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조약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숫가에 앉아 있습니다. 평화스러운 수평선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조금 전 산에서 내려올 때 떠오르던 단상을 문득 편지로 부치고 싶었답니다.
지난여름 따갑게 내리쬐던 태양 아래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아픔 그 자체였지요. 탈레반에게 무참히 총살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시민들, 미 캘리포니아와 B.C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던 산불, 그리고 허리케인…독서나 글 쓰는 일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더랬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무색할 만큼 잔인한 계절에 아무 대처할 힘도 없던 피해자들…그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도 도움의 손길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그 ‘인류애’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런저런 고통의 사연을 접할 때마다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고, 내 주변의 친구들과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가게에 매일 들르는 용접공이 있어요. 그는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작업장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일해요. 늘 후줄근한 모습이지요. 토론토에서 해밀턴까지 버스로 직장을 다닌다고 해요. 퇴근 시간에 들러서 빵이나 캔 참치 또는 파스타를 사곤 하지요. 새벽에 갔다가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이 노총각에게 “ 당신 같은 용접공이 있어서 든든해요. 내 손자 만한 꼬마들이 뛰어 놀 안전한 그네를 만들어 줄 테니까요“ 라고 말하면 그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지요. 또 부부가 의사인 집에서 그들의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아주는 유모에게, 그녀 덕분에 마음 놓고 자녀를 맡긴 의사 부부는 환자들 치료에 더 매진할 수 있을 거라고 귓속말을 해준답니다. 무거운 운송 물품을 어깨에 지고 오는 배달부에게도 물 한 병 건네주면서 행복을 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소소하지만 드러나지 않게 필요한 일을 해주는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지에, 그래서 나 역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산을 찾아가는 사람이 산 앞에 겸허한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산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산을 정복하려고 드는 걸까요? 난 ‘정복’ 이라는 단어를 몹시 싫어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정복해야 하나요? 그 단어보다는 ‘공동 작업, 혹은 협업(collaboration)’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달라지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세상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가 내내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감화시키는 인풀루언서(influencer,영향력자)들입니다.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유명 강사가 아닐지라도, 정직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노동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정신은 고고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사랑하는 그대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스펙을 쌓느라 으스대는 일도 없고, 자본주의 이윤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그저 나누어 줄 줄만 아는 그대들, 이제 열매를 거두는가 하면, 이파리를 떨구고 가벼워지는 법을 깨우친 그대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미숙하기만 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 -Albert Camus/ *모든 낙엽이 꽃으로 보일 때에야 비로소 가을은 제2의 봄이 되는 것이다” - 앨버트 카뮈(*필자의 의역)
떨어져 뒹구는 낙엽까지도 꽃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다면, 스산한 가을도 새로운 봄의 계절이 된다는 말이겠지요? 많은 사람이 긴 팬데믹에 지쳐서 우울하다고들 하네요. 누군가를 위해 한 가지 일이라도 도와주라고, 그리운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이라도 쓰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10월은 누군가에게 안부 편지를 쓰고, 감사를 전하고, 또 용서받고 싶은 달인가 봐요.
