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상을 거머 쥔 ‘기생충’에 쏠린 찬사와 ‘오징어 게임’ 열풍, 그리고 ‘BTS’(방탄소년단)의 폭발적 인기 등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근래 세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 급등과 선망은 “우리가 언제 이렇게 덩치가 커졌지?“하는 상전벽해의 뿌듯함을 자아낸다.
그런데 왠지 어색함이 뒤따른다. 국력이 커진 만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는 게 당연할 테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자랑과 대단한 것들만 내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여전히 미숙하고 모자라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결함도 한 둘이 아니어서 어설픈 선진국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이 앞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민주주의 쟁취의 민권승리를 일궈냈음에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판의 풍경들은 한국의 아킬레스건이요 지극히 후진적인 모습의 대표격이다.
전례없이 세계적 화젯거리로 등장한 대통령선거가 그걸 말해준다. 쿠데타가 사라진 민주적 선거와 평화적 정권교체 정착, 대선 결과가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 분석 등에 쏠린 눈길이라면 감지덕지일 텐데, 속사정은 그런 게 아니라 가십(gossip)과 낯뜨거운 조롱이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후보자로 나선 여야 유력 인물들의 독특하고 비정상적인 이력과 캐릭터, 거기에 배우자를 둘러싼 온갖 추문과 풍설이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연유다.
화제의 주역 이재명과 윤석열은 벌써 글로벌 인물로 부상했다. 정책경쟁과 국정능력에는 눈감은 치열한 네거티브도 난무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후보의 상반되는 면모와 대처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명암과 취약한 정치현실을 읽는다. 소위 보수와 진보를 대하는 국민들의 선입견과 현실의 괴리도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본다
이재명 후보는 ‘개천에서 용’이 된 변방 출신이다. 그는 이른바 ‘형수 욕설’과 ‘여배우 염문’ 등에 ‘대장동’ 의혹과 ‘아들 리스크’가 이어지며 고전한다. 여전히 불신의 눈으로 보는 이들도 많지만 적극적인 해명과 사과, 그리고 법원 무죄판결에 헛다리만 짚는 검찰수사까지 이어지면서 상당히 희석된 듯하다. 화전민 출신의 불우한 가정사와 역경 속의 삶에 몸부림치며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입지전적 성공신화를 일군 의지와 저력이 뒤늦게 알려진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는 건 많은데 말이 많다 바꾸기를 잘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반면 윤석열 후보는 부유한 집안이 배경인 검사출신이다. 흔히 ‘칼잡이’라는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어 총장까지 됐지만, 자신을 발탁한 정권과 상관에 대한 우직한 배신과 항명으로 뜻하지 않게 대선후보 반열까지 올랐다. 문제는 이른바 본인·부인·장모를 뜻하는 ‘본부장’ 리스크의 심각성이다.
본인은 검찰의 정치중립 파괴에다, 재임 중의 숱한 선택적 수사와 내 사람 봐주기에 ‘고발사주’, 법원의 ‘징계 판결’ 등 부적격 논란이 거세다, 현재 재판 중인 장모 관련 비리 의혹들에 특히 부인 김건희 문제는 양파껍질 같아서 더 심각하다. 결혼 전후의 사생활 논란과 주가 조작 연루설, 스폰서 특혜 등 이권 의혹에다, 무려 18건에 달한다는 학경력 위변조는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혐의도 나온다. 어쩌면 투표 날까지 사상 처음 부인없이 혼자만 뛰는 후보로 두고두고 회자될 지도 모르게 생겼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기획이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사과에 인색하다. 이들 일가의 수많은 추한 행태에도 어떻게 대선 후보로 살아남는지가 불가사의일 정도인 한국 정치와 민도(民度)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윤석열 후보의 경우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 정의’란다. 불공정과 불의한 세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솔깃한 말이지만, 스스로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사람의 외침은 공허한 말잔치요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도 들먹여진다. 그가 특수통 검사로 독하게 수사했던 사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호출된 2007년의 ‘신정아 사건’은 그의 처 ‘김건희 의혹’의 도플갱어이고 빼박이다. 조국 사건의 ‘표창장’문제도 들먹여진다. “정경심이 4년 징역이면 김건희는 몇 년이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로남불’ 부메랑이라는 비아냥도 강하다.
