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집어 삼켜 버린 전무후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인간의 일상적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는“자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일상 생활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약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약국에 간다든지, 식료품을 산다든지, 병원에 간다든지 하는 정말로 근본적이고 급박한 일이 아니면 마음대로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그런 심각한 통제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lockdown’ 이나 ‘통행금지’(curfew) 그리고 ‘stay at home’ 같은 행정 명령을 통해 국가와 정부가 사람과의 만남을 통제하고, 외출과 모임을 금지시키니까 곳곳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시위를 하였다. 국가와 정부가 일상 생활을 통제하고 활동을 금지시키니까 화가 난 사람들이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약 2억 4천 5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그 중에 약 500만 명이 사망한 이 위급한 시기에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분노하며 외치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마음껏 누려왔던 자유가 통제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자신들이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는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며 분노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을 통해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현 시점에서 이제 사람들은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를 달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 참된 자유일까?
사실 우리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마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자유에 대한 환상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게도 우리 현대인들은 실제로는 참된 자유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물가가 오를까봐 걱정하며 살아간다. 몰게지 이자를 걱정하고 주식을 걱정하고 집값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오래 사는 건강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건강을 잃어 버릴까봐 염려하고 걱정한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돈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소유한 재물이 사라져버릴까봐 염려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값비싼 감시 시스템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가 실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 대한 감시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안전을 강화하고 범죄를 막기 위한 감시 시스템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과 컴퓨터도 실제로는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 혹은 역량 있는 단체나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사람의 사생활도 다 감시하고 심지어 파헤칠 수 있는 그런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자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갇힌 사람들이 국가와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헛된 자유”이고, “거짓된 자유”이고, “환상적인 자유”일 뿐이다. 그럼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로 울부짖으며 힘을 다해 찾아야 할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의 자유” 이다.
‘침묵하는 다수’(the silent majority)라는 개념은 20세기 전까지는 대체로 망자를 뜻하던 말이었다. 로마 제국 네로 시대의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표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이 세계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많기에 죽음을 ‘다수에게 돌아갔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늘날 사용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내에서는 반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1969년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방송 연설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미국인 여러분”에게 호소했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더 빨리 끝내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종전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 미국인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길 호소하며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을 분란을 만드는 집단으로 왜곡했다.
그렇다면 이 ‘침묵하는 다수’의 실체는 있는가.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에 찬성하는 ‘침묵하는 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반전운동이 못마땅한 사람들에게 침묵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준다. 보수 정치인들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가상의 집단을 언급하길 좋아한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극성스러운 소수가 선량한 다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도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무시당한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는 다수’는 진짜 존재하나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가 지난 19일 부산 해운대갑 당협 사무실을 방문해 당원들에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취지의 전두환 옹호 발언을 했다. 이어 “호남에도 이런 얘기 하는 분들이 꽤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차원을 넘어 호남에도 ‘꽤’ 있다는 언급을 통해 마치 호남에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왜곡시킨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증언하는 목소리, 전두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 여전히 이어지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눌려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5·18기념재단 통계에 따르면 광주항쟁으로 사망한 사람만 260여명에 이른다. 아직도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 생사 확인조차 되지 않은 이들이 많아 원통한 곡성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학살에 대한 증언을 침묵시키는 권력이 있었고, 학살의 당사자인 전두환은 41년이 지나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 후보는 사과를 요구하기는커녕 ‘그것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런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의 산물로 읽힌다. 발언 다음날 그는 페이스북에서 “어제 제가 하고자 했던 말씀은 대통령이 되면 각 분야 전문가 등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해 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썼다. 인재 기용의 모범 사례로 들 만한 인물이 그에게는 전두환이라는 것이다.
발언에 논란이 일어나면 윤 후보는 매번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으며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억울해한다. 그의 사과는 “아무리 ‘아, 이건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국민들께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시면 그 비판을 수용하는 게 맞다”였다. 풀어보자면, 나는 여전히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망언은 정치가 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증오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받고 있어서 자신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다며 억울함을 표한다. 거침없이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발언을 쏟아내는 트럼프는 이들의 입에 자유를 준다.
망언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정치인이 정치적 힘을 가질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사람들이 자꾸만 망언을 듣다 보면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윤리적 감각이 흔들린다. 역사를 왜곡하고, ‘침묵하는 다수’라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결국 혐오 감정을 배설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자의 망언은 윤리적 해방감을 준다.
