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언론의 굴종과 타락

● 칼럼 2024. 3. 5. 09:4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언론의 굴종과 타락

 

요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판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설치한 ‘선거방송 심의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이 심의위가 최근 한 민영방송사를 대통령 부인의 이름이 들어간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을 ‘김건희 특검’으로 호칭했다고 “행정지도!”라며 트집 잡았다. 영부인 예우를 안하고 정부여당을 비판해 공정성을 해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부인 김건희 여사 특검’이라고 해야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요사이 한국의 언론사정을 단적으로 드러낸 해프닝이자 ‘공정성’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고 오용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선거방송 심의위는 모체인 방송통신심의위가 이미 그처럼 뒤틀린 공정성을 주장하며 방송시장을 뒤흔들어 온데다 인적구성도 편향적인 인물들로 채워, 생겨나기 전부터 ‘불공정을 목적으로’ 설치됐다는 지적을 받아 온 터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함께 방통심의위원회는 정권과는 거리를 둔 독립기관으로 엄정한 운영이 기본이다. 그럼에도 현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권력 하수기관이 되어 비판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입틀막 기동타격대’로 전락해 버렸다. 한 예로 검찰과 정부비리를 들춰낸 탐사보도 매체 ‘뉴스타파’에 칼을 겨눠 위원장이 자신의 친인척 등을 동원해 처벌 진정을 넣게 한 이른바 ‘민원사주’ 사건이 들통난 일이다. 뉴스타파는 인터넷 유튜브 기반 매체여서 심의대상도 아니다. 그런데 방통위·방심위를 필두로 여권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압수수색까지 벌이는 ‘조자룡 헌칼’소동을 연출했다. 다른 비판적 매체들에게 조심하라는 공개적 ‘엄포쇼’를 벌인 것이다.

국회의 탄핵 직전 위원장이 도망가듯 물러나 오명을 떨친 방통위는 일찌감치 언론파괴의 권력돌격대로 선발됐다. 눈엣가시인 MBC의 지배권을 강압적으로 바꾸려다 법원 제동으로 실패했지만, YTN은 단 2명이서 매각을 승인하는 불법적 행태로 말썽이다. 앞서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 KBS는 시청료 징수문제로 압박한데 이어 편법으로 이사진을 쫓아내고는 끝내 운영권을 장악했다. 시청자들이 전두환 시절의 ‘땡전뉴스’ 같은 ‘땡윤뉴스’ 시청을 날마다 강요당하게 된 배경이다. 대통령 신년회견 대신 녹화된 ‘기획대담’을 두 차례나 내보내 국제적 웃음거리가 된 것도 KBS의 추락한 현주소를 말해준다.

윤석열 정권 출범이후 이같은 언론 파괴적 현상들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사례는 차고 넘치게 됐다. 검찰을 앞세운 정부기관들의 전방위 강박에 언론사들이 굴종하고 주눅든 현실뿐 만이 아니다. 검찰정권 하에서 법조기자 출신들의 입지가 우월해지고, 입김도 거세지면서 언론보도의 친검찰·친정권화 현상이 뚜렷해졌다. 권력 비판의 강도가 약해지고, 줄어들고, 아예 사라진 언론이 대부분이다.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매체들도 무뎌지고 눈치를 보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원래 친정부적인 권력 밀착형 보수매체의 보도행태는 글자그대로 ‘애완견’이니 ‘나팔수’라는 치욕적 지칭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영합하여 ‘검·언·정 카르텔’을 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한국의 뒤틀리고 타락한 언론현실이다. 허울뿐인 언론자유 속에 참 언론을 찾을 수 없는 이유다.

