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타리오 주의 코비드 확진자 수가 5일 연속 200명 미만을 기록했으며 700만명이 백신 접종을 마쳤다는 반가운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이 수치만 보면 온타리오 주에서만큼은 코비드 사태가 조만간 종식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암울한 뉴스도 접하게 됩니다.
방역의 모범국이라 평가받던 한국이 4차 대유행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유럽도 델타 변이 바이러스로 난리입니다. 그리고 델타 변이보다 치사율이 더 센 람다 변이가 남미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알파, 베타, 델타, 감마에 이어 다섯번 째인 람다 변이 바이러스가 또다른 대유행을 안겨다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다 오메가 변이까지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올 여름 전세계적으로 폭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주 전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는 49.6도라는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지금은 미국 서부 지역이 폭염에 휩싸여 있습니다. 북유럽도 살인적 폭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오늘 내일 폭염이 시작된다고 하는데요. 작년보다 올해, 그리고 올해보단 내년에 폭염과 한파의 주기와 강도는 점점 더 잦아지고 강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이제는 기후위기가 아닌 기후재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 힘을 합쳐서 사냥을 한 후, 사냥한 것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사자가 대뜸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시킵니다. 당나귀는 사자의 명령대로 사냥한 것을 똑같이 삼등분합니다. 그러자 사자는 공평하게 나누지 않았다는 말도 안되는 생트집을 잡으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런 후 이번에는 여우에게 사냥감을 나누어 보라고 지시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사냥한 것의 대부분을 사자의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져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야 공평하게 나누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곤 여우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냐?" 여우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당나귀가 사자님께 잡혀먹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미리 대비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간접 경험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지요. 바로 마지막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날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에 그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대비하겠지요.
벧전 4:7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최근 들어 인류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이 인간의 겸손과 절제 덕분에 장미빛 전망으로 대체될지 아니면 끝없는 욕심과 교만으로 더 혹독한 내일을 여는 문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아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한국이 선진 7개국 정상회의, 즉 G7에 초대되어 전례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G8이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뒤이어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는 선진국 그룹으로 ‘승격’하라는 공식 인정을 받았다.
UNCTAD가 57년 전 발족한 이후 개발도상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월반’시킨 사례는 이번 한국이 처음이라니, 대단한 사건이다. 사사건건 정부 여당을 비판해 오던 야당의 한 대선주자가 뜻밖에도“UNCTAD가 한국의 지위변경을 결정한 7월2일을 국경일로 하자”고 공개 제안한 것을 보면, 그의 말대로 ‘역사적인 경사’ 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세계 10대 무역국이고, 경제규모나 국민소득에서도 10위 안에 들어서 이탈리아를 추월했다는 말도 들린다. 군사력은 세계 6위라고 한다. 전자제품과 자동자, 선박 등은 세계 상위그룹이다. 경제나 국방 등 국세(國勢) 뿐만이 아니다. K팝과 K문화예술, K방역, K스포츠 등 이른바 한류(韓流) 혹은 한풍(韓風: Korean Style)이 지구촌을 주름 잡는다. 미-중 등 대국들도, 개도국-후진국들도 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도움을 청하려 손짓한다. 국제사회에서 명실공히 ‘선진’의 대우를 받는 선진국이 다 된 것만 같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자신은 왜 어깨가 으쓱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하고 한 구석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것일까. 마치 양복을 입고 갓을 쓴 모양새처럼…번지르한 고급양복 입었다고 품격있는 신사라고 내세우긴 자신없고, 진한 향수에 비싼 화장품으로 단장했다고 우아한 미녀라고 우기기엔 민망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 스스로도 우리가 이젠 당당한 선진국이다 라고 확신하며 큰소리 치기에는 자신이 안서고,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져보면 아직 ‘선진’이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모자란 구석구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두리번거리다 내달리는 운전사들이 선진국 네거리에는 거의 없다. 공무를 수행중인 경찰이나 공무원에게 막말을 하고 멱살을 잡는 일이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흔하지 않다. 우리네 주변의 쉽고 간단한 ‘비교검증’ 자료들이다. 일상의 하찮은 언행에서 의식구조와 습성까지 선진·후진의 수준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지성과 품격, 도덕과 정의감 등이 바탕이 되고 의식화 되어 품행으로 표출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런 소소함을 넘어 몇가지 거시적인 사례들을 보자.
군사력 6위라지만, 한국은 마음대로 전시작전권을 행사할 수 없는 국방의 장애 상태에 있다. 세계에 유례없는 희한한 군사종속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위 보수라는 사람들은, 더구나 군의 장성 출신들이 그 전작권을 회수하면 절대 안된다, 나라 망한다고 우겨댄다. 어느 선진국에 그런 기이한 상황이 있고 그런 보수층이 존재하는가.
