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정적 제거의 흑역사

● 칼럼 2023. 2. 28. 00: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영국작가 조지 오웰이 쓴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년’은 소련의 스탈린 공포정치 시대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의 공산 독재와 나치, 파시즘을 비판한 이 소설 속의 빅 브라더가 바로 스탈린이고 임마누엘 골드슈타인은 트로츠키를 모델로 했다는 것이다.

스탈린 독재치하 소련인들은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살았다. 혐의자 한 명이 체포되면 그 주변인들이 줄줄이 끌려가 고문과 살해를 당했다. 친구나 친지도 의심하며 상호 고발이 장려됐다. 부부, 연인이 증오로 변하고, 상대방 고발 전에 먼저 고발해야 목숨을 부지했기에 의도적인 무고도 횡행했다. 냉혈한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은 간첩·모반죄를 씌우면 그만이었다. 트로츠키를 내쫓고 삼두체제를 구성했던 혁명동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연루자 160명과 함께 처형했다. 당시 비밀경찰 수장 겐리흐 야고다의 손을 빌려 25만명의 당원을 내쫓거나 처벌했는데, 그가 불안해하자 총살시키고 니콜라이 예조프를 앉혀 대숙청을 벌였다. 예조프도 스탈린의 사냥개가 되어 날뛰었지만, 역시 총살당해 팽(烹)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만 100만명 안팎이 처형됐다고 한다. 하루평균 1500명을 총살했다니 스탈린은 ‘인간 백정’소리를 들으며 피로 지탱한 권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도 빼놓을 수 없다. 총리 취임 이후 6개월 만에 전권을 쥔 그는 자신의 경호조직인 SA(Sturmabteilung:돌격대)가 세력이 커지자 게쉬타포와 군대를 동원해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 사건을 일으켰다. SA 대장 에른스트 룀과 그의 부관 하이네스 등을 처형하고, ‘떡 본 김에 제사’격으로 최대 정적 폰 슐라이허 전 총리와 반대파 클라우제너, 나치당내 거물 슈트라서, 자신의 반란 미수 사건인 ‘뮌헨 폭동’을 진압했던 폰 카르도 등을 일거에 제거한다.

 

중국의 정적 제거 고사는 셀 수가 없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뒤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를 상장군, 문종을 승상으로 임명하지만, 범려는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영화를 함께 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구천을 떠난다. 그는 문종에게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良弓藏 狡兔死走狗烹)"는 편지를 보내 피신하라 충고했지만, 문종은 주저하다가 반역의 의심을 받아 자결하고 만다. 원조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연원이다. 명장 한신이 유방을 도와 전국을 통일하고 황제에 오르게 하지만 반역을 염려한 유방에게 참수당하고 삼족 멸문지화를 입는 비운의 고사도 유명하다.

 

원래 정적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독재권력의 속성이다. 왕조시대 전권을 휘두른 군왕들 조차 비판적인 신하와 반대파, 공신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고 숙청을 일삼았다. 이는 정적의 쓴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권력에 도전하는 불안요소로 여긴 포용력의 한계와 추종자들간의 다툼, 이간질에 기인한 바가 컸다.

한국사에도 여러 사화를 비롯해 사례(史例)는 부지기수다. 조선 초 벌어진 정적 제거전은 어지럽고도 잔혹한 피의 난무였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암살당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과 개국공신 정도전 등을 살해한다. 1차 왕자의 난에 방원과 합세했던 형 방간은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을 죽이려다 패해 유배조치를 당했다. 역성혁명의 주역인 태조가 피튀긴 권력쟁탈에 얼마나 상심했으면 왕위를 던지고 함흥으로 떠나버렸을까. 그후 세조가 사육신을 필두로 수백명을 학살하고 단종을 죽인 사실도 널리 회자된다.

근현대에 들어 이승만이 김구 암살을 사주한 사실, 조봉암을 사법살인한 것도 독재권력의 잔인한 만행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야권의 거두 김대중을,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이려고 안달했던 사실은 국민들 뇌리에 새겨져 있다.