언론전반에 말과 기사와 보도는 넘쳐나는데, 냉철한 비판과 분석 대신 왜곡되고 포장된 정보와 교묘하게 버무려진 뉴스들로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할 뿐이다. 국민들은 진실에서 멀어지며 편견을 세뇌 당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언론이 이렇게 망가진 적은 없었다. 평생 40여년을 기자요 언론인으로 살아 온 나의 경험칙에 비추어 보아도, 지금의 한국처럼 기자들이 문제적 사안을 접하고도 아예 글을 쓰지 않거나 대놓고 편파적 기사를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군사독재하 검열 삭제에도 불구하고 지사적(志士的)인 비판 필력을 고집하며 기자들은 행간에 진실을 담으려 노심초사 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리도 굴종하며 타락해 버린 것인지. 정론직필(正論直筆)과 파사현정(破邪顯正)은 고사하고 이권 편승·조장세력, 어용·권력카르텔 언론으로 지탄받는 현실은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정상으로 되돌릴 것인가. 결국은 수용자인 독자와 시청자, 곧 국민들의 몫이며, 분별과 선택과 심판만이 해결책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그나마 판단의 지혜와 이성과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해외토픽에 오른 ‘명품백’ 수수를 슬그머니 덮고 특검을 거부하는 저의가 뭔지, 왜 변호에 기를 쓰며 총선 공천까지 ‘방탄’에 악용하는지, 열심히 맞장구 쳐주는 언론의 행태에서 그 냄새를 맡는다면 다행이다. 선거 코앞에 대통령이 전국을 돌며 헛공약을 남발하고, 그린벨트를 완전히 풀어 국토를 망칠 작정인데도 모른척 ‘입꾹’인 현실이 개탄스럽다면 아직 분별력이 살아있다는 희망이다. 시류에 따라 독재와 폭정에 비판과 영합을 오가는 능란한 변신에서 친일 매국과 권력 아부의 뿌리와 속성을 읽는다면 자존감이 숨쉰다는 증거다, 유독 야당에는 가혹하고 여당에는 우호적인 기사와 논조의 범람에 의도적 편파의 꼼수를 꿰뚫고 심판한다면 깨어있는 시민의 정의감이다.

구태여 학문적인, 또는 정치·사회적인 역할과 소명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언론의 부패와 타락은 권력의 부패와 타락에 직결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강자의 횡포와 독재를 부른다. 깨어 직시하지 않으면 앉아서 바보들이 된다, 독재권력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싸우지 않고 방관하면 나라가 무너진다, 역사와 정의가 사정없이 짓밟힌다.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김민호 목사(우리장로교회)

 

여러분이 캐나다에 처음 이민 오셔서 하나님께 드린 첫 기도가 기억나십니까? 어쩌면 우리의 첫 기도는 캐나다에서의 정착과 번영, 자녀들의 잘됨과 행복을 꿈꾸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여러분의 이민 생활 중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들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굵직굵직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경험을 하기까지 간절히 기도했던 여러분의 기도와 결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릴 영광과 감사보다 여전히 내 자신의 번영과 명예, 가족의 행복과 평안에만 맞추어져 있는지는 않습니까?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 온 이민자들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파별로 약속하신 땅을 받았습니다. 이미 건설되어 있는 건물, 경작해 놓은 땅,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 열매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에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재정립하고 하나님과 맺었던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고별 설교를 합니다.

이 언약갱신은 아주 역사적인 세겜이란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세겜은 일찌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첫 번째로 제단을 쌓은 곳 (12:6,7)이었고, 야곱이 삼촌 집에서 돌아올 때 우상들을 다 묻은 곳이었습니다.(35:4) 여호수아도 가나안 입성 초기에 이곳에 있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우고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낭독케 해 신앙적 결단을 촉구한 곳입니다.(8:30-35)

이 의미있는 땅, 세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놓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오셨는지를,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요셉, 애굽, 출애굽, 광야, 그리고 가나안 정복까지의 스토리를 한 편의 영화처럼 쭉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But as for me and my household, we will serve the LORD.

이 부분을 읽다가 여호수아의 이 고백이 제 가슴속에 확 들어왔습니다.

