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나라 망치는 언론과 교회의 타락

● 칼럼 2021. 11. 30. 07:4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언론이 사익추구와 수구 카르텔 정파의 도구로 전락

무속신앙 논란에도 무감각한  기독교 심각한 세속화


[한마당 칼럼] 김종천 편집인

 

 

임박한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국가의 명운과 흥망성쇠, 나아가 국제질서와 국내외 동포들 삶에도 크고작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후보자들의 소신과 품성, 이력과 역량 등을 검증하는 이유도 다름 아니다.

한국의 커진 위상을 보여주듯 이번 20대 대통령 선거는 세계 각국과 언론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세계 유수의 신문과 방송에는 한국 대통령 후보 윤석열 씨와 그 부인 김건희 씨의 무속논란을 비롯해, “(비판 언론을) 손 봐주겠다.” “(의혹 제기자들을) 청와대에 가면 감옥에 집어 넣겠다,” “미투는 돈을 안 준 때문”이라는 등의 발언 내용이 보도돼 국내외 한인들의 낯을 뜨겁게 했다.

 

세계 10위권의 국력과 상당 수준의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선진국’에서, 더구나 21세기 IT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 부부가, 원시적인 주술신앙과 샤머니즘에 빠져있다는 사실, 여성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천박한 인식, 거기에 비판을 수용할 줄 모르는 독선·독재적 성향과 보복심리를 은연중 드러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이해되지 않는 현상은 그런 후보자가 국내에서 지지율 1위를 다투고 있고, 다수 언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별 일이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독선과 보복도 괜찮다는 것인지. 자신과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칠 국정운영과 국가의 운명마저 역술가나 점쟁이 무당에게 의지하는 것도 상관없다는 의식수준들인 것일까.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과 그 부인이 반 인권적이며 언론자유를 무시하는 듯한 사고방식을 드러낸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지만, 일상의 길흉과 처신을 이른바 ‘도사’나 ‘법사’의 말에 의지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습벽이 몸에 배어 있다면, 정말 불안하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말의 요승 신돈, 제정 러시아를 몰락시킨 라스푸틴의 사례를 들 것도 없다. 바로 ‘최순실’의 전횡과 박근혜 탄핵만으로도 그 위험성은 증명되고도 남는다.

 

윤 후보는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나와 조롱과 의심을 사더니, 신천지 압수수색 거부와 라이벌의 대권도전 여부, 공직 사퇴결정 등은 물론 토론날짜 택일까지 그들 주변의 여러 점술가들에게 의존했다는 소문이 무성히 나돌며 ‘무당정권’을 경고하는 소리가 심각하다. 더구나 김건희 씨는 자기가 후보인 것처럼 말하며 “내가 정권을 잡으면~”을 장담했다니, 그런 ‘부부정권’이 국가 최고권력을 쥐고 흔든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며,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주술부부가 과연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과 의미를 알기나 할까. 만에 하나 청와대에 들어간다면 ‘무속과 국정의 분리’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미 그들 일가는 검찰권력을 해결사로 삼아 갖가지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 왔다는 이른바 ‘본(인) 부(인) 장(모)’ 의혹도 따라다니고 있는 상태다.

 

한국의 다수 메이저 신문과 방송은 이런 불길하고 엄청난 걱정거리를 덮어버리고 오히려 인물 포장과 미화에 급급하다. 거의 무제한인 언론자유에 비례하지는 못할망정 거꾸로 신뢰도 세계 최하위권인 자신들 처지를 증명하려는 듯, 언론의 사명과 본분은 저버린 채 경쟁적으로 사익추구와 수구 카르텔 정파의 도구로 전락한 보도행태가 탄식을 자아낼 뿐이다.

 

거기에 더더욱 불가사의인 것은, 무속신앙 논란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한국의 기독교계다. 일부 교단과 NCCK, YMCA 등 단체, 정의구현사제단과 신학자들의 메아리 없는 경고의 외침이 들릴 뿐, 소위 대형교회와 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무반응이거나 되레 그런 후보를 감싸고 영합하는 기상천외한 모습들을 보여 아연실색이다.