어느 후보든 설령 당사자에게 흠결이 있고 배우자의 심각한 치부가 드러난다 해서 대통령이든 영부인이든 못할 것이야 없다. 하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감싸안고 남의 눈의 티끌만 호되게 매질하는 허울좋은 공정과 정의라면 선량한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하고 국가권력 조차 사유물로 여길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비리와 의혹 투성이 후보가 우매한 군중들로 인해 대통령이 된다한들 어쩌랴!. 판단과 선택은 국민의 몫이다. 혜택을 누리는 것도, 피해를 입고 눈물을 삼키는 것도 결국은 다수 국민이다.
그래도 하나만 강권한다. 열심히 뛰어 대통령이 되라. 다만 전제가 있다. 대권을 그렇게 쥐고 싶거든, 제발 ‘내로남불’을 시인하고 사죄하라. 가족 누구든 비리와 범죄 혐의라면 인정하고 스스로 징벌을 요구하라. 그러면 그저 나리들의 하는 꼴을 지켜보며 먹고살기에 바쁜 범생이들은 잘난 놈들 세상만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임기 말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웃도는데도 오로지 ‘반문재인’을 외치면 정권교체가 되리라 생각하는 단순명쾌함은 그렇다 치자. 탄핵 당한 정당이 다시 집권을 호소하려면, 적어도 ‘이번 대통령후보는 국정을 망치지 않을 자질과 태도를 갖췄다’고 국민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윤석열 후보가 지난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부인 김건희씨의 ‘허위 경력’ 논란을 사과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박찬수 | 대기자
윤석열 후보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가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나온다. 선거란 게 언제나 요동치게 마련이고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신문·방송이 앞다퉈 보도했던 걸 기억하면, 지금의 출렁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대선을 70여일 앞둔 시점에 맞닥뜨린 윤석열 후보의 위기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는 배경엔, ‘과연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국가 운영을 잘해낼 수 있겠는가’라는 ‘대통령 자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잘하거나 못하는 범위를 넘어서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국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참담한 상황이 재연될 수 있으리란 불안감이 윤 후보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국민의힘은 5년 전 탄핵 이전의 새누리당에서 별로 바뀐 게 없다. 지난 6월 전당대회에서 36살의 청년 이준석을 당대표로 선출한 게 변화의 상징인 양 포장됐지만, 그 젊은 당대표는 지금 윤 후보 측근들의 조리돌림 속에 대표직에서 쫓겨날지 모를 처지에 놓였다. “나는 윤석열 후보 지시만 따른다”며 당대표를 치받은 조수진 국회의원의 행동에서, 박근혜 대통령 시절 오로지 ‘박심’을 쫓으며 충성 경쟁을 벌였던 수많은 ‘친박’, ‘진박’ 인사들의 잔영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허위 이력’ 파문에 휩싸인 김건희씨가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제가 남편을 처음 만난 날 검사라고 하기에 무서운 사람인 줄만 알았습니다. … 몸이 약한 저를 걱정해 밥은 먹었냐, 따뜻하게 입어라 늘 전화를 잊지 않았습니다”라며 연애편지 읽듯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걸 보노라면, 대체 윤 후보 캠프엔 부인의 기자회견문 하나 제어할 수 있는 참모가 없는 건가 새삼 놀라게 된다. 그렇게 대선 후보의 눈에 들어 권력을 잡으면 한자리 하겠다는 사람들로 가득찬 정당이 집권했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박근혜 정부가 이미 똑똑히 보여줬다.
김건희씨의 허위 이력과 논문 표절 의혹은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며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끝낼 사안이 아니다. 비슷한 사안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를 가혹하게 수사하고 사법처리한 게 바로 검찰총장 시절의 윤석열 후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정과 정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윤 후보가 자기 아내의 허물에 대해선 “판단은 국민의 몫”이라고 무심하게 넘기는 모습에서, 그에게 덧씌워진 가공의 이미지는 현저히 빛이 바랜다. 비록 결혼 전의 일이지만 장모의 사기 및 건강보험 부정수급 사건이 왜 윤 후보가 검사로 재직할 때는 죄가 되지 않다가 그가 검찰을 떠난 뒤에야 사법적 단죄를 받는 건지 국민은 의구심을 갖는다. 국민의힘이 그토록 비난했던 ‘내로남불’의 극치가 바로 윤석열 후보인 것은 아닌가.