부동산 때문에 나라가 흔들린다. 투기에는 기를 쓰면서 폭등했다고 원망하고, 폭락하면 경기침체라고 아우성이다. 값 오르면 좋아하면서도 세금에는 기겁을 한다. 부동산과 세금을 빌미로 선거 때마다 몰표를 활용하는 강남부자들이 과연 선진 시민들인가.
한국의 정치판을 선진스럽다고 평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외치면서도 상대 헐뜯기와 이전투구, 갈등 조장만 횡행한다. 오직 자기 당선과 이권에 연연하는 정치인들 뇌리에 공복과 헌신의 개념이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러니 국민 90%가 원한다는 수술실 카메라 설치법하나 처리 못한다. 중대재해법은 누더기가 되었다. ‘선진화 법’을 만들어도 후진을 면치 못하는 국회의 현주소다.
사법은 인권과 정의의 보루인가.
재판을 거래했던 대법원장과 수하 판사들은 뻔뻔하기 그지없고, 단죄해야 할 법관들은 그들이 죄가 없다고 선고한다. 징계조차 받지않고 복귀한 일부 농단 판사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재판하는 어이없는 현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검찰총장이 야권의 대선주자로 돌변해 ‘마시던 우물에 침뱉 듯’ 독설을 쏟으며 본색을 드러낸 것도 우습지만, 정치색을 감추지 않다가 중도 사퇴해 “나라를 밝힌다”며 대선판에 뛰어든 감사원장도 ‘후진’스럽기는 오십보백보다. 두 사람은 결국 공직을 개인적·선택적으로 활용해 정권 흠집내기와 항명, 자기보호와 출세에 써먹었고, 사욕의 발판삼아 정치검찰·정치감사원의 오명을 씌우며 절대중립을 짓밟고 말았다.
언론은 어떤가. 재벌과 노사는? 너무 많다. 곳곳에 대한민국의 선진도약을 먹칠하는 후진적 양태는 널려있다.
‘졸부’라는 말이 있다. 벼락부자 되어 의시대지만 그 심중에는 치사한 성정이 배어있다는 뜻이다. 선진을 자랑하기에 앞서 구석구석까지 선진인지, 몇 군데만 잘난 기형체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선진국은, 선진 시민들이 선진 시스템과 선진 공복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불편도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는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나라를 말한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코로나 바이러스가 좀 느슨해지자 한동안 묶였던 규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잔뜩 응축됐던 일상에 생기가 돌면서 그동안 집에만 갇혀 지냈던 아이들이 마음에 쓰였다. 바이러스 전파율이 예전보다 많이 느슨해졌다고는 하나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안심하기엔 이른 듯했다. 아니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기에 한번쯤 일탈을 시도해야 했다. 우리 부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가족캠핑을 구상하여 곧 실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우리와 같은 계획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캠핑 사이트 예약이 시작되자 마자 우리가 원하는 날짜는 순식간에 빨간 색으로 덮여버렸다. 며칠 시도한 끝에 겨우 사이트 예약에 성공했다. 알곤퀸 팍에서 3박4일 간 캠핑 소식을 가족 카톡방에 올렸더니 한동안 아이들의 환호로 떠들썩했다. 벌써 육 개월 전의 일이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우리들의 해방구, 알곤퀸 공원에 도착했다. 호수가 인접한 아늑한 캠핑장에 식구들의 텐트가 세워졌다. 우리 부부의 텐트 옆엔 큰 아들네, 건너편엔 늦게 합류한 작은 아들네가 자리를 잡았다. 얇은 텐트막 넘어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실루엣 되어 캠핑장을 유영했다. 내 어린 시절, 여섯 남매가 이방 저방에서 웃고 떠들면 할머니는 늘 흐뭇한 표정으로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셨다. 그때 할머니의 마음이 이토록 풍요로웠을까. 지척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인기척에 훈훈한 밤이 되었다.
혼돈의 세상사는 잠시 내려놓으라는 듯 늦여름 알곤퀸 공원은 푸르름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 푸르름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정겨워 보였다. 빙그르 둘러앉아 와인잔을 들며 담소하는 사람들, 모닥불 피워놓고 독서삼매에 빠진 노부부, 아이들 돌보느라 분주한 젊은 부부 등 자연속에 있으니 그냥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공공의 적을 향해 매진했던 투사들이 잠시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광경이 안쓰럽기도 하면서 어떤 연대감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이른 저녁, 식구들이 캠파이어 가까이 모여 쉼 없이 깔깔거렸다. 아침부터 하이킹, 카누 타기, 그냥 뒹굴기 등 각자의 희망대로 시간을 보낸 후 느긋하게 불가에 모여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참이었다. 순간 인원 점검을 해 보니 할아버지, 아들, 손녀 삼대가 빠져있었다. 저녁 찬거리를 위해 고기 잡으러 갔다는 후문에 또 한번 배꼽을 잡았다.
