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듯이,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들은 귀에 따갑고 신경에 거슬리는 법이다.
불의에 눈감거나 물러서지 않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소명에 충실한 언론의 비판적 소리가 위정자들의 귀에 달가울리는 없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자들은 주인인 국민들의 쓴소리와 회초리를 달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머슴이 주인 눈치를 보기싫다면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공직자들이 국민의 위임을 받았듯이 언론은 -물론 사익이 아닌 공익에 승부를 건 언론을 말하지만- 국민을 대신해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론의 질타를 무시해선 안되고, 귀를 기울이며 복무자세를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언론이 동네북 신세가 되어 버렸다. 특히 권력자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언론다운 언론’은 갈수록 심각한 면박과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현상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상스런 발언영상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해외순방 특별기 탑승을 봉쇄하고 기자단에게 징벌해달라고 요구하는 기이한 사건은 국제적 망신거리가 됐다. 발언 영상이 수많은 매체에 보도됐는데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언성을 높여 잡아떼는 것도 가관이었다. 특정 방송사 하나를 꼭 찍어서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만들어 보도해서 동맹을 이간질했다“고 단정하는 기상천외한 비약은 가히 경이로웠다. 방송을 보고들은 수백만 수천만의 국민들은 ‘눈에 보여도 못보고 귀에 들려도 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되어 버렸다. “바이든이 아니라 국내 야당을 향한 말이었다”고 공식 브리핑으로 일부나마 인정했던 대통령 홍보수석은 틀림없이 정신이상자였고-.
언론이 조롱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를 듣게 된 것은 큰 불행이다. 언론답지 못하고 기자답지 못한 저널리즘의 타락상을 말해 주는 자업자득의 업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열심히 취재를 하려는 기자가 범법자 용어인 ‘스토커’로 전락하고 취재대상은 ‘신변보호’ 혹은 접근금지 대상자가 되어 아예 취재영역에서 제외되고 보호받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더구나 ‘스토커’는 짝사랑 상대나 빚진 자 같은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일반인이 아니라,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 특히 법무장관이라는 고위공직자를 취재하기 위해 쫓아다닌 열혈기자였다. 국민의 위임을 받아 세금으로 국록을 받아먹는 고위 공직자라면 매사 투명하게 봉직하면서 국민들이 까발리고 설명하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요구에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밀착 취재하는 기자들을 스토커라고 범죄인 규정하면서 처벌대상으로 삼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말라며 방호벽을 치고 위협하는 상식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이 “스토킹을 하지말라”고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니, 기자를 진짜 법적인 스토커로 만드는 데 법관이 거들고 나선 셈이다.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자유를 지켜줘야 할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마저 본령을 저버리고 무소불위 검찰 위세에 쫄아든 것인지, 역시 상식의 반전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정권 보수 일색인 언론 지형인데, 몇몇 비판적 언론사를 공박하며 지원예산을 삭감하고 민영화 칼을 빼들고 있다. 눈엣가시 기자를 고소하고 10억대 소송까지 한다. 듣기 좋고 입맛에 맞는 ‘아양 언론’만 남기겠다는 안하무인의 발상이다.
바로 세계 10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대한민국에서 최근 목도하는 일들이다. 어쩌면 30~50년 전 군사독재 시절을 능가한다는 시각도 나온다.
30년 전, 도쿄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일본 총리의 특별기에 동승해 한국을 방문한 기억이 떠오른다.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가 경주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였다.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해 온 한국기자였지만, 일본정부는 총리 특별기에 선선히 태워주었고, 다행히 호소카와 총리의 진솔한 과거사 반성 언급을 취재하기도 했다. 정치 후진국 일본이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뤄 진보성향의 소수 연립정권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총리 특별기에 외국기자를 태우고, 특히 보도 논조를 따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돌아보아도 타산지석이다.
