2020. 6. 20. 08:18 Posted by SisaHan

[칼럼] 터널의 끝은...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전염병의 특성상, 사람의 죽음이 매일 더 해지는 통계의 숫자로 취급 되는 것이 무서웠고, 충분히 대처를 했다면 막을 수도 있는 죽음이라는 사실이 슬프게 했고, 그리고 나 자신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불안하게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번 일로 살아남은 사람도 변해야 한다. 애초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을 때는 난 곧 끝나리라 생각했고, 코로나19가 전세계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캐나다까지 크게 퍼지리라곤 생각 못했다. 미국과 캐나다가 이렇게 큰 타격을 입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의료시설과 방역제도가 잘 갖추어진 선진국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두 달이 넘었지만 언제 끝날지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사태가 장기화 되자 병도 병이지만 경제가 심각한 문제이다. 특히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몇 달 동안 문을 닫아놓을 수 없어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서둘러 끝내기를 원하고 있다.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여기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지금 어둡고 힘들지만, 마치 기차가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고 있듯,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곧 밝은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제 곧 터널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두려운 것은 이 터널을 빠져 나간다 해도, 이제는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다른, 그 동안 우리가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소형 자영업자들은, 물론 대형 백화점도 포함 된다, 인터넷 쇼핑의 발달로 점점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사람들의 쇼핑 습관이 직접 가게를 찾아가서 만져 보고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 폰 화면으로 보고 물건을 고르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것이 시간을 절약하고 편리한 쇼핑방법이 되어 가고 있다. 이번 녹다운 기간을 통해 인터넷 쇼핑은 더욱 활성화 됐으리라 생각한다 이 기간 동안 식당도 많은 타격을 입었다.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가족들과 식사시간을 많이 가졌을 테고 그 장점도 깨달았을 것이다. 이민생활을 하며 이제는 가족끼리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피자처럼 주문 배달하는 사업이 이득을 보았다. 영화도 굳이 영화관에 갈 필요 없이 Net Flex처럼 집에서 컴퓨터로 다운로드 받아 영화를 보는 것이 더욱 성행했을 것 같다.

직장인들이 집에서 근무하는 재테크와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던 일은 전에도 있던 일이지만, 이번 기회로 많은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더욱 그 방법이 발달되고 향상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나의 가능성으로 거론되던 방법들이 어차피 나가야 할 방향이었지만,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다가온 것 같다.

가장 궁금한 것은 새 시대에 있어서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친구 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다. ‘페친이란 말이 있다. 페이스 북 친구, 보통 몇 백 명씩 몇 천 명씩 가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쉽게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는 페친은 많아지면서 정말 만나는 친구는 줄고 있지 않은가? 친구가 없기에 친구 사귀기가 힘들기에 우리는 인터넷에서 친구를 찾고 있을까? 적어도 우리는 점점 직접 만나는 친구보다 한 번 만날지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인터넷의 친구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디.

이제 기차가 터널을 빠져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언제를 모르고, 다시 이차 감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게 하고 있지만 곧 터널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한다. 이 시점에 나는 두렵다. 모르기에 두렵다. 내가 터널 밖을 나가 보게 될 세상이 분명 바뀌었을 테고, 어떻게 변한 모습에 내 자신 적응해 나갈지……

< 박성민 시인, 소설가 >


[시론] 다시 위기에 빠진 남북관계, 어디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실기한 것일까요?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요? 아니면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시 길이 날 수 있을까요?

남북관계 이야기입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말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2년여 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물로 남북 상시 소통의 장이었던 건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콘크리트 더미로 변했습니다. 남북은 날 선 말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세차례나 만나 백두산 천지까지 함께 오른 인연들 사이의 말이라고 하기엔 몹시 민망합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요. 시계를 되감아 보면 사실 남북관계는 14개월가량 전부터 멈췄습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은 의미 있는 전진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6월 판문점에서 깜짝 남북미 정상 회동이 있었지만 깜짝에 그쳤습니다. 하노이 이후 북한은 남쪽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 듯싶습니다. 당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에 관한 문 대통령의 중재안은 러시아 스캔들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강경파에 의해 거부당했고, 북한은 충격에 빠져 신뢰의 빗장을 걸어 잠갔습니다. 문 대통령의 충격과 당혹감도 적잖았습니다. 한 정부 책임자는 지난해 사실상 남북 간 의미 있는 연락은 끊겼다고 했습니다. 이달 초 북한이 남북 연락망 단절을 공식 선언하기 한참 전입니다.

