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단절도 타협도 아닌 선한 싸움을!

● 칼럼 2023. 11. 5. 15:4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쁨과 소망]  단절도 타협도 아닌 선한 싸움을!

 

송민호 목사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목사)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하나님은 나를 누구라 부르시는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는지 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늘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정체성에 민감한 이유는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자의 길을 가려 할 때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는 세력이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막는 힘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진리를 고수해야만 합니다.  

레위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8:3-4).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가나안 땅의 풍속도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풍속은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레위기 18장을 천천히 읽어보면 얼마나 잘못된 성문화가 만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목조목 다 열거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따라가서는 안 될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그릇된 풍속을 다시는 따라가지 말아야 하며,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다가올 무서운 유혹이 있으니, 모두 다 물리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떠한 유혹이나 타협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즉 불변하는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노라며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남은 생을 마치기보다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며,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직과 순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올바른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매일매일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상이 험합니다. 말씀 안에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 속에서 능력을 달라고 주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No retreat, no compromise, but a good fight!

We who believe in Jesus are deeply concerned about our identity. Each one of us constantly thinks about who we are before God, how God sees us, and how non-believers view us. We have to be sensitive about our identity because it is not easy to follow Jesus in a secular world. So many forces work against us when we try to follow Jesus. Sometimes, we feel weak and lonely to identify ourselves as followers of Jesus Christ.
 
But Jesus stressed that we must deny ourselves, take up our cross, and follow him daily. God told the Israelites the same thing: when they get to the land full of milk and honey, be sure not to follow the world's ways. 

"You must not do as they do in Egypt, where you used to live, and you must not do as they do in the land of Canaan, where I am bringing you. Do not follow their practices. You must obey my laws and be careful to follow my decrees. I am the Lord your God" (Lev. 18:3-4).

God made it clear to the Israelites that they should not follow the ways of Egypt or Canaan. Life before was full of idols. Life ahead was going to be full of idols, also. When we read Leviticus 18, we come across the gravity of the sins in Canaan (primarily sexual deviations). God detailed each one of them and made it clear: the Israelites were NOT to follow the evil practices of the land of Canaan.
 
There is a strong message from Leviticus 18: We'd better be ready for the cultural onslaught. Temptations and compromises are real, but God's people must stand firm and fight them off. Isolation and separation are NOT the answer. Instead, God's people must engage with the fallen culture and be the light where there is darkness. God calls us to shine before the perishing world. Yes, keeping honesty, integrity, and purity always before us, we must walk the talk before the watching world. In the words of the apostle Paul, we must "fight the good fight, finish the race, and keep the faith." May the Lord bless all of us as we take a stance in the world.

[편집인 칼럼] 덩치만 커진…정체성의 혼돈

● 칼럼 2023. 11. 4. 12:1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편집인 칼럼] 덩치만 커진…정체성의 혼돈

 

가야 김수로왕릉(위) 김수로왕과 허황후.

 

지난 10월 중순, 해외 각처에서 발행되는 한인언론사의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국제포럼’을 열었다. 갓 출범한 재외동포청의 바람직한 역할과 내년 총선을 앞둔 재외선거의 여러 문제점 개선방안, 그리고 한국의 복수국적제도에 대해 학계 전문가들과 해외 현장의 언론인들이 제언을 내고 토론도 가졌다.

포럼의 주제는 서로 달랐지만, 재외동포 관련 사안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의 현안들이고 개선과 보완이 절실한 분야들이다. 포럼에 참여하며 다시한번 느낀 것은 한국의 커진 국력을 실감하는 반면 소프트웨이 측면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동포청의 제한적이고 미흡한 역량, 비효율적인 재외선거제도, 폐쇄적이고 편협한 복수국적 제도 등 글로벌 선진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면 해결과제가 산적하다는 것이다. 750만에 달하는 해외동포들을 포용하면서 국가적 후견세력으로 활용한다면서도 제도적인 뒷받침과 인식은 여전히 구태와 게걸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럼을 마친 후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 단체인 ‘대한사랑’의 안내로 뜻깊은 역사문화 탐방을 가졌다. 대한사랑은 한자 표기를 ‘大韓史郞’으로 쓰면서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의 역사와 문화, 혼을 지키는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잃어버린 우리 뿌리역사와 원형문화 정신을 되찾고 한국사의 국통맥을 바로 세워 대한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역사문화운동 단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적극 대항하고, 친일사관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한국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을 되살리고자 애쓰는 민간단체다. ‘해언사협’과 MOU를 체결한 이유다.

