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소생, 혹은 회생을 뜻하기도 한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당연히 놀랍고도 기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기적이다.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던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창에 찔려 온 몸의 피와 물을 쏟아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도 자신이 예언한대로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신비로움의 대상이다.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고 다시 살아났다는 구원과 부활의 섭리는, 전능한 신의 논리가 아니면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 세계에선 불가능한 생명의 부활이기에, 신성(神性)의 예수와 구원의 역사를 믿으면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부활신앙이 확증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부활을 기뻐하고 영생의 소망을 품으며 부활절을 축하하고 찬미한다.
비단 예수의 경이롭고 신령한 부활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사에서 흔히 접하는 부활이라는 단어는 반갑고 기뻐할 일들에 많이 쓰인다.
패가망신 했던 사람이나 가문이 다시 일어나 흥성하면 부활이라고 한다. 쫄딱 망했던 회사나 사업이 되살아나 번창하면 부활한 것이다. 한 때 날리던 선수가 형편없이 추락했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예전의 기량을 다시 뽐내는 것도 부활이라고 한다. 프로골프를 평정해 ‘황제’ 별칭을 얻은 타이거 우즈가 중년에 접어들고 몸이 고장나며 차츰 하위로 쳐지자 사람들은 이젠 끝났다보다 여겼다. 그런데 14년만인 2019년 상금 207만 달러를 거머쥐는 마스터즈 대회를 제패해 엄청난 부활의 환호를 받았다. 최근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그가 재활에 성공해 다시 부활하게 될지, 또 구름떼 갤러리를 몰고 다닐 수 있을지, 골프팬들은 궁금해 한다.
‘부활’의 어의(語意)가 지닌 긍정적인 의미 그대로 반갑고 좋은 부활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제발 부활하지 말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과 현상들 또한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요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 COVID-19 팬데믹이 중세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 그리고 사스와 메르스 같은 전염병의 재현이라는 사실은 익히 거론됐으니 차치해 두자.
40여년 전 광주에서 보고 겪었던 쿠데타 군인들의 무자비한 학살 망령이 미얀마에서 되살아난 것을 본다. 그런 비인간적인 만행에도 손을 쓰지 못하는 유엔이나 국제사회의 대립구도 역시 옛날의 되돌이 판 같다. 몸집이 커진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격화되는 대립상은 30여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였던 냉전의 부활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한동안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도 그렇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동키호테식 처신과 바이든 대통령의 ‘원칙주의’에다 ‘방해꾼’ 일본까지 끌어들이면서 다시 냉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참 답답한 분단민족의 현실이다. 백인 우월주의와 유색인종 차별을 격화시킨 ‘거짓선동’ 정치인 트럼프가 대선 패배 이후 재기와 부활을 노린다는 소식은 전혀 반가울 수가 없다.
태평양전쟁의 패퇴로 숨이 끊어졌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질긴 생명력으로 되살아 난 것 또한 우리를 불유쾌하게 만든다. 독도문제, 군대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동해문제, 무역제재와 국제기구(WTO) 수장 반대…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졸렬함에서 한때 고개를 숙인 듯 했던 저들의 극우적 마각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부활의 국제적 폐해를 본다.
역시 해방이후 지리멸렬했던 친일 세력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이승만의 반민족적 ‘공로’로 부활한 것은 한국 근대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말았다. 친일의 독버섯은 민족정신을 오염시켰고, 대대로 특권과 이권을 누리면서 나라를 병들게 하고 국민을 이간질했으며 분단대결을 심화시켰다. 민주주의를 압살한 연이은 개발독재 군사독재와 토건비리 · 정경언 유착, 그리고 국정농단에 헌정유린까지… 동학과 삼일정신, 민주항쟁의 기개로 무장한 깨시민들이 분기하여 이제 겨우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들 독버섯의 속성과 카르텔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근 선거열기로 뜨거운 한국의 정정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그 슬프고 짜증나는 부활현상에 답답해진다. 사람들은 다시 저들이 설치는 세상으로, 옛날 그 시절의 부활을 원하는 것일까?.
코로나 팩데믹과 더불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아시안 대상 인종차별 혐오 발언과 범죄들에 북미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는 큰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길을 걷다 괜히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안 그래도 이민자로 약간은 주눅 들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지난 16일 미국 아틀란타에서 있었던 4명의 한인이 총 맞아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캐나다라고 크게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제 둘 째 아이도 하루는 동네 trail에서 걷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오던 백인 할아버지가 막 ‘“차이니스 어쩌고...” 하는 욕을 하며 길에서 비키라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듣자 마자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길을 비켜준 둘 째 아이가 되레 미워졌습니다. 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느냐고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진정이 되자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이민 1세대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곳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런 일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서글펐습니다.