우리 가족은 5:3 혹은 3:5 뭉치기로 유명하다. 다름아닌 혈액형이 같은 식구들끼리 잘 뭉친다는 뜻이다. 다섯 명의 O형들이 세 명의 A형 강태공들을 기다리다 늦은 저녁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도 똑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열살 짜리 손녀가 일어나기 무섭게 눈비비며 따라나서는 모습은 앙증맞기도 하지만 신기한 현상이기도 했다. 고기 잡는 손맛을 너무 일찍 터득한 게 아닐까. 호숫가의 삼대 덕택에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꿈꾸는 캠핑이 되었다.
별 보러 가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따라 나섰다. 깜깜한 호숫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망부석처럼 우뚝우뚝 서서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낮게 앉은 별무리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나도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향해서 나직이 소원을 빌었다. ‘예전의 일상으로 얼른 돌아갈 수 있기를’ 하고.
[1500 칼럼] 브루스 트레일( Bruce trail) 예찬
임순숙 수필가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자유로운 여행이 쉽지 않은 요즈음 나는 종종 유튜브에 올려진 영상들을 보며 허기를 달랜다. 건강한 땀냄새가 그대로 느껴지는 고국의 농어촌 주민들의 일상이나, 아직 가 보지 못한 먼 나라의 신비한 풍경 속을 헤메다가 나오면 심란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유튜브에 올려진 수많은 콘텐츠들 중에 가장 선호하는 장르는 산에 관한 다큐물이다. 히말라야 산맥, 안데스 산맥, Mt.마터호른 등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명산들을 간접체험하고 나면 오래도록 진한 여운이 내 안에 남는다. 지난 인생 여정 중 반 이상은 산과 무관했었는데 중년 넘어 ‘산 바라기’ 삶으로 바뀐 연유는 전적으로 브루스 트레일의 영향임을 인지한다.
이층 침실 창가에 서면 전나무 가지 사이로 야트막한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계절 변화가 겨우 읽혀질 만한 거리에 있는 그곳은 평평한 주변 지형에 비해 제법 도드라진 품새를 내뿜는 유일한 곳이다. 산이라 칭하기엔 높이가 좀 아쉽고 앞동산이라 부르기엔 옆으로 뻗은 자태가 어색하지만 나의 중년기의 시름을 보듬어준 마음의 고향이자, 이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아낌없이 속살을 내어준 브루스 트레일의 한 자락 이다. 간간이 그 능선을 바라보며 지난 추억 떠올려보는 시간은 여느 부자가 부럽지 않다.
브루스 트레일은 남서쪽 나이아가라 강에서 북서쪽 죠지언 베이, 토버머리(Tobermory)까지 이어지는 캐나다에서도 유수한 트레일로, 메인길과 사잇길을 포함하여 총 길이 1300km 가 넘는다. 토론토는 물론 GTA 지역을 포함하여 외곽지역에서도 접근이 용이하여 평소에도 적잖은 시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은둔의 시기엔 브루스 트레일의 진가는 더욱 더 그 빛을 발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구축된 길이라 인위적이지 않고 길을 걷는 동안은 나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에 같은 눈높이로 동식물을 대하게 된다.
이곳에 첫발을 내딛은 시기는 아마도 이민생활 십 여년 차, 심신이 가장 피폐했던 때로 기억한다. 당시 운영하던 사업체에 작은 변화가 생겼을 무렵 하이킹 회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접하곤 주저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초겨울로 기억되는 하이킹 첫날엔,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왜 그렇게 감미롭던지 땀 범벅에도 아랑곳 않고 마냥 걸었던 그때의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자연을 향해 늘 목말라 하면서도 쉬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 시절,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오감이 한 순간에 열리며 자연과 합일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
하이킹 첫날부터 브루스 트레일에 푹 빠졌던 나는 매주 토요일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으로 들녘을 누볐다. 비바람, 한파, 폭설 등 하이킹을 훼방하는 악천후쯤은 개의치 않고 열성으로 걷고 또 걸었다. 억지로 행하는 일이라면 금방 실증이 났으련만 마음이 동해서 걷다보니 체력 향상은 물론 매사 자신감도 배가되었다.
브루스 트레일과 인연을 맺기 전과 후의 삶은 극과 극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비슷한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후의 삶은 매 순간 윤기가 돌았고 일의 성과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어쩌다가 장거리 트레킹을 다녀온 후엔 무탈, 무병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내 삶에서 브루스 트레일과의 인연은 엄청난 축복이며 필연이었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인생 후반기에 그 인연의 땅과 마주하며 살게 될 줄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뻔뻔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자주 입가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세상사 곳곳에서 뻔뻔한 사람과 뻔뻔한 일들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요사이 특히 갈등이 심해지고 격렬해진 정치판의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탄식이 잇달아 나온다.
‘뻔뻔하다’의 사전적 풀이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염치’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체면’은 “남을 대하는 도리”이다. 얼굴 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도 같은 말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거나 “철면피한 사람”이라는 말들 역시 표현의 차이일 뿐, 뻔뻔과 다를 바가 없다.
