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 칼럼 2021. 11. 3. 02:1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1500자 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임순숙 수필가

 

크리스마스를 불과 일주일 여 앞둔 오늘, 이곳엔 온종일 눈이 내렸답니다.

예전 같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즐거워했겠지만 녹록하지 않은 현실 앞에 한없이 마음이 가라 앉는군요. 어느날 갑자기 밀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욕심내기보단 현 상태로 유지되기를 염원하며 자신을 다독였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라 안팎 소식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눈발이 옅어질 무렵 저녁산책에 나섰습니다. 차가운 눈바람에 간간이 휘청거리긴 했어도 폐부 깊숙이 박히는 상쾌함은 집안에서의 우울했던 기분을 전환시켜 주어 그런대로 좋았답니다. 집집마다 개성 껏 멋을 부린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과 소담하게 쌓인 눈과의 조화로움에 한동안 감탄하다 말고 그 마음조차 깊은 고요함에 함몰되었지요. 가가호호 현란한 불빛은 내걸었지만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난제에 빠져있을 이웃들의 고뇌가 눈바람 속에 실려오는 듯 했으니까요.

적적한 동네의 길모퉁이에서 홀로 눈을 치우고 있는 이웃 주민을 향해 다소 과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염원하는 2022년 4월의 그 길도 누군가 힘있게 열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명치끝까지 올라왔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공통의 길이 있지요. 쉼 없이 온몸으로 기도하게 하는 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정을 쌓았지요.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미주네 가족과 모처럼 푸짐한 한식으로 석식을 함께했던 어느 저녁, 그리고 아껴두었던 누룽지를 서슴없이 꺼내어 아침 식사를 준비한 Mr. 우 부부의 지극한 배려로 인해 만시야에서의 강행군에 큰 힘이 되었지요. 그런 따뜻한 두 가족 옆에서 우리부부는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 돌아보니 늘 부족하여 미안함만 가득하군요.

비, 바람, 추위 등 자연의 온갖 심술을 길 위에서 겪어낸 후,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우뚝 서던 그날의 감격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런지요.

 

우리 부부는 800 km 프랑스 길을 완주하고 돌아와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병명도 모른 채 그쪽만을 바라보며 한동안 그리움을 키웠지요. 얼마 후에야 그곳을 다녀온 경험자들에 의해 우리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일컬어 까미노 블루(Camino Blue) 환자라고 불리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밖에서 길들여진 길을 일상에 들여놓고 하나의 그리움으로 애닯아 하는 현상을 일컬음이라는군요.  

 

프랑스 길을 다녀 온 일년 후, 우리부부는 ‘까미노 블루’ 환자임을 핑계삼아 여러갈래 순례길 코스 중 가장 어렵다는 북쪽길(El Camino Norte de Santiago)을 택했지요. 더 멀고 더 긴 시간동안 비우고 다스리기를 거듭하며 고행을 자처한 끝에 드디어 까미노 블루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실행에 옮기자구요. 그래서 또 거룩한 계획을 세웠답니다. 2022년 4월엔 은의 길( Via de la Plata),  장장 1,000 km 넘는 길에 감히 도전장을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르퓌에서 출발하기를 희망하는 Mr. 부부, 언제든 출발 날짜만 알려달라던 미주 아버지, 언젠가 그때처럼 위에서 만나지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우리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라는 난적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까미노: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줄여서 까미노라 함.

-알베르게: 순례자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

 

[1500자 칼럼] 가을비와 감자탕

 

임순숙 수필가

 

곱게 물든 단풍을 제대로 품어보기도 전에 얄궂은 가을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기나 긴 겨울을 탈없이 지내려면 활화산 같은 풍경화 몇 점 정도는 가슴 속에 저장해야 하련만,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단풍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계절 막바지에서 야외 나들이를 계획했다가 일기관계로 접고 나니, 뜰 안 가득 내려앉은 물먹은 낙엽처럼 마음도 침울해진다. 이런 때 일수록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일거리를 궁리하다가 예정에 없던 감자탕을 떠올리며 인근의 중국마켓으로 향했다. 매장엔 때이른 아침녘인데도 다른 날보다 더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처럼 애궂은 날씨 때문에 일정을 우회한 이들이 아닐까 단언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나의 쇼핑 카트가 그득해졌고, 침울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요리할 즐거움에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두툼한 살고기가 붙은 돼지 등뼈는 핏물을 뺀 다음 스토브에 올리고, 제철에 손질하여 저장해둔 우거지와 고사리, 깻잎 등을 냉동고에서 꺼내어 해동시킨다. 대부분의 한식이 그렇지만 감자탕은 특히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평소엔 이틀에 걸쳐 끓이기 일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기꺼이 끝을 보려 안간힘을 쓴다.