대통령 선거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큰 선거다. 설령 아내와 장모의 문제가 있더라도 또는 자식이 속을 썩일지라도 쉽게 판세가 흔들리지 않는다. 윤석열 후보 본인이 지도자로서 능력을 갖췄다면, 그래서 젊은 이준석이 튀고 늙은 김종인이 우왕좌왕하는 낡은 정당을 휘어잡을 정치력을 발휘한다면, 지금 이렇게 휘청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의 본질은 윤석열 자신에게 있다. 며칠 전 유튜브에 올라온 <삼프로티브이>의 윤 후보 대담을 보면, 그가 경제 현안을 제대로 고민해본 적은 있는지, 오로지 근거 없는 자신감에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묻는 패널들의 질문에 윤 후보는 “실력 있는 정부는 시장에 개입을 해도 문제가 없지만 실력 없는 정부는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라고 답했다. 자신이 집권하면 검찰 수사를 할 때처럼 언제든지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뜻인가. 그 실력이 뭔지를 설명해야 국민이 믿고 투표할 텐데, 실력을 보일 생각은 안 하고 “내 실력을 의심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데서 검사 특유의 독선과 오만을 엿보게 된다. 그래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에서 조직관리를 해봤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 맡겼다”고 칭찬한 거 같은데, 윤 후보나 주변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런 권한 위임도 위험해 보일 뿐이다.
임기 말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웃도는데도 오로지 ‘반문재인’을 외치면 정권교체가 되리라 생각하는 단순명쾌함은 그렇다 치자. 탄핵 당한 정당이 다시 집권을 호소하려면, 적어도 ‘이번 대통령후보는 국정을 망치지 않을 자질과 태도를 갖췄다’고 국민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윤석열 ‘폭주’…“독재정부는 산업화, 이 정부는 바보들 데려다 나라망쳐”
TK 찾은 윤, 막말 수위 높여…안동 선대위 출범식서 즉흥연설
“토론 같잖다” “조사하면 감옥 갈…” 연이틀 이재명 향해 비난 퍼부어
문 정부 겨냥 “무식한 3류 정권” “북 주사이론 집단” 색깔론도
민주당 “초조한 나머지 대선 진흙탕 몰아넣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29일 1박2일 일정으로 대구·경북 지역을 찾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문재인 정부를 향해 “무식한 3류 바보들을 데려다 나라를 망쳐놨다”며 “독재 정부가 산업화 기반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두고는 “(대장동 의혹을) 조사하면 감옥에 갈 (사람)” “(이 후보와) 토론하는 것은 어이없고 같잖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최근 부인 김건희씨 허위 경력 파문 등으로 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하자 초조해진 나머지 보수층에 호소하려 발언 강도를 위험수위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윤 후보는 이날 경북 안동의 경북도당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해 원고 대신 즉흥연설로 문재인 정부 비판을 시작했다. 윤 후보는 “저와 제 처, 누이동생까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통신 사찰을 당했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검찰개혁 해서 권력 남용 막고 국민 위한 공정한 검찰 만들겠다며 공수처를 만든 거 아닌가. 결국 국민을 속였다. 사찰 정보기관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당 의원들 60% 정도가 통신 사찰을 당했다”며 “제가 볼 때는 대선도 필요 없고, 이제 곱게 정권 내놓고 물러가는 게 정답이지”라고 했다.
