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의 소망과 축원 

온타리오 한인 교회협의회 김주엽 회장  (토론토 강림교회 담임목사)

 

코로나 19 펜데믹의 파도를 지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그리고 형제 자매들을 대면예배를 통하여 진심으로 대면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32:3)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느 날과 똑 같은 하루이지만, 우리는 많은 의미와 뜻을 부여하며 새로운 출발과 소망을 이루어 가길 원합니다. 시간 안에 사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지난 한 해 교회들과 성도들마다 ‘엔데믹’이라는 새로운 도전 속에 본격적인 대면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역교회 현장에서 드리는 ‘대면예배’는 (對 대할 대, 面 얼굴 면) 즉, ‘얼굴을 맞대고 드린다’는 뜻입니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를 ‘비대면 예배’ 라고 불렀습니다.

올 새해에는 이런 바램과 기원을 담아봅니다.

먼저, 온타리오주 안의 모든 교회들과 교우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얼굴 공동체’ 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과거 3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목회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이 [한국 교회 트랜드 2023 & 2024] (by지용근 외) 인데,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중의 하나가 바로 ‘소그룹’, ‘작은 공동체’ 라고 합니다. 소그룹은 장소로서의 교회가 아닌, 신앙공동체로서 건강함, 즉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여 가장 가까이서 돌보고 사랑합니다. 이런 소그룹 공동체의 건강한 모습이 교회가 코로나의 재앙을 이겨내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대면하는 공동체’, ‘얼굴 공동체’가 되는 것이 소중한 가치요, 지향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토론토 중심의 이민사회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이익과 명예만을 쫓고,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안녕과 위로, 치유, 그리고 진정한 회복을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힘으로 세워지는 공동체에서 경험되어져야 하며, 그런 면에서 교회는 얼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온타리오주의 모든 교회들이 서로의 얼굴을 헤아릴 줄 아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약 성서에 보면 얼굴(fanim)이라는 단어는 항상 복수형으로 언급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천의 얼굴’의 사람들입니다. 기쁠 때의 얼굴, 슬플 때의 얼굴, 화날 때의 얼굴, 아플 때의 얼굴, 등 다 제 각각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맞대어 보여 주시면서 다가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2:11, 개역 한글)

서로의 얼굴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대로, 그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고, 뒤에서 격려하는 교회들의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세워 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온타리오주 안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뜻합니다.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다양한 친교와 나눔의 공동체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브니엘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 날을 기약하였던 그 소망이, 우리 온타리오주의 교회들마다 경험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공동체!’

우리가 소망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5-26)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마지막으로, 창간 18주년을 맞이하는 시사 한겨레의 지면(紙面), 곧 그 얼굴이 새해에도 변함없이 더욱 더 알찬 기사와 평론으로 채워 나가길 기원합니다.

지면, 곧 신문의 얼굴이 되는 기사와 평론을 채워가는 것이 여러가지 사회과학적 진보와 온라인 매체들의 발전으로 쉽지 않은 도전이 되겠지만 꾸준함으로 정론직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꾸준함과 한결같음이 미래의 삶을 모색하는 이민자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는 시사 한겨레가 되길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2024년 새해를 많이 하여 온타리오주의 모든 교민들의 건강과 평안, 그리고 교회들의 부흥과 성숙을 기원합니다.

[성탄 칼럼] 죽어가는 사람들

● 칼럼 2023. 12. 24. 13:2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 칼럼] 죽어가는 사람들

 

윤형복  목사 < Eastern Europe Connection 교수 >

 

세상에는 전쟁으로 질병으로 천재지변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다. 사랑을 주고 받는 훈훈한 성탄의 계절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인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책이 있다. 내용인즉, 서로 사랑한 두 남녀가 결혼을 했다. 이들은 몹시 가난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선물을 해야 할텐데 선물 살 돈이 없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를 아름답게 단장할 빗을 사주기로 했다. 남편은 차고 있던 시계를 전당잡혀 빗을 샀다. 아내는 남편의 선물을 무엇으로 할까 곰곰히 생각했다. 남편의 낡은 시계줄을 새것으로 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기의 아름다운 머리를 잘라 팔아서 그 돈으로 시계줄을 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들은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 하지만 찰 시계가 없고 빗을 머리가 없으니 그 선물들은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이것은 선물의 양이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좋으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목적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심을 기억하는 시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선물로 주신 시즌이다.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 사랑의 선물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한 선물인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 거룩함과 함께(with Holiness), 조용함과 함께(with Silence) 가족과 함께(with Family), 이웃과 함께(with Neighbor) 맞이하는 성탄의 계절인 것이다. 모두와 함께 기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인류에게는 평강의 성탄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인 칼럼] 코미디 연속극 시대

● 칼럼 2023. 12. 24. 13:1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코미디 연속극 시대

 

 