 

주먹만한 감자 여섯 개를 골라서 껍질을 벗긴다. 순간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의 감자가 따끈하게 폐부를 파고 드는 듯 하다. 감자탕에서 빠지면 섭섭한 노란 감자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오묘한 맛으로 고기와 야채 틈새를 파고 들며 늘 존재감을 과시한다.

한때 감자탕의 ‘감자’는 돼지 등뼈 부위를 지칭한다고도 했고, 또는 고깃국에 감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애매모호한 돼지등뼈와 감자의 관계, ‘감자탕’이란 이름의 어원이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가지 설만 난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돼지뼈가 음식의 주재료로 쓰이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해 감자를 내세웠다는 설과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뼈 우린 국물에 감자를 넣어 끓여 먹었다는 설이다.

또한 ‘감자탕’은 영어명에서도 혼돈을 초래한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명칭과 실제요리가 매치가 되지 않아 해외 유튜브 등에서는 Pork Bone soup 으로, 국내에선 Pork back-bone stew 를 표준화된 명칭으로 표기한다.

평범한 하나의 음식에 엄청난 사례와 관심, 끊이지 않는 변화와 발전은 그만큼 대중의 사랑이 깊다는 의미이리라. 감자탕의 주인공이 돼지 등뼈면 어떻고 감자면 또 어떠하리.

 

누릇한 돼지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고기 솥에 잘 익은 된장을 넉넉히 풀고 주인공이라 자처하는 감자들을 제일 먼저 투척한다. 연이어 준비된 배추 우거지와 고사리, 버섯 등 각종 채소들을 차례대로 들이밀며 화력을 조금 높이면, 금방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는 화합의 율동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뭐니뭐니 해도 감자탕 최후의 화룡점정은 넉넉한 마늘과 들깨 가루 그리고 쭉쭉 찢어 넣은 대파가 아닐까.

 

투박한 질그릇에 김이 풀풀 나는 감자탕을 그득 담아 식탁을 차렸다. 국그릇을마주한 가족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해 보인다. 가을비 질척이는 저녁,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단풍이 지건, 기나긴 겨울이 문앞에서 서성이건 이젠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닌 듯 하다.   

[목회 칼럼] 참된 자유

● 칼럼 2021. 11. 3. 02:1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쁨과 소망]  참된 자유

 

박원철 목사 / 늘사랑교회 담임목사

 

   지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집어 삼켜 버린 전무후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인간의 일상적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는“자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일상 생활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약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약국에 간다든지, 식료품을 산다든지, 병원에 간다든지 하는 정말로 근본적이고 급박한 일이 아니면 마음대로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그런 심각한 통제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lockdown’ 이나 ‘통행금지’(curfew) 그리고 ‘stay at home’ 같은 행정 명령을 통해 국가와 정부가 사람과의 만남을 통제하고, 외출과 모임을 금지시키니까 곳곳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시위를 하였다. 국가와 정부가 일상 생활을 통제하고 활동을 금지시키니까 화가 난 사람들이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약 2억 4천 5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그 중에 약 500만 명이 사망한 이 위급한 시기에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분노하며 외치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마음껏 누려왔던 자유가 통제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자신들이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는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며 분노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을 통해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현 시점에서 이제 사람들은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를 달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 참된 자유일까?

  

사실 우리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마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자유에 대한 환상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게도 우리 현대인들은 실제로는 참된 자유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물가가 오를까봐 걱정하며 살아간다. 몰게지 이자를 걱정하고 주식을 걱정하고 집값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오래 사는 건강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건강을 잃어 버릴까봐 염려하고 걱정한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돈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소유한 재물이 사라져버릴까봐 염려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값비싼 감시 시스템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가 실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 대한 감시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안전을 강화하고 범죄를 막기 위한 감시 시스템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과 컴퓨터도 실제로는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 혹은 역량 있는 단체나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사람의 사생활도 다 감시하고 심지어 파헤칠 수 있는 그런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자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갇힌 사람들이 국가와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헛된 자유”이고, “거짓된 자유”이고, “환상적인 자유”일 뿐이다. 그럼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로 울부짖으며 힘을 다해 찾아야 할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의 자유” 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망언 정치가 권력을 얻으면 민주주의는 망한다

● 칼럼 2021. 10. 30. 02:3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끝나지 않은 학살의 기억’…망언이 권력을 얻을 때 민주주의 위협

윤석열의 실언, 실수인가 신념인가

전두환 옹호에 부마항쟁 논란까지

망언으로 지지자를 결속하는 정치

혐오배설자에게 윤리적 해방감 줘

 

이라영의 비평_망언 정치

 

이라영_ 예술사회학자.

