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작은 펜도 두렵고 떨리는데

● 칼럼 2023. 9. 11. 12:4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편집인칼럼] 작은 펜도 두렵고 떨리는데

 

권범철 기자 만평

 

신출내기 신문기자 시절부터 귀에 따갑게 들어 온 말 가운데 하나가 그 흔한 ‘펜은 칼보다 강하다’ (Calamus Gladio Fortior)는 금언이다. 방송인들이야 그리스 작가 유리피데스가 말했다는 ‘혀는 칼보다 강하다’는 말에 매력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기사를 써서 글로 할 말을 하는 기자로서는 ‘펜이 더 강하다’는 말을 은근한 자부심, 또한 무게감으로 가슴에 품고 일을 해온 게 사실이다. 공권력을 자랑하는 경찰·검찰이나 군부대를 취재할 때도 주눅들지 않고 큰소리치며 추궁할 수 있는 힘과 배짱의 원천이기도 했다. 국민의 알권리를 뒷배로한 언론을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 라고 권력기관처럼 여기는 연원의 하나다.

글 한 줄에 반향이 일고 세상이 변하고 역사가 바뀌기도 하는 데서 펜이 총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가 낸 이른바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찬탁과 반탁의 대립과 분열을 심화시켜 결국은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지게 만든 역사적 ‘펜의 재앙’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의도에 오염돼 사실이 뒤바뀐 기사 몇 줄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되돌리기 힘든 고난의 길로 몰아간 것이다.

정의감으로 쓴 기사에 불의한 일들이 파헤쳐지고 사회적 징벌이 주어지는 경우 펜의 힘을 실감하게 되지만, 글 한 줄이 갖는 무게, 그 순작용 만이 아닌 역작용과 위험성에 대한 중압감과 책임감 또한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선하고 의로운 글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는 반면, 악하고 불의한 글은 불신의 씨앗과 사악한 죽음의 독소를 뿌려대는 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글은 아무나,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글 한 줄의 위력를 생각하다 보면 두려움이 엄습해 함부로 펜을 휘두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총칼도 잘 쓰면 문명의 이기(利器)가 되지만, 잘못쓰면 파괴와 살상의 도구로 쓰이니 함부로 다뤄선 안된다. 꿈의 에너지라는 원자력도 그렇다. 잘 활용하면 놀라운 에너지원이지만, 단 한 발에 수백만 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핵폭탄일 경우 인류 생존의 위험요소가 된다. 일본 후쿠시마 폭발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태평양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처럼 인류의 미래를 환경재앙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영화 ‘오펜하이머’는 천재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핵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전쟁사를 바꾸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내지만, 그 위력에 놀라 핵무기 회의론자로 변신해 고뇌하고 고난을 겪는 인간적 딜레마를 생생히 보여준다. 지난 5월 인공지능(AI) ‘딥러닝의 대부’로 불리는 토론토대학교 제프리 힌턴 교수(76)가 10년간 몸담고 연구해온 구글의 부사장급 석학연구원직을 그만 두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한 적이 있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습득한 AI가 자율 무기인 '킬러 로봇'이 되어 인간을 공격하는 현실이 두렵다면서, AI 연구개발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난 50년간의 자신의 연구를 “후회한다”고 까지 말했다.

오펜하이머도, 힌턴도, 인류를 위협하고 지구를 파멸로 이끌지 모를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자책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실수’가 선의(善意) 보다는 ‘악의’로 인류사에 영원히 기록될 미래에 대한 공포까지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펜을 대함에 옷깃을 여미는 것도 후세까지 각인될 기록의 힘 때문이다. 총칼을 멋대로 휘둘렀다가 영원한 오명을 남긴데서도 입증된다. 멀게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살인에서부터, 시저 황제를 찌른 브루투스의 배신, 1차 세계대전을 부른 사라예보 암살의 총성, 그리고 히틀러를 비롯해, 뭇솔리니와 스탈린…이웃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조 히데키 등등까지,

조심스레 다루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정치권력도 마찬가지다. 오만에 빠져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천심(天心)인 민심의 무서운 심판을 부를 뿐더러, 역사에 두고두고 저주받는 악행자·패륜아 단정을 피할 수 없다. 당장은 ‘세상이 다 내 것이요, 누가 감히 날 건드려~!’ 하고 거들먹거려도, 한낱 어느 봄날의 꿈 같고(一場春夢), 잠시 화려하나 곧 지는 꽃(花無十日紅)과 진배없다는 냉엄한 경고를 무시한 자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비참한 기록으로 남았다.

지난 1년반 윤석열 정권을 겪은 안팎의 한국민과 해외의 한인동포들이 흑역사로 남을 수많은 권력의 비행(非行·卑行)과 비정상을 목도하며 불안과 울분에 안절부절 못하는 현실을 본다.