색깔론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현 정부를 겨냥해 “좌익 혁명 이념, 북한의 주사이론 배워서 민주화운동 대업에 끼어 마치 민주화 투사인 것처럼 지금까지 끼리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이렇게 살아온 그 집단들이 이번 문 정권 들어서서 국가와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전문가 들어오면 자기들이 해먹는 데 지장이 있으니 무식한 3류 바보들 데려다가 정치를 해서 나라 경제 망쳐놓고 외교·안보 뭐 전부 망쳐놨다”며 “권위주의 독재 정부는 우리나라 산업화 기반 만들었다. 이 정부는 뭐 했나. 정말 가지가지 다 하는 무능과 불법을 동시에 다 하는 엉터리 정권”이라고 맹비난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북은 핵개발 계속하고 미사일 펑펑 쏘는데 종전선언 하면 뭐 하나. 떡이 나오나, 국민의 먹거리가 나오나”라며 비난했다. 이어 “자유민주주의 지키려고 하는 것인지 이 나라를 사회주의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인지”라며 색깔론을 동원하며 종전선언을 비판했다.
윤 후보는 전날에 이어 이재명 후보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토론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이 후보가 대장동) 특검을 왜 거부하느냐. 죄를 지었으니까 거부하는 것이다. 진상을 밝히고 조사를 하면 감옥에 가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라며 “민주당에서 후보가 저보고 토론을 하자고 하더라. 제가 바보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음습한 조직폭력배 이야기, 잔인한 범죄 이야기를 다 밝히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재명 후보의 공약 수정을 언급하면서 “집권여당 후보는 잘하는 게 한가지 있다. 변신술이다” “제가 이런 사람하고 국민들 보는데 토론을 해야겠나. 어이가 없다. 정말 같잖다”고 말했다. 윤 후보는 전날도 이 후보를 “중범죄가 확정적인 후보자”라고 칭했다. 윤 후보는 이 후보가 대장동 사업의 핵심이며 “관여한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한다”며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하고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재산을 국민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윤 후보는 당원들에게 “뭉치면 정권교체고 흩어지면 국민약탈”이라며 “정권을 회수하지 못하면 정말 한국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진다”고 지지를 당부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후보가 마지막으로 기댈 것은 네거티브 전략밖에 없냐”며 윤 후보를 비판했다. 조오섭 선대위 대변인은 논평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돌아서는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경북까지 내려가 경쟁 상대에게 색깔론을 덧씌우고 독재의 낙인을 찍으려는 것”이라며 “윤석열 후보는 대통령선거를 진흙탕으로 몰아넣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둠으로 덮으려는 무책임한 책동을 중단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앞서 윤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공사가 중단된 경북 울진의 신한울 3·4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을 찾아 공사 재개를 약속했다. 그는 원자력발전 비중을 30%대로 유지하고 원전 수출을 통해 일자리 10만개를 창출하겠다고 말했다. 울진 안동/배지현 기자, 최하얀 기자
“내가 하면 수사, 남이 하면 사찰?”…윤석열 검찰 땐 282만명 통신자료 조회
여야 모두 제도 개선 없이 ‘사찰’ 주장만 반복
국민의힘 “공수처, 의원 78명 통신자료 조회”
윤 “게슈타포나 할 일…대통령되면 책임 묻겠다”
정작 서울중앙지검장 때는 홍준표 비서 조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3월4일 검찰총장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들머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소속 의원 105명 가운데 최소 78명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다며 ‘불법 정치 사찰’을 주장하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배우자 김건희씨도 조회 대상이 됐다고 한다. 이 사안을 두고 “공수처 존폐 검토”를 언급했던 윤석열 후보는 29일 “대통령이 되면 공수처의 불법 행위에 책임있는 자들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공수처가 게슈타포나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조회 대상인 된 ‘통신자료’는 이동통신서비스 가입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서비스 가입·해지일 등이다. 공수처가 법원 허가 없이 간단한 사유만 적어 이동통신사에 요청해 받아낸 것들이다. 검찰 등 수사기관은 우선 법원 영장을 받아 수사 대상자의 통화 내역을 확보한다. 통화 내역에는 수사 대상자가 통화(발신·수신)한 누군가의 전화번호와 통화 시간 등이 뜬다. 수사기관은 이 전화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동통신사에 통신자료를 요청해 이름 등을 확인한다. 범죄와 연관이 있는 인물로 드러나면 추가 수사가 이뤄지지만 대부분은 일반적인 통화여서 버려진다.
