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잼버리 소동이 말해주는 것

● 칼럼 2023. 8. 11. 12:2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편집인 칼럼]  잼버리 소동, 또 하나의 징후

 

 

지구촌 청소년 야영축제인 세계 잼버리가 ‘난민 체험’ ‘생존게임’으로 비아냥 당하며 낯뜨거운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에서 열린 국제행사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여름·겨울 올림픽과 월드컵을 포함해 수많은 세계적 스포츠대회와 국제행사들을 개최해 오며 빈틈없는 준비와 운영으로 정평이 난 한국에서 어찌 저런 일이 벌어졌는가~? 국내는 물론이고 캐나다를 비롯한 전세계 한인동포들이 하나같이 탄식을 쏟아내고 있다.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는 치열한 경쟁 끝에 유치해 5년여 동안 1천여 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다는 행사다. 그것도 3개 부처의 장관 3명이 공동위원장이고, 대통령이 휴가 중임에도 개영식에 성대한 의전예우를 받으며 참석해, ‘전폭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던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던 이벤트였다.

그런데 개막하자 마자 준비부족에 운영미숙이 드러나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총체적 난맥상’이 되어 국가망신을 사고 있다. 국내외 빗발치는 질타에 놀란 정부가 허겁지겁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어서 행사는 상채기만 남은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World Scout Jamboree’는 세계스카우트연맹(WOSM)에서 주최해 4년마다 열리는 전세계 보이스카우트 회원들의 합동 야영대회이자 각국의 문화 교류를 위한 대규모 청소년 축제다.

나라마다 중·고등학교 스카우트 대원을 중심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세계잼버리에 참가한다. 이들은 야영생활을 하면서 국제적 우의를 쌓고 형제애를 나눈다. 피부색·종교·언어를 초월해 각종 행사와 과정활동에 참여하면서 “개척정신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과 자아실현을 도모하여 국가 발전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잼버리 정신을 경험하고 체득한다.

올해 25회 대회에 이르기까지 캐나다도 두 차례 세계잼버리를 개최한 적이 있다. 1955년 북미에서는 처음으로 제8회 행사를 온타리오 나이아가라의 On-the-Lake에서 71개국 1만1천여명이 참가해 성대히 열었다. 이어 1983년에 제15회 행사를 앨버타주의 카나나스키스에서 106개국 1만47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무난히 개최했다.

한국에서는 1991년 8월 강원도 고성군에서 제17회 대회를 ‘세계는 하나’라는 주제로 처음 열었다. 당시엔 잼버리 사상 가장 많은 135개국의 1만9천여명이 참가했고, 이 행사의 성공을 계기로 세계 청소년들에게 한국의 이미지와 관심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호평과 함께 이후 참가국과 인원이 크게 늘면서 한국 스카우트도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그후에도 아시아태평양 잼버리와 국제 패트롤 잼버리 등 30~50개국의 수천에서 2만명 안팎이 참가하는 잼버리를 아무 문제없이 여러차례 개최해 신망을 얻었다. 그런 저력을 바탕으로 이번에 158개국 4만3천여명이 참가하는 세계잼버리 역대 2번째 큰 규모의 대회를 유치했는데, 뜻밖에도 ‘개망신’의 화를 자초한 것이다.

 

경제력이 커지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선진국 소리를 듣게 되어, 우리들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게 엊그제다. BTS를 필두로 한 K-pop과 영화, 음악 등 수준높은 문화예술이 세계를 주름잡는 자랑스런 나라 내 조국, 자부심이 가슴을 부풀렸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새 정부 들어선지 겨우 일년여 만에 급전직하, 날개없는 추락에 얼굴을 들기가 부끄러운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젊은이 159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 대처에서 민낯이 드러난 바 있다. 사전 대비는 없고, 일이 터지자 갈팡질팡, 책임은 미루고 떠넘기다 하위 실무자들만 처벌당한다. 위기 대처능력 부족에 책임감조차 없다. “내가 간다고 달라질 게 있나?”라는 공통의 발언에 저들의 무능 무책임과 천박한 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존중이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공복의 자세와 역량이 되어있질 않은 부류들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뀐 뒤 검사정치와 경제악화, 언론장악, 매국적 굴욕외교와 안보파탄 등등 ‘총체적 추락’ 외에는 제대로 기억되거나 이뤄진 치적 자체가 없다. 안팎에서 치룬 행사마다 탈이 나고 뒷말이 무성하다. 잼버리 참사가 벌어진 이유나, 터진 뒤의 황망함도, 탓하고 발뺌하고 쪼잔하게 떠넘기며 덮어씌우는 모양새 역시 한치 다름없는 그들의 공식이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그랬고 잼버리 폭망도 연장선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참사들은 이어질 것이다. 일본의 공범을 자처한 핵폐수 방류도 다가오고 있다.

