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새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게 될 용산 국방부 청사 일대의 조감도를 가리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주현 | 이슈부문장

 

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을 발표하면서 내보인 ‘용산 시대’ 조감도를 보면서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새 대통령 집무실이 될 국방부 청사 남쪽으로 널따란 잔디밭 공원이 펼쳐져 있다. 실제로 50m 옆에 있는 합동참모본부 건물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삼각지 일대 고층 아파트들은 원경으로 한참 물러나 있다. 삼각지역 일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용산미군기지가 공원으로 바뀌면 새 대통령 집무실과 연계해 많은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얼짱 각도를 위한 생략과 과장이 거침없다. 이날 윤 당선자의 발표 장면을 지켜본 도시·건축 전문가들도 “사기에 가깝다”며 비판하는 반응이 많았다.

 

걱정스러웠다. 누군가 제공한 근사한 청사진에 윤 당선자가 그저 휘둘리는 것이 아닌지, 잠재적인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의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지 못한 채 거침없는 의지만 앞세운 것이 아닌지.

 

용산 이전을 최대한 ‘선해’하는 이들은 백악관 모델을 거론한다.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건축가인 유현준 교수는 지난 1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용산 이전과 관련해 “신의 한 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우리가 백악관을 보시면 앞에서 워싱턴 내셔널 몰 같은 기념관들이 딱 있고 거기에서 백악관이 약간 언덕에 올라가게 돼 있다. 그런 구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3월 윤 당선자가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 6월말 정치선언을 하기까지 ‘공부’를 한다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던 시절에 만난 사람이다. 윤 당선자가 제시한 공원 그림도 링컨기념관-워싱턴기념관-의사당까지 잇는 내셔널 몰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 21일치 <조선일보 >는 “윤 당선인 측은 미 백악관 집무동인 웨스트윙을 새로운 집무실 모델로 고려해온 것으로 전해졌다”고 설명했다.

 

왜 서울이 워싱턴을 따라해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정말 백악관을 모방하기 위한 의도였더라도 이는 워싱턴과 미국의 수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맥락을 떼놓고 하는 말이다. 18세기 말 워싱턴디시 밑그림을 짠 건축가 피에르 샤를 랑팡은 의회와 백악관을 두 축으로 하여 의회-행정부 간 균형과 견제의 원칙을 담았다. 20세기 초 수립된 ‘맥밀런 플랜’은 내셔널 몰과 링컨기념관, 제퍼슨기념관을 배치해 미국이 지향하는 독립과 자유, 평등의 가치를 명확하게 풀어냈다. 링컨기념관이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로 꼽히는 것도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마틴 루서 킹의 연설로 인해 인권의 보편적 가치가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백악관 역시 1800년에 완공된 이래 수차례의 증축, 확장, 보강공사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 즉, 윤 당선자 쪽이 지향하는 워싱턴은 시대에 부응하는 전문가의 계획과 시민의 행동, 그리고 200여년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던 ‘광화문 시대’는 단지 대통령과 참모가 같은 건물에서 일하고 문밖으로 나가면 시민들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광화문은 국가 지도자가 휘두르는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려는 시민의 열망이 분출되고 자유로운 담론이 오가는 직접민주주의의 전당, ‘광장’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셀카를 찍는 수준의 소통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청취하고 항의를 수용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소망한 것이었다.

 

윤 당선자가 ‘광화문 시대’를 주장한 최초의 의도도 비슷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윤 당선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4대강 사업보다도 훨씬 급조되고 미숙한 청사진을 흔들며 50여일 만에 집무실 이전을 마무리짓겠다고 말한다. 여론의 반대는 본인이 직접 나서 ‘설득’하겠다는 것으로 충분한 모양이다.

 

공간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물이 담기면 물잔이고 술이 담기면 술잔이다. 너무나 손쉽게 광장의 소통을 저버린 윤 당선자는 용산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윤 당선자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다. 큰일이다. 불통과 과속이라는 우리 시대의 치명적 한계가 새 대통령 집무실에 담길 것이며, 그 불통과 과속을 옹호하는 대통령의 인식은 더욱 강화될 테니.

 

[시사 칼럼] 9·11의 백악관, 윤석열의 청와대

 

정의길 기자

 

윤석열 당선자에게 청와대란 그저 대통령 책상이 있는 사무실이고, 자신이 쓸 개인 공간이다. 청와대는 없고, 윤 당선자의 집무실만 있을 것이다.