 

십계명부터 떠올린 교인이 한 두명 일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부터, 어떤 형상의 우상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삼 계명까지,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라는 준엄한 신앙지침은 헛구호란 말인가?.

 

교회는 조상에게 절하는 제사조차도 금기시 한다. 단군상을 훼손하고 불교사찰을 찾아가 땅밟기 하는 극성 신도들도 있다. 그렇게 극진한 신앙심들은 다 어디에 묻어둔 것일까. 주일마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에덴을 쫓겨난 원죄부터, 우상을 섬김으로 징벌이 반복된 불신앙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며 다만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쳤다. 귀신들린 아이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질타하며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탄식했다.

 

의인이 한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을 용서하겠다는 성경말씀도 있다. 비록 세상이 혼탁해도 기독인들이 투철한 영적 분별력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한다면, 어찌 그 사회가 ‘지옥을 향한 묻지마 질주’를 하겠는가.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발표한 신학자들의 꾸짖음은 맘몬주의와 세속에 물들어 손가락질 당하는 한국교회와 ‘삯꾼’들을 향한 매서운 회초리로도 들린다.

“교회와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묵과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지와 연대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으니 그들의 신앙은 얼빠진 것이고, 그들의 신은 사실상 우상임에 틀림없다.…그들은 성경을 헛 읽었고, 기독교 신앙을 크게 오해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리고,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 행동하고 있다”         < 김종천 편집인 >

 

  "내로남불 먼저 시인하고 사죄하라"

[한마당] 공정과 정의의 이중 잣대

 

 

오스카상을 거머 쥔 ‘기생충’에 쏠린 찬사와 ‘오징어 게임’ 열풍, 그리고 ‘BTS’(방탄소년단)의 폭발적 인기 등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근래 세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 급등과 선망은 “우리가 언제 이렇게 덩치가 커졌지?“하는 상전벽해의 뿌듯함을 자아낸다.

 

그런데 왠지 어색함이 뒤따른다. 국력이 커진 만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는 게 당연할 테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자랑과 대단한 것들만 내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여전히 미숙하고 모자라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결함도 한 둘이 아니어서 어설픈 선진국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이 앞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민주주의 쟁취의 민권승리를 일궈냈음에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판의 풍경들은 한국의 아킬레스건이요 지극히 후진적인 모습의 대표격이다.

전례없이 세계적 화젯거리로 등장한 대통령선거가 그걸 말해준다. 쿠데타가 사라진 민주적 선거와 평화적 정권교체 정착, 대선 결과가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 분석 등에 쏠린 눈길이라면 감지덕지일 텐데, 속사정은 그런 게 아니라 가십(gossip)과 낯뜨거운 조롱이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후보자로 나선 여야 유력 인물들의 독특하고 비정상적인 이력과 캐릭터, 거기에 배우자를 둘러싼 온갖 추문과 풍설이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연유다.

 

화제의 주역 이재명과 윤석열은 벌써 글로벌 인물로 부상했다. 정책경쟁과 국정능력에는 눈감은 치열한 네거티브도 난무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후보의 상반되는 면모와 대처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명암과 취약한 정치현실을 읽는다. 소위 보수와 진보를 대하는 국민들의 선입견과 현실의 괴리도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본다

 

