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창조의 파괴

● 칼럼 2023. 7. 7. 06:5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창조의 파괴

박원철 목사 <늘사랑교회 담임>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천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性)의 구별은 성경적 가치관일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 인종과 나라를 막론하고 동일한 인류의 보편적 질서였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성적 구별은 성적 평등이라는 이름 하에 파괴되고 있다. 성의 구별에서 오는 차별을 없애고 성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활동가들의 주장에 의해 성별의 문화적, 생물학적, 사회적 및 심리학적 역할이 파괴되고 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내세우며 다양한 성정체성을 포용하자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적 구별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성의 구별이 파괴된 시대 상황 속에서 남자가 치마를 입거나 여자가 터프하게 남성적 복장을 하는 것을 뛰어넘어 요즘엔 남녀 성별 경계가 모호한 패션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성적 중립성의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에 언어에서 먼저 나타났다. 특히 상대적으로 성적 구별이 엄격하지 않은 영어권에서도 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mankind”를 “humankind”로, “chairman”을 “chairperson”으로, “manpower”를 “staff”로 바꾼 것이 일부 사례들이다. 심지어 “God our father”을 성적 중립 언어 사용이라는 명목으로 “God our parents”로 바꾸었다.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자 “세계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남/여”라는 성적 구별을 거세하고, 남/여 이분법으로 정의되지 않는 성소수자(LGBTQ)까지 아우르는 성적 중립 언어는 이 세상이 점점 성의 구별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의 시대로 바뀌어 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소수자의 인권과 성차별금지를 위해 활동하는 사회운동가들은 이러한 성별 파괴를 성적 차별을 없애고 성적 평등을 실현하는 “창조적 파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젠더리스(genderless)의 상황을 하나님의 “창조의 파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창조의 파괴”는 급기야 남성의 신체를 가진 트랜스젠드가 여성 전용 스파에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하였다.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 남성의 성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트랜스젠드가 한인이 운영하는 여성 전용 찜질방의 멤버십을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는데, 연방법원 워싱턴주 지법은 여성 전용 스파에서 남성의 신체를 가진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성차별금지 규정의 위배”라고 판결을 하였다고 한다. “진짜 세상이 완전히 미쳐가고 있구나!”

        성경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내용 중 하나는 “구조-방향”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각 영역에 부여하신 규범이나 본질은 “구조” (structure)로 설명하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왜곡을 “방향” (direction)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타락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본질(구조)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통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성적 중립성(젠더리스)나 동성애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왜곡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 파괴”의 시대에 끝까지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가는 “남은 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19:18).

 

[1500자 칼럼]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 칼럼 2023. 7. 7. 06:5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은의 길’을 완주하고.

임순숙 수필가

최근 세번 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하기 이전 계획했던 여행을 실행하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 자유롭지 못했던 기간 동안 산티아고라는 해방구는 상상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지만 때론 쉬이 나설 수 없는 상실감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이미 두 번의 완주 경험을 했음에도 마음 한쪽은 늘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마음의 병이 깊어지기 전에 하늘길이 열려, 삼월하순 ‘은의 길’ 출발지인 스페인 남부 세비야로 향했다. 이번 여정에선 그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지루한 길을 줄여나갔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 중 ‘은의 길(Via de la Plata )’은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에서 북쪽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1000km를 약간 웃도는 거리이다. 옛 로마시대의 군사들이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사용된 도로가 현재의 순례길로 전환되었으며 곳곳에 그 시대의 유적들이 산재하여 감상하며 걷는 재미도 특별했다. 스페인에서도 가장 스페인다운 곳으로 호평받는 ‘은의 길’은 아마도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주민들의 일상에 그대로 흡수되어 어우러진 옛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은의 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외로움의 길’이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수많은 길 중 ‘은의 길’을 택한 사람은 전체의 5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하루종일 걸어도 고작 5~6 명의 사람들과 스칠 정도였다. 순례길은 곧 고행의 길이라 외로움도 감수해야겠지만 때론 힘들기도 했다. 그 순간마다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짝꿍이 더 없이 고마웠고, 초반전 함께 했던 일행들의 안위가 몹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쩌다 그들 중 몇몇이 같은 숙소에라도 묵게되면 그날은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한동안 풀어내지 못한 갖가지 사연들을 토해내며 전의를 다지는 시간, 내일을 위한 활력을 비축하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우연히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일 뿐인데 서로의 감정을 그토록 잘 공유하며 다독일 수 있었는지, 아마도 외로움에서 온 산물이 아니었을까 쉽다.

