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둔화된 지각과 주권의 펀치

● 칼럼 2023. 12. 3. 07:4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둔화된 지각과 주권의 펀치

 

 

사람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콧속에 있는 후각상피 세포가 냄새분자를 인지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뇌중추에 전달해 구분해내는 신경전달 시스템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후각세포는 아주 예민해서 미약한 자극에도 금방 반응을 보이는 반면, 예민한 만큼 금세 피로해지는 특징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심한 악취도 조금 지나면 별 것 아닌 냄새처럼 익숙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대변을 볼 때 처음엔 심한 냄새가 엄습하지만 얼마안가 둔해지는 이유도 그렇게 설명된다.

후각세포의 기능이 단발성이어서 곧 둔감해지는 게 천만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한없이 강한 악취를 지속 감지하는 ‘고성능’을 자랑한다면 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역일 것이다. 물론 후각세포의 둔감이 악취 뿐은 아닐테니, 향기에 대해서도 곧 둔해지는 것은 마찬가지 이겠지만.

감각이 짧은 시간에 둔해지는 것은 비단 후각 뿐만이 아니다. 피부의 촉감도 자극이 오래가면 둔해지고, 반복되면 무감각해진다. 고통 역시 길어지고 되풀이 되면 익숙해지며 면역력이 생겨서 무덤덤 해진다. 훈련을 통해 인내력을 키우면서 단련하는 것도 사람의 그런 감각적 적응력과 내성, 혹은 둔감화의 순작용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일 게다.

문제는 사람의 ‘둔감 적응력’이 형이하학적 말초 감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부분, 즉 지성(知性)과 감성(感性) 등 지각(知覺)능력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순진하던 사람도 폭력영화를 자주 보면 폭력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고, 누군가에게 욕설과 험담을 지속적으로 듣는 사이 그러려니하고 무감각해지는 현상, 커닝을 반복하다 보면 시험 때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커닝에 의존하게 되고, 뇌물을 하나 둘 챙기다 나중에는 거액을 수뢰해도 양심적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윤리의식의 마비 등 사례들이 그렇다. 예민한 반응으로 인간의 고통과 불편을 덜어주는 순기능도 있는 반면, 고통스런 환경과 불편한 상황에 무신경해져서 삶의 질이 낙후되는 역작용의 후유증에 내몰리게 된다.

거짓말과 허풍으로 똘똘뭉친 트럼프가 등장했을 때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매일이다시피 쏟아내는 그의 폭탄발언과 기행을 지탄하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사람들은 차츰 무덤덤해져 갔다. 과격한 말과 허세의 되치기, 덮어 씌우기가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제는 차기 대통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당당한 정치거물 트렌드로 자리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한국에서 한층 더 심각한 둔감화의 역기능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정권이 등장한지 이제 1년 반이 지났건만, 하루가 멀다하고 상식과 원칙과는 거리가 먼 사례들이 돌출하면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겼는데, 이제는 다들 무감각해진 것인지, 아예 그러려니 포기한 건지 피로감인지, 무거운 침묵에 빠져있는 감 마저 느낀다.

검사 대통령에 정부부처 요소요소를 검사들이 장악한 이른바 ‘검찰공화국’이 되어 국정이 검찰청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정치부재, 경제추락과 외교 안보의 파탄 등등 숱한 폐해에도 모두가 그런가보다 익숙해진 듯하다.

대통령 일가의 범죄의혹은 덮기에 바쁜 것과 달리 야당과 비판세력에는 가혹하고 끈질긴 검찰 총력수사로 날을 지새는데도, 비리검사 탄핵론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핍박받고 노예 취급을 당했던 국민들이 엄연히 살아서 사죄를 요구하는데 압제자들 편이 되어 과거사는 덮어버리자고 입막음에 나섰다. 최근 법원이 다시 배상책임을 인정하자 일본은 ‘한국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큰소리치고 나왔다. 국민 대다수가 제2의 침략이라고 규탄하는 핵폐수 방류를 정부예산 들여 홍보해주는 일본의 대변정권, 욱일기를 달고 영해를 누벼도 동해를 일본해라고 못박아도 끽소리 못하는 비굴한 외교에도 반응이 별로없다. 국가 미래를 좌우할 예산과 복지부문은 뭉텅뭉텅 잘라 낸 반면 정권홍보와 해외순방 예산은 대폭 늘려 극우단체들 설치게 하고, 한달 단위 호화외유를 즐기는데 ‘여사 패션’과 미용 운운 기사만 넘쳐난다.

친정권 언론이 90%를 넘는 현실에도 성이 안차는지, 공영방송들을 장악하려고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하는 무리수에도, 해당 언론사 외에는 반발의 함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같은 국민적 ‘지각 둔감’ 현상에 우둔한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남북간에 최소한의 평화장치인 ‘9.19 군사합의’의 무력화를 시도해 휴전선 일대는 물론 긴장과 충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강구하기는 커녕 정세 판단능력이 위태로운 힘의 논리와 강국 추종의 저돌성만 드러내고 있다. 와중에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어야 할 국정원은 파벌싸움으로 지리멸렬상을 드러냈고, ‘역전승’할 것처럼 온통 법석을 떤 월드엑스포 유치는 ‘폭망’과 낙담으로 수치를 안겼다.