I will serve the Lord라고 한 것이 아니라 We will serve the Lord 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우리도 쉽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자녀가 다 장성한 후에도 우리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Silence Exodus(조용한 출애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국의 이민교회를 경험한 한인이 교회의 청소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서 신앙도 떠나는 모습을 보고 한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이 고백은 모든 백성들이 자신들의 번영만을 꿈꾸고 있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그는 지금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 그의 자녀들도 장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 있게 모든 백성들 앞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닌 그의 평생의 삶이 담긴 묵직한 고백이며, 그의 자녀들도 여호수아가 살아낸 삶의 모습을 보고 배워서 함께 고백했던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과 번영을 꿈꾸는 그 자리에서, 여호수아는 진정으로 해야 할 고백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며 그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가 그토록 바랬던 이 땅에서의 정착과 번영을 성취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만이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야 했던 것일까요? 우리의 처음 소망이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정말 바래야 할 소망은 여호수아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나와 함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편집인 칼럼] 한국의 ‘트럼프 리스크’

● 칼럼 2024. 2. 21. 10:0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한국의 ‘트럼프 리스크’

 

 

유럽이 혼란에 빠졌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던진 말폭탄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유세에서 “방위비를 부담하지 않는 나토 회원국을 공격하도록 러시아를 부추기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방위비를 내지 않는 나라에 대해 러시아에게 공격하라고 독려하겠다는 것이다.

제3자가 들어도 도대체 제정신으로 내뱉은 말인지 의아하다. 아무리 돈이 중하다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적에게 동맹국을 공격해달라고 부탁한다니 놀랍고도 반역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당사자인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이 느낀 배신감과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유럽에는 트럼프의 지난 집권기인 5~6년 전에도 비슷한 언동으로 나토를 들쑤시고 동맹의 불신과 불안을 불렀던 트라우마가 있다. 그런데 ‘악몽’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강한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더구나 미국과 나토의 지지부진한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갈수록 기세등등해지고 있는 상황과도 맞물려 유럽에 일고있는 우려와 충격은 엄청나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원래부터 미국 주도로 창설된 군사-안보동맹이다. 1949년 출범 당시 소련의 위협과 군국주의 부활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출범했지만, 이후 정치·경제적 위기와 대테러 및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등 북미와 유럽의 공동안보와 평화를 추구하는 집단 방위체제로 기능하고 있다. 당초 12개국이던 회원국도 31개국으로 크게 늘었다.

국제 상황과 역학 변화에 따라 나토의 위상과 역할도 달라지고 있지만, 창설이래 불변의 원칙은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은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고 명시된 조약 제5조의 집단방위 확약이다. 거기에 ‘돈을 내지 않으면 회원국이라 해도 공격을 방관한다거나 조장한다’류의 숨은 의미는 없다. 설령 돈을 내지 못해도 침략을 당하면 자동적으로 무력개입하여 공동 방위한다는 약속이 ‘동맹’에 내포된 것은 상식이다. 최근에 중립국 지위를 버리고 3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핀란드와 가입을 눈앞에 둔 스웨덴 모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에 자극받아 나토의 ‘공동방위’ 안보 울타리가 절박해진 것도 그런 기대와 신뢰에 기반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의 세계 최강 군사력이 나토 전력을 좌우하는 것을 무기로 ‘안보 무임승차론’을 디밀며 유럽 동맹들에게 돈을 강요한다. 그는 아예 나토를 탈퇴해 버리겠다는 위협에 더해 적국에 공격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극언의 겁박까지 서슴치 않았다.

트럼프는 미국에서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을 누르고 4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오른다면, 악몽은 현실이 된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좌충우돌하는 그의 언행들로 보아 동맹을 적국만도 못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협박이 헛소리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기에 안절부절하는 것이다.

