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팩데믹과 더불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아시안 대상 인종차별 혐오 발언과 범죄들에 북미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는 큰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길을 걷다 괜히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안 그래도 이민자로 약간은 주눅 들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지난 16일 미국 아틀란타에서 있었던 4명의 한인이 총 맞아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캐나다라고 크게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제 둘 째 아이도 하루는 동네 trail에서 걷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오던 백인 할아버지가 막 ‘“차이니스 어쩌고...” 하는 욕을 하며 길에서 비키라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듣자 마자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길을 비켜준 둘 째 아이가 되레 미워졌습니다. 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느냐고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진정이 되자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이민 1세대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곳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런 일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서글펐습니다.
이렇듯 아시안 계 혐오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가까이 집안 식구마저도 욕설과 더불어 민망한 일을 당하다 보니 제 ‘마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도 ‘증오’가 꿈틀거림이 감지가 되었습니다. ‘내가 길 가는데 혹시라도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기만 해봐라’ 하며 ‘마음’이 공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어떤 ‘욕’으로 대꾸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연습’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마주치는 ‘백인’의 눈빛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제 눈에도 힘이 들어가 째려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곧 문제 생긴 ‘마음’ 더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위에 인용한 글처럼 말이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찬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지옥임이 분명합니다. 혐오발언과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이 끔찍한 것은 가해자의 ‘지옥’에 함께 빠져버린 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 부분을 성령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도 가해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이미 지옥이 되어가고 있구나!’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말이 참으로 마음의 알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선언합니다.
고로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예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의 표현이요 결정체이십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담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욕’할 기회를 찾고 마음에 증오를 품고 있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내 ‘말’이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변명은 옳지 않습니다.
‘지옥’을 벗어나 ‘천국’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잠언서 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 23:7)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말에 예수가 묻어 나와야합니다.
우리말에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 나와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 먼저 우리 마음이 예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겠습니다.
‘마음’이 천국이 되면 가해자를 향해서도 긍휼히 여김과 그 영혼을 위한 기도마저 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역시 인류 최고의 책이다. 매일을 살아가며 얼핏 떠오르고 때로는 곰곰 음미해 볼 때마다 성경의 ‘적확무오(的確無誤)’함에 감복하곤 한다. 완전하고 흠없는 ‘정확(正確)무오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학적이거나 다른 여러 의미와 평가가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속성과 인간사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 정밀하게 분석 묘사하고 예견까지 한 책은 없다고 여겨져서 그렇다.
수천년 전의 기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현실감은 요즘의 팬데믹 상황에서 시간여행을 하듯 인류의 자화상에 대한 기시감을 던진다.
설령 목회자가 아니어도, 코로나19 재앙에 노아의 홍수를 떠올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전 지구적 재난 가운데 첫 번째가 노아의 대홍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월을 지나며 문득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가 다시 생각났다. 성경에는 2월17일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하고 열흘만인 2월27일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홍수가 물러간 땅에 발을 다시 디딘 날이다.
1년을 넘어선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구촌 창궐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은 꼴 일까.
인간의 무절제한 자연파괴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괴물 바이러스의 출현을 낳았다. 코로나 공포에 쫓겨난 사람들은 속수무책 봉쇄되고 단절된 집안에 격리돼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인간이 머리를 짜내 겨우 백신을 만들었다지만, 코로나 괴물이 순순히 물러갈 것 같지도 않다. 세상은 바야흐로 코로나 전과 후로 구분될 큰 변혁기를 맞았다…그렇게 비슷한 지구 생태계 변전의 계기가 노아의 대홍수였다.
땅의 물이 솟고 하늘이 터진 듯 쏟아져 내린 비가 40일 밤낮을 퍼부어 지구의 높은 산꼭대기가 모두 물에 잠겼다. 세상의 숨 쉬는 것, 하늘과 땅의 살아있는 것들은 모조리 물에 쓸려 죽어갔다. 오로지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과 번식용 암수 동물들만이 살아남은 대재앙이 지구를 덮친 것이다.