꼬박 40여일 걷는 동안 우리부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의기투합했던 사람들은 불과 7~8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엄청난 산티아고 애호가, 혹은 하이킹 마니아 들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며 네잎 클로버를 나에게 쥐어준 아이슬란드 여인, 무려 11번 째 순례길 방문이라는 그녀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호쾌한 언변과 웃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리고 오래 전 부인과 이혼한 후, 여건이 될 때마다 ‘은의 길’만 고집한다는 프랑스에서 온 얀, 최근 부인과 사별한 후 3개월째 세계 여행 중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 Dussy, 그외 정말 하이킹을 좋아해서 오게 됐다는 미국, 독일계의 두 커플들과 긴 시간 함께 하면서 내린 답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온 몸과 마음을 바쳐 구현해 낸, 모든 순례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토론토 출신의 산티아고 애호가, 샌드라로 부터 장문의 이 메일을 받았다. 허연 싸리꽃이 온 산을 뒤덮은 어느 이른 아침이 몹시 그립노라고. 여름한철 서드버리 별장에서 식구들과 즐겁게 지내면서, 고생바가지 그때를 그리워하는 마음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번 가을엔 그녀와 브루스 트레일을 걸으며 특별한 하루를 보내려 한다.  

 

 

[목회 칼럼] "피투성이일 때를 기억하십시오"

● 칼럼 2023. 7. 7. 06:0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 칼럼] 피투성이일 때를 기억하십시오

 

생명나무교회   전상규 목사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 이후로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금리인상,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식상하기까지 합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황들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갑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한 후 다시 지친 어깨와 굳은 얼굴로 또 다른 일을 찾아갑니다. 말도 안되는 이런 상황들이 언젠가 나아지기를 바라며 치솟은 모기지와 렌트비를 당장은 온 몸으로 막아 보기 위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는 찾을 수 없고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집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사를 다 말려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잠시 이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단지 우리의 감사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성경의 에스겔서 16장에는 버려진 여자 아기가 나옵니다. 이 여자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피투성이인 채로 들에 버려집니다. 살아보려고 목청을 다해서 울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곧 기진해서 숨소리가 가늘어질 것입니다. 저만치서 짐승들이 아기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한 왕이 지나가다 죽어가는 여자 아기를 발견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 손으로 아이를 안고 간절히 이야기합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으라.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으라.” 그 이후 이 아이는 왕에 의해서 양육되고 결국은 왕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 아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아무 것도 없는 삶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후의 자리에 오른 여자는 곧 왕을 배신합니다. 왕과의 관계에서 낳은 자녀를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온갖 자신이 원하는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왕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여인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나는 왕후야. 나는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어.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왕은 그런 왕후의 처신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피투성이 일 때를 기억하라” (겔16:22,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않고)

죽어가던 네가 살려졌던 그때,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알몸이었던 그때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천들에게 피투성이일 때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주신 때입니다. 우리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던 상황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상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뿌리 내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들이 잠시 우리를 힘들게, 지치게, 그리고 쓰러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가 왕을 배신했든 하지 않았든) 만약 우리가 “피투성이”였던 때(아직 구원 받지 못한 때)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닌 다시 절대적 충만함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편집인 칼럼] 무뇌정권의 치명적 자살골

● 칼럼 2023. 3. 15. 04: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칼럼]

 

무뇌정권의 치명적 자살골

불과 일년 전 이야기다. 되돌아보기도 싫은 ‘손가락 절단’ 해프닝의 추억을 떠올린다. 허상과 위선의 맹신, 고집과 방관과 어깃장 등등이 얽혀서 초래한 사고투성이 운행 참사를 겪게 되면서, 허퉁한 미련이 진하게 남아있는 회한의 추억을 되씹어보게 된다.

일행은 듣지 않았다. 사고위험이 크다고, 설명하고 외쳐도 보고, 아무리 두 손 들어 말려도, 허상에 취한 그들에겐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엔진에 이상 신호가 뚜렷한데다 타이어도 펑크날 정도로 낡아 불안한데 운전사는 술까지 거나했다. 일행은 ‘괜찮다 운전 잘한다’고 감싸더니 ‘그래도 외제차인데 잘 굴러가지 않겠냐’며 고속도로 질주를 고집했다. 이 차로는 불안하니 다른 운전사가 모는 좋은 차로 가는 게 좋겠다고 거듭 말려보아도 “술 좀 먹으면 어떠냐”고 손사래 치며, ‘외제차’라는 철지난 매력을 내세워 다짜고짜 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향했다. 그리곤 잘한다는 운전술과 외제차 맹신에 힘입어 겁없이 폭주의 본색을 드러내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안예감 그대로 ‘십리도 못가’ 만신창이 사고투성이가 되었다. 난폭차량 한 대 만의 사고라면 모르되 갈팡질팡 좌충우돌, 연쇄추돌과 역주행에 상대 차선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온통 난장판을 만들었다.