국민의힘은 공수처의 고발 사주 의혹 수사 대상이다. 지난해 4월 ‘손준성 보냄’ 텔레그램 메시지를 이용해 김웅 국민의힘 의원에게 전달된 고발장이 그해 8월 당 공식계통을 통해 법률자문위원장이던 정점식 의원실을 거쳐 당 법률자문위원에게 전달됐다. 이 고발장은 당 공식직인이 찍힌 뒤 대검찰청에 접수돼 실제 수사와 기소까지 이뤄졌다. 피의자로 입건된 윤석열 후보와 김웅 의원 등 수사 대상자와 통화한 불특정 다수에 대해 공수처가 통신자료 조회를 했고, 이 과정에서 의정활동 등으로 통화가 잦은 국민의힘 의원들 다수가 그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공수처가 통신자료 조회 논란에 대해 “수사 중인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기 어렵다”면서도 “고발 사주 의혹 수사”를 언급한 이유다.
사찰이 성립하려면 처음부터 대상자를 특정해 통신자료 조회가 이뤄져야 하는데 통신자료 조회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조회가 어떤 성격이고,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잘 알고 있다. 윤 후보가 검찰총장으로 재직한 2019년 하반기부터 2020년까지 1년6개월 간 검찰은 모두 282만6118건(전화번호수 기준)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다. 수백만명의 국민이 통신자료 조회를 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나갔다.
서울중앙지검은 2017년 3월과 4월 두 차례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 수행비서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다. 윤석열 후보가 서울중앙지검장이던 그해 8월에도 수행비서 통신자료 조회가 이뤄졌다. 홍 전 대표 쪽은 “사찰”을 주장했지만, 당시 서울중앙지검은 “수사 대상자와 여러 차례 통화한 전화번호 가입자 인적사항을 확인하다 그 중 한명이 수행비서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사찰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조선일보>는 “통신자료 조회는 통신 수사의 한 수단일 뿐 특정인을 겨냥한 사찰로 단정짓기 어렵다. (사찰 주장 등) 여야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기보다는 통신조회 남용 방지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통신자료 조회가 구체적 통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시기에 누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등 ‘인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할 수 있다. 수사·정보기관이 이를 다른 용도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법무부와 경찰청 등 수사기관은 “수사 사실 노출 우려”를 이유로 통신자료 조회를 당한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도록 하는 등의 개선안에 반대 의사를 밝혀왔다. 검찰 출신이 대거 포진한 윤석열 대선 후보 캠프와 국민의힘에서도 이 문제를 ‘불법 정치 사찰’로 선거 쟁점화할 뿐 정보·인권단체 등에서 10년 넘게 요구해온 통신자료 조회 제도에 대한 근본적 개선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도 야당이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언론인·정치인 등에 대한 수사·정보기관의 통신자료 조회를 ‘불법 사찰’로 규정했지만, 거대 여당이 된 지금은 조회 근거가 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통신자료 조회 제도 개선 운동을 지속적으로 펴온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지난 27일 “통신자료 제공 요청은 위헌적인 제도임에도 윤석열 후보 자신이 검찰총장직에 있었던 검찰은 물론 경찰 등 수사기관들이 일상적으로 자행해 온 것이다. 오히려 규모로 따지면 공수처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다. 윤 후보 발언과 같이 사찰이 된다면 검찰총장 재직 시절 이뤄진 검찰의 통신자료 요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가 하면 수사, 남이 하면 사찰인가”라며 통신자료 조회에 대한 영장주의 도입 등 근본적 개선 방안을 촉구했다. 전광준 기자
윤석열의 원전 공약, 전문가들은 탄식했다
원전 비율 30% 공약에 “어디에 지을 것인가”
“MB 정부 땐 원전 80기 수출 공약…못 지켜”
재생에너지 경쟁력 상승 등 시장 바뀐 탓
“원전, 목적 아닌 기후위기 대응 수단이어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9일 오후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중단 현장을 방문, 탈원전 정책 전면 재검토와 신한울 3·4호기 건설 즉각 재개 등 원자력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윤 후보 뒤로 보이는 원자력 발전소 돔은 공정률 99%에 시험 운전 중인 한울 1, 2호기다.