세상이 타락하고 인간의 죄악이 만연하자 하나님은 탄식하며 징벌을 결심하고 경고한다. 하지만 방탕에 젖은 사람들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의인인 노아만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방주는 배와는 전혀 달랐다. 모양도 기능도 크기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방수 건조물이었다.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 타운에 가면 노아의 방주를 재현한 거대한 모형이 세워져 있다. 방주는 사람들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자력이 아닌 타력에 맡긴 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돛이나 닻이 없었고, 스크류나 키도 없었다. 창문도 겨우 하나밖에 없는 이상한 배였다. 오로지 신의 섭리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동력장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떠다니는 시체, 추악한 세상을 보아 유익할 일이 없으니 창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려 1백년 동안이나 그런 기이한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조롱했을 것이다. 노아는 오랜 세월 세상의 퇴폐와 질시를 참고 견디며 고독한 믿음의 수행을 계속한 것이다.
노아 일가는 그런 놀라운 믿음으로 천벌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청난 재앙과 축복을 직접 체험했던 아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소문내는 인륜범죄로 저주를 당한다. 그리고 또 얼마가지 않아 언약을 저버린 후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망상에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도 거주지도 산산이 흩어지는 징벌을 받는다. 그 얼마 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어진다.
성서의 사람들 발자취를 보면 어리석은 배반의 반복사를 보게 된다. 언약을 세우고 숱한 기적과 역사로 지키며 인도하는 데도 그들은 하나님 신뢰를 저버리고 거역하며 반역을 일삼는다. 그래서 결국 재앙의 반복을 겪는 고난과 업보의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본질적인 죄성과 기억상실, 그리고 배반의 본능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너희가 최후에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경고했던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신병기를 자랑하고, 우주를 정복한답시고 화성까지 로봇을 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인간들이, 한낱 보이지도 않는 미물의 전염병 조화에 절절매면서도 여전히 겸손할 줄은 모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멀기만 한 백신을 먼저 맞겠다며, 또한 서로 차지하려 꼼수와 억지를 쓰는 이기적 다툼과 탐욕, 나만은 괜찮다며 마스크도 봉쇄도 걷어치우라고 악을 쓰는 오기에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은 드러난다. 이 만인 고통의 시기에 아시안이 싫다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패악질, 동족을 학살하는 미얀마군의 무자비한 쿠데타 만행… 그저 살벌한 생존경쟁에 이기적인 투쟁을 벌이며 날고 기는 그 영리하고 약삭빠른 동물적 본능만이 영원하리니….
아무리 인간의 오만과 사악함의 죄과에 경종을 울려댄다 해도 습성은 바뀌지 않을 테고, 이내 망각하는 반복의 재앙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질 뿐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웃을 일이 아니야. 대중적으로 상당히 어필하는 행보라고 나는 봐. 전문가들이 붙었다고 봐야지.”
대학 연구소에 적을 둔 친구 ‘고 박사’는 유명 정치 컨설턴트까지 거론하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윤 전 검찰총장이 꽤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거다.(음, 내 주변에선 그래도 제일로 가방끈이 긴데, 신뢰해도 될까.)
윤 전 총장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하는 언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이후 중간지대와 보수진영을 아우르며 정치적 위상이 확고해질 것이다, 아니다, ‘검찰주의자’로서 철학의 빈곤과 정치 초짜의 한계를 드러내며 거품이 빠질 것이다, 말들이 분분하다. 정치공학적 분석을 더 얹고 싶진 않다. 그가 야기한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의 훼손에 대해 돌아보고 싶다.
‘윤석열 검찰’이 남긴 가장 큰 부정적 유산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에 전례 없는 거대한 균열을 낸 것이라고 본다. 윤 전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검찰이 추구하는 정의의 본질인 양 제시해왔다. 그러나 민주화된 국가에서 살아있는 권력은 정권만이 아니다. 의석을 분점한 야당, 자율성을 쥔 관료기관도 국가권력을 나눠 갖고 있다. 법적 권위를 부여받진 않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 재벌 등도 빠트릴 수 없다. 오랜 집권을 통해 뿌리내린 검찰·수구매체·보수야당 ‘기득권 동맹’의 총체적 영향력이 정권보다 약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이 모든 다원적 권력의 비리를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수사할 때 검찰의 정의가 작동한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은 특이하게도 정권을 겨냥해 ‘선택적 수사’의 칼을 휘둘렀다. 정권 대상 수사는 하나같이 과잉 수사 논란을 빚었다. 보수야당과 수구매체, 검찰 내부 수사에선 한결같이 봐주기·감싸기 의혹이 불거졌다. 김학의 사건을 뭉갠 검사, 룸살롱 접대를 받은 검사, 위증을 교사한 혐의를 받는 검사들은 대놓고 또는 교묘하게 봐주면서, 김학의 도피 출국을 저지한 소수 검사에겐 가혹한 칼날을 들이댔다. 이 부조리를 ‘선택적 정의’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다. 마치 선택된 일부 영역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선택적 정의’는 사실 ‘총체적 불의’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는 공정과 공평을 본질로 삼는데, 선택적으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 본질을 산산조각 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정의론을 확립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의 기준을 합의하는 방식으로 ‘무지의 장막’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신이 부자인지 빈자인지, 주인인지 노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원칙을 택할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검찰 수사에 적용하면, 특정 대상에게만 가혹한 ‘선택적 정의’란 정의일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야말로 윤 전 총장에게 결여된 철학이다.