애완견을 기르는 이들은 강아지도 잘잘못을 아는 염치가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인간이 후안무치라면, 개만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온갖 거짓과 허풍으로 지구촌에 ‘뻔뻔한 것도 처세술이고 무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던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여전히 입심이 펄펄하다. 일본 정치를 주무르며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판 대표적 뻔뻔 인물 아베 전 총리.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그들에 못지않은 뻔뻔함을 뽐낸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겠다는 연방경찰과 대법관을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여성 국회의원에게 “강간하기엔 너무 못생겼다“고 막말을 뱉어낸 인물. 그는 코로나19 대응 잘못으로 6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데다 경제마저 망친 원흉으로 탄핵요구가 130번이나 나왔지만, ”펜으로도, 판사 결정으로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고 버텨 선량한 브라질인들을 울분케 한다.
한국은 다른가? ‘K문화’의 열풍이 무색한 최고반열의 뻔뻔인사들이 뒤질세라 설쳐댄다.
상관인 참모총장에게 총을 겨눠 반역하고 수하 무리들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 주역 전두환은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다. 그가 법의 심판과 국민적 단죄를 받긴 했지만, 40여년 지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죄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재산 29만원’등의 뻔뻔한 단어만 맴돌 뿐이다.
그런 뻔뻔한 자를 칭송하는 ‘더 뻔뻔한 자’가 나와 다시 국민적 분노를 돋우고 있다. “전두환이 5.18과 쿠데타를 빼고는 정치를 잘했다”고 추켜세운 망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전 검찰총장이다. 현직을 그만 두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어 검찰과 정치 모두에 오물을 덧씌우고도 그의 뻔뻔한 언행의 행로는 그칠 줄을 모른다. “배울 점이 있다는 취지였다“며 해명이랍시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수준이하 본질과 감출 수 없는 본색은 ‘뻔뻔 일지’에 추가될 때마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곤혹스럽다.
그는 수많은 가족비리와 의혹의 증거에도 ”음해”라고 강변한다. 검찰총장 재임 중 대통령 인사권을 무시하고, 항명을 일삼은 언행을 국민들이 똑똑히 보았는데도 “정권에 맞섰다”고 호도한다, 검찰권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들, 법무부의 징계가 부족할 지경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황당하다고 되레 발끈했다. 손바닥 ‘왕’자 소란과 주변 주술인들 증언에도 “옆집 할머니” 운운 우겨댔다. 오히려 다른 대통령 후보들의 ‘눈에 티’를 맹공하는 그에겐 자신의 눈 속 ‘들보’가 뻔뻔의 훈장인 것인지, 단 한 번도 잘못이나 사과를 입에 올린 적이 없으니 참 뻔뻔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노라고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하와도 마찬가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들러댄다. 자기들 잘못은 없다는 뻔뻔의 원조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의 원죄는 아들 가인에게로 흘러 동생을 쳐죽이는 살인죄로 발전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문책에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죄에 무감각한 채 도리어 왜 나를 지목하느냐는 뻔뻔함의 전형을 드러낸다.
그렇게 ‘뻔뻔’의 역사는 인류사와 함께 해왔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뻔뻔한 자들은 항상 죄와 악의 편이요, 거짓과 어둠과 불의의 세력이며, ‘트러블 메이커’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빛과 진실, 양심과 선과 정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뻔뻔의 두꺼운 장막 뒤에 숨어 내로남불-아전인수의 변명과 궤변을 찾는 공통점이 있다. 선을 악으로 이기려다 보니 본질 흐리기, 물타기, 되치기 등 온갖 사악한 수법을 동원하고, 갈등과 이간질,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완력의 발버둥을 친다. 친일 매국노들, 쿠데타 독재일파, 국정농단 세력이 그랬다.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만 보아도 거의가 뻔뻔한 인물들이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의 도조 히데끼를 비롯한 전범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이나 배후의 스탈린 같은 인물들….