무능하면 그만 둬야 맞다. 자신 없으면 당장 손을 떼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무능과 무지 무책임의 들보는 외면한 채 남의 눈의 티끌만 헤집고 우겨대니, 답답해 울화가 솟는 고통과 인내는 고스란이 국민 몫이다. 국격 손상 나라 망신에, 땅에 떨어진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애먼 국민들이 앞으로 얼마나 땀과 피와 정력을 쏟고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직접 피해자’들이 전세계에서 온 미래의 주역들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후진 현실을 피부와 가슴으로 느꼈을 청소년들의 불쾌한 기억은 앞으로 수 십 년, 대한민국에 드리워질 어둡고 긴 그림자로 남을 것이다.     < 편집인 >

 

[목회칼럼] 가득할 복(畐)옆에 무엇을 둘 것인가?

● 칼럼 2023. 8. 11. 12:1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우리 교회 기쁨과 소망]

가득할 복(畐)옆에 무엇을 둘 것인가?

 

함진원 목사 < 순례길교회 담임 >

 

복(福)하면 떠오르는 성경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이름이 아브람(큰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바뀌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 또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그의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 복을 받은 인물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75세, 그가 드디어 아들을 얻었을 때는 100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무려 25년이 걸린 것입니다. 말이 25년이지, 이 기간동안 아브라함과 사라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가 정말 복을 받은 인물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그는 나그네가 되는 일을 감당해야 했고, 아름다운 아내로 인해 자신의 안전을 전전긍긍해야 했고, 처음엔 재산도 있었지만 나중엔 목숨이라도 붙이자고 애굽으로 들어가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주 긍정적인 시선으로 봐줘서 아브라함이 자신을 사라의 오빠라고 (두번이나) 속이는 행위도 결국은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게 됨으로, 그것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처신이었다 해도, 25년이라는 시간의 무응답은 복(福)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의 인생을 복의 근원이라고 규정 지은 것일까요? 이 25년의 세월도 그가 복의 근원임을 말하고 있을까요?

복(福)이라는 단어는 ‘가득할’ 복(畐)자 옆에 ‘보일’ 시(示)자가 있습니다. 시(示)자는 제단의 모양에서 나온 상형문자인데, 신과 연관이 있는 문자입니다. 신에게 보여주는 것도 의미하지만, 신이 보여주는 것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채워 주시는 것이 복(福)입니다.

그런데, ‘가득할’ 복(畐)자 옆에 사람(人)이 들어가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人)+ 복(畐)= 핍박 할 핍(偪)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봐도 그가 뭔가를 스스로 이루려 할 때마다, 오히려 걱정거리가 하나씩 늘어만 갔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보이시고, 말씀하시고, 그와 동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0세가 되어 아들을 얻은 순간부터 비로소 복의 근원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순간부터 그는 이미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복의 주체는 그의 소유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걷는 길을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동행하며 그의 실패와 실수를 다 수습해 주십니다. 그의 결핍을 채워 주십니다. 25년의 세월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가운데 그와 함께한 아주 의미있는 복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득할 복(畐)자 옆에 무엇을 둬야 할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자리를 두시고, 그분이 개입할 여지를 두시고, 그분과 함께 할 시간을 두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福)된 순례길이 될 것입니다.

[편집인 칼럼] 희극 '검찰관'의 기억

● 칼럼 2023. 7. 8. 01:4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칼럼]  "희극 ‘검찰관’의 기억"

 

 

‘검찰관’이라는 유명한 희극이 생각난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고골이 쓴 5막극으로, 비리와 불법이 들통날까 두려워하는 부패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온갖 부패와 편법에 찌든 관료와 유지들이 어느 형편없는 무전취식 청년을 민정 감찰의 검찰관으로 오인해 불안감에 몸을 떨며 극진히 모신다. 졸지에 검찰관 노릇을 하게 된 그는 허풍으로 사람들을 농락하고, ‘털면 먼지가 수두룩할’ 군상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낯뜨거운 아양과 추태로 향응을 베푼다. 그야말로 코미디같은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들의 위선과 무능, 만연한 부정 부패의 세태를 고발한다.

그러나 이 희극에는 정작 ‘검찰관’은 등장하지 않는 의미 심장함이 있다. 단순히 검찰관이라는 말이 지닌 공포와 위력에 절절매는 모습에서 비정상인 사회와 의식구조가 그려진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 그대로, 뒤가 구린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황제의 ‘암행어사’ 같은 검찰관이 온다더라는 소문만 듣고 기겁들을 해서, 분별력을 잃은 나머지 엉뚱한 오인과 면죄부를 노린 오발경쟁을 벌인다. 나중 검찰관으로 믿었던 방탕 청년이 성대한 환송연을 즐기고 사라진 뒤에야 상황을 파악하고 욕설과 악담으로 저주를 퍼붓는 낯두꺼운 사람들. 도둑들이 ‘도둑놈 잡아라’고 핏대를 올리며 억울해 하는데, 그제서야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으로 극이 다시 반전하며 모두가 멘붕에 빠져 얼어붙은 사이에 막을 내린다.