 

20일 오전 서울 용산역에서 시민들이 텔레비전으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집무실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관련 기자회견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밀어붙이는 대통령 집무실의 국방부 청사 이전에 대해 전직 국방장관과 합참의장들도 “정부와 군 지휘부를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목표가 된다”며 반대했다. ‘9·11 테러’가 겹쳐졌다.

 

알카에다의 2001년 9·11 동시 테러 때 공격받은 목표물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 펜타곤이었다. 실패한 목표물도 있었다. 백악관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4대의 비행기 중 1대는 워싱턴으로 날아오던 중에 펜실베이니아 섕크스빌에 추락했다. 기내의 승객들이 제압하려 하자,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를 추락시켜 버렸다. 워싱턴에서 약 200㎞ 거리였다. 여객기를 가속하면 1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추락한 여객기의 테러리스트들은 백악관이나, 상황을 봐서 의사당을 공격하려고 했다. 여객기의 승객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9·11 동시 테러에서 가장 비판받은 지점은, 쌍둥이빌딩이 공격받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발생하고 거의 한시간이 지났는데도 미국 국방의 지휘부로 최고 보안 대상인 펜타곤이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민간 여객기의 공격에 허망하게 당했다는 것이다. 추락한 여객기가 계획대로 워싱턴으로 날아왔다면 백악관 역시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백악관과 펜타곤이 같은 공간이나 인접한 장소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그날 미국의 전쟁 지휘본부는 상당 기간 완전 먹통이 됐을 것이다. 국방부를 옆으로 밀어내고 대통령 집무실을 꽂아넣겠다는 발상을 놓고 9·11 테러의 교훈까지 끌어대는 것은 민망한 일이기는 하다.

 

물론 9·11 테러의 교훈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민간 여객기로도 세계 최강국의 최고 안보시설물들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안보의 불가측성이며, 백악관 등 미국 지도부가 그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는 것이다. 안보 위기를 안보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이데올로기가 결부된 대외정책의 관철 기회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9·11 테러 당일 알카에다가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텅 빈 훈련장을 공습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오콘의 핵심인 더글러스 파이스 국방차관은 9·11 테러 당일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던 기내에서 후세인을 타도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가, 동석한 존 애비제이드 대장한테서 “후세인은 아니다, 알카에다와 관련이 없다”는 반박을 받기도 했다. 9·11 테러 발발 뒤 일주일 동안 부시 행정부의 고위 외교안보회의, 이른바 ‘전쟁위원회’는 9·11 테러나 알카에다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라크 응징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결국 아프간 침공을 우선시하기로 결론이 났으나, 이라크 전쟁은 9·11 테러 당일 결정된 것이나 진배없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 자유주의 정권을 수립해서 중동을 바꾸겠다는 ‘중동 개조론’이 9·11 테러 대책의 결론으로 둔갑했다. 그 산물인 이라크 전쟁이 미국에 어떤 재앙을 불러왔는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다.

 

부시 행정부는 9·11이라는 위기 앞에서 즉각 이라크를 조건반사처럼 끄집어냈다.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장악하고 있던 네오콘의 머리에 뿌리박힌 미국의 가치, ‘반미 국가’에 대한 혐오로 채워진 우파 이상주의가 그런 조건반사를 일으키게 했다.

 

부시 행정부는 9·11이라는 위기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는 이유라도 있었으나,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도대체 그 이유를 알기 힘들다.

 

부시 행정부 네오콘들의 머리에 우파 이상주의가 박혀 있던 것과 비슷하게, 윤 당선자와 핵심 측근인 ‘윤핵관’들의 머리에는 용산으로 가야만 하는 풍수와 도참사상이 박혀 있다는 말인가?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9·11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는데, 윤핵관들은 청와대 이전으로 위기를 만들어서 기회로 삼으려는 것인가? 대선에서 승리한 당선자인데도 지지율이 부진하니, 이걸로 당선자의 밀어붙이기를 보여줘 정국을 장악하려는 의도인가?

 

윤 당선자는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며 더 이상 ‘청와대’는 없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이 말이 총각 자취방 이사하듯이 감행하는 그의 집무실 이전 구상보다도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청와대란 그저 대통령 책상이 있는 사무실이고, 5년간 자신이 마음에 들어 써야 할 개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청와대는 없고, 윤석열의 집무실만 있을 것이다.