게임이론에 ‘최후통첩 게임’이 있다. 어쩌면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정의의 본질을 좇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 둘 중 한명(제안자)에게 10만원을 주면서 다른 한명(반응자)에게 임의대로 금액을 나눠주라고 한다. 제안자가 주는 돈이 얼마든 간에 반응자가 받기만 하면 둘 다 돈을 갖고, 거부하면 둘 다 못 갖는다. 합리적 선택 가설에 따르면, 제안자는 9만원 이상 갖는 게 가장 이익이다. 반응자도 1만원, 아니 100원이라도 받는 게 이익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안자 상당수가 5 대 5를 제시한다. 반응자도 8 대 2 이하 배분 제안은 다수가 거부한다. 뇌과학자들은 불공정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이 금전적 이득마저 걷어차게 만든다고 본다. 사람은 정의가 없으면 불편하게끔 프로그램된 존재일지 모른다. ‘윤석열의 정의’가 왜 그토록 큰 분노를 촉발했는지도 짐작하게 한다.
정의의 원칙을 깬 윤 전 총장이 사회를 통합하고 이끄는 정치의 영역에 착근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격 미달’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자기 나라 군대 작전 통제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2006년 12월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예비역 군 장성을 “직무유기자”라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북한 핵 개발에 북폭론을 제기한 미국의 강경파, 북한 정권 붕괴 등에 대비해 독자적 작전권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노 전 대통령은 천신만고 끝에 2006년 9월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과 ‘전작권 환수 추진’에 합의했다. 그런데 예비역 장성들이 결사반대하자 폭발한 것이다. 결국 2007년 2월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17일에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작권을 환수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주권국 군대의 면모를 갖추려는 결단이었다.
보수세력은 합의를 뒤엎으려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전쟁 억지가 어렵고, 핵우산 보장도 곤란하고, 미군 지원이 불투명하다는 등 온갖 핑계를 동원했다. 한국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비하의 극치였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계기로 2010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2015년 12월1일’로 환수 시기를 3년 늦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초까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과 ‘2015년 전작권 환수’도 거듭 확인했다. 그런데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을 이유로 2014년 10월 미국과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에 합의하며 재연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19일 만인 1950년 7월14일 작전지휘권을 유엔사로 이관했다. 일부 장성이 전선을 이탈한 당시 국군의 현실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을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떠날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1954년 11월17일 한-미 합의의사록 제2항에 “국제연합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위해 책임을 분담하는 동안 국군을 연합사의 작전통제하에 둔다”고 명시했다. 전시·평시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것이다.
국력이 성장하면서 작전권 환수 요구도 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12월1일 60년 만에 평시작전권을 환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석달 뒤인 지난 2017년 8월 국방부 핵심정책 토의에서 “막강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독자적 작전능력에 대해서 아직 때가 이르다고 하면 어떻게 군을 신뢰하겠는가”라고 군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똥별 비판’을 11년만에 소환한 듯했다.
‘임기 내 환수 조건 확보’를 위해 지난 4년간 막대한 국방비를 쏟아부었다. 그런데 지난 18일 한국을 찾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조건을 충족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 임기 내 전작권 환수는 사실상 어렵다는 미국의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에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19일 “진정한 주권국가가 되기 위해선 전작권을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며 “문재인 정부 임기 내 환수가 사실상 어려워졌다면 전환요건을 추상적인 ‘조건’이 아니라 ‘기한’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 때 처럼 미국에 환수 날짜를 못 박자고 요구한 것이다. 서글픈 한국군, 언제쯤 온전한 주권 국가의 군대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