친일적 주류 사학자들의 ‘매국적 역사왜곡’을 고발해 바로잡겠다는 이 단체의 집념과 열정은 “해외동포들에게도 알려야 한다”며 한인 언론인들을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기꺼이 사적지 안내를 도맡은 성실성이 말해준다. ‘국수주의자들 아닌가’ 하는 감이 들 정도의 ‘9천년’ 민족사에 달통한 역사 가이드들이 고조선 건국에서 동학혁명까지를 되새기게 했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가야와 신라 역사의 속살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들과 함께 한 2박3일의 역사문화 기행에서도 가슴에 와닿은 것은 덩치만 커진 한국의 ‘소프트웨어 부실’, 그리고 역사적 정체성의 혼돈상이었다. 쉽게 말해 5천년~9천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 광복 80년을 앞두고도 여지껏 민족의 뿌리와 정통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재편성해 마음 껏 왜곡했다.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나라’, ‘조선인은 미개해서 억압해도 되는 민족’이라는 세뇌공작의 선봉들이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으로부터 창건된 가야는 521년의 역사를 가진 당당한 민족국가였다. 조선의 505년을 능가하는 문화강국이다. 6개 가야의 전성기와 패망 후에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치며 건국의 기초를 닦아 준 어머니 같은 나라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서술하고 있는 이 가야의 역사가 일본인들의 자존심에 거슬리고 만만했는지, 일제의 역사가들은 축소 왜곡하고 지우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가짜라며 일본서기만 인용했다. 그들에게 사사받은 한인 사가와 그 제자들은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를 주름잡으며 일본적인 시각으로 한국사를 짜깁기해 식민사관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실정이란다.

많은 기록과 유물, 사적 등이 입증하는 가락국 건국과 허 황후 불인정, 고녕가야 삭제, 가야 왕들의 계보 부인과 교과서에서 삭제, 일제하 1915년 김해 김씨 족보 발행을 금지시킨 사건 등 왜곡사례가 넘쳐난다. 그리고 ‘임나일본부’가 등장했고, 최근에는 그 영역이 북으로는 조령, 서로는 전라도, 동쪽은 신라 수도 경주 가까이 까지 확장해 각지의 지명도 일본식으로 작명해 붙인 임나 지도가 일본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다는 것이다.

지난 9월17일 유네스코는 한국의 가야 고분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했다. 가야 고분군이 등재되면서 한국은 모두 16건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유럽과 중국 등에 비하면 적은 편이고, 반만년 역사를 고려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역사문화의 부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할 만하다.

그런데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학계는 모두 7개 가야 고분군 중에서 경남 합천군 옥전에 있는 고분군을 ‘임나 일본부’의 ‘다라국’ 것이라고 표기하고, 전북 남원군 유곡리와 두락리에 있는 고분군 역시 임나의 ‘기문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대로 표기해 등재해야 한다고 버텼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주장을 대변한 것으로, “한국 역사학자들이 아닌 일본의 식민사관 사학자들이 할 짓”이라는 게 분통을 터뜨린 대한사랑 사학자의 비판이다.