그 뒤로 남북관계 활력은 눈에 띄게 잦아들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섣불리 어떤 것을 함께 도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는 미국에 기댔습니다. 하노이 중재 실패 후유증이 짙은 탓인지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한반도 운전자론대신 북미 협상이 우선이란 말이 많이 들렸습니다. 궁여지책 같기도 했고, 책임회피 같기도 했습니다. 남북관계에 한-미 공동보조를 맞추자는 명목으로 미국이 주도한 한-미 워킹그룹이 거부할 수 없는 제동을 걸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성에 익숙해졌습니다. 차근차근 신뢰를 쌓기보단, 트럼프의 미국이 통 크게 한 방터뜨려주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이야 북한 비핵화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것이겠지요. 무역분쟁과 화웨이 규제, 코로나19 책임 공격 등을 보면 미국의 눈은 중국에 가 있고, 이런 중국을 견제하는 데 북한은 버리기 어려운 카드입니다. 한반도, 정확히는 동북아, 더 정확히는 중국 견제에 북한을 빌미 삼는 것이 낫습니다.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북한의 쓰임새는 핵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북한의 쓰임새보다 못합니다. 청와대와 정부가 한동안 미국의 국익과 우리의 국익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요.

청와대와 정부는 통이 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은 역지사지란 말을 자주 씁니다. 상대 처지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인데, 남북관계에서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첫 정상회담 때 남한 시각에 맞춰 평양 표준시를 30분 앞당기고, 세번째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에게 15만명이 모인 평양 능라도 5·1경기장 연설을 허용한 것은 깎아봐도 북 내부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이를 감내했던 북한의 적극성에 견줄 만큼 청와대와 정부가 간절했는지, 남북관계가 얼음장같이 식은 지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 대통령도 잘못한 대처였다고 인정한 대북전단 문제에서 전단 살포를 진작부터 강하게 막지 않은 것은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이제 문 대통령은 전쟁 위기로 치닫던 2017년 세밑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적어도 남북 신뢰도 측면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시엔 북한이 불확실하나마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신이란 맞바람을 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청와대는 사리분별 못 하는 무례한 언행이라고 북한의 말폭탄에 맞대응했지만, 문 대통령의 말마따나 구불구불 흐르더라도 끝내 바다로 향하는 강물처럼남북이 가야 할 방향은 선명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20돌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 대신 “8천만 겨레앞에 함께한 약속을 언급하며 합의 정신을 강조한 것은 다시 신뢰의 기본기를 다지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남북관계는 길이 끊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길이 나곤 했습니다. 3년 전만 해도 그랬습니다. 문 대통령의 2017년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이 남북관계를 평창판문점백두산으로 이끌지 예상했던 사람은 적었습니다. 문 대통령 앞에 놓인 길도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숙명과 그의 사명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 성연철 기자 >


[칼럼] 미국과 쿠바가 선택한 의료제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지역방송 <덴버7>은 지난달 말 코로나19에 감염돼 집중치료실에서 2주 동안 치료를 받은 로버트 데니스라는 이의 치료비 내역을 공개했다. 총액이 자그마치 84385달러 94센트였다. 10억원이다. 진료비와 약값 등을 포함한 것인데, 약값만 25만달러(29700만원) 정도라고 방송은 전했다.

코로나19 치료비는 코로나바이러스 지원, 구제, 경제 안전 법’(CARES Act)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에 환자 부담은 거의 없고, 실제로 데니스의 경우도 보험사가 전액 처리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데니스의 부인은 이런 숫자가 적힌 내역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렵다고 말했다. 이 사례는 미국 병원들이 어떤 치료를 하고 의료진의 인건비는 얼마나 높게 책정하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의료진과 기술을 갖춘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최고의 의료를 제공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 많은 사람에게 그림의 떡이라는 점이다.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2017년 미국의 총 의료비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17.06%.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17.14%)에 이은 세계 2위다. 스위스(12.35%), 프랑스(11.31%), 독일(11.25%)과도 꽤 차이가 난다.

나라 전체가 많은 돈을 의료에 투입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혜택은 선택받은 이들만 누리는 미국과 대조적인 나라가 플로리다주 바로 아래 섬나라 쿠바다.

쿠바의 2017년 총 의료비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의 11.71%. 경제 규모에 비해 적지 않은 자원을 의료에 투입하는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혁명을 일으킨 이후의 의료 정책 핵심 목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카스트로의 생명을 연장할 의술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건강을 보장할 의술을 무료로 보급하는 것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1980년대에 확립된 가정주치의 제도다. 의사 한명과 간호사 한명이 짝을 이뤄 600~1500명 정도의 주민 건강을 꾸준히 관리한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20~40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근무하는 지역 종합외래진료소로 보내진다. 여기서도 치료가 어려운 환자는 상급 종합병원이 맡는다.

쿠바의 가정주치의 제도는 코로나19 대응에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7(현지시각) 쿠바의 가정주치의들이 매일 아침 자신이 담당하는 주민을 방문해 상황을 파악한다고 전했다. 이 덕분에 쿠바의 코로나19 환자는 최근 두달 동안 꾸준히 줄고 있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10일 발표 자료를 기준으로 하면,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2205명이며 사망자는 83명이다. 인구 100만명당 사망자 수는 7.33명이다. 미국의 누적 확진자는 1951096, 사망자는 11770명이다. 100만명당 사망자 수는 338.38명이다.