북한 세습정권도 반대파 숙청의 많은 기록들이 있다. 김일성 시절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과 이승엽 등 13명을 간첩과 정권 전복음모 등 혐의로 처형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김정은 정권 초기 실세였던 고모부 장성택과 그 일파를 처형한 사건도 정적을 두고보지 못하는 독재권력의 속성 그대로다.

 

나중에 자업자득의 비참한 말로로 귀결되기 일쑤지만,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이 정적 말살을 꾀하는 것은 정통성이 결여된 무소불위 권력의 취약과 불안감에 위기와 도전이 두렵기 때문이다.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정치 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다수 제1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야당대표를 범죄자로 간주한 검찰권의 총동원 수사가 끝도없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검찰독재’의 실증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정적제거 공작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엄청난 국력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편집인 칼럼] 새해 고진감래(苦盡甘來) 건강법

● 칼럼 2023. 2. 28. 00:2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새해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모두의 제일의 소망은 건강이라고 믿는다. 건강이 무너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건강은 신체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건강, 심령의 평안함이 중요하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임계선을 넘으면 육신의 병으로 도진다. 스트레스가 암을 유발한다는 경고는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 평안하기, 넓게 보아 정신건강 지키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를 감싸고 평생을 붙어다니는 걱정과 불안, 공포와 분노, 강박 스트레스 등의 ‘평안을 해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 넓게는 우주적-지구적인 문제들에서부터 우리 모국의 갈등 양상들, 작게는 가정과 개인의 사소한 고민들까지, 때로는 걱정을 안해도 될 뿐더러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기우(杞憂)성 염려들까지 끼어들어 머리 주변을 맴돈다.

그렇게 누구나의 일상에 필요악(必要惡, 숙명의 악)같은 존재라면, 공존하거나 혁파의 지혜가 필요하다. 슬기롭게 평정과 평안을 찾아 곧은 심지(心志)와 건강을 지키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우리는 올 한해 건강한 삶을 위해 매일 부딪히는 외부적 충격파, 심리적 강박 요소들에 대처하고 다스릴 단단한 채비를 해야한다.

새해는 특히 여러모로 불안과 위기가 예고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아무리 험하고 속상해도 평정심을 잃지말되, 임계선까지는 지혜롭게 참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덕목과 인내의 철학으로 심신의 평안과 건강을 지켜냈으면 하는 소망이다.

 

지구촌의 거대한 불안들은 우리 삶과 마음들에 찬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동시간대를 살기에 전 지구적 문제들도 이제 개인적 심리의 영역에까지 큰 파장이 미치는 공통의 불안요소로 작용한다. 개개인의 내밀한 고민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삶을 압도하기도 한다.

