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제 판사를 선거로 뽑아야 할까?

 

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법관은 어떻게 판결을 내릴까? 법현실주의에 따르면 판사 역시 여느 일반인처럼 특정 목적을 위해 판결을 내린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일본 사법부에 대한 분석에서 하버드대학의 마크 램자이어 교수는 그것은 판사들의 승진에 대한 열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사법부의 연공서열주의에 기반한 승진제도가 판사들의 이러한 열망을 이용하여 정치적 판결을 내리게 만드는 통로라고 보았다. 실제 램자이어 교수는 자민당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린 판사들이 이후 좋은 보직을 거쳐 더 빠르게 고위 법관으로 승진했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통찰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사법농단에서 보듯 한국의 사법부에도 적용된다. 이 사건은 인사권을 이용하여 권력집중을 꾀한 대법원장과 엘리트 코스에 있던 몇몇 행정처의 비윤리적 판사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런데 재판 농단보다 더 유감스러운 사실은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이 제대로 된 징계나 유의미한 제도 개선을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법원이 자정 능력이 있는 조직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국회가 판사를 탄핵하지 않는 한 주권자가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단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불신은 더 커져갔다. 자율성은 높아졌는데 책임성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눈에서 보면 판사는 권한만 누리되 책임은 지지 않는 법조 귀족이다. 혹자는 자율성은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겠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을 통해 임용된 법관에게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수준의 정당성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자가 법원에 거는 최소한의 기대는 사법적 자제다. 행정부의 재량이 인정되는 사항에 대해 그 정당성을 존중하는 절제의 모습이 있을 때 법원의 자율성 역시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의 법원의 모습은 이와 거리가 멀다. 법원은 충분한 근거도 없이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있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의 2개월 정직에 대한 집행정지를 인용하였다. 이로써 권한을 남용하고 있는 검찰총장에 대한 통제수단인 대통령의 징계권은 사문화되었다. 법원 논리에 따르면 이제 검찰총장에 대한 대통령에 의한 인사권의 통제는 감봉과 견책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인사상 통제는 이제 모두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의 정치적 독립성이 개인의 권한 남용까지 면책할 정도로 중요한 헌법적 가치이며 그 직위 역시 대통령에 비할 만한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기관인가?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본안 재판이 아닌 집행정지 결정에서 내리는 것이 옳았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 환송심은 집행유예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달려가고 있다. 재판 초기에는 미국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권하더니만, 이제는 수박 겉핥기 식의 전문심리위원 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여러 법률 전문가들은 내년 2월 선고에서 이를 근거로 재판장이 집행유예를 선고할 것이라 예측한다. 재판장의 소신에 따른 치료적 사법? 이는 그냥 원색의 유전무죄.

이처럼 법원이 파워엘리트의 입장을 자율성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할 때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장 티롤과 에릭 매스킨이란 두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2004판사를 언제 언제 선거로 뽑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판사 선거제도가 사회적으로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판사로 하여금 당선을 위해 유권자의 입맛에 맞는 잘못된 판결을 내릴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법관이 특별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할수록 선거제도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국민에게 공익의 수호자가 되기를 포기한 법관을 징벌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이 판결을 법관 3200명의 손에만 남겨둘 수 없는 이유다. 국민은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는 비판할 권리가 있다. 또한 잘못된 판결이 법원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것이 선거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주권자에게 이 문제를 교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은 국회의 몫이자 의무다. 그 전이라도 법원 또한 이러한 불신과 우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한마당] 망년에 사라져야 할 괴물들

● 칼럼 2020. 12. 26. 12:15 Posted by SisaHan

[한마당] 망년에 사라져야할 괴물들

 

다시 한해가 저물어 가는 세월의 분기점을 맞는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유난히 답답하고 불안하고 초초했던, 강박 속에 참고 견디며 살아야 했던 한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연히 COVID-19 이야기로구나 하고 직감할 터이다. 하지만 그 것만을 거론하기엔 부족하다. 지난 일년 동안 우리를 괴롭히고 피곤하게 하고 상처를 준 것들이 어디 한 둘 이랴만, 그 중에도 코로나에 버금가는 다른 두 인물이 인상적이었다. 그들 역시 코로나 못지않게 비슷한 기질로 기승을 부리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지겨운 한 해를 넘기는 마당에 어서 사라줘졌으면 하는 강한 소망으로 오버랩된다.

아무래도 그들 세 군상은 곰곰 따져볼수록, 범위와 영향력은 다르나 정말 유별나고도 징그럽고 독한 물건들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도 닮은꼴들이 아닌가 하는 감이 든다.