밖에서는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굴종과 굴신의 냉전적 행보를 추종하고, 안에서는 구석구석 멋대로 들쑤셔 망가뜨리고 원칙없는 내로남불과 철지난 이념을 외쳐 갈라치기 분열책만 매달린다고 지적한다. 핵폐수 비판을 괴담·가짜라며 일본 정부보다 더 흥분하는데, 욱일기나 ‘동해 아닌 일본해’라는 데는 꿀벙어리가 되더니 독립영웅의 흉상과 정신을 육사에서 제거한다는 저들의 민족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해병 익사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강직한 수사단장을 항명 처벌하겠다는 그들의 군인정신은 비굴일까. 민주 진보단체들의 외침은 공산세력으로 몰아치는가 하면, 소수에 불과한 비판언론은 가짜뉴스 정치공작소란다. 심각한 경제악화에 복지예산, 연구예산은 마구 칼질하면서도 들러리 어용단체에 거액을 몰아주는 머릿속에는 무슨 철학이 들어있나, 이기적 탐심 외에 그들 안중에 국민과 나라가 티끌만큼이라도 있을지, 혹평이 싸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먹칠하는 사료(史料)가 넘쳐나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한다. 잠시 거쳐갈 못된 권력이 나중에 치유와 회복조차 불가능한 상채기만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마음들을 졸인다.

하물며 작은 펜도 두려움으로 대할진대, 권력이야말로 극히 노심초사할 대상이다. 국민을 하늘같이 받들면서 떨리고 삼가는 심정으로 정의롭게 행사하지 않는다면 참혹한 심판이 기다림을 역사가 말해준다. <편집인>

 

 

[목회 칼럼] 7천만 불과 하나님

● 칼럼 2023. 9. 11. 12:3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7천만 불과 하나님

 

박헌승 목사 (서부장로교회 담임목사)

 

얼마 전 캐나다의 한 TV 방송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로토 당첨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1년 전 ‘맥스 MAX’ 복권의 1등 당첨자를 찾는데, 티켓 번호까지 밝혔습니다. 당첨금은 무려 7천만 불이고, 지급만료일이 6월 28일이었습니다. 여러 번 방송을 했지만, 당첨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당첨자는 자기가 구매한 티겟이 뽑힌 줄을 몰라서, 그 많은 돈을 받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뉴스를 접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모르면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지하면 복을 스스로 걷어차는 것과 같습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몰랐기에 배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바꾸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줄 몰랐기에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을 몰랐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무지해서 7천만 불을 놓친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외쳤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무지하면 불행해 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으로 아는 지식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임해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야 합니다. 환난 많은 세상,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강하여 용맹을 떨칠 수가 있습니다.

7천만 불은 잃어도, 영원하신 하나님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칭송합니다. 경배합니다.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립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편집인 칼럼]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

● 칼럼 2023. 8. 29. 13:0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

 

 

삼국지(演義)에는 적군의 신출귀몰하는 계략에 넘어가서, 혹은 막강전력 위세에 눌리거나 풍문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항복하고 제발로 굽히고 들어가는 사례들이 나온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합세해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유비와 제갈공명의 세력은 관우·장비 같은 걸출한 장수는 거느렸지만 본거지 영토도 변변치 않았고 군사도 겨우 수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윗에게 골리앗과도 같았던 조조의 대군을 초토화하는데 결정적 전략을 제공한 공명의 탁월한 전술과 선정을 펼친 유비의 덕망에 전의를 상실하고 지레 겁을 먹은 성읍들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않고 유비군에게 백기를 들고 나온다. 이로써 유비와 공명은 요지 형주를 근거지로 영릉, 장사, 계양, 무릉 등 양자강 이남 지역을 속속 차지해 당당히 삼국정립의 토대를 구축한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경애왕을 죽게한 뒤 세운 왕이 신라 최후의 56대 임금 경순왕이다. 그는 8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 줄타기를 하며 국권을 회복해보려 하지만,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국력이 쇠잔해지자 서기 935년에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고 만다. 군신회의에서 두 왕자까지 나서서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의 나라에 넘겨줄 수 있습니까!”라고 성토하는 극구 반대를 뿌리치고 고려 복속을 결행한다. 신라는 망했고 두 왕자는 출가해 초라하게 살았는데, 경순왕은 고려에서 왕건의 두 딸을 ‘선물’받는 등 고관대작으로 40여년의 영화를 누리다 죽는다.

앞서 후백제의 견훤도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하자 몰래 고려로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했다.

한국 역사에서 정세판단의 잘못으로 치욕을 삼키며 머리를 굽혀 적국 휘하에 들어간 사례는 또 있다.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을 맞아 청나라에 망국적 수모를 당한 삼전도의 굴욕은 그야말로 뼈아픈 민족사다. 군주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정도가 아니라,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즉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3차례씩 9번을 엎드려 절하여 완전 굴복을 표해야 했다. 청나라의 신하국으로 몰락한 것은 물론, 왕자들이 볼모로 잡혀가고 수많은 백성이 끌려가는 곤욕을 치르며 나라가 절단나고 말았다.

