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한마당] 둔화된 지각과 주권의 펀치
사람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콧속에 있는 후각상피 세포가 냄새분자를 인지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뇌중추에 전달해 구분해내는 신경전달 시스템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후각세포는 아주 예민해서 미약한 자극에도 금방 반응을 보이는 반면, 예민한 만큼 금세 피로해지는 특징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심한 악취도 조금 지나면 별 것 아닌 냄새처럼 익숙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대변을 볼 때 처음엔 심한 냄새가 엄습하지만 얼마안가 둔해지는 이유도 그렇게 설명된다.
후각세포의 기능이 단발성이어서 곧 둔감해지는 게 천만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한없이 강한 악취를 지속 감지하는 ‘고성능’을 자랑한다면 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역일 것이다. 물론 후각세포의 둔감이 악취 뿐은 아닐테니, 향기에 대해서도 곧 둔해지는 것은 마찬가지 이겠지만.
감각이 짧은 시간에 둔해지는 것은 비단 후각 뿐만이 아니다. 피부의 촉감도 자극이 오래가면 둔해지고, 반복되면 무감각해진다. 고통 역시 길어지고 되풀이 되면 익숙해지며 면역력이 생겨서 무덤덤 해진다. 훈련을 통해 인내력을 키우면서 단련하는 것도 사람의 그런 감각적 적응력과 내성, 혹은 둔감화의 순작용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일 게다.
문제는 사람의 ‘둔감 적응력’이 형이하학적 말초 감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부분, 즉 지성(知性)과 감성(感性) 등 지각(知覺)능력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순진하던 사람도 폭력영화를 자주 보면 폭력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고, 누군가에게 욕설과 험담을 지속적으로 듣는 사이 그러려니하고 무감각해지는 현상, 커닝을 반복하다 보면 시험 때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커닝에 의존하게 되고, 뇌물을 하나 둘 챙기다 나중에는 거액을 수뢰해도 양심적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윤리의식의 마비 등 사례들이 그렇다. 예민한 반응으로 인간의 고통과 불편을 덜어주는 순기능도 있는 반면, 고통스런 환경과 불편한 상황에 무신경해져서 삶의 질이 낙후되는 역작용의 후유증에 내몰리게 된다.
거짓말과 허풍으로 똘똘뭉친 트럼프가 등장했을 때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매일이다시피 쏟아내는 그의 폭탄발언과 기행을 지탄하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사람들은 차츰 무덤덤해져 갔다. 과격한 말과 허세의 되치기, 덮어 씌우기가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제는 차기 대통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당당한 정치거물 트렌드로 자리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한국에서 한층 더 심각한 둔감화의 역기능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정권이 등장한지 이제 1년 반이 지났건만, 하루가 멀다하고 상식과 원칙과는 거리가 먼 사례들이 돌출하면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겼는데, 이제는 다들 무감각해진 것인지, 아예 그러려니 포기한 건지 피로감인지, 무거운 침묵에 빠져있는 감 마저 느낀다.
검사 대통령에 정부부처 요소요소를 검사들이 장악한 이른바 ‘검찰공화국’이 되어 국정이 검찰청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정치부재, 경제추락과 외교 안보의 파탄 등등 숱한 폐해에도 모두가 그런가보다 익숙해진 듯하다.
대통령 일가의 범죄의혹은 덮기에 바쁜 것과 달리 야당과 비판세력에는 가혹하고 끈질긴 검찰 총력수사로 날을 지새는데도, 비리검사 탄핵론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핍박받고 노예 취급을 당했던 국민들이 엄연히 살아서 사죄를 요구하는데 압제자들 편이 되어 과거사는 덮어버리자고 입막음에 나섰다. 최근 법원이 다시 배상책임을 인정하자 일본은 ‘한국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큰소리치고 나왔다. 국민 대다수가 제2의 침략이라고 규탄하는 핵폐수 방류를 정부예산 들여 홍보해주는 일본의 대변정권, 욱일기를 달고 영해를 누벼도 동해를 일본해라고 못박아도 끽소리 못하는 비굴한 외교에도 반응이 별로없다. 국가 미래를 좌우할 예산과 복지부문은 뭉텅뭉텅 잘라 낸 반면 정권홍보와 해외순방 예산은 대폭 늘려 극우단체들 설치게 하고, 한달 단위 호화외유를 즐기는데 ‘여사 패션’과 미용 운운 기사만 넘쳐난다.
친정권 언론이 90%를 넘는 현실에도 성이 안차는지, 공영방송들을 장악하려고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하는 무리수에도, 해당 언론사 외에는 반발의 함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같은 국민적 ‘지각 둔감’ 현상에 우둔한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남북간에 최소한의 평화장치인 ‘9.19 군사합의’의 무력화를 시도해 휴전선 일대는 물론 긴장과 충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강구하기는 커녕 정세 판단능력이 위태로운 힘의 논리와 강국 추종의 저돌성만 드러내고 있다. 와중에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어야 할 국정원은 파벌싸움으로 지리멸렬상을 드러냈고, ‘역전승’할 것처럼 온통 법석을 떤 월드엑스포 유치는 ‘폭망’과 낙담으로 수치를 안겼다.
모두가 무신경·무감각 해지면 사회전체에 부패와 폭력이 난무해도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폐수가 스며드는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결국은 나라와 민족이 오염돼 패망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복싱 강자는 펀치가 날아와도 절대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야 허점을 노려 일격에 KO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둔감에 눈을 감지말고 감각과 지각을 깨워야 한다.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주권의 펀치를 가다듬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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