재야 학자와 단체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시켰지만, “이른바 동북공정으로 한강 이북은 중국 땅이 될 상황이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고 일본이 기득권을 주장하면 대한민국은 사라질 판”이라는 재야 민족사가들의 절절한 외침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편집인 칼럼] 강하면 부러지고 누르면 튄다

● 칼럼 2023. 11. 4. 08:0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강하면 부러지고 누르면 튄다

 

‘화약고’ 중동에서 다시 불꽃이 튀었다. 50년 전 제4차 중동전쟁인 이른바 ‘욤키푸르’ 전쟁 이후 최악의 유혈충돌이 벌어졌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오랜 반목이 그동안 수면하에서 들끓다가 마치 화산 폭발처럼 하마스라는 분화구를 통해 반세기 만에 ‘임계 폭발’이 재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서 간의 냉전이 다시 시작됐다는 불안과 불안정이 심화되고 있는 요즘의 국제정세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미국 중심의 우군세력과 러시아 편을 드는 쪽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바람에 지구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지 벌써 2년째. 이제 이스라엘 편을 선언한 미국 유럽 등 서방세력과 하마스의 후견을 자처하는 아랍의 반서방세력으로 또 분화·분립하여 극한 분쟁과 감정대립의 파고가 한층 거세질 것만 같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 이스라엘과 친 하마스 시위들이 이 분열과 대립의 현실을 말해준다. 특히 다민족 국가인 캐나다에서는 한쪽에서 이스라엘 규탄, 다른 한쪽에서는 하마스의 테러를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캐나다 국내마저 양분되고 있는 양상이다.

사람과 땅을 정복하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힘을 겨뤄 온 인류 역사에서 어느 한때 대립과 분쟁이 없었을까마는, 최근 국제정세를 보면 불판의 열기로 끓어오른 수증기에 주전자 뚜껑이 들썩이는 것처럼 조마조마하다. 언제 뚜껑이 튀어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한 상황. 마침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이번에는 하마스의 도발이 이어졌다. 대만을 둘러싼 긴장과 한반도의 안보정세도 심상치 않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며 내연하던 응축된 힘들이 미국이라는 최강의 ‘뚜껑’이 쇠락기미를 보이면서 불만과 적개심이 분출되기 시작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 충돌사태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미국의 책임을 거론한다. 이른바 ‘악의 축’이라고 생각하는 적대국들을 제압하고 따돌리기 위해 무리한 압박작전을 벌이다가 반작용을 부르며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추진한 중동정책은 ‘야심찬 평화구상’이라고 포장하지만 속셈은 이란을 ‘왕따’시키는 것이었다. 시아파 이란과 적수이며 수니파 수장이고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안전보장을 미끼로 이스라엘과 화해시키려 했다. 중동의 판도를 뒤바꿀 그야말로 야심찬 전략일 수는 있으나, 모두에게 이익이 아닐진대 계획대로만 될 리가 없다. 궁지에 몰릴 상대측이 기를 쓰고 덤벼들 것이라는 국제역학의 상식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바레인과 아랍에미레이트에 이어 사우디까지 이스라엘과 손을 잡으면 이란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역시 극한 상황에 내몰리게 될 하마스의 울분을 이란이 부추겼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팔레스타인을 무시하고 정착촌을 밀어붙이는 등 독선적인 정책으로 극심한 반감을 사고, 국내적으로도 사법개혁 등 반민주적 극우행보로 지탄을 받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부를 거든 이중적 태도 역시 바이든 책임론의 하나다.

중동의 파열음을 주시하면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불안을 떠올리는 이들도 같은 맥락으로 미국을 겨냥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위협적 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고 ‘왕따’시키려는 협공전략에 몰두하면서 역풍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압박 포위전략으로 이란을 고사시키려다 사달이 난 중동과 판박이가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은 최고의 우방국으로 여기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미국·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라는 정보동맹체를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운영해 왔다. 그런데 2천년대 들어 중국이 급부상하자 일본·인도·호주가 참가하는 4자 안보 협의체 ‘쿼드(Quad)’를 결성했다. 또 2021년에는 영국·호주와 3개국을 묶는 최상급 군사동맹체로 ‘AUKUS’를 출범시켰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한국에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한국과 일본을 압박해 3국 안보체제를 강화하고 NATO에도 끌어들이고 있다. 중국을 강압하는 3중 4중의 철망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뜻대로 중국이 쪼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러시아와 제3세계 중견국들인 ‘BRICS’(Brazil·Russia·India·China·South africa)와 연대를 강화해 세력을 키우고, 러시아-북한과 밀착하는 신냉전 구도를 초래하는 형국이 됐다. 미국에 올인하다 ‘불똥’을 자초한 윤석열 정부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에 직면했고, 남북간 극한대치로 한반도 위기지수는 날로 치솟고 있다.