먼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괴물은 다들 보고 듣고 겪은 그대로 일 것이다.

가까운 이웃에서 전염병 감염 소식을 들으면서 얼굴은 늘 마스크로 감싸고 끈을 단단히 조여야 했다. 요양원에서 죽어나가는 노인들 이야기가 TV에서 쏟아져 나올 때는 머잖아 다가올 인생말기에 다들 저런 취급을 당하겠구나 하는 실감이 스며들곤 했다. 일이 멈추고 수입이 막혀 나라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난감한 처지는 사람들을 속병이 들게 했다. 누구를 만나기도 겁나고,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도 없으니 이게 무슨 징벌이란 말인가.

어느 날 갑자기 차단된 일상 속에서 마치 창살없는 감옥처럼 제한된 반복의 나날은 정신력과 삶의 역량을 불시 점검 당하는 인생 재수시험같은 감이 들 정도였다.

비단 어느 한 사람 뿐이랴. 현재까지 지구상의 220개 국가와 지역에 감염자를 내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내노라 하는 거대 선진국들이 속수무책으로 짓밟혔다. 8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걸려들어 병을 앓고, 그 중에 170여만 명은 목숨을 잃었다. 첨단과학을 동원해 만들어 낸 백신으로 기세가 꺾일려나 했더니 절묘하게도 변종으로 빠져나가려는 지능적이고 끈질기고 교활한 근성을 드러낸 존재.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 기괴한 위력과 파장을 보면, 쩔쩔매는 인간을 향해 분명히 오만한 헛웃음을 치고있을 것이다.

 

대국 미국에서 기행을 일삼은 한 인물 때문에 미국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인이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금세 트럼프를 떠올릴 것이다.

그는 미국이 우선이라며 세계 각국을 압박하고 강짜를 부렸다. 동맹국이라면서도 갈취공갈수준의 예우를 일삼았다. 흑인을 죽인 백인경찰을 두둔하면서 항의시위를 폭동이라고 매도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있는 사실을 없는 것처럼 범벅을 만들어 버리는 억지와 허언의 재주꾼.

그는 마침내 표로 결판이 난 선거마저도 부정·불복하는 막무가내 아집으로 여전히 몽니를 부리고 있다. 국력과 국격과 민주주의의 세계 최고인 나라 국가원수 함량이 그 정도라는 게 믿기는가. 그것도 집단지성이 택했다고 볼 수 있는 선거로 뽑힌 지도자다. 더구나 그런 꼴을 보고, 당하고 겪고 나서도, 미국인의 절반 가량은 여전히 그에게 환호하고, 그래서 그 걸 믿고 버티며 임기 말에 국정을 성깔대로 뒤흔들다니, 과연 미국은 죽어 가는가. 미국인들의 분별력도 그렇지만, 도대체가 공직자와 지도자의 덕목이란 찾아볼 수가 없는 그로인해 분열되어 신음하는 미국은 그리고 불안한 장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농락당한 그 이상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제 세 번째 대상, 한국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 1년여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 말고 나라와 민심을 뒤흔든 존재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좌우를 떠나 국론을 분열시켰고, 국정 최고책임자와 상급자에게 반항하여 공직의 기강을 무너뜨렸다. 국민 대표기관의 검증시스템을 무력화하여 삼권분립 원칙을 침해했다. 국민이 선출한 임명권자에게 도전하여 문민통제를 위태롭게 한 그는 장관급 공직자다. 사상 유례없는 항명과 국정요동의 소란, 거기에 가족비리 의혹을 보는 국민적 원성 만으로도 진작 부덕의 소치로 물러나는 게, 구태여 목민심서를 들출 필요도 없는 상식이고 도리였다. 그런데 그는 이해가 맞아 떨어진 패거리들을 부추겨 자기만의 법치를 외치며 감찰도 거부했다. 입맛대로 수사하고 기소하는 내로남불의 칼을 휘둘러 국가 사정기관을 사조직이나 정당처럼 만들었다. 마치 핍박받는 정의 투사 행세로 대선주자인 양 정치검찰의 상징이 된 그가, 지난 한해 나라와 국민들 가슴을 얼마나 후벼파고 불안케 했던가. 머잖아 트럼프는 퇴장할 것이다. 이제 남은 두 괴물, 제발 코로나 바이러스도, ‘검찰 두목도 망년과 함께 말끔히 사라져, 새해에는 세상에 평화가 충만할 지어다!.     < 김종천 편집인 >

[기쁨과 소망] B.C.와 A.C. 시대

● 칼럼 2020. 12. 26. 12:11 Posted by SisaHan

B.C.A.C. 시대 : Before Corona & After Corona Era

           

서기 2020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연호, A.D.2020년의 기준은 예수님이십니다. 기원 전을 뜻하는 ‘B.C.’‘Before Christ’의 약자이고, 기원 후를 뜻하는 ‘A.D.’는 라틴어로 주의 해를 뜻하는 ‘Anno Domini’의 약자입니다. , 우리가 쓰는 A.D.2020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즉위하신지, 2020년이 되는 해“라는 의미입니다.