모두가 무신경·무감각 해지면 사회전체에 부패와 폭력이 난무해도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폐수가 스며드는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결국은 나라와 민족이 오염돼 패망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복싱 강자는 펀치가 날아와도 절대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야 허점을 노려 일격에 KO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둔감에 눈을 감지말고 감각과 지각을 깨워야 한다.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주권의 펀치를 가다듬을 때이다.

[목회 칼럼] 그 분을 기다리는 삶

● 칼럼 2023. 12. 3. 06:2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그 분을 기다리는 삶   

 

고영민 목사

< 본 한인 교회 담임목사 >

 

올해는 12월 3일 주일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교회와 가정에서 대림절 화환을 장식합니다. 전나무로 만든 둥근 모양의 화환에 4개의 초를 꽂아 놓고, 가운데에 하얀 초를 꽂아 놓습니다. 매주 마다 하나씩 촛불을 켜면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마침내 성탄절이 되었을 때에 가운데 있는 하얀 초를 밝히게 됩니다. 4주 동안 켜는 대림절 촛불을 통해서 주님을 기다라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대림절 첫번째 주일의 촛불은 희망의 촛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어둠과 절망 가운데 사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망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기를 다짐하게 됩니다.

두번째 촛불은 평화의 촛불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평화이십니다.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모든 사람을 하나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다시 모시고, 갈등과 전쟁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기를 다짐하게 됩니다.

세번째 주일은 기쁨의 촛불입니다. 세번째 촛불을 펴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합니다.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고, 땅의 슬픔 속에서 하늘의 기쁨을 보게 해 달라고, 더 나아가 오직 주님 한 분만을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마지막 네번째 촛불은 사랑의 촛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랑의 충만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세상 속에서 사랑의 불꽃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들을 향해서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기간 동안 더욱 사랑을 실천합니다. “꼭 이런 때만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느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절기가 아니라, 항상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때라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희망 품고 살기, 평화 만들기, 기쁨 빼앗기지 않기, 사랑실천하기, 대림절 촛불을 우리의 영혼 가운데 밝히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삶으로 우리 모두 함께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편집인 칼럼] 삼권분립 허상과 ‘합법 독재’

● 칼럼 2023. 11. 18. 07:3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한마당]  삼권분립 허상과 ‘합법 독재’

 

김용민 화백

 

대한민국은 엄연히 헌법을 바탕으로 삼권이 분립된 민주주의 국가다. 3권 분립은 정립(鼎立)이라고도 한다. 입법-사법-행정부가 마치 솥의 세 다리처럼 균형과 견제로 국가를 이룬다 하여 민주국가의 정치 시스템을 그렇게 표현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삼권이 정확히 균형을 이루며 서로 견제하는 나라가 맞는가? 대답은 한마디로 “아니올시다”이다. 한국사람 어느 누구도 삼권이 정립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입법과 사법에 비해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 권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식 민주정치 시스템을 답습했다고 하나, 입법권력이 막강하고 각종 법률적 정치적 견제장치가 작동하는 미국에 비해 한국의 대통령 권력은 거의 기형적이라 할 만큼 무소불위에 가깝다. 법규정과는 달리 그 사람의 개인적 자질과 민주적 소양에 따라 고무줄처럼 무한대까지 늘어나 ‘왕정시대 아니냐’는 말이 나기도 한다. 요새 한국의 정정(政情)은 그런 초법적 권력을 확연히 체감시켜 준다.

사법부 독립이 법에 명시된 원칙이고 상식임에도, 대법원장 후보추천을 앞두고 대통령실이 왈가왈부하더니 ‘설마’가 ‘역시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 구미에 맞는 판결을 유도해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재발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역시 대통령의 대학동기가 지명됐다.