국제사회도 당연히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힘 겨루기가 국가별 안위와 부침을 좌우한다. 세계평화는 최강국의 리더십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을 가진 미국이 자국 이익에만 눈이 멀어 힘을 오용하게 되면 평화가 이뤄질 리 없다. 상대세력의 반발은 물론 수많은 약소국들이 피해를 보고, 원성이 터져나올 게 뻔하다, 힘의 쇠락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무리한 발버둥을 치면 칠 수록 지구촌 물은 흐려지고 애매한 물벼락 피해는 늘어나는 것이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강압하면 튀어 오르는 게 인간사의 법칙이다. ‘괴물’ 트럼프가 심화시킨 대립과 갈등의 골이 미국 내부는 물론 글로벌 불화를 가중시킨 여파에 시달리면서도 슬그머니 답습하는 바이든의 우둔을 읽는다. 한국의 윤 정부도 눈을 떴으면 보고 귀가 뚫렸으면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처럼 받드는 미국의 오만과 강공이 어떤 결과와 평가로 후유증을 부를지를 생각해 보는가. ‘방구석 여포’라 했는데, 국내에서는 검찰독재 비판에 눈귀를 막고 강공일색 무모의 질주를 즐기니 참 위태롭기 그지없다.

[목회칼럼] 맥켄지 기념행사에 다녀와서

● 칼럼 2023. 11. 4. 07:5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쁨과 소망] 맥켄지 기념행사에 다녀와서

 

 박태겸 목사 (캐나다 동신교회)

 

맥켄지는 지금까지 한국에 간 캐나다 선교사 중에서 가려진 인물이었습니다. 1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의 선교와 삶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그의 선교는 화려하지도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맥캔지 선교사는 숨겨진 보화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복음전도의 길이 막힌 이 시대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가을 들판에 핀 국화처럼 다른 선교사들의 화려한 사역의 꽃이 모두 핀 후에 가장 늦게 외로운 성도의 가슴에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휘장에 가려진 분향단의 향기와 같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그의 냄새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비난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중에 이번에 해외한인장로회(KPCA) 캐나다동노회 선교부에서 그의 선교의 중심을 찾아내고 그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남기기 위해 고향 헬리팩스와 한인교회에서 기념행사를 갖게 된 것은 매우 소중하고 기쁜 일입니다.

맥켄지는 예수님의 영성을 가장 많이 닮은 선교사입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였습니다. 그는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왔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 선교한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다가 34세에 황해도 소래 땅에 묻힐 때 남은 유산은 미화 172달러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동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그가 조선에서 활동한 1893-1895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명성왕후(민비)가 일본의 칼에 시해되며, 콜레라와 폐병이 만연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며, 마침내 국운이 일본에게 넘어가는 절대절명의 기간이었습니다. 양반과 평민이 분열하고, 동학교도들이 서양종교와 선교사들을 죽이고, 제국주의가 조선반도를 지배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맥켄지는 서울과 평양이 아닌 시골 어촌인 소래교회를 선교지로 택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에게 쫓기는 부상당한 동학 교도들을 숨겨주며 치료했습니다. 소래교회를 건축할 때 건축헌금 1/3은 동학교도들이 헌금했으며,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모든 서양교회를 불태울 때 동학교도들이 멕켄지의 소래교회는 우리를 위하는 교회인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선 최초로 <십자가>를 달아 교회 표시를 하게 했습니다.

맥켄지는 캐나다 사람이 아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으로 살았습니다. 그와 함께 동역하는 서상륜 서경조 영수(장로)는 맥켄지가 죽자 캐나다 선교부(PCC)에 맥켄지 같은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냈습니다. 소래 사람들은 그에게서 복음과 인격이 하나가 된 예수님의 성품이 보았습니다.

나는 한국교회가 그를 통하여 복음전파에 새로운 길을 찾게 되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