2년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기름값과 물가고, 고금리 등으로 직결되면서 올해는 더 쪼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커진다. 팬데믹에 멍든 비즈니스가 한층 더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일상이 팍팍해지면 공연한 화풀이도 늘어날텐데, 재수없이 동양인 표적범죄에 휩쓸리는 일은 없을지, 기후위기에 기상이변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폭설과 홍수, 허리케인, 정전 등의 재난이 언제든 덮쳐올 수 있으니 그 또한 안심할 수 없다. 3년이 넘도록 우리 곁을 맴돌며 파상공세를 펴고있는 코로나 위협에서도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글로벌 분석가들의 올해 어두운 전망 가운데는 전쟁불안이 번지고 있는 한반도 상황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칫 화약고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사람들은 날로 대결이 심화되고 있는 조국의 안위에 더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다. 핵 문제와 미사일 공방에서부터 드론 사태까지 긴장과 대결이 날로 격화되는데, 진정성 있는 대화노력은 없고 외교는 난맥에 빠져 ‘참사’니 ‘굴종외교’니 ‘국격추락’ 등 소식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외치의 연장선에서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 자조하는 내정과 리더십의 난맥은 스트레스를 더한다. 국제기구가 한국은 공식적 선진국이라고 칭할 때 동포들 가슴이 뿌듯했었는데,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찬밥 신세인 걸 보고도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6위라고 든든해 하다가, 북의 드론이 서울상공을 헤집고 다녔다는 소식에 탄식한 연유도 그렇다. 경제와 사회는 어려워지는데, 가진 자 위주의 역주행과 무능, 검찰통치의 독선을 우려하는 소리가 갈수록 거세진다. 갈등을 조정하고 국정의 방향을 짚어 줄 정치와 국회가 실종과 표류상태를 맴도는 것도 한심하다. 홍콩과 미얀마 시위대들이 5.18을 선망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때, 아 우리 조국이 민주주의 선진국이구나 자부했는데, 교과서에서 5.18을 지운단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모르는지, ‘반헌법 세력’이라고 비판집회를 매도하는 대통령, 노조를 ‘북한핵’에 비유하며 적 무찌르듯 제압해 국제노동기구의 반감을 사고도 이긴 줄로만 아는 무도한 정권을 보며 분노지수는 높아진다. 비판언론을 쫓아내고 소송과 압수수색 반복으로 겁박하는 독재적 언론관 역시 국제 망신거리여서 창피한 까닭이다. 언론마저 제 갈 길을 잃으며 국민의 눈과 귀가 통제받는 40여년 전 암흑시대로의 역행을 개탄하는 외침이 들린다.

 

국제사회의 불안 요소들은 세계인 공통의 고민이어서 글로벌 공동체적인 집단지성과 해결의지가 작동하면서 일정한 방어선 형성이 기대된다.

하지만, 단일 정치-사회 공동체인 모국의 이슈들은 외력의 영향 보다는 거의 자력 해결해야 한다. 우리들과 후손들까지 직결된 세대불문의 상수(常數)이기에 관심이 커질 수 밖에 없는 문제다. 더구나 보편적인 국제기준과 역사적 연원, 상식과 양심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걱정과 불안, 분노 등의 지수가 높아져 맥박이 빨라지는 게 일말의 정의감이라도 있는 동포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처단한 국정농단 부패사범을 풀어주는 어이없음과 제편만 챙긴 뻔뻔한 사면 복권, 야당대표와 전 정권은 검사 150여명을 동원해 물고 늘어지면서 ‘증거가 차고넘치는’ 대통령 부인·장모 범죄는 모른 척 외면하는 내로남불의 극치, 아예 대놓고 뭉개고 덮어버리는 몰상식 사례들을 보고도 무감각하다면 정상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수십년 전의 퇴행, 아니 그것을 능가한다는 권력의 오만불손이 국민 정신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상황이다.

 

비정상과 몰상식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비정상이고 몰상식한 것이다. 부정과 불법, 불의에 무반응인 것 역시 부정하고 불법이며 불의한 것에 다름 아니다. 불공정과 불평등에도 불만이 없다면, 차별에 무감각하거나 공정과 평등의 의미를 모르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상적인 상식과 균형감각을 지닌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라면 불안과 분노지수가 높아지는 게 자연스런 현상이다.

정상이 아닌 상황을 접하고 솟구치는 분노와 마음의 격동을 달래고 평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모른 체, 회피해 버리거나 “누군 털어서 먼지 안나나” 하고 체념과 용인의 비겁을 택한다. 또 한 부류는 “꼴불견도 지나가려니”하고 삭이며 감내한다. 하지만 ‘벽에다 주먹질이라도’ 하는 열혈족들은 뛰는 심장의 에너지를 안고 광장을 향한다. 그들은 그래야만 분이 풀리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힘들고 험한 세상을 살아오며 참고 또 참았다. 그래서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한이 서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내의 비등점을 넘어설 때는 무도하고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다. 민심의 폭발과 정의로운 항거로 쌓이고 담아둔 한을 쏟아냈다. 수난의 민족사는 위기를 넘나든 백성들의 심적 울분 해소와 정신건강 해법을 말해준다. 아울러 민초들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분노지수를 촉발시킨 자들의 인과응보 결말도 보여준다.