일행은 진작부터 귀가 따갑게 외친 경고를 들을려고도 듣지도 않다가 곤경에 처했다. 장담코 손가락을 자르겠다던 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뒤에 손을 감췄다. 뻔뻔한 입으로 상처입은 운전자 변명하고 눈치보며 염치없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릴 뿐….

 

목이 터져라 외쳐 불길한 예감을 경고한 사람들은 현실이 된 불행 앞에 울화통이 치밀어 “마이동풍 흘려 듣더니 꼴 좋다!” 고 호통을 쳐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오물투성이를 이젠 어떻게 쓸어 담아야 하나.

예견된 경고 그대로 마침내 사고를 쳐 난장판이 됐어도, 여전히 주취 운전자도 괜찮고 외제차라 문제없다던 맹종자들은 “너네들이 잘못해서 사고난 것”이라 덤터기 씌우며 주변에 큰 피해를 준것도 자기들과는 상관없다고 우긴다. 손가락은 커녕 손톱도 자르지 않은 손으로 삿대질을 해대는 맹신과 고집 덩어리의 두꺼운 얼굴들, 대를 이어 내로남불의 자기만족을 즐기는 그들이 아직도 30% 안팎은 남아서 우겨대고 있다는 가상 아닌 현실의 이야기다.

 

승객을 호도한 난폭운전 차량의 예화는 그야말로 간단히 윤곽만 스케치한 데생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실제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지난 1년의 생화와 동영상을 펼쳐본다면, 참으로 가관이어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몰꼴들이 현실이니까.

 

나라 구석구석을 검사들이 꿰차고 앉아 수사권 기소권으로 겁박하며 점령군처럼 위세를 부리는가 하면, 자기 편 범죄는 눈감고 뭉개는 조폭적 검찰왕국이 됐다. 전 정권과 야당 죽이기에 올인하며 여당 조종만 노릴 뿐 실종돼 버린 정치, 비판 언론을 스토커범으로 모는 치졸한 언론정책도 천박하다. 무역적자·물가불안은 심각한데 대책없는 경제 쇠락, 남북간 전쟁위기 조성과 미일 종속을 가속화하는 안보와 외교무능에 속이 탄다. 가진 자들만을 위한 감세와 복지축소·민영화 꼼수, 국립공원 마저 훼손하는 난개발도 설친다. 사회 곳곳에 똬리 튼 수구 적폐들의 발호와 역사의 뒷걸음질이 거세다, 그렇게 민주주의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깊은 탄식소리….

 

민족 자존과 처철한 항쟁의 숨결을 되새기는 삼일절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피흘려 투쟁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자주독립의 고귀한 가치를 자학적 망언으로 짓밟고 모욕한 것도 생화의 한 컷이다. 일제 군국주의의 전쟁범죄를 불문에 부치며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파트너’라고 아양떠는 칭찬을 늘어놓아 일본 극우의 찬사를 들었다. 3.1혁명 후 104년 역사에 처음있는 망동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쳤으면 자유니 미래지향이니 버무린 미사여구에 현혹돼 유야무야 넘어갈 뻔 했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지향도 국정철학도 찾아 볼 수 없는 무뇌(無腦)의 본색은 이내 그 내장을 드러낼 수밖에.

그야말로 날강도에게 찔리고 얻어맞았는데, 미안하다는 반성의 말 한마디 듣기는커녕 “내 상처 내가 싸맬테니, 날 외면하지 마시고 제발 잘 돌봐주세요”하고 통사정하는 비굴하고 치욕적인 이른바 ‘강제징용 제3자 변제 해법’이란 것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아마도 위태위태한 ‘무뇌 정권’의 최대 최악의 치명타가 될 자살골을 날린 것이 아닐까.

 

한국민에게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 그런 돈은 굶어 죽어도 안 받는다!"는 양금덕 할머니의 외침 그대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 아닌 이상 어느 한국 사람이 일본에 굽신대고 무릎꿇기를 달가워하는가.

지난 1년간 ‘무뇌의 일탈’은 차곡차곡 수없이 쌓였다. 불의를 참지못하는 한국인들의 인내심은 비등점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리 선비적인 아량을 지닌 민족이라지만, 끓어오르는 결기의 분출을 5년이나 견딜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