 

[유레카]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 집무실 이전에 주는 교훈

 

박민희 | 논설위원

 

1864년 아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듬해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270년 넘게 서울 한복판에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은 워낙 대규모의 사업이어서 이전까지 어떤 국왕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밖에서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밀려오고 내부에서는 봉건 지배질서가 와해되고 민생이 피폐해진 위기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김종학 국립외교원 교수가 쓴 <흥선대원군 평전>을 보면, 대원군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나라의 기풍을 일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경복궁 중건을 통해 공식 관직을 맡을 수 없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세운 영건도감은 그가 국가 재정을 주무르고 인사에 간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중건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미신도 활용했다. 경복궁 안 석경루 아래서 구리그릇이 나왔는데 그 안에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예언한 듯한 글귀가 나왔다. 대원군이 사람을 시켜 몰래 묻어놓은 것이었다. 1866년 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애써 모아 놓은 목재가 전부 불타버린 뒤에는 전국 각지의 좋은 나무나 바위, 양반 선산의 산림까지 무자비하게 벌채해 궁궐 건축에 동원했다.

 

공사를 위해 가혹한 징세를 했다. 7년간의 공사에 들어간 총비용은 783만냥이었는데, 그중 왕실의 내탕금과 종친의 기부금은 45만냥이었고, 나머지의 대부분인 727만냥은 민간에서 거둬들였다. 처음에는 부호들로부터 원납전( 願納錢)을 거뒀는데 제대로 걷히지 않자, 백성들에게 강제 징수를 했다. 백성들은 이를 ‘원망하면서 내는 세금’이라는 뜻으로 원납전( 怨納錢)이라고 불렀다. 서울 도성문 출입세를 비롯해 온갖 명목의 잡세도 더해졌다. 그래도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대원군은 실질 가치가 명목 가치의 20분의 1인 당백전을 주조해 강제로 유통시켰고, 화폐 가치 하락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868년 8월19일 경복궁이 중건되어 고종을 비롯한 왕실이 창덕궁에서 옮겨 왔으니,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집무실과 관저 이전이었다.

경복궁 중건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은 국제 정세 변화를 외면한 채 쇄국정책을 강압적으로 추진했고, 권력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가차 없이 탄압하고 독재에 나섰다.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왕후가 권력 투쟁을 벌이는 틈을 이용해 외세가 번갈아 조선에 개입했다. 김종학 교수는 조선 말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대원군에 대해 “무너진 사회질서를 복구하고 생존의 최소한의 조건을 지켜줄 강력한 권력자의 도래를 바라는 절박한 염원“을 가졌으나, 결국 그것은 “우상을 향한 맹목적인 바람, 또는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에 지나지 않았다”고 썼다.

 

150여년이 흐른 뒤, 국제질서는 또 다시 위태롭고 코로나19와 불평등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도 엄혹하다. 여론의 우려를 무시하고 속전속결식으로 집무실 이전을 밀어붙이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제왕적 불통’은 정치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듯하다. ‘강력한 권력자가 지켜줄 것이라는 맹목적 바람’이 아닌, 민주적 제도, 정치권의 반성, 대안을 만들어 내려는 시민 각자의 노력이 퇴행이 아닌 희망을 만들 것이다.

 

[시사컬럼] ‘묻지 마 정권교체’는 곤란하다

● 칼럼 2022. 3. 5. 05:2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검사 시절의 일탈, 명백한 범죄를 짐짓 모른 척 봐주거나 거꾸로 결론을 정해놓고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의혹도 많다. 대장동과 부산저축은행, 삼부토건, 고발사주, 판사사찰 등의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부인과 장모의 주가 조작 의혹 등 여러 범죄혐의도 만만치 않다. 일부러 병역을 피했다는 의혹도 해소되지 않았다. 남들이 써준 것을 읽기만 할 정도로 실력도 형편없다. 국정 과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한 사람이, 무엇보다 기본적인 태도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정권교체론에 기대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오늘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국민이 선택할 시간이다. 그동안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당선 가능성이 큰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는 각각 유능한 일꾼론과 정권교체론으로 맞서고 있다.

