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 소설가 칼럼] 촛불혁명과 대통령 선거
촛불혁명은 훼손된 유권자의 존엄성을 되찾는 역사적 행위였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람다운 삶’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20대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촛불혁명의 계승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정찬 | 소설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는 역사학자 이 에이치(E. H.) 카의 명언이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빛을 급속히 잃어갔다. 인터넷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면서 과거를 돌아보는 힘을 빠르게 상실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신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만 달려가게 한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니 과거는 잊힐 수밖에 없다. 과거의 중요성은 현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척도의 역할에 있다. 이 척도를 상실하면 현실에 매몰되어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대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한 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촛불혁명을 다시 돌아볼 가치가 있다. 2016년 10월29일 1차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2017년 4월29일 23차 촛불집회까지 183일 동안 1685만2천명의 시민이 참가해, 구속자와 사망자 한명 없이 민주주의의 질서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평화롭고 장엄한 혁명은 부패와 무능, 통치 권력의 비정상성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304명의 생명과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이게 나라냐’라는 절망스러운 깨달음과, 국민이 뽑은 대통령 권력이 비선실세에 의해 행사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형성된 분노였다. 집회에서 한 시민이 치켜든 팻말의 문구 ‘모이자! 내 나라다’에 주권자의 분노와 간절한 열망이 집약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박정희 카리스마’였다. 그러한 후광에 감정이입 된 이들이 박근혜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물론 박근혜도 불행에 빠뜨린 것이었다.
2016년의 마지막날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시민들. 촛불집회는 2017년 4월29일까지 이어졌다.
촛불혁명이 진행되던 2016년 겨울의 주말은 유독 추웠고 눈비가 많이 내렸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11월26일, 광화문광장이 휑할까 걱정하며 나온 사람들이 150만명이었다. 영하 11도로 집회 이후 가장 추웠던 2017년 1월14일과, 한파에다 강풍까지 휘몰아친 2월18일에도 촛불의 열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열기로 집회장 안의 온도가 바깥보다 4도에서 6도까지 높았다.
촛불혁명이 그전의 혁명과 구분되는 것은 혁명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많은 ‘나’가 저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외치고, 노래 부르고, 퍼포먼스를 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파편화되어버린 ‘나’가 ‘우리’로 변화하면서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피 흘림 없이 승리를 쟁취한 혁명을 이룬 것이었다.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함으로써 촛불혁명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세계에 확인시켰다. 촛불혁명이 시작된 2016년의 세계는 인종주의, 쇼비니즘, 기독교 근본주의, 안티페미니즘 등으로 무장한 극우 포퓰리즘에 신음하고 있었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심화되어가는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분노가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악성의 형태로 분출되어 난민 약자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 테러와 전쟁이 난무하는 지구적 상황 속에서 한국의 촛불 시민들은 민주주의 원리를 평화적으로 구현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그들의 놀람은 “도시가 시위의 불빛으로 이렇게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답다”라는 국외 네티즌의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피와 눈물이 배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좌절의 절망과 고통을 견디며 조금씩, 느리게 민주주의를 쌓아나가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 촛불혁명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생명체이듯 민주주의도 불완전한 생명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욕망 사이에서 늘 위태로웠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 너머 저쪽에 있었다. 촛불 시민들이 광장에서 꿈꾼 것은 잘못 선출된 권력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민주주의 너머에 있는 저쪽의 민주주의였다.
다가오는 대선은 역사적 주체로서의 촛불 시민을 광장으로 다시 소환한다. 대선은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역사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의 염원을 얼마나 구현해왔는가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터이지만,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 통절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다. 촛불의 빛은 지금도 우리 사이를 흘러가고 있으며,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는 척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차기 정부가 갖추어야 할 것들 가운데 촛불혁명을 구현하는 의지와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깨닫게 된다.
촛불혁명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한국을 ‘꼭두각시 대통령의 나라’라고 보도했던 외신 매체들이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자 한국인의 높은 민주주의 의식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그동안 미국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여겨왔고, 한국이 민주화를 이룬 지 불과 30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경이로운 진보다”라고 했고,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촛불혁명을 계기로 재벌이 주도하는 허약한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는 물론 외교정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개혁을 추진하는 동력을 얻었으며, 세계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모델이자 지정학적 핵심 플레이어가 되려는 순간과 마주 섰다”라고 썼다.
촛불 시민들이 희구한 것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주권자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훼손된 유권자의 존엄성을 되찾는 역사적 행위였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람다운 삶’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은 신냉전과 극우 포퓰리즘,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 등 갈수록 위험해지는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의 역할이 그만큼 높아져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정부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형성된다.
20대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촛불혁명의 계승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차기 정부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의 손에 촛불혁명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론] 공간이 의식 지배한다...그래서 ‘용산’이 걱정이다 (0) | 2022.03.22 |
---|---|
[시사컬럼] ‘묻지 마 정권교체’는 곤란하다 (0) | 2022.03.05 |
[목회칼럼] "욕심을 버리십시오" (0) | 2022.03.01 |
[칼럼] 윤석열의 상식 밖 언행, 참을 수가 없다 (0) | 2022.02.22 |
[칼럼 3제] 윤석열의 무지와 철학빈곤, 검찰 만능주의 위험하다 (0) | 2022.02.16 |
[목회 칼럼] 겨울밤 단상- 이글스필드 한인교회 장성훈 목사 (0) | 2022.02.15 |
‘비선’ 김건희, 최순실보다 위험할 수 있다 (0) | 2022.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