검찰이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 혐의가 있는 전직 대통령을 잇달아 쇠고랑 채우자 국민들은 환호했다. 특수통 검사들은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강골’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증언대에서 큰소리 치는 바람에 더더욱 스타덤에 오른 윤석열 검사는 당시 이명박과 박근혜를 잡아넣었던 특수부의 중심 멤버였다. 두 전직 대통령에게 윤석열은 ‘저승사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벼락부자가 되듯 어느날 대통령이 된 ‘강골검사’ 윤석열은 언제 내가 잡아넣었느냐는 식으로 박근혜와 이명박을 서둘러 사면했다. 제 손으로 옭아넣었던 범죄자들을 제 손으로 풀어준 자가당착의 코미디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남은 형기가 창창하고, 갚아야 할 벌금도 엄청난 액수였지만, 전혀 따지지 않고 돌연 ‘은전’을 베푸는 객기에 기가 막힌 것은 국민들이었다. 내 손으로 결박했으니 내가 풀겠다는, ‘결자해지’로 치부되기에는 너무나 이해가 안되는 황당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막대한 국가적 손실과 상처를 떠안은 국민들은 사회정의와 정치부패 근절의 여망이 무참히 짓밟히는 상실감과 박탈감, 정치-사법불신의 트라우마를 되씹어야 했다. 아마도 윤석열 시대 블랙코미디의 서막을 여는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엑스포 유치에 참패한 이후 부산시민들을 달랜다며 기업활동에 바쁜 대기업 총수들을 동원해 벌인 국제시장 ‘떡볶이 먹방쇼’는 어떤가. 프랑스 파리의 폭탄주 파티에 이어 시장바닥에 들러리 세운 재벌 총수들과 기업 또한 윤석열 자신이 특수부에서 국정농단의 공범들로 처벌했던 ‘묵시적 뇌물’의 당사자들이다. 탄핵당한 ‘윤 사단’의 이정섭 검사가 자신이 수사한 재벌의 향응을 받고도 당당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코미디나 개그 같은, 아니 진짜 블랙 코미디 혹은 즉흥 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검찰정권’의 정치희극이 하루가 멀다하고 전개되어 쓴웃음과 탄식에 분노까지 유발하고 있다.

윤석열이 자신을 검찰총장 시절 ‘채널A 사건 감찰 및 수사 방해’ 등으로 징계한 처분이 잘못됐다며 제기한 소송의 피고가 채널A 사건의 당사자인 한동훈의 법무부인 재판이 ‘역시나’로 선고된 전말도 그 대표적 코미디의 하나로 손색없이 등극했다. 원고와 피고가 ‘형님 아우’인 한통속이니 짜고치는 게임이라는 예상을 적중시킨 법기술에, 법원까지 주눅들어 맞장구를 치고나온 사법코미디의 결정판을 선보인 것이다.

1심은 꼼꼼히 법리와 사안을 따져 ‘징계 2개월은 약하다. 면직도 마땅하다’는 추상같은 판결로 법무부 승리를 선언했다. 그런데 대통령과 법무장관으로 윤석열과 한동훈의 신분이 바뀐 뒤, 피고 법무부는 패하려고만 애를 쓰는 기괴한 소송을 했다. 승소 변호사들을 해임해 버리고, 공판에서는 증인 한사람 부르지 않은 채, 제출하라는 서면이나 답변은 미루고 버텼다. 원고와 피고의 증인신문 시간이 70대 7이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초록동색이 된 2심 판사는 징계사안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는 법구절 하나를 아전인수 해석하는 잔머리를 굴려 법무장관이 징계에 관여해선 안되는데 절차에 하자가 있었다며 ‘징계취소’를 선고했다. 윤석열 징계에 나섰던 전 장관 추미애는 “검사징계법을 그런 식으로 자의적 해석하면 검찰총창이 무슨 잘못을 해도 징계할 수 없다는 말”이라며 “덮어주기 위한 곡학아세를 위해 무지 애썼구나 하는 헛웃음이 나온다. 사법 치욕의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직격했다. 여러 법학자들도 대법원 판례까지 무시한 판결이며 법무부의 징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판이라는 지적들을 한다. 이제는 패소 목적을 이룬 한동훈이 과연 상고를 하겠느냐는 코미디 속편을 기대하는 상황이 됐다.