 

유럽의 ‘트럼프 쇼크’가 먼 산의 불이 아닌 ‘한국 리스크’로 다가오는 것은, 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천문학적 방위비 분담금을 쥐어 짠 ‘살벌한 추억’이 생생한 까닭이다. 더구나 한국 현 정부의 어리숙한 외교-안보 역량과 그로인한 위기가 날로 고조되고 있는 남북대치와 한반도 정세의 위태위태한 현실 때문이다.

트럼프 말폭탄과 관련해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전례가 없다고 지적한 미국 뉴욕 타임즈는 “유럽의 동맹국들이 미국에 기댈 수 없게 된다면 상호 안보협정을 맺은 다른 나라들 역시 미국의 도움을 확신하기 어렵다”면서 이는 과거 한국전쟁과 같은 상황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상기시켰다. “역사는 이런 상황이 전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1950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제외한 ‘극동 방위선'을 발표한 지 5개월 뒤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고 적시, 6.25 남침을 초래했다고 보는 ’애치슨 라인‘에 비견하기도 했다.

어쩌면 한국에 있어 트럼프 충격의 재발은 유럽 그 이상의 태풍으로 닥칠지 모른다. 트럼프가 재등장하면 주한미군과 전략자산을 담보로 한 공박은 몇 배 거셀 것이다. ‘동맹’이나 ‘우방’에 의미를 두지않는 트럼프가 “한국방위에서 손을 떼겠다”든가, 유럽동맹에 겁을 준 것처럼 설마하니 “내 친구 김정은에게 공격하라고 부추기겠다” 식의 청천벽력 같은 괴설을 늘어놓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

이제 머잖았는데, 자주국방은 내팽개치고 미군철수와 전작권 보유에 겁을 내면서, 상전처럼 떠받드는 미국의 군사력에 목을 매단 세력들은 경재도 폭망상태니 어떻게 해야하나… 북한과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 우크라이나에서 암암리 대리전을 치르면서 중국과 러시아 마저 적으로 만든 외눈박이 무능정권의 ’트럼프 리스크’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사면초가에 빠져 “독도를 넘겨줄게”라며 일본으로 달려가 자위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목회칼럼] 축복의 삶

● 칼럼 2024. 2. 21. 09:5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축복의 삶

 

이영정 목사 (덴토니아파크 연합교회 담임)

 

오늘날 세상은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충돌로 사회는 점점 복잡해 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리와 가치관이 각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는 온전한 절대적 진리는 없다. 단지 지엽적인 진리만 있을 뿐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대화의 시작부터 자신의 주장을 문화와 종교라는 테두리안에서 하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것 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의 주장도 수많은 진리주장의 하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종교의 교리를 무분별하게 기독교와 혼합하면서 새로운 진리라고 현혹하는, 착각속에 빠져있는 목사와 그들의 그럴듯한 주장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에  “진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자체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바른말을 하기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똑바로 이해해야 하고 이를 표현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도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갈리어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교단의 지엽적인 믿음을 대변하는 교리주의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제기되는 논점에 대한 대답을 성경을 통해서 찾고 있는데 그 당시의 문화와 사회상황을 참고하며 이해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가 마치 지식인의 전유물인 것 처럼 착각하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믿음의 실체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없이 그럴듯한 궤변으로 현혹하고 현혹되는 요즈음의 현실에 절실히 요구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창조의 의지를 ‘정의와 자비’라는 대 명제를 통해서 성경에 증거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삶 그리고 고난과 부활의 십자가를 통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야기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내용은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세상 안에서 “삶을 통해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과 봉사로 이룬 선교가 중심이 된 삶의 핵심요소입니다. 참교회의 모습을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룬 믿음 공동체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은 정의와 자비를 깨닫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삶에서 실현시키는 공동체의 선교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제기된 한 신도의 질문이 오랬동안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하는 토론과 성경공부는 선교라는 차원에서 볼 때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준비를 언제 까지 하고만 있을겁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손과 발이되어 그의 자비로운 따뜻한 마음을 품고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어려운 이웃에게 선교를 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숨이 살아 있는 축복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