뻔뻔한 자들의 실체를 모르면 불행과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체를 알고도 방관하거나 환호하면 평화와 정의를 거스른 역사의 죄인들이 된다. 그들을 옹호하며 즐기는 세력의 교활한 속셈 또한 알아내고 경계하지 않으면 큰 낭패와 곤욕을 치르게 된다. < 김종천 편집인 >
한마당 - 공존·공생은 숙명이다
지난 주 시사 한겨레 신문(15면)에 실린 ‘기적의 mRNA’기술‘은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mRNA 백신의 기적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새로운 하이테크 mRNA 의학은 수많은 중증질환을 치료할 잠재력이 있다. 에이즈, 독감, 결핵, 암, 다발성경화증, 류머티즘, 각종 알레르기, 위염, 알츠하이머, 낭포성섬유증, 무릎관절염, 척추디스크 등 온갖 질병에 대해 mRNA 기술을 이용한 치료법이 연구개발 중이다.』
독일 슈피겔지 기사를 소개하는 이 글에는 mRNA 기술의 발견과 COVID-19 백신 개발과정, 그리고 향후 만능 치료제로 발전해 ‘슈퍼 약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 그러면 어떤 놀라운 의료혁명이 일어날지를 전망하면서 ‘중증질환과 불치의 감염병에 대항할 신무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코로나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전염병들은 물론 현대의술로도 손쓸 수 없는 불치병들을 퇴치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지상천국이 도래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질병에 도전해온 발자취를 보면, 획기적인 의약품 개발이 대부분 발상의 전환, 혁신적 접근과 함께 오랜 고난을 견딘 과학자들의 도전과 실험정신의 산물들이다.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임을 증명해 의학의 새 시대를 연 ‘세균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는 어려서는 미술에, 대학에서는 화학을 공부한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는 고깃국물 오염이 자체 미생물 증식 때문이라는 당시의 통설을 뒤집고, 외부의 세균 때문이라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해 살균의학의 길을 열었다. 그의 역발상에서 나온 발견들은 이후 과학사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 뿐만 아니라 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로 확장시켰다. 세균을 죽이는 항생제 개념도 그에게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알렉산더 플레밍에 의해 발견된 항생제의 원조 페니실린은 근 40년 동안 별다른 진척이 없다가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야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의 빛을 발했다.
생소한 생물과학 용어 ‘mRNA’, 즉 ‘전령 리보핵산’(messenger RiboNucleic Acid)은 핵산의 한 종류에서 일약 질병에 대항하는 신기원을 연다. 바이러스 단백질의 설계도를 암호화하는 mRNA를 만들어 해당 mRNA를 인체에 주입하면 인체는 자체 면역체계가 ‘낯설다’고 인지한 mRNA를 대량 만들어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기억을 형성해 방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백신은 기존 생균이나 죽은 균을 몸에 투여한 뒤 해당 세균과 싸워 이기도록 연습시켜 항체를 형성하는 방식인데, 에이즈나 뎅기열 등의 감염병에는 힘을 쓰지 못한다.
mRNA는 발상의 전환이었고, 그런 작동 메커니즘을 적용한 혁신적 백신이 발명되기까지는 오랜 시일 많은 과학자들이 시련과 실패을 거듭했다. 미국 유전학자 존 울프가 1990년 mRNA를 거론한 이후 10년 만에 코로나 사태에 직면해서야 백신이 응급 등장할 수 있었다.
효능이 뛰어난 획기적 백신과 치료제 개발은 질병에서 인류를 지키고 생존을 보장해주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지난 2년, 그리고 현재진행형 COVID-19 팬데믹은 백신이 만능일 수 없음도 보여주고 있다. ‘고성능’ mRNA 백신의 효능이 90~95%에 달한다는데 2차 완료자들의 돌파감염률이 25%를 오르내린다. 부스터 샷에, 상시적 접종을 해야 할 거라는 말도 나온다.
인간은 질병 정복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해나간다. 그러나 항생제 역사 백년도 안되는 사이에 수많은 항생제가 무력화되며 갈수록 초강력이 필요해지듯이, 교활한 변신과 신종 병원체들은 뛰는 인간 위에 나는 탁월한 존재들이다. 여전히 암이나 당뇨, 알츠하이머, 파킨슨 등 불치의 영역은 치유의 영토보다 넓다.
COVID-19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니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 자연은 인간 머리 위에 있으니 이기려 하지 말 것이며, 셋째는 공존과 공생의 지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전세계적인 코로나 몸살을 앓으며 양극화와 이념대립의 심화로 갈등과 분열도 극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숙명은 공존과 공생임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 죽고 나만 살기’를 고집한다면 자멸에서 공멸로 갈 뿐이다.
인간 몸의 세포는 30조개인데 비해 세균은 39조나 된다고 한다. 사실상 몸의 99%가 미생물이라는 수치도 있다. 공존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생태계를 교란·파괴하는 인간의 교만을 역습하는 독한 병원균의 발생과 변이를 따라잡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mRNA의 슈퍼약물이 나온다해도 다시 능가하는 엑스트라 슈퍼 바이러스가 등장하리라는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인간의 도전과 과학으로 적극 대처해야 하겠지만, 도달할 수 없는 ‘초과학’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생 가운데 생존의 지혜, 어차피 ‘With Corona’의 시대는 오고 있다.
[한마당] 동맹바라기의 업보
지난 9월24일 캐나다 국민들은 전혀 낌새를 몰랐던 대형 뉴스가 터져나왔다.