30년 전의 일본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다. 왕조시대에도 사관들의 목숨 건 직언과 선비들의 도끼상소(持斧上疏: 지부상소)가 있었기에 왕을 깨우쳐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었다. 군사 독재정권의 망령도 개탄스러울 진대, 한 술 더떠 치졸하고 조폭적인 언론핍박을 대놓고 자행하다니 무슨 전제 왕권인 줄 착각한다면, 제 발등 찍는 일이었음을 깨달은 때는 이미 늦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성탄트리를 만든다. 푸른 전나무에 불빛을 두르고 형형 색색의 등근 방울과 장식용품들을 단다. 도심 거리와 종탑에는 대형 성탄트리를 달며 백화점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성탄트리를 만들어 고객을 유인한다. 그런데 성탄트리가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를 상징하며, 모세가 호렙산에서 본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얼마나 될까. 이것을 기억하며 올 해는 성탄트리를 만들며 주님의 몸에 참여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선악과는 열매가 있어 먹음직스럽고 화려하여 아담과 하와가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열매가 없고 그냥 소나무같이 나무다. 찬 겨울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 칠 때 까지는 소나무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화려한 모든 꽃과 열매가 떨어지고 난후 굳굳히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생명나무는 바로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우리 위해 희생당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 육신의 몸을 입은 것이 생명나무이다. 생명은 영원한 신성을 나타내며, 나무는 곧 유한한 인성을 나타낸다. 인간이 된 이 나무를 우리가 먹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 바로 생명나무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현현을 본 사람이다. 그때 나타난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가장 쉽게 불에 타는 연약한 나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날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도 떨기나무의 형태가 사라지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성인 불꽃과 인성인 나무가 하나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다. 이것이 출애굽기에 나타난 여호와(야훼) 즉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모세는 거기서 신발을 벗으며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신실한 종이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는 목동이 아니다. 그가 손에 든 하나님의 지팡이는 애굽의 강을 피로 물들이며,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된 것이다.
성탄트리는 바로 이 떨기나무 불꽃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푸른 전나무는 예수님의 몸인 인성을 상징하고, 그 몸에 둘린 전구의 불빛은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한다. 독일에서는 성탄절날 이 나무를 실제로 불태우면서 성탄절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통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나무가 희생됨으로서 인류에게 영생의 불과 생명을 주는 것이 성탄트리의 의미이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아무리 전깃 불에 태워도 성탄트리는 타지 않는 영생하는 생명나무이다. 이 나무가 고통과 질병과 좌절과 낙심으로 우울해진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와 회복을 주는 참된 양식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교회 안에 성탄트리를 밝히면서 주님의 임재를 깨닫고 잠자던 신앙에서 깨어나 빛을 발하는 생명나무 즉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검찰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됐다. 검사가 곧바로 대통령이 되면서 역시나, 다들 우려하던 ‘검찰공화국’이 드디어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설마 처벌이 될까”, “구속이라니 말도 안돼”라고 이구동성 말들 하지만, 검찰은 희한한 기교로 올가미를 씌우고 교묘히 판사의 저울추를 움직여 구속영장을 받아낸다, “그런 적 없다”고 단언하던 사람들이 검사실에 불려 다니더니 갑자기 증인으로 돌변해 ‘검찰 앞잡이’처럼 굴어댄다. “그 사람은 탈북자”라고 입을 모아 공언했던 공직자들이 돌연 태도를 바꿔 “탈북으로 조작했다”고 거들어 전직 장관과 청장을 옥에 잡아넣고, 이젠 그 ‘윗선’을 문초하겠다고 벼른다. 그야말로 거칠 게 없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불가능이 가능한 게 대한민국 검찰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 검찰의 칼끝이 전 정권 수뇌부와 야당대표를 겨누고 질주하면서 한국 정치가 완전 실종상태에서 혼돈에 빠졌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는 삿대질과 악담만 떠돌고 있다. 어쩌면 의원들도 언제 검찰 칼날에 찔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경이 곤두선 것 일지도 모른다. 설마하고 믿기지 않던 일들이 현실화하고, 도대체 죄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를 엮어 범죄자로 발라내는 칼 솜씨에 멸문지화를 당한 사례들을 똑똑히 보았으니 어쩌겠는가.