이재명 후보는 ‘개천에서 용’이 된 변방 출신이다. 그는 이른바 ‘형수 욕설’과 ‘여배우 염문’ 등에 ‘대장동’ 의혹과 ‘아들 리스크’가 이어지며 고전한다. 여전히 불신의 눈으로 보는 이들도 많지만 적극적인 해명과 사과, 그리고 법원 무죄판결에 헛다리만 짚는 검찰수사까지 이어지면서 상당히 희석된 듯하다. 화전민 출신의 불우한 가정사와 역경 속의 삶에 몸부림치며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입지전적 성공신화를 일군 의지와 저력이 뒤늦게 알려진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는 건 많은데 말이 많다 바꾸기를 잘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반면 윤석열 후보는 부유한 집안이 배경인 검사출신이다. 흔히 ‘칼잡이’라는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어 총장까지 됐지만, 자신을 발탁한 정권과 상관에 대한 우직한 배신과 항명으로 뜻하지 않게 대선후보 반열까지 올랐다. 문제는 이른바 본인·부인·장모를 뜻하는 ‘본부장’ 리스크의 심각성이다. 본인은 검찰의 정치중립 파괴에다, 재임 중의 숱한 선택적 수사와 내 사람 봐주기에 ‘고발사주’, 법원의 ‘징계 판결’ 등 부적격 논란이 거세다, 현재 재판 중인 장모 관련 비리 의혹들에 특히 부인 김건희 문제는 양파껍질 같아서 더 심각하다. 결혼 전후의 사생활 논란과 주가 조작 연루설, 스폰서 특혜 등 이권 의혹에다, 무려 18건에 달한다는 학경력 위변조는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혐의도 나온다. 어쩌면 투표 날까지 사상 처음 부인없이 혼자만 뛰는 후보로 두고두고 회자될 지도 모르게 생겼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기획이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사과에 인색하다. 이들 일가의 수많은 추한 행태에도 어떻게 대선 후보로 살아남는지가 불가사의일 정도인 한국 정치와 민도(民度)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윤석열 후보의 경우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 정의’란다. 불공정과 불의한 세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솔깃한 말이지만, 스스로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사람의 외침은 공허한 말잔치요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도 들먹여진다. 그가 특수통 검사로 독하게 수사했던 사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호출된 2007년의 ‘신정아 사건’은 그의 처 ‘김건희 의혹’의 도플갱어이고 빼박이다. 조국 사건의 ‘표창장’문제도 들먹여진다. “정경심이 4년 징역이면 김건희는 몇 년이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로남불’ 부메랑이라는 비아냥도 강하다.

 

어느 후보든 설령 당사자에게 흠결이 있고 배우자의 심각한 치부가 드러난다 해서 대통령이든 영부인이든 못할 것이야 없다. 하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감싸안고 남의 눈의 티끌만 호되게 매질하는 허울좋은 공정과 정의라면 선량한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하고 국가권력 조차 사유물로 여길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비리와 의혹 투성이 후보가 우매한 군중들로 인해 대통령이 된다한들 어쩌랴!. 판단과 선택은 국민의 몫이다. 혜택을 누리는 것도, 피해를 입고 눈물을 삼키는 것도 결국은 다수 국민이다.

 

그래도 하나만 강권한다. 열심히 뛰어 대통령이 되라. 다만 전제가 있다. 대권을 그렇게 쥐고 싶거든, 제발 ‘내로남불’을 시인하고 사죄하라. 가족 누구든 비리와 범죄 혐의라면 인정하고 스스로 징벌을 요구하라. 그러면 그저 나리들의 하는 꼴을 지켜보며 먹고살기에 바쁜 범생이들은 잘난 놈들 세상만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한마당] 업보는 비켜가지 않는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것들 중 하나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 때문이다. 흔히 말들 하듯이 대개 선하고 착한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드물다. 처세에 능하지 못해 높은 자리나, 이른바 ‘황금보직’에 가기가 어렵다. 무슨 이유인지 빨리 죽는 사람들도 많다. 거꾸로 악행과 술수에 능하고 위선으로 포장한 자들이 승승장구 출세하고, 돈 잘 벌어 부귀영화와 장수까지 누리니, 복 받은 인생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도 선한 자의 불행과 악한 자의 형통에 대해 거론하는 부분이 여럿 있다. 가령 시편(73)을 보면 악인들이 잘되는 모습이 이렇게 그려진다.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입는 옷이며…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이런 부조리를 접한 시편기자는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헛되고 헛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 것을 깨우쳐 준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옷깃을 여미고 고인을 추모하는 게 상례지만, 엊그제 90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전두환은 사후에도 온갖 욕설과 수모를 당하고 있다. 바로 ‘악인의 형통’을 누린 자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를 때까지는 그야말로 영광스런 삶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인생의 내리막 길에는 고통과 저주가 밀려들었다. 어쩌면 그의 잘못된 인생행로로 인해 후손들마저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운 불행한 가문으로 전락해 버린 건 아닐까.