첫 각료인선에서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는 인물을 여가부 장관으로 보내는 코미디로 시작한 윤 정부다. 전광훈 집회에서 ‘문재인 목을 따겠다’던 극우인사를 국방장관으로 밀어부치고, 그는 과거 자기 부하 사병의 오폭 사망사고 진실을 장관권력으로 셀프 방어하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이명박의 BBK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어 대통령이 되는데 일조했던 김홍일이라는 검사는 이명박이 특검수사로 처벌을 받았어도 ‘무탈’하더니 윤석열 시대에 다시 두꺼운 얼굴로 승승장구 중이다. 억울한 국민을 보살핀다는 준엄한 기관 ‘국민권익위원장’도 버겁고 낯 간지러울 터인데, 사표도 내지않고는 전혀 생소한 ‘방송통신’위원장직 청문준비에 나서 “낙방하면 되돌아갈 작정이냐”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과거 변호사 시절 공수처에 대해 “사법절차 안에 난데없는 이질분자, 공수처는 괴물기관”이라고 혹평했던 사람은 공수처장 후보자가 되어 최종 추천절차까지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불행하게도 코미디 시리즈가 끝이 없다.

코미디는 웃기고 즐겁게 하며 카타르시스와 평안을 안겨줄 때 존재가치가 있다. 국민적 스트레스와 분노를 배가시키는 블랙(Black) 코미디·데드팬(Deadpan) 코미디류의 범람은 정치 사회 희화화는 물론 국가 저질화와 국민정신의 사막화를 재촉할 뿐이다.

 

고향 통영 그리고 어머니의 함박웃음.

 

임순숙 수필가

이른 아침 지척에 있는 ‘남망산 공원’ 산책길에 나섰다. 공원은 삼면이 바다인 통영의 지형을 축소한 듯, 어디에서든 선 자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크고 작은 섬을 품은 남해안 바다가 다양한 풍경으로 뭇시선을 사로잡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외형적 요소에다 나의 문학소녀의 꿈을 키우던 곳이라 수시수시 드나들기를 좋아한다.    

 흔히 동양의 나폴리라 일컫는 아름다운 통영항구를 끼고 약간 돌아가면 제법 가파른 공원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작부터 난이도가 꽤 있지만 길 위에 흩뿌려진 붉은 동백꽃을 손바닥 위에 하나 둘 올리다 보면 어느 사이 산 중턱에 올라와 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멀리 통영대교가 아른거리고, 새벽 조업을 위해 분주했을 아침바다엔 겹겹의 산 그림자가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나의 미욱함이 뒤엉켜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올 즈음 청마 유치환의 ‘깃발’ 시비(時碑)가 발길을 잡는다. 새파랗게 이끼 낀 행간 사이 사이로 그냥 너답게 살라는 강한 펄럭임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중략)              <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 중 >

꼬불꼬불 이어지는 노송숲, 동백숲을 거닐다 보면 이 고장이 배출한 문화, 예술계 거장들의 숨결을 도처에서 느끼게 된다. 자연이란 거대한 전시장에서 다도해의 잔잔한 물결을 배경 삼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 싶다. 두어 시간 자유로운 행보 끝엔 습관처럼 우리집 찾기에 열중한다.

 보일 듯 말 듯, 아흔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숨소리를 닮은 정든 집이 아련하게 잡히면 마음은 또 나락으로 떨어진다. 긴 타국살이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면하려 당신 곁을 지키고 있지만 늘 미흡하여 반성문 쓰기 바쁘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그 시점의 어머니를 인지하지 못하고 예전의 당신으로 착각하여 번번이 우를 범하고 있다. 다행히 어머니를 함박웃음 짓게 만든 사건이 최근에 있어 스스로 면죄부를 주려 한다. 

‘비진도’에서 낚시를 즐기는 친구부부와 제법 큰 고기를 몇 마리 낚아 올렸다. 하지만 이놈들은 낚시바늘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어서 번번이 놓아주어야 했다. 결국 빈 망태기로 돌아온 사연을 들으신 어머니가 얼마나 웃으시든지 …

머리 허연 노장들이 어린 고기한테 당했다며 내내 함박웃음을 터트리셨다.

며칠 후엔 예전의 실수를 만회하려 또 낚싯대를 드리웠다가 손바닥만한 고기 한마리를 잡았다. 이를 보신 당신은 또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낚시를 즐기시던 아버지의 망태기에선 한번도 보지 못한 고기를 낚았다며 또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모른다. 아무리 고기가 귀해도 낚시꾼의 망태기엔 결코 들지 못한다는 ‘망상어’란 고기가 또 한번 큰 웃음을 선사했다. 장모님을 위한(?) 고기잡이 구실이 생긴 셋째 사위는 오늘도 겨울바다에 나설 궁리를 한다. 

 돌아오는 길은 늘 활어(活魚)로 넘쳐나는 중앙어시장을 경유한다. 삶에 대한 열기가 최대치로 치솟는 현장의 아침은 고요했다. 불과 몇 시간 후 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그곳에서 밑반찬 몇 가지를 샀다. 돌아와 장바구니를 펼쳐보니 낯선 봉지가 또 나온다. 상인이 몰래 넣어준 감사의 표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함인가 보다.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음에도 그때마다 전해지는 감동은 배가 된다. 오랜 타국생활에서 잊고 지냈던 통영인심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에 고무된 산책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