노상강도들이 횡행하는 도시가 있다. 경찰관 A는 순찰 도중 노상강도가 시민들한테서 금품을 갈취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들은 그렇게 피해를 면했으나, 그 사이 여전히 강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일부 시민들은 주머니를 탈탈 털리고 말았다. 강도는 한몫 단단히 챙기고 사라졌다. 그러자 A의 행위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다. 왜 시민 모두를 대피시키지 못했느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강도와 결탁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A는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사실 이 도시에는 노상강도를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경찰관들도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A를 격렬히 비난하던 경찰관 B는 강도한테서 금품을 나눠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대장동 의혹’을 지켜보며 떠올려본 우화다. 그런데 독자들은 이야기 속에서 분명 부조리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경찰관 A가 시민들을 보호하고자 했다면 노상강도를 제압해 체포하면 되는 게 아닌가. 왜 일부 시민들만 대피시키는 데 그쳤나. 하지만 우화 속 도시에서 노상강도는 ‘범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 비정상적인 도시의 부조리는 바로 여기에서 잉태됐다. 노상강도가 들끓어도 아무도 근본 대책을 촉구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실로 돌아와 보자. 부산의 해운대관광리조트(엘시티) 사업은 2007년 민간사업자에게 맡겨졌다. 애초 콘도·호텔 등 상업시설만 짓는 조건이었는데 사업자 요구로 아파트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줬다. 부산시는 그밖에도 각종 특혜를 제공하며 민간사업자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불법 로비가 벌어져 박근혜 정부 정무수석 출신 현기환씨와 배덕광 자유한국당 의원 등 정관계 인사들이 처벌을 받았다. 개발이익은 1조원가량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공공 환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개발 계획과 인허가라는 공공의 권한과 의사결정을 통해 이뤄지는 부동산 개발 사업이 천문학적 규모의 이득을 창출하지만, 정부는 그 이득을 시민들의 몫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소수의 민간사업자들이 독식하는 구조, 누가 봐도 부조리한 이 구조가 우리 사회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대장동 사업도 이 지역구의 신영수 한나라당 의원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공영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박했고, 2010년 민간개발로 바뀐 뒤 신 의원의 동생이 이 사업 관련 로비를 받아 처벌되기도 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신영수 전 의원을 꺾고 성남시장에 당선된 뒤에도 새누리당이 다수였던 성남시의회는 줄기차게 민간개발을 주장하고 공영개발에 반대했다. 당시 한 시의원의 발언에서 그들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대장동 개발은 원래 민영개발이 원칙이었다. 이재명 시장이 성남시장이 된 이후에 개발 허가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대장동 개발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 대장동 개발은 민영개발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민영개발회사의 이익이 얼마 남든 손해가 나든 개발 허가를 내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지사가 이런 반발을 뚫고 개발이익 환수를 추구했다면 민관 공동이 아닌 전면적인 공영개발을 선택하는 게 옳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당연히 따라붙는다. 이 지사 쪽은 시의회의 반발과 막대한 사업비 자체 조달의 한계 등으로 관철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국민의힘 김형동 의원(오른쪽부터), 박수영 의원, 정상환 법률자문위 부위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이른바 ‘대장동 개발사업'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 경기도지사, 화천대유·천화동인 관계자 8명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기 위해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김형동 의원(오른쪽부터), 박수영 의원, 정상환 법률자문위 부위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이른바 ‘대장동 개발사업'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 경기도지사, 화천대유·천화동인 관계자 8명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기 위해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타협책이지만 민관 공동개발을 추진해 5500억원을 환수한 것인데, 그럼에도 여기에 참여한 소수 민간사업자들이 수천억의 거대한 수익을 누린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화천대유가 챙긴 막대한 이익을 애초 예측하고도 방치했다면 문제다. 나아가 이 지사가 뒷돈이라도 챙겼다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의문점들은 수사 등을 통해 밝혀야 할 일이다.
아직 의문들이 해소되지 않았고 정치권이 ‘개발이익 환수’냐 ‘특혜 개발’이냐를 두고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한가지 바뀌지 않는 사실은 대장동과 같은 부동산 개발사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 천문학적 이익을 남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간사업자가 아닌 공공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분노도 결국엔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대선 국면에서 이번 논란이 불거진 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부동산 개발로 인한 민간사업자의 일확천금을 더 이상 용인하지 말고 철저히 공공으로 환수하는 근본적 제도 개혁에 나설 동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화 속 세계로 말하자면, 노상강도를 범죄화하는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진 셈이다. 대선에 참여하는 후보와 정치세력들이 과연 토건 카르텔의 편에 서 있는지, 공공의 편에 서 있는지는 이제 유권자들의 선택에 중요한 변수가 됐다. 대장동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과 함께 부동산 개발 불로소득 방지를 위한 공약과 실천 의지를 통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지금 절망과 분노를 느끼는 유권자들이 거기에 화답하리라 믿는다.
아침에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다 보면 얼굴이 부시시 하고 충혈된 눈에 열심히 껌을 씹는 검사를 볼 때가 있다. 야근에 지쳤거나 어떤 스폰서와 밤을 지샌 것이려니 궁금해 슬슬 몇 마디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역시 주취 탓이다. 민망했는지 공연한 선심성 빈말도 빼놓지 않는다. 다음에는 꼭 연락 할테니 같이 한 잔 하자구….