29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원전 관련 공약을 발표하자 전문가들은 현실성 부족과 위험성을 먼저 꼬집었다. 일부는 탄식하고 조소했다.
이날 윤 후보는 “세계 최고의 원전기술력을 재입증해 원전 수출의 발판을 마련할 계기가 될 것”이라며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와 가동원전의 계속 운전 등을 통해 기저전원으로서의 원자력 발전 비중 30%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윤 후보는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조화한 탄소중립 추진”이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재생에너지 확충보다는 원전 활용을 선명히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부터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향후 5년내 원전을 30%대로 유지한다는 공약이 특히 그렇다. 2000년 40% 비율이었던 원전은 지난해 29%로 감소 추세에 있다. 사실상 늘리는 정책이 된다.
한병섭 원자력안전연구소장은 “원전 비율 30%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폐로 원전 수명을 고려할 때 6기 정도를 더 지어야 한다. 노후 원전을 폐로하지 않고 계속 가동한다면 안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월성 원전은 사용후핵연료가 새고 있다는 문제 제기까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비율을 유지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사용후핵연료 폐기물 처리도 난제다. 영구처분장에 기본적 합의도 마련하지 못한 가운데, 기존 원전시설에서의 방폐물 임시저장을 이어가며 지역사회 갈등이 비등하고 있는 상황이다.
윤 후보의 소형모듈원전(SMR) 개발 지원을 통한 원전 강화 방안에 대해서도 한 소장은 “SMR이라도 수십개를 더 지어야하는데 어디에 지을 수 있을까, 2,3층으로 올릴 것인가, 지을 땅이 없다는 걸 알고 합리적인 대안을 세워야 한다. 원자력에 대한 종교적 접근(맹신)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원전 수출(10기 이상)을 통한 일자리 10만개 창출 공약도 비현실적이란 지적이 많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12월 아랍에미리트(UAE)에 APR-1400 4기를 수출한 뒤 원전 수출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이명박 정부 때 2030년까지 80기의 원전을 수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UAE 수출 이후 1기도 추가하지 못했다”며 “게다가 10기면 약 40조원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 돈을 들여 일자리를 10만개만 창출한다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했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UAE가 애초 이명박 정부와 논의했던 추가적 원전 건설을 취소한 이유는 태양광 발전 사업 단가가 하락하면서 산업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유럽도 유럽연합의 강화된 안전 기준과 시장경쟁 과정에서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 영국의 원전들이 모두 애초 견적대비 2배 이상 상승하고 있다”며 “결국 중동이든 동유럽이든 세계적으로 원전 퇴조 추세에서 (한국이) 수출할 시장은 없다”고 말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원전 안전 문제와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의 원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윤 후보에겐 원전이 ‘목적’이 되어버렸다는 탄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선 나온다. 현 정부와의 차별화 전략으로서 치닿는다는 우려로도 읽힌다. 한병섭 소장은 “절전하고 에너지 효율을 올리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온실가스를 줄이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합리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의) 수단으로 활용할 원전을 더 짓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는데 이런 접근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윤 후보는 “신한울 3·4호기를 건설할 경우 석탄발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연간 약 1700만톤 감축할 수 있고, 10기 운영할 경우 연간 약 5천만톤을 감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원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원전을 가동하면서 생기는 온배수를 바다에 흘려보내는 문제, 이미 포화 수준의 사용후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은 검토되지 않은 모양새다. 최우리 김민제 기자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지난 21일 오후 국회 당 대표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상임선대위원장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편집국에서] 신승근 | 정치에디터
국민의힘을 혼돈에 빠트린 이준석 대표와 조수진 최고위원의 ‘선대위 격돌’을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이다. 자기 정치에 몰입한 이 대표를 탓하는 이들, 대선 후보를 팔아 완장질하는 조 최고위원을 비난하는 이들로 갈린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정권교체가 물 건너간다”고 근심하지만 분란은 필연에 가깝다. 변한 듯하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국민의힘의 현실을 드러낸 블랙코미디일 뿐이다.