윤 후보의 출마 선언에서 여러번 중요하게 언급되는 개념이 ‘자유’였다. 모순되게도 보수 정치는 ‘자유’를 좋아한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7월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주기 위해 주 52시간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했다. 윤 후보는 가난한 사람도 부정식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윤 후보와 경쟁하는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는 “부자에게 돈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노동 착취를 자유롭게 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빈곤층을 비하하고, 각종 막말을 하나의 의견처럼 둔갑시킨다. 반면 기득권을 핍박받는 피해자처럼 묘사한다.
현재 홍 후보와 윤 후보는 서로 ‘망언 리스트 25건’과 ‘막말 리스트 25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2017년 대선에서도 홍 후보의 말이 수시로 문제가 되어 당시 민주당 캠프에서 ‘홍준표 후보의 10대 막말’을 선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막말 정치인으로 꼽히던 홍 후보가 뱉은 수많은 발언이 잠시 가려질 정도로 윤 후보는 분야별로 부지런하게 망언의 기록을 쌓는 중이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주고받은 망언과 막말로 타격을 받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의 말 속에서 난타당하는 노동자, 여성, 호남 사람 등이다. 죽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침묵당하는 다수가 아닌가.
‘뻔뻔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자주 입가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세상사 곳곳에서 뻔뻔한 사람과 뻔뻔한 일들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요사이 특히 갈등이 심해지고 격렬해진 정치판의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탄식이 잇달아 나온다.
‘뻔뻔하다’의 사전적 풀이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염치’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체면’은 “남을 대하는 도리”이다. 얼굴 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도 같은 말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거나 “철면피한 사람”이라는 말들 역시 표현의 차이일 뿐, 뻔뻔과 다를 바가 없다.
애완견을 기르는 이들은 강아지도 잘잘못을 아는 염치가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인간이 후안무치라면, 개만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온갖 거짓과 허풍으로 지구촌에 ‘뻔뻔한 것도 처세술이고 무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던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여전히 입심이 펄펄하다. 일본 정치를 주무르며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판 대표적 뻔뻔 인물 아베 전 총리.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그들에 못지않은 뻔뻔함을 뽐낸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겠다는 연방경찰과 대법관을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여성 국회의원에게 “강간하기엔 너무 못생겼다“고 막말을 뱉어낸 인물. 그는 코로나19 대응 잘못으로 6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데다 경제마저 망친 원흉으로 탄핵요구가 130번이나 나왔지만, ”펜으로도, 판사 결정으로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고 버텨 선량한 브라질인들을 울분케 한다.
한국은 다른가? ‘K문화’의 열풍이 무색한 최고반열의 뻔뻔인사들이 뒤질세라 설쳐댄다.
상관인 참모총장에게 총을 겨눠 반역하고 수하 무리들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 주역 전두환은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다. 그가 법의 심판과 국민적 단죄를 받긴 했지만, 40여년 지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죄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재산 29만원’등의 뻔뻔한 단어만 맴돌 뿐이다.
그런 뻔뻔한 자를 칭송하는 ‘더 뻔뻔한 자’가 나와 다시 국민적 분노를 돋우고 있다. “전두환이 5.18과 쿠데타를 빼고는 정치를 잘했다”고 추켜세운 망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전 검찰총장이다. 현직을 그만 두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어 검찰과 정치 모두에 오물을 덧씌우고도 그의 뻔뻔한 언행의 행로는 그칠 줄을 모른다. “배울 점이 있다는 취지였다“며 해명이랍시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수준이하 본질과 감출 수 없는 본색은 ‘뻔뻔 일지’에 추가될 때마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곤혹스럽다.
그는 수많은 가족비리와 의혹의 증거에도 ”음해”라고 강변한다. 검찰총장 재임 중 대통령 인사권을 무시하고, 항명을 일삼은 언행을 국민들이 똑똑히 보았는데도 “정권에 맞섰다”고 호도한다, 검찰권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들, 법무부의 징계가 부족할 지경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황당하다고 되레 발끈했다. 손바닥 ‘왕’자 소란과 주변 주술인들 증언에도 “옆집 할머니” 운운 우겨댔다. 오히려 다른 대통령 후보들의 ‘눈에 티’를 맹공하는 그에겐 자신의 눈 속 ‘들보’가 뻔뻔의 훈장인 것인지, 단 한 번도 잘못이나 사과를 입에 올린 적이 없으니 참 뻔뻔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노라고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하와도 마찬가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들러댄다. 자기들 잘못은 없다는 뻔뻔의 원조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의 원죄는 아들 가인에게로 흘러 동생을 쳐죽이는 살인죄로 발전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문책에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죄에 무감각한 채 도리어 왜 나를 지목하느냐는 뻔뻔함의 전형을 드러낸다.