그날 검사들을 접대했던 ‘스폰서’는 모 행정관서 공무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종의 비리혐의로 그 관서의 장이 몇 차례 검찰청을 들락거렸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후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라니…. ‘증거’를 쥐고는 곧바로 차장검사에게 쫓아가 유도질문을 꺼내는 기자에게 차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 그 친구, 강 검사가 불러서 알아봤는데, 뭐 별거 아니더라구”란다. 부하직원이 승진 청탁을 하며 봉투를 건넸다는데, 수사해보니 이미 돌려주었고, 액수도 미미해서 그 기관장을 혼내주되 기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 기관장의 비위는 돈 싸들고 청탁한 부하들이 여럿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했지만, 알고보니 그의 동생이 정보기관에 있었고, 결국 불문에 부치는 봐주기로 끝냈던 것이다. 어쩐지 수사는 시작했는데 그 뒤 감감 무소식이더니, 슬그머니 덮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선처에 보답하느라 검사를 모셔다 양주에 곤죽이 될 정도로 향응을 베풀었고….
공직 기강과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검사가 공직자의 범죄를 덮어버리고, 형벌권과 기소권을 행사하지 않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에, 청탁을 들어 준 대가로 접대를 받은 ‘사후 수뢰’까지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부정한 금품을 주고 받았던 행정관서 부패 공무원들은 본분을 저버린 부정청탁에 국민의 세금으로 향응을 ‘공여’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선량한 국민들과 국가에 고스란히 피해를 전가한 것이다. 검찰도 행정기관도 철퇴를 맞아야 할 사안이 분명했다.
취재를 확인한 검찰과 해당 관서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확실한 팩트의 기사였지만, 분통을 터트리는 기자에게 편집 데스크는 “김 기자, 방법이 없네, 중정(中情)에 보안사에, 총동원됐어, 이해하게!”하곤 달랠 뿐이었다. 신문사도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 있는 때 였으니, 언론의 자유와 사명이란 단어는 고상한 수사에 불과했고, 분기탱천을 삭이며 위험한 줄타기에 도전해야 했다.
‘인혁당 사법살인’처럼 초대형 공작은 아니어도, 검찰은 물론 법원까지 그런 식으로 크고 작은 민·형사 사건들이 왜곡·조작되거나 묻히는 사례는 당시에 흔치않게 있었다. 언론 역시 재갈이 물린 채 공생의 멍에와 카르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때가 언제적 인데, 그런 법조 안팎의 속성과 풍속도가 바뀌기는 커녕 고착화·지능화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이 되고 있는 근래의 사건들에서 뚜렷하게 그 불편한 실체를 본다. 널리 알려진 노무현 수사와 이명박 BBK사건을 필두로, 김학의 사건, 옵티머스 사건 등 일탈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흐지부지 덮어버린 ‘나경원 사건’과는 달리, 수사도 하기 전에 기소해버린 ‘조국 사건’에, 최근의 이른바 ‘고발 사주’ 사건까지. 사회정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참 교활하고 사악한 선택적 형벌권의 민낯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 카르텔의 일원으로 헤어나지 못하는 언론까지….
공직 당사자와는 관련없는 일가친족을 ‘멸문’지경으로 내몬 무지막지한 별건·연좌제 수사의 비열한 숫법은 조폭의 칼부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런 냉혹한 칼끝이 정작 자신에게 향한다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검찰총장의 일가를 집적거렸다고 친위검사가 고발장을 만들어 야당과 민간단체에 고발을 ‘청부’했다는 폭로는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방어를 위해 국가사법체계를 악용한 범죄요 법치농락에 다름 아니다.
어디 검찰 뿐인가. 사법거래를 일삼았던 대법원장과 행정처의 판사들은 법관의 양심은 팽개친 채 뭘 잘못했느냐고 고개를 쳐들고, 제식구 감싸기 덕에 면죄부를 챙겨 다시 재판을 맡아서는 보복하듯 요상한 판결을 쏟아낸다.
과거 독재시대 무소불위로 저지른 정치공작과 조작의 그림자, 멀게는 일제치하 고등계 형사들의 악독했던 행적의 뿌리가, 여전히 21세기 민주정치 시스템의 그늘아래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고도 경악할 일이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죄의식도 미안한 양심도 없다. 오히려 큰소리치며 역정을 낸다.
그들은 민주화든 문민화 든 관심도 변함도 없이 손에 쥔 권력을 즐기며 안주해왔기에, 늘상 그런 습벽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국민을 ‘돌보겠다’니, 위장된 양의 손을 내민 늑대처럼, 소름 돋을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검찰 개혁, 사법개혁·언론개혁을 통한 카르텔 혁파는 여전히 미완 상태인 이 시대 최우선의 국가적·국민적 과제다.