이렇듯 아시안 계 혐오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가까이 집안 식구마저도 욕설과 더불어 민망한 일을 당하다 보니 제 ‘마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도 ‘증오’가 꿈틀거림이 감지가 되었습니다. ‘내가 길 가는데 혹시라도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기만 해봐라’ 하며 ‘마음’이 공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어떤 ‘욕’으로 대꾸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연습’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마주치는 ‘백인’의 눈빛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제 눈에도 힘이 들어가 째려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곧 문제 생긴 ‘마음’ 더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위에 인용한 글처럼 말이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찬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지옥임이 분명합니다. 혐오발언과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이 끔찍한 것은 가해자의 ‘지옥’에 함께 빠져버린 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 부분을 성령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도 가해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이미 지옥이 되어가고 있구나!’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말이 참으로 마음의 알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선언합니다.
고로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예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의 표현이요 결정체이십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담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욕’할 기회를 찾고 마음에 증오를 품고 있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내 ‘말’이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변명은 옳지 않습니다.
‘지옥’을 벗어나 ‘천국’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잠언서 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 23:7)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말에 예수가 묻어 나와야합니다.
우리말에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 나와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 먼저 우리 마음이 예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겠습니다.
‘마음’이 천국이 되면 가해자를 향해서도 긍휼히 여김과 그 영혼을 위한 기도마저 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역시 인류 최고의 책이다. 매일을 살아가며 얼핏 떠오르고 때로는 곰곰 음미해 볼 때마다 성경의 ‘적확무오(的確無誤)’함에 감복하곤 한다. 완전하고 흠없는 ‘정확(正確)무오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학적이거나 다른 여러 의미와 평가가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속성과 인간사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 정밀하게 분석 묘사하고 예견까지 한 책은 없다고 여겨져서 그렇다.
수천년 전의 기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현실감은 요즘의 팬데믹 상황에서 시간여행을 하듯 인류의 자화상에 대한 기시감을 던진다.
설령 목회자가 아니어도, 코로나19 재앙에 노아의 홍수를 떠올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전 지구적 재난 가운데 첫 번째가 노아의 대홍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월을 지나며 문득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가 다시 생각났다. 성경에는 2월17일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하고 열흘만인 2월27일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홍수가 물러간 땅에 발을 다시 디딘 날이다.
1년을 넘어선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구촌 창궐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은 꼴 일까.
인간의 무절제한 자연파괴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괴물 바이러스의 출현을 낳았다. 코로나 공포에 쫓겨난 사람들은 속수무책 봉쇄되고 단절된 집안에 격리돼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인간이 머리를 짜내 겨우 백신을 만들었다지만, 코로나 괴물이 순순히 물러갈 것 같지도 않다. 세상은 바야흐로 코로나 전과 후로 구분될 큰 변혁기를 맞았다…그렇게 비슷한 지구 생태계 변전의 계기가 노아의 대홍수였다.
땅의 물이 솟고 하늘이 터진 듯 쏟아져 내린 비가 40일 밤낮을 퍼부어 지구의 높은 산꼭대기가 모두 물에 잠겼다. 세상의 숨 쉬는 것, 하늘과 땅의 살아있는 것들은 모조리 물에 쓸려 죽어갔다. 오로지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과 번식용 암수 동물들만이 살아남은 대재앙이 지구를 덮친 것이다.
세상이 타락하고 인간의 죄악이 만연하자 하나님은 탄식하며 징벌을 결심하고 경고한다. 하지만 방탕에 젖은 사람들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의인인 노아만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방주는 배와는 전혀 달랐다. 모양도 기능도 크기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방수 건조물이었다.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 타운에 가면 노아의 방주를 재현한 거대한 모형이 세워져 있다. 방주는 사람들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자력이 아닌 타력에 맡긴 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돛이나 닻이 없었고, 스크류나 키도 없었다. 창문도 겨우 하나밖에 없는 이상한 배였다. 오로지 신의 섭리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동력장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떠다니는 시체, 추악한 세상을 보아 유익할 일이 없으니 창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려 1백년 동안이나 그런 기이한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조롱했을 것이다. 노아는 오랜 세월 세상의 퇴폐와 질시를 참고 견디며 고독한 믿음의 수행을 계속한 것이다.
노아 일가는 그런 놀라운 믿음으로 천벌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청난 재앙과 축복을 직접 체험했던 아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소문내는 인륜범죄로 저주를 당한다. 그리고 또 얼마가지 않아 언약을 저버린 후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망상에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도 거주지도 산산이 흩어지는 징벌을 받는다. 그 얼마 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어진다.