밴쿠버에 억류 중이던 중국 통신장비회사 화웨이의 부회장인 ‘멍완저우’라는 여성이 전격 석방돼 중국으로 떠나고, 중국에서는 간첩혐의로 옥살이를 하던 캐나다인 마이클 스페이버와 마이클 코브릭 씨가 역시 전격 석방돼 캐나다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세여객기까지 동원해 멍완저우를 ‘모셔간’ 중국은 마치 국빈방문 영접 행사처럼 그녀의 귀환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법석을 떨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적 승리’라고 안팎에 선전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인질로 잡아두었던 두 명의 캐나다인 석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뉴스에 올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캐나다는 화풀이 대상이었을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자국민이 억류되는 바람에 속앓이를 해왔던 캐나다는 어떻든 앓던 이 빠지는 격이어서 특별기를 보내 두 사람을 데려왔고, 트뤼도 총리는 25일 캘거리 국제공항에 직접 나가 이들을 포옹하며 환영했다.
그런데 이 희대의 사건에서 캐나다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따져 봐도 이해가 안되는 허탈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과문(寡聞) 탓인가, 국제정치 역학에서 당연한 일인데 너무 과민한 것인가.
들리는 바로는 미국 법무부와 중국 정부가 멍완저우의 기소 연기에 합의하면서 캐나다 법원이 그녀의 범죄인 인도 재판을 기각하고 연금해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중국도 '멍완저우 석방용 교섭 카드'로 중형을 때려 감금했던 캐나다인 두 명을 석방했다. 그 해결과정에 캐나다의 표면적인 역할은 없었다. 거론도 되지 않았다. 캐나다는 두 강국 간 대립에 말려들어 실컷 수모를 당하기만 하고는 그들이 화해한 덕에 어정쩡하게 수렁을 벗어난 것이다.
멍완저우가 밴쿠버에 있었던 것이 발단이기는 하지만, 캐나다가 처했던 신세는 미국이 중국을 격하게 몰아부치는 압박에 공연히 말려들어 미국의 행동대요 총알받이가 되었고, 선량한 자국민들이 인질로 잡히는 유탄을 맞아 3년간 곤욕을 치른 게 전말이다. 바꿔 말해 미국의 몇 마디에 따라 ‘죄인’을 억류해 주었을 뿐인데,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지는 않고 만만한 캐나다인들을 붙잡은 중국의 돌려차기에 얻어맞고 비틀거렸던 것이다. 공권력 허비와 원칙없는 사법판단, 외교와 무역의 마찰, 국민 수난 등 손해만 잔뜩 보고, 나라 위상마저 애매 해졌으니, 세계 최강국을 이웃 우방으로 둔 업보인 것일까.
두 달 전 철수사태가 벌어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와 영국·프랑스 등 우방국들은 도주하듯 철군해버린 미국에 뒤통수를 맞고는 ‘맹방’의 허구와 자국 이익에만 철저히 몰두한 ‘양키’의 비정함을 절감해야 했다.
동키호테처럼 종잡을 수 없던 장사꾼 트럼프가 사라진 뒤 “미국이 돌아왔다”며 기대를 부풀린 바이든이 등장했지만,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실망이 커져가는 모양새다.
지난 9월15일 영국·호주와의 ‘오커스’(AUKUS) 동맹 결성을 발표해 또 하나의 파장을 부른 게 결정적이다. 화기애애했던 G7 정상만남 때부터 다른 우방을 따돌리고 3국이 은밀히 논의해 왔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배신감은 컸다. 특히 호주와의 잠수함 수출계약까지 파기된 프랑스는 즉각 대사소환 등 노발대발했다. 장 이브 르드리앙 외무장관은 “트럼프나 할 만한 행동”이라고 성토했고,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장관도 “미국이 동맹국을 어떻게 대했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고 칼을 갈았다.
살벌한 국제사회에서 동맹국은 필요하고 국익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역사적인 전통의 맹방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피로맺은 혈맹이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알 수 없고 영원한 적도 없는 게 인간사회다. 결코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는 나라는 없다.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했다지만, 6.25를 부른 분단의 설계자는 자국전략을 우선한 미국이었다. 한국을 따돌리고 정전협정을 맺은 미국은 지금껏 종전(終戰)의 열쇠를 건네지 않고 있다. 일제를 철저히 징벌하고 해체시키지 않아 지금까지 친일 잔재와 독도와 극우일본 등등의 골치아픈 문제들이 횡행하는 것도 시발은 미국의 계산에서 비롯됐다.
신냉전이 조성되는 글로벌 전략의 소용돌이에서 막연한 선의의 ‘동맹바라기’나 ‘동맹 우산살이’가 과연 바람직한 생존전략인지. 어정쩡한 강국들인 캐나다도, 한국도, 도약을 위해서는 ‘자국이익’을 깊이 성찰해 보는 게 현명한 일이다.
[편집인 칼럼] 선택적 불의와 방종
[한마당] 불변의 법치농락 카르텔
법원과 검찰을 출입하던 법조 기자시절 기억나는 이야기다.