 

‘침묵하는 다수’(the silent majority)라는 개념은 20세기 전까지는 대체로 망자를 뜻하던 말이었다. 로마 제국 네로 시대의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표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이 세계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많기에 죽음을 ‘다수에게 돌아갔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늘날 사용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내에서는 반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1969년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방송 연설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미국인 여러분”에게 호소했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더 빨리 끝내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종전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 미국인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길 호소하며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을 분란을 만드는 집단으로 왜곡했다.

 

그렇다면 이 ‘침묵하는 다수’의 실체는 있는가.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에 찬성하는 ‘침묵하는 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반전운동이 못마땅한 사람들에게 침묵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준다. 보수 정치인들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가상의 집단을 언급하길 좋아한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극성스러운 소수가 선량한 다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도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무시당한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는 다수’는 진짜 존재하나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가 지난 19일 부산 해운대갑 당협 사무실을 방문해 당원들에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취지의 전두환 옹호 발언을 했다. 이어 “호남에도 이런 얘기 하는 분들이 꽤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차원을 넘어 호남에도 ‘꽤’ 있다는 언급을 통해 마치 호남에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왜곡시킨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증언하는 목소리, 전두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 여전히 이어지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눌려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5·18기념재단 통계에 따르면 광주항쟁으로 사망한 사람만 260여명에 이른다. 아직도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 생사 확인조차 되지 않은 이들이 많아 원통한 곡성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학살에 대한 증언을 침묵시키는 권력이 있었고, 학살의 당사자인 전두환은 41년이 지나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 후보는 사과를 요구하기는커녕 ‘그것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런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의 산물로 읽힌다. 발언 다음날 그는 페이스북에서 “어제 제가 하고자 했던 말씀은 대통령이 되면 각 분야 전문가 등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해 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썼다. 인재 기용의 모범 사례로 들 만한 인물이 그에게는 전두환이라는 것이다.

 

발언에 논란이 일어나면 윤 후보는 매번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으며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억울해한다. 그의 사과는 “아무리 ‘아, 이건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국민들께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시면 그 비판을 수용하는 게 맞다”였다. 풀어보자면, 나는 여전히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망언은 정치가 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증오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받고 있어서 자신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다며 억울함을 표한다. 거침없이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발언을 쏟아내는 트럼프는 이들의 입에 자유를 준다.

 

망언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정치인이 정치적 힘을 가질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사람들이 자꾸만 망언을 듣다 보면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윤리적 감각이 흔들린다. 역사를 왜곡하고, ‘침묵하는 다수’라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결국 혐오 감정을 배설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자의 망언은 윤리적 해방감을 준다.

 

윤 후보의 출마 선언에서 여러번 중요하게 언급되는 개념이 ‘자유’였다. 모순되게도 보수 정치는 ‘자유’를 좋아한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7월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주기 위해 주 52시간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했다. 윤 후보는 가난한 사람도 부정식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윤 후보와 경쟁하는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는 “부자에게 돈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노동 착취를 자유롭게 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빈곤층을 비하하고, 각종 막말을 하나의 의견처럼 둔갑시킨다. 반면 기득권을 핍박받는 피해자처럼 묘사한다.

 

현재 홍 후보와 윤 후보는 서로 ‘망언 리스트 25건’과 ‘막말 리스트 25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2017년 대선에서도 홍 후보의 말이 수시로 문제가 되어 당시 민주당 캠프에서 ‘홍준표 후보의 10대 막말’을 선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막말 정치인으로 꼽히던 홍 후보가 뱉은 수많은 발언이 잠시 가려질 정도로 윤 후보는 분야별로 부지런하게 망언의 기록을 쌓는 중이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주고받은 망언과 막말로 타격을 받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의 말 속에서 난타당하는 노동자, 여성, 호남 사람 등이다. 죽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침묵당하는 다수가 아닌가.

 

 

 

[편집인 칼럼] 뻔뻔한 자들의 정체를 안다면

● 칼럼 2021. 10. 25. 06:2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칼럼-한마당]  뻔뻔한 자들의 정체를 안다면

 

‘뻔뻔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자주 입가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세상사 곳곳에서 뻔뻔한 사람과 뻔뻔한 일들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요사이 특히 갈등이 심해지고 격렬해진 정치판의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탄식이 잇달아 나온다.