 

집권세력이 제대로 못했다면 바꾸는 게 맞다. 어떤 정부도 예외일 수 없다. 정권교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세력에 책임을 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묻지 마 정권교체’는 곤란하다. 집권세력이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꼼꼼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정권을 바꿀 까닭을 분명하게 확인했다면, 그다음엔 ‘좋은 정권교체’인지 물어야 한다. 정권을 바꾼 결과가 더 나쁘다면 선거는 그저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하게 될 거다. 5년 만의 대선을 그렇게 허비할 수 없다. 선거 결과에 따라 국민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권교체가 의미가 있으려면, 이전 정권보다 더 잘할 거란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안철수식 ‘묻지 마 정권교체’가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 거다. 얼마 전 유세에서 “윤석열이 되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겠는가. (윤석열을 찍은) 내 손가락 자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비난했던 사람이 갑자기 윤석열 후보를 지지해달라며 사퇴한 것도 ‘정권교체’를 위한 것이란다. 다당제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이 결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는 형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권교체의 유력한 대안으로 윤석열 후보가 꼽히지만, 더 좋은 정권교체를 실현할 사람인지 의문이다. 다들 알고 있듯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나 문재인 대통령보다 무엇이든 더 잘할 가능성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윤 후보는 무엇보다 대통령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시민으로서의 기본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 보인다. 사람들은 열차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지만, 그건 몰상식하고 매너 없는 사람이라 여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국정운영은 전혀 다르다.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에 따라, 그 지도자의 역할에 따라 국민은 생사 갈림길에 서기도 하고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한다.

 

국민 앞에서 진행한 텔레비전 토론에서 보여준 윤석열 후보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윤석열 후보는 국정 운영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 기본적인 용어도 모르고 정책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상대가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아예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때론 두루뭉술하게 말하거나 동문서답을 했다. 토론의 규칙도 자주 무시했다. 검사 시절 피의자를 두고 호통치던 모습이 저렇겠구나 싶었다. 토론 내내 이재명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에만 집중했다. 기회만 있으면 대장동에 대해 공격했지만, 막상 이재명 후보가 선거 이후라도 대장동 특검을 도입해서 끝까지 책임을 묻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이것 보세요”만 반복했다. 다섯 번을 물어도 끝내 답하지 않았다.

토론에 임하는 윤석열 후보는 상대 후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었다. 토론을 엉망으로 만들어 미래의 정책과제를 챙겨야 할 귀한 시간을 날려버리고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 후보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는 국민마저 우습게 여기는 태도다. 후보 시절에도 저렇게 행동하는데,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할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 토론을 처음 시작한 1997년 대통령 선거부터 지금까지 어떤 선거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까지 무례한 후보는 일찍이 없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벼락공부로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보로 나섰으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자기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아무 말이나 하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다며 주워 담는 건 너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검사 시절의 일탈, 명백한 범죄를 짐짓 모른 척 봐주거나 거꾸로 결론을 정해놓고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의혹도 많다. 대장동과 부산저축은행, 삼부토건, 고발사주, 판사사찰 등의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부인과 장모의 주가 조작 의혹 등 여러 범죄혐의도 만만치 않다. 일부러 병역을 피했다는 의혹도 해소되지 않았다. 남들이 써준 것을 읽기만 할 정도로 실력도 형편없다. 국정 과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한 사람이, 무엇보다 기본적인 태도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정권교체론에 기대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목회칼럼] "욕심을 버리십시오"

● 칼럼 2022. 3. 1. 07:0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쁨과 소망] 욕심을 버리십시오

 

송민호 토론토영락교회 담임목사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이란 긴 세월을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4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매일 주시는 만나이기 때문에 구태여 욕심을 내서 많이 거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거두는 선, 즉 일 인당 오멜씩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욕심을 가지고 많은 양을 거두었다가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나는 저장하는 음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daily food)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주시는 몫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둘 수 없어서 이틀 치 거두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안식일용으로 거둔 만나는 하루가 지나도 벌레가 생기거나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만일 1년 치를 한 번에 주셨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매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일 주시는 만나를 통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가르치십니다(마 6:11). 평생 먹을 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7:34).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놓고 걱정하기보다는 오늘을 충실히 살고, 오늘 먹을 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모두가 많이 초조하고 불안해합니다. 이전의 좋았던 모습을 그리며 아쉬워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삶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욕심은 언제나 금물입니다. ‘오늘 주시는 은혜로 족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정찬 소설가 칼럼] 촛불혁명과 대통령 선거

● 칼럼 2022. 2. 23. 02:2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정찬 소설가 칼럼]  촛불혁명과 대통령 선거

 