그렇게 ‘뻔뻔’의 역사는 인류사와 함께 해왔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뻔뻔한 자들은 항상 죄와 악의 편이요, 거짓과 어둠과 불의의 세력이며, ‘트러블 메이커’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빛과 진실, 양심과 선과 정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뻔뻔의 두꺼운 장막 뒤에 숨어 내로남불-아전인수의 변명과 궤변을 찾는 공통점이 있다. 선을 악으로 이기려다 보니 본질 흐리기, 물타기, 되치기 등 온갖 사악한 수법을 동원하고, 갈등과 이간질,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완력의 발버둥을 친다. 친일 매국노들, 쿠데타 독재일파, 국정농단 세력이 그랬다.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만 보아도 거의가 뻔뻔한 인물들이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의 도조 히데끼를 비롯한 전범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이나 배후의 스탈린 같은 인물들….
뻔뻔한 자들의 실체를 모르면 불행과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체를 알고도 방관하거나 환호하면 평화와 정의를 거스른 역사의 죄인들이 된다. 그들을 옹호하며 즐기는 세력의 교활한 속셈 또한 알아내고 경계하지 않으면 큰 낭패와 곤욕을 치르게 된다. < 김종천 편집인 >
저는 지금 조약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숫가에 앉아 있습니다. 평화스러운 수평선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조금 전 산에서 내려올 때 떠오르던 단상을 문득 편지로 부치고 싶었답니다.
지난여름 따갑게 내리쬐던 태양 아래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아픔 그 자체였지요. 탈레반에게 무참히 총살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시민들, 미 캘리포니아와 B.C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던 산불, 그리고 허리케인…독서나 글 쓰는 일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더랬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무색할 만큼 잔인한 계절에 아무 대처할 힘도 없던 피해자들…그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도 도움의 손길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그 ‘인류애’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런저런 고통의 사연을 접할 때마다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고, 내 주변의 친구들과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가게에 매일 들르는 용접공이 있어요. 그는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작업장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일해요. 늘 후줄근한 모습이지요. 토론토에서 해밀턴까지 버스로 직장을 다닌다고 해요. 퇴근 시간에 들러서 빵이나 캔 참치 또는 파스타를 사곤 하지요. 새벽에 갔다가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이 노총각에게 “ 당신 같은 용접공이 있어서 든든해요. 내 손자 만한 꼬마들이 뛰어 놀 안전한 그네를 만들어 줄 테니까요“ 라고 말하면 그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지요. 또 부부가 의사인 집에서 그들의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아주는 유모에게, 그녀 덕분에 마음 놓고 자녀를 맡긴 의사 부부는 환자들 치료에 더 매진할 수 있을 거라고 귓속말을 해준답니다. 무거운 운송 물품을 어깨에 지고 오는 배달부에게도 물 한 병 건네주면서 행복을 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소소하지만 드러나지 않게 필요한 일을 해주는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지에, 그래서 나 역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산을 찾아가는 사람이 산 앞에 겸허한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산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산을 정복하려고 드는 걸까요? 난 ‘정복’ 이라는 단어를 몹시 싫어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정복해야 하나요? 그 단어보다는 ‘공동 작업, 혹은 협업(collaboration)’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달라지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세상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가 내내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감화시키는 인풀루언서(influencer,영향력자)들입니다.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유명 강사가 아닐지라도, 정직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노동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정신은 고고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사랑하는 그대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스펙을 쌓느라 으스대는 일도 없고, 자본주의 이윤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그저 나누어 줄 줄만 아는 그대들, 이제 열매를 거두는가 하면, 이파리를 떨구고 가벼워지는 법을 깨우친 그대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미숙하기만 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 -Albert Camus/ *모든 낙엽이 꽃으로 보일 때에야 비로소 가을은 제2의 봄이 되는 것이다” - 앨버트 카뮈(*필자의 의역)
떨어져 뒹구는 낙엽까지도 꽃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다면, 스산한 가을도 새로운 봄의 계절이 된다는 말이겠지요? 많은 사람이 긴 팬데믹에 지쳐서 우울하다고들 하네요. 누군가를 위해 한 가지 일이라도 도와주라고, 그리운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이라도 쓰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10월은 누군가에게 안부 편지를 쓰고, 감사를 전하고, 또 용서받고 싶은 달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