‘조직에 충성’하는 일편단심으로 마침내 검찰공화국을 만든 주역이어서 마냥 즐거운 것일까. 어둠이 내려앉으면 부하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던 습벽이 여전한 듯,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주취소식은 여전히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다. 벌써 5개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검사 습성에 충실한 나머지 정치를 특수수사로 해결하려 한다. 정치인 쯤이야, 막말과 욕설로 다루던 피의자 xx들로 여긴다. 국정의 파트너라느니 협치라는 말은 사치스런 고전적 정치용어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들도 여럿 잡아 넣었는데 갓 물러난 대통령 예우나 거대야당의 대표가 무슨 대수인가. 정치가 실종됐다니, 무슨 실종? 보기싫은 자들 내가 부리는 검사들 쌍칼에 날아가거나 굴종하면 모든 게 잘 되는 거야, 감사원도 이젠 내 손안에 있지 않나… 경제난 생계난에 안보 위기까지, 국민들의 불안과 국정의 표류는 안중에 없는 ‘무사’(武士)태평이다.
그렇게 암담한 검찰공화국의 ‘실행자’로 보이는 그 수하의 사람도 무소불위 안하무인인 것은 빼닮은 것으로 보인다. 검사에서 장관으로 직행했으니 검사의 습성 또한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국회에서 기고만장을 넘어 오만방자한 태도는 ‘절대 권력’ 검찰의 칼을 내비치며 ‘검찰왕국의 왕자’라고 박박 우겨대듯 오기가 넘친다. 국회의원들이 무시당하는 양태를 보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권위나 삼권분립도 실종상태가 됐다. 미사여구로 아부하는 언론은 융숭히 대우하며 특종감을 던져주고, 집요하게 진실을 추적하는 언론은 ‘스토커’라며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는 현실에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언론이 궤멸상태가 된 것도 당연하다. 그런 권력자들에게 국민들이 과연 ‘주인’일까, ‘개 돼지’일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었다.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지역주의적이었다. 개탄스러웠다. 권력에 굴종하다 약해지면 물어뜯었다. 나라가, 검찰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서 우려스러웠다." 일찌기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렇게 검찰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어디 김 전 대통령 뿐인가. 역대 정권에서 권력의 앞장이로 활개치다가 기우는 권력에는 하이에나처럼 물고 뜯고 날뛰는 검찰의 흑역사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곳곳에 얼룩져 있다.
이승만의 조봉암 제거, 박정희의 조용수 처형과 민족일보 폐간, 인혁당 사법살인, 전두환의 내란음모 날조 등 갖가지 패악에 검사들이 수족노릇을 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권력 아부의 망언, 무고한 퇴임 대통령을 자살로 내몬 파렴치 수사…. 독립투사들을 괴롭히던 친일검사들부터 자유당 때 설치던 반공검사들, 그리고 역대 독재정권과 그 아류 부패정권에서 정치수사와 조작의 주역은 검사들이었다.
오늘의 심각하고 위험한 현실은 그런 검찰권력이 ‘통치권력’ 마저 손에 쥐었다는 것과, 그들이 민주적 시스템과 합법으로 포장한 채 선택적이고 감정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사병화(私兵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대로’ 라는 합법의 기치를 내세워 수사와 기소권을 독점 행사하는데 제동을 걸 장치는 현 ‘공수처’가 열 개라도 부족하다. 국회와 법원이 막아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과연 기대할 만한가.
소위 선진국이라는 어느 나라에 이런 흑역사가 이어지는고. 참 불안하고 답답한 형국이다.