우리는 그의 경원당하는 쓸쓸한 죽음을 목도하며 한낱 ‘권불십년(權不十年)’에만 그치지 않는 많은 삶의 교훈들을 떠올리게 된다. 본분(本分)을 망각하면 쓴물을 들이켜야 한다는 것,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원한과 갈등을 만들면 복수의 저주가 따른다는 것, 자신의 악행을 분별하거나 참회할 줄도 모르는 철면피야말로 어리석은 최악(最惡)이라는 것, 죄악(罪惡)의 업보는 틀림없이 져야한다는 것, 악인의 형통은 신기루와 같다는 것….

그가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으면 말년도 편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의 탐욕과 오판의 유혹에, 가서는 안될 길, 해서는 안될 권력도박의 불판으로 내달렸다. 군인의 기개와 오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민주주의 시민정신을 총칼 압제로 찍어 누르려다 역사에 상흔을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 피눈물을 쏟게 했다. 그렇게 역사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와 남긴 상처는 심히 위중하고 오래 갈 것이다.

 

자고로 사람들에게 한을 남긴 자들, 세상에 갈등과 대립을 불러일으킨 자들의 말로가 행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해악이 깊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설령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린다 해도, 그들의 죄과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3~4대 자손까지 이른다는 성경의 경고는 그래서 두렵다.

한반도를 짓밟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일본이 갈수록 쇠락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이 조선 땅에 남긴 깊은 상처는 오늘까지 분열과 갈등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 그 원한과 저주가 영혼과 심장을 옥죄지 않겠는가.

우리 역사만 보아도 수많은 사례가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나중 함흥차사의 수모를 겪었고, 5백년 왕조라 하나 분란이 끊이지 않다 망했다. 세조의 경우 동생 안평·금성대군과 조카 단종, 김종서 등 충신을 죽이고 셀프 등극했다가 원혼의 저주와 질병으로 고통 중에 단명했다. 가까이는 부하의 총탄에 죽은 박정희의 비극에, 권력 앞잡이로 생사람을 잡았던 검찰주의자의 외아들이 비명횡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사치의 길을 벗어나 나라를 통째로 밑천 삼으려던 이명박의 거짓과 위선은 철창으로 귀결됐다. 아버지 후광과 아첨 친위 카르텔의 위장술 덕에 권좌에 오른 박근혜의 말로 역시 불행하기 그지없다.

 

전두환의 죽음을 보며 이 시대를 사는 모두가 되새길 일이다.

본분을 저버린 탐욕, 민심과 천심을 거스르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 원한과 갈등을 만들고 남기는 자, 분별과 참회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복수와 저주가 뒤따르며 악행의 업보는 결코 비켜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무엇보다 거짓과 위선이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으며, 악인의 형통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1500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 칼럼 2021. 11. 3. 02:1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1500자 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임순숙 수필가

 

크리스마스를 불과 일주일 여 앞둔 오늘, 이곳엔 온종일 눈이 내렸답니다.

예전 같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즐거워했겠지만 녹록하지 않은 현실 앞에 한없이 마음이 가라 앉는군요. 어느날 갑자기 밀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욕심내기보단 현 상태로 유지되기를 염원하며 자신을 다독였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라 안팎 소식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눈발이 옅어질 무렵 저녁산책에 나섰습니다. 차가운 눈바람에 간간이 휘청거리긴 했어도 폐부 깊숙이 박히는 상쾌함은 집안에서의 우울했던 기분을 전환시켜 주어 그런대로 좋았답니다. 집집마다 개성 껏 멋을 부린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과 소담하게 쌓인 눈과의 조화로움에 한동안 감탄하다 말고 그 마음조차 깊은 고요함에 함몰되었지요. 가가호호 현란한 불빛은 내걸었지만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난제에 빠져있을 이웃들의 고뇌가 눈바람 속에 실려오는 듯 했으니까요.