열등감을 포악으로 보상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상징하는 사이코패스적 학정과 착취, 끝없는 재물욕에 견디다 못해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났다. 이완용 등 매국 역적들의 변신에 폭발한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삼일혁명으로 분출했다. 반민특위를 친일 경찰로 무참히 해체시켜 일제 잔재 청산을 무산시킨 이승만은 김구 암살과 사사오입 개헌, 3.15부정선거 등 민심을 무시한 독재로 치닫다가 참다못한 4.19 학생의거로 쫓겨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소불위 독재가 5.18 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 등 수많은 시민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 현대사 역시 후안무치를 참다 못한 국민의 울분이 터져나온 것임은 역사가 말해준다.

 

하찮은 강아지도 제 잘못은 알고 머리를 쳐박거나 구석에 숨는다. 그런데 후안무치 권력은 부끄러운 줄도, 미안함도, 책임도 모르고 상대멸시, 국민무시로 일관해 소시오패스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의 쉬후이라는 역사가는 ‘뻔뻔하고 독한 자들 전성시대’라는 책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하고, 간악한 술책을 부려 남을 모함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며 살인과 나라를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고 몰양심 권력자들을 서술했다. 철학자 애런 제임스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빗대 3대 ‘철면피 자질’을 거론했다. "철저히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처신하면서, (공복인 주제에) 자신에게 그럴 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다른 사람이 불만을 표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했다. 1920년대 마피아 수장 알 카포네 조차 “(권력층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폭 두목이 언급한 묘사까지 너무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문제는 조폭적 소시오패스 행태는 하루 아침에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도 ‘악인들의 형통’에 대한 의구심을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자들이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하나님은 이에 대해 선한 자들을 연단시키기 위함이라면서 때가 이르면 반드시 심판하여 공의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고진감래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심판의 때를 안다면 참을 만하다 하겠으나, 끝없이 설치는 악인들의 작태를 감내하는 고통이 범인(凡人)들에게는 곧 응어리와 한이 되어 비등점을 향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새해 건강의 화두는 우리에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뻔뻔하고 독한 ‘머슴’들의 행태를 견디며 최대한 제어해 나가야 하니 보통 힘든 일인가, 비등점-임계점을 눈 앞에 두고 마음과 정신줄을 힘껏 붙들어 다잡아야 하는 현실, 무시당하는 주인들 처지가 된 우리 모두가 직면한 시대적 고민이다. 올 한해 ‘고진감래’의 지혜를 되씹으며 단단히 각오할 일이다. 사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대와 심신의 건강을 다짐하며.

< 김종천 편집인 >

 

 

[세상읽기]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헛소리

● 칼럼 2022. 12. 28. 04: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사법부가 확정한 이명박씨 범죄사실 중 하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위에서 100억원이 넘는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파렴치범이자 세계적 망신이다. 대한민국은 공무원의 뇌물죄를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1억원 이상 뇌물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공무원이 100억원을 훨씬 넘는 뇌물을 받고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는데, 2년 살고 끝나는 경우는 없다. 전직 대통령 말고는.

 

 
2021년 2월10일 서울동부구치소 수감 도중 기저질환으로 50여일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원하는 모습. 연합뉴스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이명박씨가 사면됐다.

사법부가 확정한 이명박씨 범죄사실 중 하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위에서 100억원이 넘는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파렴치범이자 세계적 망신이다.

대한민국은 공무원의 뇌물죄를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1억원 이상 뇌물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공무원이 100억원을 훨씬 넘는 뇌물을 받고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는데, 2년 살고 끝나는 경우는 없다. 전직 대통령 말고는.