 

법조기자로 뛰던 시절 매일 접하던 검사들의 인상은 요약해서 ‘건방지다’는 것이었다. 점잖은 선비들 같던 판사들과 달리, 일부를 제외하고 다수 검사는 자유분방하되 거의 버릇이 없었다. 새파란 젊은 검사도 피의자나 참고인은 물론 기자들과도 반말이 능사였고, 자세와 태도 또한 방자했다. 악을 쓰며 수사한 사건이 무죄가 나기 일쑤인 검사들 일수록 거만이 두드러졌다. 요사이 최고권좌에 앉아서도 반말과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바로 그 전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기사 마감 때문에 대개 오전에 법원과 검찰청을 돌게 되지만, 가끔 오후 늦은 시간 들르면 법원과 검찰의 대조적인 퇴근 모습도 보게된다. 묵직한 사건기록 보따리를 안고 집에 가서도 검토해 봐야 한다며 피곤한 모습으로 퇴근하는 많은 판사들과 대조적으로, 거의 매일 ‘회식’이라는 이름의 저녁근무지로 향하는 검사들은 활기가 넘친다. “오늘은 누가 내느냐”고 물으면 “우리끼리”라든가 우물거리기 일쑤지만, 대개는 스폰서들이 마련하는 접대의 자리다. 이튿날 아침에도 불그레한 얼굴에 술냄새가 가시지 않은 모습들에서 전날 저녁의 풍경은 그려지게 마련이다.

벌써 40년이 지난 시절의 검사들 기억이지만, 요즈음 한국 검찰의 이면 소식은 어찌 그리도 변함이 없는 것인지, 아니 오히려 검사들이 더 기고만장하고 오만방자 해졌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법 집행의 ‘독립기관’인 검사들이 쥐고있는 직무상의 권한과 권세로 인해 성품조차 권위적으로 바뀌는 직업특성은 기본이랄 수 있다, 정치권력의 도구로 부역하면서 배우고 쌓은 권력성향에, 이제는 최고권력자를 배출했다는 자만과 교만으로 권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검찰권력의 민낯을 무소불위 행태가 드러내 준다.

 

특수통 검사가 대통령이 된 이후 검사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른다. 내노라하는 권력기관은 모두가 검찰 출신들, 그 중에도 대통령 사단에 속했다는 인물들이 직역과 능력을 따질 것도 없이 요직을 모조리 ‘점령’하고 있다.

특수부 검사들은 ‘없는 죄를 만들어 내고’ 때로는 ‘있는 죄도 뭉개버리는’ 조폭적 수사기법으로 악명을 얻은 부류다. 조금만 눈밖에 나거나 비위가 상하면 가차없이 압수수색의 칼을 빼들고, 불러다 강도 높은 수사로 압박과 공포감을 자아내 자살을 부르기도 한다. 그들이 야당대표를 3백번 넘게 압수수색을 하고도 이렇다 할 범죄증거를 못찾는 이례적인 일도 있기는 하나…, 공직사회는 물론 사회전반에 ‘검찰 공포’로 찬바람이 감돌고, 권력기관들은 검찰의 수족처럼 움직인다. 법치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법원조차 검찰의 눈치를 살피는 판결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과 달리 검사들 손과 머리 속에는 ‘법’이라는 ‘유무형’의 도구가 자리잡고 있을 뿐이지만, 합법적 강제력을 지닌 국가 공권력이기에 총칼도 무력하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다.

문제는 사회악과 부패를 척결하고 정의를 구현하는데 써야 할 합법의 무기를 ‘합법적인 불법’과 편법으로 교활하게 사용하는데 있다. 검찰권을 권력 보위와 보복의 무기로, 사적이익 보호의 방편으로 휘두르면 그들 말대로 깡패요 조폭이며 공권력의 오용일 뿐이니, 깡패와 조폭이 설치는 비정상이 과연 얼마나 오랠지 궁금하다.              < 편집인 >

 

[편집인 칼럼] "공범을 자청하는 동키호테"

● 칼럼 2023. 7. 7. 07:1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칼럼]  공범을 자청하는 동키호테

 

일본 도쿄의 중심지에 있는 신쥬쿠교엔(新宿御苑)은 넓고 아름다운 도심공원이다. 봄이 되면 온통 벚꽃(사쿠라,桜:さくら)이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평소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공원이지만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하나미’(꽃구경, 花見:はなみ)를 즐기려 소풍나온 가족과 인파가 줄을 이어 잔디밭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아마 요즘도 그럴 것이다.