촛불혁명은 훼손된 유권자의 존엄성을 되찾는 역사적 행위였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람다운 삶’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20대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촛불혁명의 계승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정찬 | 소설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는 역사학자 이 에이치(E. H.) 카의 명언이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빛을 급속히 잃어갔다. 인터넷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면서 과거를 돌아보는 힘을 빠르게 상실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신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만 달려가게 한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니 과거는 잊힐 수밖에 없다. 과거의 중요성은 현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척도의 역할에 있다. 이 척도를 상실하면 현실에 매몰되어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대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한 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촛불혁명을 다시 돌아볼 가치가 있다. 2016년 10월29일 1차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2017년 4월29일 23차 촛불집회까지 183일 동안 1685만2천명의 시민이 참가해, 구속자와 사망자 한명 없이 민주주의의 질서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평화롭고 장엄한 혁명은 부패와 무능, 통치 권력의 비정상성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304명의 생명과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이게 나라냐’라는 절망스러운 깨달음과, 국민이 뽑은 대통령 권력이 비선실세에 의해 행사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형성된 분노였다. 집회에서 한 시민이 치켜든 팻말의 문구 ‘모이자! 내 나라다’에 주권자의 분노와 간절한 열망이 집약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박정희 카리스마’였다. 그러한 후광에 감정이입 된 이들이 박근혜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물론 박근혜도 불행에 빠뜨린 것이었다.

 

2016년의 마지막날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시민들. 촛불집회는 2017년 4월29일까지 이어졌다.

 

촛불혁명이 진행되던 2016년 겨울의 주말은 유독 추웠고 눈비가 많이 내렸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11월26일, 광화문광장이 휑할까 걱정하며 나온 사람들이 150만명이었다. 영하 11도로 집회 이후 가장 추웠던 2017년 1월14일과, 한파에다 강풍까지 휘몰아친 2월18일에도 촛불의 열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열기로 집회장 안의 온도가 바깥보다 4도에서 6도까지 높았다.

 

촛불혁명이 그전의 혁명과 구분되는 것은 혁명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많은 ‘나’가 저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외치고, 노래 부르고, 퍼포먼스를 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파편화되어버린 ‘나’가 ‘우리’로 변화하면서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피 흘림 없이 승리를 쟁취한 혁명을 이룬 것이었다.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함으로써 촛불혁명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세계에 확인시켰다. 촛불혁명이 시작된 2016년의 세계는 인종주의, 쇼비니즘, 기독교 근본주의, 안티페미니즘 등으로 무장한 극우 포퓰리즘에 신음하고 있었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심화되어가는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분노가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악성의 형태로 분출되어 난민 약자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 테러와 전쟁이 난무하는 지구적 상황 속에서 한국의 촛불 시민들은 민주주의 원리를 평화적으로 구현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그들의 놀람은 “도시가 시위의 불빛으로 이렇게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답다”라는 국외 네티즌의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피와 눈물이 배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좌절의 절망과 고통을 견디며 조금씩, 느리게 민주주의를 쌓아나가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 촛불혁명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생명체이듯 민주주의도 불완전한 생명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욕망 사이에서 늘 위태로웠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 너머 저쪽에 있었다. 촛불 시민들이 광장에서 꿈꾼 것은 잘못 선출된 권력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민주주의 너머에 있는 저쪽의 민주주의였다.

 

다가오는 대선은 역사적 주체로서의 촛불 시민을 광장으로 다시 소환한다. 대선은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역사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의 염원을 얼마나 구현해왔는가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터이지만,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 통절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다. 촛불의 빛은 지금도 우리 사이를 흘러가고 있으며,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는 척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차기 정부가 갖추어야 할 것들 가운데 촛불혁명을 구현하는 의지와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깨닫게 된다.

 

촛불혁명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한국을 ‘꼭두각시 대통령의 나라’라고 보도했던 외신 매체들이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자 한국인의 높은 민주주의 의식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그동안 미국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여겨왔고, 한국이 민주화를 이룬 지 불과 30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경이로운 진보다”라고 했고,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촛불혁명을 계기로 재벌이 주도하는 허약한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는 물론 외교정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개혁을 추진하는 동력을 얻었으며, 세계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모델이자 지정학적 핵심 플레이어가 되려는 순간과 마주 섰다”라고 썼다.

 

촛불 시민들이 희구한 것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주권자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훼손된 유권자의 존엄성을 되찾는 역사적 행위였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람다운 삶’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은 신냉전과 극우 포퓰리즘,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 등 갈수록 위험해지는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의 역할이 그만큼 높아져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정부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형성된다.

 

20대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촛불혁명의 계승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차기 정부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의 손에 촛불혁명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