대통령의 권력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비해서도 월등하다. 국회가 ‘민의’에 따라 제정한 법률을 거부권(재의 요구권) 하나로 무력화 시킬 수가 있다. 양곡관리법과 간호법 사례가 말해준다. 국회는 청문회를 통해 장관후보자들의 자격을 따지지만, 적부 검증에 상관없이 대통령이 임명하면 그만이다. 현정부 들어 19명이 그렇게 청문절차를 ‘패싱’했다. 국회는 국무위원들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건의’여서 국회에서 다수결로 사실상 파면된 총리도 장관도, 대통령의 국회 무시에 기대어 보란 듯이 직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 권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대통령의 위세는 독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법부 수장과 대법관들을 임명하도록 한 월권적 모순과 마찬가지이고 선거관리위원회나 감사원도 예외는 아니다. 역시 민주정치 시스템의 결함 가운데 하나라고 봐야한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고, 독립성과 중립성이 생명이다. 그래서 제4부 라고도 한다. 하지만 언론, 특히 방송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다고 할 만한 방송통신위 위원장과 위원, 방송통신심의위 위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언론의 견제를 받아야 할 권력이 언론 감독 감시기구를 좌지우지 할 수 있게 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 사장 임명 전후 황당하게 제작진과 앵커 등을 무더기 교체하는 사달을 낸 한국방송(KBS)의 경우에도 사장 임면권을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애초에 불편부당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권력에 호의적인 언론지형을 만들려는 유혹은 어느 정권이나 있게 마련인데, 현실적으로 그 유혹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여지가 곳곳에 널려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힘은 정부의 기관들 뿐만 아니라, 산하 공기업은 물론 민간 영역에도 폭넓게 미친다. 금융기관과 단체의 장들, 심지어 사기업의 임직원들 자리도 영향을 받는다. 대통령의 인사권에 직간접 영향을 받는 자리가 어림잡아 1만8천개에 달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권력이요 ‘합법적인 독재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토양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면 당연히 이들 자리가 일제히 뒤바뀐다. 권력이동에 뒤이어 엄청난 자리이동의 후폭풍이 인다. 문제는 자리 뿐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나라의 정책기조가 경우에 따라 180도 전환한다.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외교정책은 외교관들이 헷갈릴 정도로 바뀌었다. 국방과 교육, 경제 등도 완전히 달라졌다. 인사폭풍과 함께 글자그대로 천지개벽 수준의 대전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5년마다 대통령 한사람 바뀌는 것으로 나라의 정책이 천지가 바뀌듯이 하루아침에 달라진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정상적인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자고나니 후진국”이라는 자조섞인 한탄이 나오는 상황이나, 대통령이 안하무인의 독재적 권력에 심취하게 되는 현실이 국가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무엇보다 그런 제왕적·독재적 권력을 쟁취하려는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의 후유증은 심각하기 이를데 없다.

대통령제가 매력적이라고는 하나 권력행사의 범위를 좁히고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 국회의 통제를 원용하되 사법수장은 사법부가 뽑고, 언론통제는 언론계 스스로 하게 해야 한다. 최근 국회가 통과시킨 방송3법도 그런 방편의 하나다. 거부권으로 무산시킬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국가정책의 변화도 정체성 혼란이 없을 만큼의 제한을 둬야 한다. 대통령 때문에 나라와 국민이 큰 고통을 겪는 것은 불행이다. 대통령은 권력만 향유하기 보다 오직 국민을 섬기며 국가발전 헌신에 집중하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목회 칼럼] 교회의 리빌딩이 필요하다

● 칼럼 2023. 11. 18. 07:3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교회의 리빌딩이 필요하다"

 

 박원철 목사 <늘 사랑교회 담임목사>

 한목협은 지난 1월에 2012년 한국교회 개신교인의 비율은 22.5 %였는데, 2022년에는 15.0 %까지 하락했다는 분석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한국교회 트렌드 2024>는 지난 10년 동안의 하락 추세율을 동일하게 적용했을 때 10년 뒤인 2032년에는 개신교인 인구가 10.2%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새롭고 변화된 목회전략을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 책은 담임목사, 부목사, 전도사, 개신교인,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교회와 관련된 광범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10명의 전문가들이 한국교회 트렌드를 전망하고 예측한 '한국교회 생존전략 트렌드 분석서’로서 “코로나 이후 전국적으로 교회의 주요 사역 회복도가 60-70% 선이며, 현장예배의 회복이 85% 선에서 멈추고, 30명 이하 소형교회로의 편중화(10년간 82% 증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분석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한국교회 트렌드 2024>가 분석한 10개의 주제 중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약한 고리 3040 세대: 직장과 가정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부담으로 신앙 침체로 접어들 위험이 있는 세대'이다. 지금 한국의 3040 세대는 끼인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3040세대들의 현실은 녹록하지가 않다. 그들은 취업과 결혼과 육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제적인 상황에 따라 그들의 현실은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3040 세대의 현실은 척박하다. 이런 3040세대들을 위해서 교회가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교회는 대체적으로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한국의 인구 중에서 20대 다음으로 3040 세대의 종교인구가 적다고 한다. 3040세대에게서 종교가 필요 없다는 의견도 가장 많이 나온다. 가나안 성도, 플로팅(교회를 찾아 돌아다니는) 크리스천이 가장 많은 세대가 3040이다. 이들은 연령상으로 교회 안에서 허리가 되어야야 하는데 도리어 가장 약한 고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3040 세대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기존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로는 3040세대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3040세대들의 현실과 신앙관을 잘 이해하면서 어떻게 목회 현실을 맞춰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대격변기를 맞이하였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인수가 급감했다는 것이다. 교인수의 감소는 교회의 존립 위기를 낳는다. 그래서 30명 미만의 소형 교회가 늘어나고, 초소형 교회들은 폐쇄되는 위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교인들도 변했다. 코로나 기간 새로운 유형의 교인들이 나타났다. 플로팅 크리스천과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즉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교회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이다. 교회 공동체성도 예전 같지가 않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신앙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된 교인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 자기 신앙을 (특별히 온라인을 통해) 만들어갔다. 교회는 이와 같은 격변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이전과 같은 구조와 형태로는 교회가 유지조차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대격변기를 맞이한 교회는 이제 리빌딩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