아침에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다 보면 얼굴이 부시시 하고 충혈된 눈에 열심히 껌을 씹는 검사를 볼 때가 있다. 야근에 지쳤거나 어떤 스폰서와 밤을 지샌 것이려니 궁금해 슬슬 몇 마디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역시 주취 탓이다. 민망했는지 공연한 선심성 빈말도 빼놓지 않는다. 다음에는 꼭 연락 할테니 같이 한 잔 하자구….
그날 검사들을 접대했던 ‘스폰서’는 모 행정관서 공무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종의 비리혐의로 그 관서의 장이 몇 차례 검찰청을 들락거렸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후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라니…. ‘증거’를 쥐고는 곧바로 차장검사에게 쫓아가 유도질문을 꺼내는 기자에게 차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 그 친구, 강 검사가 불러서 알아봤는데, 뭐 별거 아니더라구”란다. 부하직원이 승진 청탁을 하며 봉투를 건넸다는데, 수사해보니 이미 돌려주었고, 액수도 미미해서 그 기관장을 혼내주되 기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 기관장의 비위는 돈 싸들고 청탁한 부하들이 여럿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했지만, 알고보니 그의 동생이 정보기관에 있었고, 결국 불문에 부치는 봐주기로 끝냈던 것이다. 어쩐지 수사는 시작했는데 그 뒤 감감 무소식이더니, 슬그머니 덮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선처에 보답하느라 검사를 모셔다 양주에 곤죽이 될 정도로 향응을 베풀었고….
공직 기강과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검사가 공직자의 범죄를 덮어버리고, 형벌권과 기소권을 행사하지 않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에, 청탁을 들어 준 대가로 접대를 받은 ‘사후 수뢰’까지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부정한 금품을 주고 받았던 행정관서 부패 공무원들은 본분을 저버린 부정청탁에 국민의 세금으로 향응을 ‘공여’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선량한 국민들과 국가에 고스란히 피해를 전가한 것이다. 검찰도 행정기관도 철퇴를 맞아야 할 사안이 분명했다.
취재를 확인한 검찰과 해당 관서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확실한 팩트의 기사였지만, 분통을 터트리는 기자에게 편집 데스크는 “김 기자, 방법이 없네, 중정(中情)에 보안사에, 총동원됐어, 이해하게!”하곤 달랠 뿐이었다. 신문사도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 있는 때 였으니, 언론의 자유와 사명이란 단어는 고상한 수사에 불과했고, 분기탱천을 삭이며 위험한 줄타기에 도전해야 했다.
‘인혁당 사법살인’처럼 초대형 공작은 아니어도, 검찰은 물론 법원까지 그런 식으로 크고 작은 민·형사 사건들이 왜곡·조작되거나 묻히는 사례는 당시에 흔치않게 있었다. 언론 역시 재갈이 물린 채 공생의 멍에와 카르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때가 언제적 인데, 그런 법조 안팎의 속성과 풍속도가 바뀌기는 커녕 고착화·지능화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이 되고 있는 근래의 사건들에서 뚜렷하게 그 불편한 실체를 본다. 널리 알려진 노무현 수사와 이명박 BBK사건을 필두로, 김학의 사건, 옵티머스 사건 등 일탈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흐지부지 덮어버린 ‘나경원 사건’과는 달리, 수사도 하기 전에 기소해버린 ‘조국 사건’에, 최근의 이른바 ‘고발 사주’ 사건까지. 사회정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참 교활하고 사악한 선택적 형벌권의 민낯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 카르텔의 일원으로 헤어나지 못하는 언론까지….
공직 당사자와는 관련없는 일가친족을 ‘멸문’지경으로 내몬 무지막지한 별건·연좌제 수사의 비열한 숫법은 조폭의 칼부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런 냉혹한 칼끝이 정작 자신에게 향한다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검찰총장의 일가를 집적거렸다고 친위검사가 고발장을 만들어 야당과 민간단체에 고발을 ‘청부’했다는 폭로는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방어를 위해 국가사법체계를 악용한 범죄요 법치농락에 다름 아니다.
어디 검찰 뿐인가. 사법거래를 일삼았던 대법원장과 행정처의 판사들은 법관의 양심은 팽개친 채 뭘 잘못했느냐고 고개를 쳐들고, 제식구 감싸기 덕에 면죄부를 챙겨 다시 재판을 맡아서는 보복하듯 요상한 판결을 쏟아낸다.
과거 독재시대 무소불위로 저지른 정치공작과 조작의 그림자, 멀게는 일제치하 고등계 형사들의 악독했던 행적의 뿌리가, 여전히 21세기 민주정치 시스템의 그늘아래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고도 경악할 일이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죄의식도 미안한 양심도 없다. 오히려 큰소리치며 역정을 낸다. 그들은 민주화든 문민화 든 관심도 변함도 없이 손에 쥔 권력을 즐기며 안주해왔기에, 늘상 그런 습벽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국민을 ‘돌보겠다’니, 위장된 양의 손을 내민 늑대처럼, 소름 돋을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검찰 개혁, 사법개혁·언론개혁을 통한 카르텔 혁파는 여전히 미완 상태인 이 시대 최우선의 국가적·국민적 과제다.