대통령실과 여권은 ‘국민통합’을 이야기한다. 사면 때마다 늘 나오는 명분이고, 늘 납득하기 어렵다. 뇌물 받아 자기 배 불린 고위공직자 죄를 면해주는 것이 누구와 누구의 통합에 도움이 되나? 죄인에 대한 법원의 유죄 판결이 사회를 분열시킨단 말인가?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표자는 특별하다는 주장도 있다. 주장 자체도 설득력이 없지만, 이번 사면에는 선출직이 아닌 원세훈,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등도 포함됐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면권이란 그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권에 속했거나 가까운 사람들이 향유하는 특권일 뿐이다. 정치권에 강력한 로비를 할 수 있는 경제계 인사 역시 그 특권을 알뜰하게 나눈다.

이명박 사면에 야권이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사면만큼 정치권이 한목소리인 사안도 많지 않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까지 그 어떤 정권도 사면권 행사를 자제하거나 공정한 기준을 세우지 않았다. “‘국민대화합’, ‘경제 살리기’ 등 그럴싸한 명분으로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기업인들에 대한 사면·복권”, “대통령의 측근이나 정권창출의 공신을 슬쩍 집어넣고, 야당 정치인도 적당히 끼워넣음으로써 물타기를 하는 것”.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 한 신문의 사설이다. 오늘치 사설이래도 손색없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신성불가침 권한처럼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다. 헌법 제79조 1항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감형 또는 복권을 명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즉, 법률로써 사면의 원칙과 한계를 정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을 만드는 정치권이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스스로 제한했을 리 만무하다.

사면법은 1948년 정부조직법 다음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제2호 법률이다. 그 이후 2007년에서야 첫번째 개정이 이뤄졌다. 헌정사상 가장 오랜 시간 개정되지 않은 법률이 사면법이다. 그만큼 가장 통제받지 않은 권한이 대통령의 사면권이었다. 이제는 한 단계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대선 때마다 후보들은 사면권 행사 자제를 공약한다. 사면권 통제가 필요하다는 여론도 충분하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권이 ‘사면권을 남용하는 현 대통령을 견제하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과감한 제도 개선을 기대할 수도 있는 국면이다. 사면법 개정 방안에 관해 여러 논의가 있다. 뇌물죄 등 특정 범죄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법, 사면 절차에서 사법부나 피해자의 의견을 듣는 방법 등이다.

필자는 두가지 방향을 특별히 주장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사면 대상을 ‘최저 형기 경과자’로 제한하는 것이다. 형기의 반, 최소한 3분의 1은 복역해야 사면 대상에 포함될 수 있어야 한다. 사면은 사법부가 내린 결정의 효력을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당연히 권력분립의 원칙, 법 앞의 평등 원칙과 대립한다. 이 헌법적 긴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안은 일정한 처벌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면을 성문헌법에 최초로 규정한 미국의 경우 형기가 종료한 이들을 사면 대상으로 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두번째는 2007년 도입된 사면심사위원회의 실질화다. 사면심사위원회를 법무부 산하가 아닌 독립적 위원회로 격상하고, 절반 이상이 대법원·국회 추천 등 외부위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의결을 거친 이들만 사면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일반사면은 국회 동의를 요건으로 뒀지만, 특별사면은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바로 이 공백을 이용해 수십만명, 수백만명 규모 특별사면이 남용돼왔다. 일반사면을 국회가 통제하듯이 특별사면 역시 독립기구를 통해 제한돼야 한다.

한때 ‘군주의 대권’으로 명명되던 사면권의 축소, 제한은 세계적 추세다. 위 두가지 원칙이 입법된다면 사면권 행사는 자연스럽게 엄격한 기준 아래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이는 헌정사의 중요한 발전이 될 것이다.

 

[편집인 칼럼] 스토커 기자와 아양 언론

● 칼럼 2022. 12. 12. 12:4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 편집인 칼럼]  스토커 기자와 아양 언론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듯이,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들은 귀에 따갑고 신경에 거슬리는 법이다.