이쯤 되면 미국인들도 자국의 의료체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만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에이피>(AP) 통신이 7일 발표한 자체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 70%는 의료 혁신 측면에서 정부보다 민간 기관을 신뢰한다고 답했다. 의료의 질 개선(62%), 의료보험 보장(53%) 측면에서도 정부보다 민간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이피>는 이런 결과가 코로나19 발생 초기인 지난 2월 조사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인의 판단과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해야겠지만, 그들의 방식이 코로나19 사태 같은 큰 위기에서 자신들과 세계를 구할 것 같지는 않다.

< 신기섭 한겨레신문 국제뉴스팀 기자 >

 


[칼럼] 이게 나라냐”, 미국의 촛불혁명

         

이건 우리 시대의 혁명이야.”

지난달 25일 백인 경찰의 무릎에 짓눌린 채 숨을 쉴 수 없다며 숨져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분노한 시위가 시작된 지 며칠 뒤 미국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솔직히 좀 과장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년간 백인 경찰의 폭력에 흑인들이 목숨을 잃을 때마다 항의 시위는 자주 일어났지만 어떤 변화도 없이 곧 사그라들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이제 많은 미국 언론들이 이런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9일로 시위는 보름째를 맞았다. 대도시뿐 아니라 소도시, 교외지역까지 미국 전역에서 변화의 함성이 이어지고 있다. 폭력과 약탈이 확연히 줄고 아이들까지 참여하는 평화 시위가 자리잡았다. 흑인뿐 아니라 백인과 아시아계, 히스패닉까지 인종의 벽을 넘은 각계각층이 함께 인종차별 반대와 경찰 폭력을 해결할 제도 개혁을 요구한다. 한인들도 흑인들과 연대해 시위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수십년 만에 가장 광범위한 민권운동이다.

잔인한 빈부격차, 인종차별,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 대량 실업 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끼던 미국인들의 절망과 분노에 플로이드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이 불을 댕겼다. 시위대의 우선 목표는 인종차별 철폐와 경찰 개혁이지만, 정의와 공정과는 거리가 먼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혁 논의도 확산되고 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미국인들의 외침은 몇년 전 한국인들이 촛불을 들고 외쳤던 이게 나라냐와 일맥상통한다.

미국판 촛불시위는 미국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실패 국가가 되어버렸다.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해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남 탓과 거짓말에 급급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지만,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만이 아니다. 트럼프가 집권하기 훨씬 전부터 미국 사회는 여기저기 곪고 썩어가고 있었다.

세계 최강대국 쇠락의 첫번째 전환점은 20019·11 공격에 대한 대응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사태의 원인이 된 중동정책을 반성하지 않고, 근거 없는 대량살상무기주장을 앞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다. 혼란에 빠진 중동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난민이 됐다. 미국이 세금으로 퍼부은 막대한 전비는 군사·에너지 기업들에 막대한 이익을 안겼고, 서민들에겐 큰 부담이 됐다.

두번째 전환점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정부와 의회는 천문학적인 세금을 구제금융으로 투입해 월가의 은행들과 금융회사들을 구했다. 무책임한 투자로 시스템을 망가뜨린 월가 사람들은 일자리와 자산을 지켰다. 반면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집과 일자리를 잃고 빚더미에 앉았다. 1%의 상류층과 하층민, 대도시와 농촌, 엘리트와 서민들 사이의 분열은 끝없이 깊어졌다.

분열을 틈타 대통령이 된 트럼프의 무책임과 작은 정부=효율의 논리를 내세우며 정부가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득권층은 완벽한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트럼프는 사상 최대 감세를 통해 기업과 부유층에 막대한 돈을 벌어주었고, 이익을 얻은 이들은 트럼프의 재선을 위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코로나19 재난 앞에서도 월가는 또다시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아냈고 불안정해진 시장을 활용해 큰 수익을 챙겼다. 일자리를 잃고 식량을 배급받으려고 줄을 선 빈곤층과는 딴 세상처럼, 증시는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번 시위는 절망 속의 희망이다. 너무나 거대한 문제 앞에서 무감각해져 침묵해온 미국인들이 인종과 계층의 벽을 넘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복잡한 선거인단 제도와 백인 중도층 민심은 큰 변수다. 또 트럼프가 퇴장한다고 해도 소수에만 이득이 집중되는 국가 시스템과 군사주의, 관료주의를 고칠 개혁은 쉽지 않다. 민주당의 조 바이든과 기득권을 쥔 정치인들이 변화를 만들어낼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도 불투명하다.

아래로부터 분출한 에너지가 경찰 개혁을 넘어선 사회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미 너무 늦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무질서와 갈등이 들끓는 전국시대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 박민희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