얼추 30년 전의 기억이다. 특파원으로 있던 당시 고베 대지진으로 5천명 이상이 숨지는 대참사 등 큰 사건이 많아 ‘파김치’로 지낼 때였다. TV에서 하나미소식이 넘쳐나기에 모처럼 짬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공원을 찾았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으며 둘러 본 주변은 음식을 먹고 웃으며 떠드는 사람들로 왁자지껄 했지만, 어쩌면 그리도 평온하고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 것인지-. 장난치며 딩구는 아이들,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훈풍에 날리는 벚꽃 잎들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감상어린 모습…청명한 봄 날씨 아래 푸른 잔디밭 위에 펼쳐진 분홍빛 사쿠라 세상은 그야말로 평온과 평화가 가득한 천국이었다.

순간 머리에 맴돌고 가슴에 치미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구나! 이 나라가 어떤 나라, 어떤 사람들인데 이렇게 평화가 이 땅에 넘쳐난단 말인가, 이들에게 과연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일본 사람들에게 짓밟혔던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북의 핵개발과 경수로 문제 타결에 집중하느라 정신없었고,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죽은 후 권력내부 정리까지 겹쳐 혼돈스럴 상황이었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1월에 고베지진, 3월에는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살포 사건 등 대형 악재가 잇달아 터져 자민당 정권이 무너진 뒤 소란스런 정치상황 속에 뒤숭숭할 때였다.

안팎 정세야 어떻든 상관없어 보이는 도쿄 도심공원의 충만했던 평화는 묘한 대비로 다가오며 질투나 분노와도 같은 탄식을 자아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변국에 저질렀던 만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무감각도 그러려니와, 자국의 수많은 국민들이 지진의 대재앙 수습으로, 살인 독가스 살포로 공포와 불안에 잠겨있는데도, ‘너는 너, 나는 나’ 라는 이기와 무관심이 지배하는 일본수도 도쿄의 평화로운 공원풍경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방사능 핵폐수를 방류하겠다고 막무가내 밀어부치는 요사이 일본을 보면, 나만 편하면 남이야 어찌되든 관심없고 상관도 않는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이기적 속성과 그들의 변치않는 ‘시마구니 곤조’(島國根性: 섬나라 근성)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한마디로 정수처리에 자신있거든 바다에 내다버릴 리가 없으니 이기적 속임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들은 오로지 조선 침탈의 야욕만 채우면 그만인 자들이었기에 동학혁명의 농민들을 수 십 만명 학살한 제노사이드 범죄를 기억하거나 사죄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인 1만명 가까이를 관민합작으로 학살한 관동대지진 당시의 야만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땅과 사람들을 수탈한 식민범죄도, 태평양전쟁으로 3천만 명 이상을 죽게 한 전쟁범죄도 저들은 참회나 사죄하기는커녕 이제는 피해자 코스프레 마저 하고있다. 그런 그들에게 태평양과 인근 나라 바다를 오염시킬 핵 오염수 방류 쯤이야, 뭐가 대수겠는가. 태평양 섬나라들과 중국 등 몇 나라들, 그리고 그린피스 같은 환경단체들이 ‘지구파괴 생태범죄’라고 제동을 걸긴 하지만, 우방인 미국이 눈감아 주고, 캐나다는 침묵하고, 한국의 동키호테 지도자는 앞장서서 변호인 노릇까지 해주니, 일본에게 “범죄는 더 이상 저지르지 않겠다”며 인류건강을 생각하는 양심을 기대하기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크고 작은 공동체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간다. 마을공동체에서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며 서로 힘이 되고, 국가적으로도 한 마음으로 경기를 응원하는가 하면 국난에는 함께 위로하고 고통을 나눈다. 지구촌이라는 인류공동체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고, 자기 나라만 편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는 세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뛰고 경제가 불안한 것을 우리 모두 겪고 있다. 퀘벡의 산불 연기가 뉴욕까지 뒤덮었고 유럽과 호주의 소방관들이 캐나다로 달려온다.

유독 일본인들만 이웃이야 어찌되든 신경 안쓰는 족속의 특성을 보이는데, 한국의 윤 정권은 무슨 빚을 졌기에 굴욕을 마다않고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자청하는 것일까. IMF 당시 한국의 긴급 외화차입 요청을 완강히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이 일본은 믿을 만한 이웃나라가 못된다. 과거 군국·제국주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여러 행태만 보아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나라다. 그런 일본을 꿰뚫어 보면서도 미국은 힘이 있으니 압박하며 활용한다지만, 친일에 목을 맨 한국 윤 정권은 불꽃의 유혹을 좇다가 타죽는 부나방처럼 우둔의 늪을 가고 있다. 지구의 70%인 물을 병들게 하는 환경범죄의 후과를 일본과 같이 짊어질 작정인지,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