선대위 공보단장의 지시 불이행을 지적하며 체계와 계통을 문제 삼은 이 대표의 지적이 틀린 게 없다. 하지만 당대표가 대선에서 손을 떼는 처방을 할 만큼 중대 사안인지 의문이다. 정당엔 실세, 이른바 ‘핵심 관계자’가 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대선에선 더욱 그런 존재가 힘을 쓴다는 걸 보수 정당에서 10여년 구르며 성장한 이 대표가 더 잘 알 것이다.
더욱이 지금 국민의힘은 반문재인 세력이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확실한 주인이 없는 정당에 모여든, 이익공동체에 가깝다. 누구는 용광로, 누구는 잡탕밥이라 부른다. 사실 ‘윤석열-김종인-이준석 삼각편대 선대위’는 정치 초년병과 킹메이커를 자처한 원로, ‘이대남 정서’에 기대 성장한 30대 당대표가 힘겨루기를 거듭하며 급조한 ‘대선용 프로젝트 팀’ 성격이 강하다.
서로 이해도 다르다. 윤 후보는 ‘조국 일가’ 수사 등으로 ‘공정과 정의’라는 상징자본을 구축했지만 독자 세력화엔 실패했다. 결국 “별의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김종인 위원장과 ‘경선버스 정시 출발론’을 외친 이준석 대표의 압박에 밀려 국민의힘에 몸을 실었다.
김 위원장과 이 대표는 내부에서 대안을 찾지 못해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인 그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안에서 존재감을 키워온 이 대표는 진짜 당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가 “선거에 대한 무한 책임은 후보자가 갖게 된다”며 선대위 직책을 내던졌지만 당대표 사퇴 요구엔 “내가 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건 본심을 잘 드러낸 장면이다.
김 위원장도 국민의힘엔 나름 지분이 있다.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고,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국민의힘을 기사회생시켰다. ‘보수 꼴통당’ 이미지를 탈색한 것도 그의 기여가 제일 크다. 그러나 그를 불편한 존재로 여기며 비토하는 이들도 많다. 상당수는 윤 후보의 ‘핵심 관계자’다. 이 대표가 당무를 거부한 채 제주로 울산으로 떠돌며 윤 후보와 힘겨루기 한 끝에 가까스로 김 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다시 입성할 수 있었다. 이번 갈등은 한배를 탄 김종인·이준석 팀과 윤 후보와 ‘윤핵관들’이 울산 회동을 통해 대강 봉합한 균열이 18일 만에 다시 깨진 것일 뿐이다.
조 최고위원의 완장질은 갈등을 폭발시킨 불씨일 뿐이다. 모든 문제는 윤 후보에게서 비롯했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면서 정작 아내의 허위이력엔 내로남불 행태를 보이며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윤 후보 때문에 분란은 시작됐다. 조 최고위원의 공보단장직 사퇴로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을 크게 키운 것도 윤 후보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라며 조 최고위원을 보호하려 했다. 이 대표가 상임선대위원장직을 사퇴하자 김 위원장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모습을 보인 건 대통령이 되려는 윤 후보의 자질과 판단력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했다. 국민의힘 게시판에 ‘대선 후보 교체’와 ‘당대표 사퇴’를 요구하는 상반된 글이 빗발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이번에도 김종인 위원장이 구원투수로 나선 모양새다. 김 위원장은 “그립을 세게 쥐겠다”며 선대위 개편을 공언했고, 윤 후보는 추인했다. 유력 주자와 협력하고 갈라서기를 반복해온 김 위원장은 일단 후보와 공생을 모색하고 있다. 공정경제를 내걸고 네거티브 중단을 지시하는 김 위원장의 존재는 위기의 윤 후보가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가릴 수 있는 그럴듯한 가림막이다. 그러나 윤 후보 스스로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실현할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국민의 선택을 받을 자격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 측근들도 완장질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당원과 국민을 설득하는 겸손함을 먼저 배워야 한다. 윤 후보와 ‘윤핵관들’의 자질과 능력에 의문을 키운 유권자들도 더욱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봐야 한다.