 

‘뻔뻔하다’의 사전적 풀이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염치’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체면’은 “남을 대하는 도리”이다. 얼굴 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도 같은 말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거나 “철면피한 사람”이라는 말들 역시 표현의 차이일 뿐, 뻔뻔과 다를 바가 없다.

애완견을 기르는 이들은 강아지도 잘잘못을 아는 염치가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인간이 후안무치라면, 개만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온갖 거짓과 허풍으로 지구촌에 ‘뻔뻔한 것도 처세술이고 무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던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여전히 입심이 펄펄하다. 일본 정치를 주무르며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판 대표적 뻔뻔 인물 아베 전 총리.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그들에 못지않은 뻔뻔함을 뽐낸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겠다는 연방경찰과 대법관을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여성 국회의원에게 “강간하기엔 너무 못생겼다“고 막말을 뱉어낸 인물. 그는 코로나19 대응 잘못으로 6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데다 경제마저 망친 원흉으로 탄핵요구가 130번이나 나왔지만, ”펜으로도, 판사 결정으로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고 버텨 선량한 브라질인들을 울분케 한다.

 

한국은 다른가? ‘K문화’의 열풍이 무색한 최고반열의 뻔뻔인사들이 뒤질세라 설쳐댄다.

상관인 참모총장에게 총을 겨눠 반역하고 수하 무리들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 주역 전두환은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다. 그가 법의 심판과 국민적 단죄를 받긴 했지만, 40여년 지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죄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재산 29만원’등의 뻔뻔한 단어만 맴돌 뿐이다.

 

그런 뻔뻔한 자를 칭송하는 ‘더 뻔뻔한 자’가 나와 다시 국민적 분노를 돋우고 있다. “전두환이 5.18과 쿠데타를 빼고는 정치를 잘했다”고 추켜세운 망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전 검찰총장이다. 현직을 그만 두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어 검찰과 정치 모두에 오물을 덧씌우고도 그의 뻔뻔한 언행의 행로는 그칠 줄을 모른다. “배울 점이 있다는 취지였다“며 해명이랍시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수준이하 본질과 감출 수 없는 본색은 ‘뻔뻔 일지’에 추가될 때마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곤혹스럽다.

그는 수많은 가족비리와 의혹의 증거에도 ”음해”라고 강변한다. 검찰총장 재임 중 대통령 인사권을 무시하고, 항명을 일삼은 언행을 국민들이 똑똑히 보았는데도 “정권에 맞섰다”고 호도한다, 검찰권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들, 법무부의 징계가 부족할 지경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황당하다고 되레 발끈했다. 손바닥 ‘왕’자 소란과 주변 주술인들 증언에도 “옆집 할머니” 운운 우겨댔다. 오히려 다른 대통령 후보들의 ‘눈에 티’를 맹공하는 그에겐 자신의 눈 속 ‘들보’가 뻔뻔의 훈장인 것인지, 단 한 번도 잘못이나 사과를 입에 올린 적이 없으니 참 뻔뻔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노라고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하와도 마찬가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들러댄다. 자기들 잘못은 없다는 뻔뻔의 원조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의 원죄는 아들 가인에게로 흘러 동생을 쳐죽이는 살인죄로 발전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문책에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죄에 무감각한 채 도리어 왜 나를 지목하느냐는 뻔뻔함의 전형을 드러낸다.

 

그렇게 ‘뻔뻔’의 역사는 인류사와 함께 해왔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뻔뻔한 자들은 항상 죄와 악의 편이요, 거짓과 어둠과 불의의 세력이며, ‘트러블 메이커’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빛과 진실, 양심과 선과 정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뻔뻔의 두꺼운 장막 뒤에 숨어 내로남불-아전인수의 변명과 궤변을 찾는 공통점이 있다. 선을 악으로 이기려다 보니 본질 흐리기, 물타기, 되치기 등 온갖 사악한 수법을 동원하고, 갈등과 이간질,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완력의 발버둥을 친다.  친일 매국노들, 쿠데타 독재일파, 국정농단 세력이 그랬다.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만 보아도 거의가 뻔뻔한 인물들이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의 도조 히데끼를 비롯한 전범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이나 배후의 스탈린 같은 인물들….

 

뻔뻔한 자들의 실체를 모르면 불행과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체를 알고도 방관하거나 환호하면 평화와 정의를 거스른 역사의 죄인들이 된다. 그들을 옹호하며 즐기는 세력의 교활한 속셈 또한 알아내고 경계하지 않으면 큰 낭패와 곤욕을 치르게 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