연호 A.D.525, 동로마의 수도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당시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도를 계산했는데, 폭군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예수님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연호를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역사적 기준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COVID-19)은 짧은 시간 안에 전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인류의 생활 양식은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도 또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가 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말합니다. 코로나(Corona) 이전을 뜻하는 ‘B.C.’(Before Corona)와 코로나 이후를 뜻하는 ‘A.C.’(After Corona)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A.D.’(After Diseas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코로나 감염증(Corona Disease)가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준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물론 코로나(Corona)가 새로운 연호의 기준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가져다 준 충격이 너무나 크기에, 코로나 사태 이후는 다른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벌써 교회의 예배의 형태가 바뀌고 있습니다. 기존에 지켜왔던 예배의 형식, 방법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대그룹 모임 보다는 소그룹 모임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신앙생활이 단순히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모습이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선교도 바뀌고 있습니다. 매해 방문했던 선교지를 올해는 가지 못했기에, 새로운 선교의 방법을 구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선교 현장을 방문하여 교회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을 전달하기 보다, 선교 현장의 사역자들, 현지인들에 의해 개발된 프로그램과 선교의 방법이 적용되어질 수 있도록 후원교회는 도와가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 시대와 코로나 이후 시대가 어떻게 달라지게될지 예견하기 쉽지 않지만,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를 통해 복음의 파급력이 더욱 강력하게 나타났던 사건을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곳 저곳에서 더욱 강한 영적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고, 교회됨을 지켜가는 교회들이 더욱 많이 나타나고, 선교 현장마다 현지인 사역자들로 말미암아 복음이 더욱 강력히 나타날 것을 기대해 봅니다.

빌라델비아장로교회 김치길 목사


[목회칼럼-기쁨과 소망] 얕은 뿌리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송만빈 목사

노스욕 한인장로교회 담임


캘리포니아 북부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 초입을 자동차로 드라이브해서 들어가다 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자란 레드 우드 군락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레드 우드가 수십 미터 높이로 자라니까 자기 몸을 지탱하고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뿌리 또한 깊이 뻗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겁니다. 식물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뿌리가 그리 깊지 않게 뻗어 있다는 거예요. 이상하죠. 뿌리가 얕으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쉽게 넘어질 것이 뻔한데, 어떻게 수십 미터까지 자랄 있는 것인가요?

비밀을 파헤쳐보았더니,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표면 아래 얕게 뻗은 뿌리가 수십 수백 그루의 나무 사이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뿌리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로를 지탱해 주고, 그래서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도 넘어지지 않고 높이 자랄 있었던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생존 전략인데요.

레드 우드의 생존 전략은 영적으로도 심오한 교훈을 던져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람 사람을 놓고 보자면 신앙의 뿌리가 얕을 있어요. 그래서 약한 바람에도 쉽게 넘어질 있습니다. 하지만 얕은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강한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극복해 나가며 나무로 자라갈 있어요.

에베소서 5:29 보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사도 바울의 언급이 나오는데요.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의 몸을 미워하지 않고 영양분을 공급하며 소중히 여기고 보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에게도 서로 이렇게 사랑할 것을 바라십니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벌써 1년이 되어갑니다. 2 유행을 맞이한 요즈음, 확진자 수는 1 유행 최고점 때보다2 가까이 증가했고 날씨가 추워지면 수치가 얼마나 증가할지 모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최소한 내년 봄까지는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를 제대로 다니고 있는 것은 맞는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맞는지 헷갈립니다. 정신적인 우울증과 함께 영적 우울증을 겪기 쉽습니다. 만약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립되어 버린다면 그래도 믿음의 뿌리가 얕은 우리로선 넘어지기 좋아요.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기도의 끈으로 묶여 있어야 합니다. 조금 신경을 써서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챙겨야 해요. 얕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기에 하늘 높이 자라는 레드 우드 나무처럼, 토론토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과 기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믿음의 거목들로 자라 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