불의에 눈감거나 물러서지 않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소명에 충실한 언론의 비판적 소리가 위정자들의 귀에 달가울리는 없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자들은 주인인 국민들의 쓴소리와 회초리를 달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머슴이 주인 눈치를 보기싫다면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공직자들이 국민의 위임을 받았듯이 언론은 -물론 사익이 아닌 공익에 승부를 건 언론을 말하지만- 국민을 대신해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론의 질타를 무시해선 안되고, 귀를 기울이며 복무자세를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언론이 동네북 신세가 되어 버렸다. 특히 권력자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언론다운 언론’은 갈수록 심각한 면박과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현상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상스런 발언영상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해외순방 특별기 탑승을 봉쇄하고 기자단에게 징벌해달라고 요구하는 기이한 사건은 국제적 망신거리가 됐다. 발언 영상이 수많은 매체에 보도됐는데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언성을 높여 잡아떼는 것도 가관이었다. 특정 방송사 하나를 꼭 찍어서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만들어 보도해서 동맹을 이간질했다“고 단정하는 기상천외한 비약은 가히 경이로웠다. 방송을 보고들은 수백만 수천만의 국민들은 ‘눈에 보여도 못보고 귀에 들려도 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되어 버렸다. “바이든이 아니라 국내 야당을 향한 말이었다”고 공식 브리핑으로 일부나마 인정했던 대통령 홍보수석은 틀림없이 정신이상자였고-.

 

언론이 조롱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를 듣게 된 것은 큰 불행이다. 언론답지 못하고 기자답지 못한 저널리즘의 타락상을 말해 주는 자업자득의 업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열심히 취재를 하려는 기자가 범법자 용어인 ‘스토커’로 전락하고 취재대상은 ‘신변보호’ 혹은 접근금지 대상자가 되어 아예 취재영역에서 제외되고 보호받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더구나 ‘스토커’는 짝사랑 상대나 빚진 자 같은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일반인이 아니라,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 특히 법무장관이라는 고위공직자를 취재하기 위해 쫓아다닌 열혈기자였다. 국민의 위임을 받아 세금으로 국록을 받아먹는 고위 공직자라면 매사 투명하게 봉직하면서 국민들이 까발리고 설명하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요구에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밀착 취재하는 기자들을 스토커라고 범죄인 규정하면서 처벌대상으로 삼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말라며 방호벽을 치고 위협하는 상식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이 “스토킹을 하지말라”고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니, 기자를 진짜 법적인 스토커로 만드는 데 법관이 거들고 나선 셈이다.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자유를 지켜줘야 할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마저 본령을 저버리고 무소불위 검찰 위세에 쫄아든 것인지, 역시 상식의 반전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정권 보수 일색인 언론 지형인데, 몇몇 비판적 언론사를 공박하며 지원예산을 삭감하고 민영화 칼을 빼들고 있다. 눈엣가시 기자를 고소하고 10억대 소송까지 한다. 듣기 좋고 입맛에 맞는 ‘아양 언론’만 남기겠다는 안하무인의 발상이다.

바로 세계 10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대한민국에서 최근 목도하는 일들이다. 어쩌면 30~50년 전 군사독재 시절을 능가한다는 시각도 나온다.

 

30년 전, 도쿄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일본 총리의 특별기에 동승해 한국을 방문한 기억이 떠오른다.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가 경주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였다.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해 온 한국기자였지만, 일본정부는 총리 특별기에 선선히 태워주었고, 다행히 호소카와 총리의 진솔한 과거사 반성 언급을 취재하기도 했다. 정치 후진국 일본이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뤄 진보성향의 소수 연립정권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총리 특별기에 외국기자를 태우고, 특히 보도 논조를 따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돌아보아도 타산지석이다.

 

30년 전의 일본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다.  왕조시대에도 사관들의 목숨 건 직언과 선비들의 도끼상소(持斧上疏: 지부상소)가 있었기에 왕을 깨우쳐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었다. 군사 독재정권의 망령도 개탄스러울 진대, 한 술 더떠 치졸하고 조폭적인 언론핍박을 대놓고 자행하다니 무슨 전제 왕권인 줄 착각한다면, 제 발등 찍는 일이었음을 깨달은 때는 이미 늦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