적적한 동네의 길모퉁이에서 홀로 눈을 치우고 있는 이웃 주민을 향해 다소 과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염원하는 2022년 4월의 그 길도 누군가 힘있게 열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명치끝까지 올라왔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공통의 길이 있지요. 쉼 없이 온몸으로 기도하게 하는 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정을 쌓았지요.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미주네 가족과 모처럼 푸짐한 한식으로 석식을 함께했던 어느 저녁, 그리고 아껴두었던 누룽지를 서슴없이 꺼내어 아침 식사를 준비한 Mr. 우 부부의 지극한 배려로 인해 만시야에서의 강행군에 큰 힘이 되었지요. 그런 따뜻한 두 가족 옆에서 우리부부는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 돌아보니 늘 부족하여 미안함만 가득하군요.

비, 바람, 추위 등 자연의 온갖 심술을 길 위에서 겪어낸 후,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우뚝 서던 그날의 감격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런지요.

 

우리 부부는 800 km 프랑스 길을 완주하고 돌아와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병명도 모른 채 그쪽만을 바라보며 한동안 그리움을 키웠지요. 얼마 후에야 그곳을 다녀온 경험자들에 의해 우리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일컬어 까미노 블루(Camino Blue) 환자라고 불리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밖에서 길들여진 길을 일상에 들여놓고 하나의 그리움으로 애닯아 하는 현상을 일컬음이라는군요.  

 

프랑스 길을 다녀 온 일년 후, 우리부부는 ‘까미노 블루’ 환자임을 핑계삼아 여러갈래 순례길 코스 중 가장 어렵다는 북쪽길(El Camino Norte de Santiago)을 택했지요. 더 멀고 더 긴 시간동안 비우고 다스리기를 거듭하며 고행을 자처한 끝에 드디어 까미노 블루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실행에 옮기자구요. 그래서 또 거룩한 계획을 세웠답니다. 2022년 4월엔 은의 길( Via de la Plata),  장장 1,000 km 넘는 길에 감히 도전장을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르퓌에서 출발하기를 희망하는 Mr. 부부, 언제든 출발 날짜만 알려달라던 미주 아버지, 언젠가 그때처럼 위에서 만나지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우리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라는 난적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까미노: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줄여서 까미노라 함.

-알베르게: 순례자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

 

[1500자 칼럼] 가을비와 감자탕

 

임순숙 수필가

 

곱게 물든 단풍을 제대로 품어보기도 전에 얄궂은 가을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기나 긴 겨울을 탈없이 지내려면 활화산 같은 풍경화 몇 점 정도는 가슴 속에 저장해야 하련만,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단풍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계절 막바지에서 야외 나들이를 계획했다가 일기관계로 접고 나니, 뜰 안 가득 내려앉은 물먹은 낙엽처럼 마음도 침울해진다. 이런 때 일수록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일거리를 궁리하다가 예정에 없던 감자탕을 떠올리며 인근의 중국마켓으로 향했다. 매장엔 때이른 아침녘인데도 다른 날보다 더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처럼 애궂은 날씨 때문에 일정을 우회한 이들이 아닐까 단언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나의 쇼핑 카트가 그득해졌고, 침울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요리할 즐거움에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두툼한 살고기가 붙은 돼지 등뼈는 핏물을 뺀 다음 스토브에 올리고, 제철에 손질하여 저장해둔 우거지와 고사리, 깻잎 등을 냉동고에서 꺼내어 해동시킨다. 대부분의 한식이 그렇지만 감자탕은 특히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평소엔 이틀에 걸쳐 끓이기 일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기꺼이 끝을 보려 안간힘을 쓴다.

 

주먹만한 감자 여섯 개를 골라서 껍질을 벗긴다. 순간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의 감자가 따끈하게 폐부를 파고 드는 듯 하다. 감자탕에서 빠지면 섭섭한 노란 감자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오묘한 맛으로 고기와 야채 틈새를 파고 들며 늘 존재감을 과시한다.