2016년 11월8일 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윤곽을 드러내자 <뉴욕 타임스> 정치담당 기자들은 혼비백산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확신한 나머지 반대 상황엔 아예 대비하지 않았는데, 투표함을 열어보니 승자가 도널드 트럼프였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 편집국장을 지낸 질 에이브럼슨은 저서 <진실의 상인들>(Merchants of Truth)에서 당시 1면에 ‘마담 프레지던트’(여성 대통령) 기사를 준비해두었던 기자들이 황망하게 책상으로 뛰어가던 모습을 묘사했다. 그들은 여론조사를 믿었던데다, ‘여성혐오 발언과 성추행을 일삼던 남자가’ ‘탈세 등 의혹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놀람 속에 집권한 트럼프는 세가지 ‘퇴행’으로 미국 사회에 내상을 남겼다. 첫째는 과학을 부정하고 전문가를 불신한 일이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급속히 퍼질 때, 트럼프는 방역책임자의 판단을 무시하고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를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트럼프 추종자들의 방역 비협조, 백신 음모론과 취약한 의료보험시스템이 겹쳐 미국에선 지난 2년간 3억3천만 인구 중 80만명이 코로나로 숨졌다. 우리나라 청주시 인구만큼이 사라진 것이다.
트럼프의 두번째 퇴행은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깨고 지구적 과제 해결을 방해한 것이다. 그는 2017년 취임 직후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기후변화 부정론자였던 그는 탄소배출 규제가 기업의 이익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 이어 탄소배출 2위인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기후위기 대응 동력은 떨어졌고, 기후재난은 가속화했다.
그의 세번째 퇴행은 소수자 혐오를 선동하고 사회갈등을 부추긴 것이다. 그는 여성을 비하했고, 장애인을 조롱했고, 유색인종·이주민·난민을 범죄자로 몰았다. 백인 경찰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억울하게 죽인 데 항의하는 시위대에게 발포 위협도 했다. 그가 ‘코로나19는 중국 탓’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한 후 미국 곳곳에서는 한국인 등 아시아인을 겨냥한 ‘이유 없는 폭행’이 급증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 트럼프는 엄중한 교훈을 준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재난 상황에서 국민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수 있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지구적 과제 해결을 망치는 ‘민폐 국가’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쟁취한 인권과 민주주의도 잃을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석달간 우리는 ‘퇴행’이 아닌 ‘전진’의 길로 나라를 이끌 사람이 누구인지, 정신 바짝 차리고 따져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여론지형은 걱정스럽다. 후보의 가치관과 정책을 검증하기보다 가족을 둘러싼 추문 공방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가족이, 특히 세금으로 활동을 지원받게 될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따져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이 될 인물의 생각과 정책을 검증하는 일보다 중요하진 않다. 연간 수백조원의 예산과 군대, 경찰, 행정 조직을 움직이는 책임자를 뽑는 일이다. 과연 민생과 인권, 민주주의를 개선할 사람인지, 아니면 뒷걸음치게 할 사람인지 살피는 데 우리는 더 집중해야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최저임금제 후퇴를 시사했고, “주 120시간 바짝 일하고 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발언 등으로 노동인권 침해 우려를 샀다. 기후위기를 막기엔 정부의 탄소감축 목표가 낮다고 환경단체들이 비판하는데도, 그는 기업을 위해 더 낮춰야 한다는 의중을 보였다. 또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지 않았다”며, 기본적 사실관계도 모른 채 탈원전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국토보유세 기반의 기본소득을 공약했다가 ‘국민이 반대하면 안 하겠다’고 물러섰다. 부동산 불로소득 차단을 외쳤지만 이를 위한 공시가격 현실화에 제동을 걸어, ‘표를 위해 원칙을 허무는 사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그는 탈원전을 공약하고도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검토를 시사하는 등 모호한 행보를 보인다.
언론은 이런 문제들을 집중 점검해야 한다. 후보들의 진짜 생각은 무엇이며, 실제 추진할 정책은 어떤 것인지, 날카롭게 따져 물어야 한다. 그래서 퇴행이 아닌, 좀 더 안전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나라로 전진하게 할 대통령감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