< 김종천 시사한겨레 편집인 >
[편집인 칼럼-한마당] 선택적 불의와 방종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기 원한다. 하기 싫은 일은 피하고 미루기 일쑤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싫증이 나고, 더디고 힘들다. 그래서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유의지가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을 택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매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따른다. 마땅히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 집중’,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과 권리와 한계는 비단 개인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부여받고도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의 길을 간 것처럼, 자유의지는 끊임없이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재촉한다. 선악과를 택한 순간의 탐욕이 에덴 추방을 불렀고, 자손만대를 징벌의 세계로 내모는 천추의 한을 낳았다.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마침내 거대한 태풍으로 번지듯이, 작은 선택의 여파가 미래의 진로를 좌우한다.
무미건조한 주제지만, 되짚어 봐야 할 절실한 화두다. 개인을 위한, 나아가 공공을 위한 지혜롭고 공의로운 선택과 집중의 길을 심각하게 재론해 봐야할 이유, 사회적 공정과 정의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삶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 피하고 싶어도 부딪혀야 하는 사안들이 허다하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들도 많다. 그래서 공공을 위한 직업인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적 행동에는 제약과 규범이 있고, 직업윤리도 엄존한다.
그런데 단체나 회사에서 혹은 공조직에서 개인적 선호나 이기적 태도로 불의한 자유의지의 고수나 자의적 행동에 몰두 한다면, 그는 공인(公人)이기를 포기했거나, 자질과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직업의식과 책무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면 전혀 자신의 취향과는 달라서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경우, 그도 아니면 나태와 해이, 혹은 유착과 편애 등의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교사가 자기 좋아하는 학생만 가르치고 다른 학생들은 알아서 공부하라고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소방관이 불끄기 싫어 화재현장에서 불구경만 하다가, 막상 자기 집에 불이 나니 초특급 출동해선 동료들 빨리 안온다고 난리친다면?
경찰이 도둑은 보고도 모른 체 하고는 교통단속만 나선다고 고집하면?, 혹은 지인은 잘 봐주고, 괘씸죄 대상은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인다면…틀림없이 그 사회는 엉망이 될 것이다. 미래는 희망이 사라지고 먹구름이 뒤덮을 수밖에 없다.
결코 있어서는 안될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실제 상황임을 부인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권력을 쥔 자들의 본분을 저버린 선택적 일탈이 도를 넘었다.
대표적인 권부라고 할 검찰, 법원, 언론, 그리고 정치인들이, 공동체를 위한 봉사자라는 공직인의 책무를 망각한 채 ‘유착과 편애의 선택적 자유의지 발동’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근래 선명하게 드러난 검사들의 선택적 표적-기획수사 습성은 검찰개혁에 거세게 반항하며 질긴 파열음을 내고 있다. 판사들은 법과 양심을 팽개치고 사법농단을 감싸면서 서슴없는 감정적 판결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미 ‘기레기’니 ‘구더기’ 소리를 듣는 언론들은 자사 이기와 진영에 매몰된 선별보도로 국민을 오도하며 양극화와 대결을 부추긴다.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은 안중에 없이 오직 권력쟁취에만 눈먼 헐뜯기와 혹세무민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안타깝게도 생생했던 기억을 벌써 잊어가고 있지만, 가깝게는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길어도 한 세기가 채 안된다.
서슬퍼런 권력 앞에 국회는 거수기였고, 기자와 언론은 어용 나팔수들이었다. 검사들은 권력의 개 답게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었을 뿐이다. 판사들은 개들이 짖는 구형대로 앵무새 판결에 자족하며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 자유의지와 선택은 사치였다.
굴종과 침묵이 능사였던 그들에게 어느 날 권력의 자유의지가 선한 ‘시혜’를 베풀자, 원죄의 습성과 사악한 근성이 살아난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의지의 선한 선택은 방종이고 무법이고, 불의에 다름 아니었다.
검찰과 법원의 선택적 양심과 정의, 언론의 표적 보도와 편의적 곡필, 적폐 정치인들의 내로남불…그야말로 선을 악으로 갚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들에게는 자유의지를 부여할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근자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역사가 거꾸로 갈 조짐이다. 이 망국적 선택의 불의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조바심이다. 저들에게 치욕의 시대 기억을 되찾아 주어야 비로소 깨어들 날지 모른다.
결국은 국민과 집단지성의 선택이 가장 강한 무기가 아니겠는가. 다시 촛불을 들어도 좋다. 광장의 촛불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에, 눈길 마다에 촛불을 살리는 것이다.
사그러드는 개혁의 불씨, 선한 선택의 횃불을 활활 살려서, 저들의 방종과 악습을 불살라 태우는 것이다. 공정과 정의를 바로세울 최선의 길은 바로 깨어있는 국민의 자유의지와 선한 선택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