8월15일 카불이 함락됐다. 온 세계가 충격에 빠졌지만 우리에게는 한층 더 그랬다. 6·25 전쟁 당시 한강철교 폭파와 1975년 4월30일 사이공 함락의 혼란과 비극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 “인천공항이 카불공항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느냐”는 정치인들의 말은 이를 흡사 데자뷔처럼 생생히 되살려냈을 것이다.
외국 언론도 한몫했다. “한국이 이런 종류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미국의 지원 없이는 빠르게 붕괴해버릴 것”이라는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마크 티슨의 트위터 글이 언론 지면을 뒤덮었다. 한반도 문제를 오래 다뤄온 원로 외신 특파원 심재훈과 돈 커크도 “대만, 일본과는 달리 평화와 데탕트라는 공허한 슬로건을 남발하며 한-미 동맹을 저해하고 한-미 군사연습을 축소하는 문재인 정권 아래서 한국의 안보는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간 사태 이후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쏟아져 나온 말들은 크게 세 갈래다. 이를테면 ‘나비효과’다. 첫째, 우리 군에 대한 걱정이다. “현 정권은 우리 군을 적이 없는 군대, 목적 없는 군대, 훈련하지 않은 군대로 만들었다”는 윤석열 후보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아프간 사태에 빗대어 나온 말이라 하겠다. 둘째, 평화협정 무용론이다. 카불 함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2020년 2월 체결된 미국과 탈레반 사이의 도하 평화협약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추진해온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도 아프간과 같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은 주한미군과 동맹 문제였다. 주한미군 없이 안보를 담보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워싱턴은 국익에 따라 언제든지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을 붙잡아 두기 위해 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카불 철수 과정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이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스스로 서고자 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 인계철선 같은 과거의 논리에 얽매이는 것이야말로 미군에게만 기대려 했던 아프간 정부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 비판, 주문은 다분히 황당하게 들린다. 우선 한국군을 아프간군과 비교하는 것은 모욕에 가깝다. 아프간 병력의 90% 이상이 문맹이고 30만 병력 중 6만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유령 군대였다. 각 종족과 부족에서 충원되어 이질적 오합지졸로 구성됐다는 근본적인 한계에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지휘통제체계가 겹쳐, 미국의 군수병참은 물론 공중 및 정찰감시 지원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깡통 군대이기도 했다. 세계 수위의 전투력과 겹겹이 쌓아올린 전력투자비를 자랑하는 70년 전통의 한국군을 아프간군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군내 성폭력 문제 등 몇몇 사례를 들어 군의 안보 의식과 전투력, 기강을 도맷금으로 폄훼하는 일은 더욱 수긍하기 어렵다.
도하 평화협약이 문제투성이인 것은 사실이다. 미국과 월맹 사이의 1973년 파리 평화협정도 그러했다.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정부는 아프간 정부를 사실상 배제한 채 탈레반과 무리한 협상을 전개했고, 아프간의 국내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 병력의 감축과 철수에 합의했다. 당시 협상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그러나 이를 문재인 정부의 평화구상과 연결짓는 것은 무리다.
종전선언이 미군 철수와 동맹 붕괴로 이어질 것처럼 주장하지만, 한·미 양국 정부는 종전선언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추동하는 상징적 제스처이자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종전선언이 한-미 동맹이나 주한미군의 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일은 북한의 비핵화와 동시적으로 연동돼 있다. 또한 한국 정부가 평화협상을 주도할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아프간과는 크게 다르다.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갈수록 강화되는 북한의 핵 능력에 억지태세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 자산이다. 그러나 아프간의 비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동맹과 미군을 상수로 간주하는 타성에서 벗어나 전시작전통제권의 조속한 전환을 통해 한국의 방위는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다. 카불 철수 과정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이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스스로 서고자 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 인계철선 같은 과거의 논리에 얽매이는 것이야말로 미군에만 기대려 했던 아프간 정부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이렇듯 카불의 교훈은 따로 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스스로 비하해 상대의 오판을 초래하거나 정파적 이익을 위해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고 국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 말이다. 그리고 동맹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먼저 자강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상식이다. 다만 눈앞의 이익 때문에 상식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어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