한때 감자탕의 ‘감자’는 돼지 등뼈 부위를 지칭한다고도 했고, 또는 고깃국에 감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애매모호한 돼지등뼈와 감자의 관계, ‘감자탕’이란 이름의 어원이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가지 설만 난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돼지뼈가 음식의 주재료로 쓰이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해 감자를 내세웠다는 설과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뼈 우린 국물에 감자를 넣어 끓여 먹었다는 설이다.

또한 ‘감자탕’은 영어명에서도 혼돈을 초래한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명칭과 실제요리가 매치가 되지 않아 해외 유튜브 등에서는 Pork Bone soup 으로, 국내에선 Pork back-bone stew 를 표준화된 명칭으로 표기한다.

평범한 하나의 음식에 엄청난 사례와 관심, 끊이지 않는 변화와 발전은 그만큼 대중의 사랑이 깊다는 의미이리라. 감자탕의 주인공이 돼지 등뼈면 어떻고 감자면 또 어떠하리.

 

누릇한 돼지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고기 솥에 잘 익은 된장을 넉넉히 풀고 주인공이라 자처하는 감자들을 제일 먼저 투척한다. 연이어 준비된 배추 우거지와 고사리, 버섯 등 각종 채소들을 차례대로 들이밀며 화력을 조금 높이면, 금방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는 화합의 율동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뭐니뭐니 해도 감자탕 최후의 화룡점정은 넉넉한 마늘과 들깨 가루 그리고 쭉쭉 찢어 넣은 대파가 아닐까.

 

투박한 질그릇에 김이 풀풀 나는 감자탕을 그득 담아 식탁을 차렸다. 국그릇을마주한 가족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해 보인다. 가을비 질척이는 저녁,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단풍이 지건, 기나긴 겨울이 문앞에서 서성이건 이젠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닌 듯 하다.   

[목회 칼럼] 참된 자유

● 칼럼 2021. 11. 3. 02:1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쁨과 소망]  참된 자유

 

박원철 목사 / 늘사랑교회 담임목사

 

   지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집어 삼켜 버린 전무후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인간의 일상적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는“자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일상 생활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약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약국에 간다든지, 식료품을 산다든지, 병원에 간다든지 하는 정말로 근본적이고 급박한 일이 아니면 마음대로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그런 심각한 통제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lockdown’ 이나 ‘통행금지’(curfew) 그리고 ‘stay at home’ 같은 행정 명령을 통해 국가와 정부가 사람과의 만남을 통제하고, 외출과 모임을 금지시키니까 곳곳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시위를 하였다. 국가와 정부가 일상 생활을 통제하고 활동을 금지시키니까 화가 난 사람들이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약 2억 4천 5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그 중에 약 500만 명이 사망한 이 위급한 시기에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분노하며 외치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마음껏 누려왔던 자유가 통제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자신들이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는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며 분노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을 통해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현 시점에서 이제 사람들은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를 달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 참된 자유일까?

  

사실 우리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마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자유에 대한 환상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게도 우리 현대인들은 실제로는 참된 자유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물가가 오를까봐 걱정하며 살아간다. 몰게지 이자를 걱정하고 주식을 걱정하고 집값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오래 사는 건강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건강을 잃어 버릴까봐 염려하고 걱정한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돈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소유한 재물이 사라져버릴까봐 염려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값비싼 감시 시스템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가 실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 대한 감시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안전을 강화하고 범죄를 막기 위한 감시 시스템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과 컴퓨터도 실제로는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 혹은 역량 있는 단체나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사람의 사생활도 다 감시하고 심지어 파헤칠 수 있는 그런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자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갇힌 사람들이 국가와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헛된 자유”이고, “거짓된 자유”이고, “환상적인 자유”일 뿐이다. 그럼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로 울부짖으며 힘을 다해 찾아야 할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의 자유” 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망언 정치가 권력을 얻으면 민주주의는 망한다

● 칼럼 2021. 10. 30. 02:3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끝나지 않은 학살의 기억’…망언이 권력을 얻을 때 민주주의 위협

윤석열의 실언, 실수인가 신념인가

전두환 옹호에 부마항쟁 논란까지

망언으로 지지자를 결속하는 정치

혐오배설자에게 윤리적 해방감 줘

 

이라영의 비평_망언 정치

 

이라영_ 예술사회학자.