신라 경순왕과 후백제 견훤의 고려 복속은 우리 땅에서 같은 민족에게 굽히고 들어간 사례다. 삼전도의 굴욕은 타민족에게 왕과 백성이 무참히 수모를 당한 사건이긴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는 왜국 일본에 국권과 국토와 국민까지 모조리 빼앗긴 사상 초유의 민족 말살기를 열었다. 황후는 무참히 살해되고 황제는 폐위됐다. 백성은 일본천황의 신민으로 전락했으며, 창씨를 개명하고 조선말이 아닌 일본말을 써야했다. 국토는 일제의 전쟁물자 공급지로 수탈당했다. 수백만 청년들은 강제징집·동원되어 대동아전쟁 총알받이로, 군수공장과 탄광의 노동자로, 군위안부로 끌려가 이역만리에서 노예의 삶을 견뎌야 했다. 고종황제의 반대를 거스르며 나라를 팔아먹은 학부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조정의 권부에서 영화를 누리던 매국 5적은 일본제국에서 작위와 재물을 댓가로 받아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가 행복했을까. 결코 민족혼을 버리지 않은 독립영웅들에 의해 평생 암살 위협에 떨며 두리번거리고 살아야 했다. 이완용은 실제로 칼에 맞아 병약한 말년을 살았다.

요즘 한국 윤석열 정부의 ‘국익 저해외교’, 특히 일본과 미국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느니 ‘삼전도의 굴욕’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들이 회자되는 소란스런 현실과 지난 민족사가 오버랩 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도 없이 일본의 죄과에 면죄부를 주고, 영합하고, 대변까지 자처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에 국내외 동포들은 “일본사람 아니냐!”며 울화를 꾹꾹 누르고 있다. 철지난 ‘멸공’과 ‘전체주의’를 외치면서 ‘바이든의 푸들’, ‘기시다의 꽃놀이패’가 되려고 안달하는 모양새에 불안 증폭은 물론 자존심도 망가진다는 지탄이 넘친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못박아도 끽소리 못하는 저자세와 굴종, 미국과 일본의 결속에 맹목 접근해 두 나라의 하위구조를 자처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의 허장성세, 반면에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의 적대를 심화시키고 있는 ‘자해적(自害的)-조공적(朝貢的)’ 외교를 보며 ‘방패막이 전쟁위기’ ‘일본의 제2 식민’ ‘독도는 무사할까’ 등등 국내외 동포들의 걱정과 원성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년 반 사이에 경제 악화를 필두로 안보까지 나라 곳곳 성한 데가 없이 망가져 위기를 맞고있는 데다 밖으로 ‘국격’마저 계속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하여 체결하였다…”. 100여년 전의 한반도 정세를 상기시키는 안팎의 경고를 불안하게 되새겨보는 요즘이다.  

 

[목회칼럼] Jesus in the city Parade 참여를 위하여

● 칼럼 2023. 8. 29. 12:5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Jesus in the city Parade 참여를 위하여

 

박웅희 목사 < 쏜힐 새빛교회 담임 >

 

팬더믹 이후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에서 교인들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모든 교단의 교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매 주일 인원이 얼마나 예배에 참석했는가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매일 예배 숫자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소형 교회는 회집 인원이 갈수록 즐어 들게 되면 혹시나 교회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어 스스로 위축되어지게 됩니다. 어떤 교회는 코로나 이후 교인들이 다 떠나 이제 교회 문을 닫고 집에서 가족들끼리 예배드리는 교회도 여러 곳에서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민 교회 목회자들 중에 80프로 이상이 이중직을 가지고 목회자들이 주 중에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추세는 대형 교회 집중 현상이 뚜렷해짐으로 더욱 소형 교회가 생존하기에 어려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였으며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14)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가 각 도시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마지막 주 토론토 다운타운에서도 3일간 프라이드 퍼레이드(성소수자 거리행진)가 시행되었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단합과 인권을 높이는 일에 그들만의 퍼레이드는 이제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3일간 모여 여러 가지 그들이 하는 퍼포먼스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심을 높이고 그들의 단합과 인권을 홍보하는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성도 여러분들은 금년들어 제24회 째가 되는 ‘Jesus in the City Parade’에 지난 기간에 참여해 보셨습니까?

우리 한인 교회 연합팀들은 두 대 이상의 대형 트레일러와 함께 찬양. 부채춤. 태권도, 의상, 배너, 깃발 등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표현하며 행진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지고 채찍을 맞으시며 고난 받으시다가 마침내 부활하시는 십자가 행진은 많은 호응과 박수를 받았으며 주최측으로 부터 상까지 받기도 하였습니다.

다운타운에서 실시하는 퍼레이드는 미국 50개 주에서도 없는 유일한 기독교인들의 퍼레이드입니다. 한국과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캐나다 토론토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퍼레이드가 열린 것입니다.

지난 기간 동안 참여한 교회들을 보면 소형교회 목사님들이 많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금년에 목사님들이 참여하시면 성도들도 같이 참석하게 됩니다. 목사님들께서 매 주일 마다 광고해 주셔서 성도들의 참여를 독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타락해 가는 이 시대와 이 땅의 회복을 위해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교회들이 많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도시를 깨우는 이 뜻깊은 행사에 한인 교계가 더욱 큰 관심을 갖고 동참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Jesus in the City 한인 총 준비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