하지만 ‘칼은 칼로 망한다’는 경험칙적 금언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며 오래가지 못한다는 역사적 사실도 새겨둘 일이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한국적 저항의식과 오늘의 민주한국을 일군 정의감은 세계 최강이다. 검찰의 전횡이 미완에 그친 검찰개혁의 절실성을 절감시킨다는 역설도 희망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어쩌다 대통령이 된 ‘어통령’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이 “그야말로 ‘어쩌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고 칭했고, 윤 당선자 스스로도 누누이 “국민이 불러냈다”는 말로 어쩌다 대선에 나선 상황을 설명했다.
‘어통령’이 됐다는 건 윤 당선자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당선된 건 아니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가 국정 운영을 잘할 거라고 믿어서 지지한 국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지난 2월3~4일 케이스탯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에서 윤 후보 지지층의 64.8%는 지지 이유로 “정권교체를 위해서”를 꼽았다. “자질과 능력이 뛰어나서”는 4.1%, “정책이나 공약이 마음에 들어서”는 9.7%에 그쳤다. 실제 투표 결과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1차적으로 강경 보수층의 정권 탈환 욕망이 그를 유력 대선 주자로 띄워 올렸고, 여기에 현 정부의 집값 폭등과 세금 인상, ‘내로남불’에 성난 민심이 가세해 어쩌다 ‘윤석열 대통령’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윤 당선자가 드러내고 있는 난맥 또한 대부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준비되지 않은 ‘어쩌다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은 물론 그에게 투표한 지지층마저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윤 당선자가 자신의 첫 국정과제로 집무실 용산 이전을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은 그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엄중함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안보는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본연의 서비스다.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초적 ‘서비스 마인드’ 역시 안보에는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국방부·합참 연쇄 이전의 문제점과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시스템의 사장 등 곳곳에서 제기되는 우려를 ‘일단 청와대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기이한 논리를 들어 거듭 일축하고 있는 것은, 윤 당선자가 대통령의 기본 책무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왕적 대통령’에서 벗어나겠다며 ‘탈청와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졸속과 불통의 제왕적 행태를 드러낸 문제점에 대해서는 일일이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애초 윤 당선자가 “경호 문제나 외빈 접견 문제는 충분히 검토했다. 당장 인수위 때 준비해서 임기 첫날부터 광화문 집무실에 가서 근무가 가능하다”고 장담해놓고 당선된 지 사나흘 만에 경호와 시민 불편 등을 문제 삼아 용산으로 이전 장소를 바꾼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지 않을 수가 없다. ‘말 바꾸기’를 넘어 처음부터 용산을 염두에 둬놓고 선거 기간 중에는 국민들에게 듣기 좋은 ‘광화문’을 얘기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윤 당선자는 흔한 유감 표명조차 없이 “결단”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추켜세우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국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투명한 논의를 거쳐 국가적 의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지도자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보는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어통령’이 됐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윤 당선자가 용산 이전에 집착하며 당선 뒤 첫 3주의 ‘골든 타임’을 날려버린 것은 이걸 빼면 그가 국민에게 내놓을 수 있는 뚜렷한 비전이나 국정과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권을 잡긴 했지만, 정작 어떤 나라와 정부를 만들어 국민의 삶을 향상시킬 것인지는 스스로도 오리무중이기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속이 텅 빈 ‘정권교체’ 구호만으로 당선된 ‘어통령’의 근본적 한계다. 그가 국민의 실제 삶과 직결된 국정 분야에서 약간의 준비만 돼 있었다면, 지금처럼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며 귀중한 국정 동력을 허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윤 당선자 주변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레드팀’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어통령의 시대를 맞는 불안과 우려를 더욱 깊게 한다. 정치 초보의 불통 행보를 말리기는커녕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굳은 의지”(권성동),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결단”(김기현) 운운하며 칭송하기에 급급한 사람들뿐이다. 계속 이 상태로 간다면 언젠가는 국민들이 소리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