 

‘침묵하는 다수’(the silent majority)라는 개념은 20세기 전까지는 대체로 망자를 뜻하던 말이었다. 로마 제국 네로 시대의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표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이 세계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많기에 죽음을 ‘다수에게 돌아갔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늘날 사용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내에서는 반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1969년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방송 연설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미국인 여러분”에게 호소했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더 빨리 끝내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종전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 미국인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길 호소하며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을 분란을 만드는 집단으로 왜곡했다.

 

그렇다면 이 ‘침묵하는 다수’의 실체는 있는가.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에 찬성하는 ‘침묵하는 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반전운동이 못마땅한 사람들에게 침묵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준다. 보수 정치인들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가상의 집단을 언급하길 좋아한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극성스러운 소수가 선량한 다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도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무시당한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는 다수’는 진짜 존재하나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가 지난 19일 부산 해운대갑 당협 사무실을 방문해 당원들에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취지의 전두환 옹호 발언을 했다. 이어 “호남에도 이런 얘기 하는 분들이 꽤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차원을 넘어 호남에도 ‘꽤’ 있다는 언급을 통해 마치 호남에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왜곡시킨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증언하는 목소리, 전두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 여전히 이어지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눌려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5·18기념재단 통계에 따르면 광주항쟁으로 사망한 사람만 260여명에 이른다. 아직도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 생사 확인조차 되지 않은 이들이 많아 원통한 곡성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학살에 대한 증언을 침묵시키는 권력이 있었고, 학살의 당사자인 전두환은 41년이 지나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 후보는 사과를 요구하기는커녕 ‘그것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런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의 산물로 읽힌다. 발언 다음날 그는 페이스북에서 “어제 제가 하고자 했던 말씀은 대통령이 되면 각 분야 전문가 등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해 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썼다. 인재 기용의 모범 사례로 들 만한 인물이 그에게는 전두환이라는 것이다.

 

발언에 논란이 일어나면 윤 후보는 매번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으며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억울해한다. 그의 사과는 “아무리 ‘아, 이건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국민들께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시면 그 비판을 수용하는 게 맞다”였다. 풀어보자면, 나는 여전히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망언은 정치가 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증오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받고 있어서 자신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다며 억울함을 표한다. 거침없이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발언을 쏟아내는 트럼프는 이들의 입에 자유를 준다.

 

망언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정치인이 정치적 힘을 가질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사람들이 자꾸만 망언을 듣다 보면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윤리적 감각이 흔들린다. 역사를 왜곡하고, ‘침묵하는 다수’라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결국 혐오 감정을 배설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자의 망언은 윤리적 해방감을 준다.

 

윤 후보의 출마 선언에서 여러번 중요하게 언급되는 개념이 ‘자유’였다. 모순되게도 보수 정치는 ‘자유’를 좋아한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7월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주기 위해 주 52시간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했다. 윤 후보는 가난한 사람도 부정식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윤 후보와 경쟁하는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는 “부자에게 돈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노동 착취를 자유롭게 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빈곤층을 비하하고, 각종 막말을 하나의 의견처럼 둔갑시킨다. 반면 기득권을 핍박받는 피해자처럼 묘사한다.

 

현재 홍 후보와 윤 후보는 서로 ‘망언 리스트 25건’과 ‘막말 리스트 25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2017년 대선에서도 홍 후보의 말이 수시로 문제가 되어 당시 민주당 캠프에서 ‘홍준표 후보의 10대 막말’을 선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막말 정치인으로 꼽히던 홍 후보가 뱉은 수많은 발언이 잠시 가려질 정도로 윤 후보는 분야별로 부지런하게 망언의 기록을 쌓는 중이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주고받은 망언과 막말로 타격을 받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의 말 속에서 난타당하는 노동자, 여성, 호남 사람 등이다. 죽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침묵당하는 다수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