성서의 사람들 발자취를 보면 어리석은 배반의 반복사를 보게 된다. 언약을 세우고 숱한 기적과 역사로 지키며 인도하는 데도 그들은 하나님 신뢰를 저버리고 거역하며 반역을 일삼는다. 그래서 결국 재앙의 반복을 겪는 고난과 업보의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본질적인 죄성과 기억상실, 그리고 배반의 본능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너희가 최후에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경고했던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신병기를 자랑하고, 우주를 정복한답시고 화성까지 로봇을 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인간들이, 한낱 보이지도 않는 미물의 전염병 조화에 절절매면서도 여전히 겸손할 줄은 모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멀기만 한 백신을 먼저 맞겠다며, 또한 서로 차지하려 꼼수와 억지를 쓰는 이기적 다툼과 탐욕, 나만은 괜찮다며 마스크도 봉쇄도 걷어치우라고 악을 쓰는 오기에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은 드러난다. 이 만인 고통의 시기에 아시안이 싫다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패악질, 동족을 학살하는 미얀마군의 무자비한 쿠데타 만행… 그저 살벌한 생존경쟁에 이기적인 투쟁을 벌이며 날고 기는 그 영리하고 약삭빠른 동물적 본능만이 영원하리니….
아무리 인간의 오만과 사악함의 죄과에 경종을 울려댄다 해도 습성은 바뀌지 않을 테고, 이내 망각하는 반복의 재앙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질 뿐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웃을 일이 아니야. 대중적으로 상당히 어필하는 행보라고 나는 봐. 전문가들이 붙었다고 봐야지.”
대학 연구소에 적을 둔 친구 ‘고 박사’는 유명 정치 컨설턴트까지 거론하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윤 전 검찰총장이 꽤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거다.(음, 내 주변에선 그래도 제일로 가방끈이 긴데, 신뢰해도 될까.)
윤 전 총장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하는 언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이후 중간지대와 보수진영을 아우르며 정치적 위상이 확고해질 것이다, 아니다, ‘검찰주의자’로서 철학의 빈곤과 정치 초짜의 한계를 드러내며 거품이 빠질 것이다, 말들이 분분하다. 정치공학적 분석을 더 얹고 싶진 않다. 그가 야기한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의 훼손에 대해 돌아보고 싶다.
‘윤석열 검찰’이 남긴 가장 큰 부정적 유산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에 전례 없는 거대한 균열을 낸 것이라고 본다. 윤 전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검찰이 추구하는 정의의 본질인 양 제시해왔다. 그러나 민주화된 국가에서 살아있는 권력은 정권만이 아니다. 의석을 분점한 야당, 자율성을 쥔 관료기관도 국가권력을 나눠 갖고 있다. 법적 권위를 부여받진 않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 재벌 등도 빠트릴 수 없다. 오랜 집권을 통해 뿌리내린 검찰·수구매체·보수야당 ‘기득권 동맹’의 총체적 영향력이 정권보다 약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이 모든 다원적 권력의 비리를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수사할 때 검찰의 정의가 작동한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은 특이하게도 정권을 겨냥해 ‘선택적 수사’의 칼을 휘둘렀다. 정권 대상 수사는 하나같이 과잉 수사 논란을 빚었다. 보수야당과 수구매체, 검찰 내부 수사에선 한결같이 봐주기·감싸기 의혹이 불거졌다. 김학의 사건을 뭉갠 검사, 룸살롱 접대를 받은 검사, 위증을 교사한 혐의를 받는 검사들은 대놓고 또는 교묘하게 봐주면서, 김학의 도피 출국을 저지한 소수 검사에겐 가혹한 칼날을 들이댔다. 이 부조리를 ‘선택적 정의’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다. 마치 선택된 일부 영역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선택적 정의’는 사실 ‘총체적 불의’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는 공정과 공평을 본질로 삼는데, 선택적으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 본질을 산산조각 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정의론을 확립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의 기준을 합의하는 방식으로 ‘무지의 장막’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신이 부자인지 빈자인지, 주인인지 노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원칙을 택할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검찰 수사에 적용하면, 특정 대상에게만 가혹한 ‘선택적 정의’란 정의일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야말로 윤 전 총장에게 결여된 철학이다.
게임이론에 ‘최후통첩 게임’이 있다. 어쩌면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정의의 본질을 좇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 둘 중 한명(제안자)에게 10만원을 주면서 다른 한명(반응자)에게 임의대로 금액을 나눠주라고 한다. 제안자가 주는 돈이 얼마든 간에 반응자가 받기만 하면 둘 다 돈을 갖고, 거부하면 둘 다 못 갖는다. 합리적 선택 가설에 따르면, 제안자는 9만원 이상 갖는 게 가장 이익이다. 반응자도 1만원, 아니 100원이라도 받는 게 이익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안자 상당수가 5 대 5를 제시한다. 반응자도 8 대 2 이하 배분 제안은 다수가 거부한다. 뇌과학자들은 불공정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이 금전적 이득마저 걷어차게 만든다고 본다. 사람은 정의가 없으면 불편하게끔 프로그램된 존재일지 모른다. ‘윤석열의 정의’가 왜 그토록 큰 분노를 촉발했는지도 짐작하게 한다.
정의의 원칙을 깬 윤 전 총장이 사회를 통합하고 이끄는 정치의 영역에 착근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격 미달’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