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무능한 지도자와 불행지수

● 칼럼 2023. 3. 1. 12: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시사 한겨레 칼럼 한마당]

 

 

현재까지 5만명 가까이 사망자가 나온 튀르키에-시리아 대지진 참사의 여파가 현지 정권들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23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가 지배하는 시리아는 지진 피해가 ‘자유 시리아’ 반군 지역에 집중됐다. 아사드는 엄청난 재난을 호기로 판단한 듯 국경을 막고 국제 구호조치도 방해하며 오히려 공습을 단행했다. 피눈물도 없다는 국제사회 비난이 일자 마지못해 외부의 구호물품 반입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평소 눈엣가시로 여겨 온 반군지역의 지진 피해를 내심 반겼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반정부군 소탕작전이야 잠시 미룰 수도 있으련만 지진 참사를 기다렸다는 등 공세를 벌인 것은 냉혈한인 그의 잔인한 품성을 드러낸다. 오래 전부터 그 땅에 터잡고 살아 온 주민들에겐 지진 참사로 생사의 기로에 섰는데 정부군 공격까지 닥치니 그야말로 이중의 참상과 생지옥에 맞닥뜨린 셈이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설상가상의 고통을 겪어야 하나. ‘팔자소관’으로 그 땅에 살게 된 것과 악독한 독재자를 만났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란 없었다.

 

튀르키에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는 지진 피해 초기 대처에 늑장을 부렸을 뿐만 아니라 구조작업도 허술해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있다. 오는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정권을 내주게 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그래서 에르도안이 선거를 연기할 것이라는 전망도 한다.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진 것은 그가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부패와 불법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1999년에 있었던 대지진 피해 당시 완벽한 복구와 재발방지를 내세워 압승하고 2003년 정권을 잡았다. 그는 지진세를 도입해 방진시설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거둔 지진세만 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세금만 거두고는 여지껏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불법 건축물들 철거를 면제 해주는 ‘사면세’까지 챙겨 수많은 불법건축물을 존치시켰다. 그로인해 이번 지진 지역에서만 부실건물 7만5천채 이상이 ‘사면’ 돼 대참사를 빚은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지난 20년 동안 장기 집권하며 야당과 반대자들을 무차별 탄압한 독재자다. 지난 2016년 불발 쿠데타를 전후해 군과 정치 사법 교육 언론 등 구석구석의 반대자 수만명을 색출해 처벌했다. 심지어 미국에 망명해 있는 반정부 인사 귈렌도 송환을 요구하면서 비난하는 등, 강경한 민족주의적 독재정치를 해왔다. 국명을 바꾸고, 이슬람주의 정책을 강화했으며, 군사력을 증강해 그리스 등 주변국들과 마찰도 늘어났다. 나토 회원국임에도 러시아와 군사교류를 확대해 미국과 나토를 곤혹스럽게 했다. 최근에는 쿠르드·반이슬람 시위 등을 빌미로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유일하게 제동을 걸어 애를 먹이고 있다. 대지진 구호 중에도 현장소식을 비판적으로 전한 SNS 사용자들을 수사 체포하는 등 무소불위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그가 이번에 진짜 실력과 속내가 드러나면서 정치역정에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번 대지진 진앙지에서 가까운 튀르키에 하타이주의 인구 4만2천여 명인 에르진 시는 기적적으로 단 한 명의 사망자나 건물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지진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알고보니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시장 외케시 엘마소을루 씨가 불법 건축물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 강골 원칙주의자로 확인된 것이다. 그래서 시내 건물과 시설들은 방진 기준을 제대로 갖춘 설계와 시공으로 튼튼하게 건축돼 규모 7.8의 역대급 지진에도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가까운 친척이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는 정직한 소신과 청렴으로 시정을 해오는 바람에 “당신만 정직하냐”라는 힐난과 비난을 듣기도 하며 사람들과 관계가 나빠지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털어 놓았다.

 

대재앙으로 생사를 넘나든 사람들은 권력에만 취한 독재자의 허언 정치와 정직한 시골 시장의 청렴정치가 가져온 결말에서 지도자의 중요성과 진면목을 새삼 실감했음에 틀림없다.

태어나 살고있는 터전에 닥친 천재지변이야 운명이라고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견제없는 독재자의 오만과 권력 오용이 초래한 피해의 가중은 국민들에게 정말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사회라고 다른가. 권력을 위임한 지도자의 공복으로서의 자세, 국민적 불행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능력의 유무와 수준, 그에따른 여파와 불행지수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그러니 무능하고 무지한 지도자를 둔 국민들은 불행을 안고 사는 셈이어서 언제든 국가적 재난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극 의지로 선택했든, 속아서 표를 주었든, 아니면 무관심 속에 방관했든, 지도자를 택한 국민 개개인의 판단과 책임에도 귀결되기 때문이다.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며 탄식이 쏟아지는 한국 사람들 역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절감하며 절치부심하는 이유 또한 그러하리라.         

                                                                                   < 2023. 2. 23자 게재 >

 

[목회 칼럼] 인공지능 챗(Chat)GPT 혁명

● 칼럼 2023. 3. 1. 11:3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박원철 목사 / 늘사랑교회 담임목사

 

대화 전문 인공 지능 챗(Chat)GPT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과히 폭발적이다.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를 뜻하는 말로, 챗GPT는‘딥 러닝’(인간의 두뇌처럼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인공 신경망이 대량의 자료와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을 활용한 인공지능(AI)이다. 단순히 말해, 챗GPT는 사람처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챗GPT가 경이로운 것은 사람이 쓴 것인지 기계가 쓴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글을 잘 쓰는 탁월한 언어 능력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1월 25일에 미국 하원의원인 제이크 오친클로스는 챗GPT가 작성한 연설문으로 의회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공동으로 인공지능 연구센터를 설치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오친클로스 의원이 자신의 연설문을 챗GPT가 작성하였다는 것을 밝히기 전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치 사람이 쓴 것같은 완벽한 (어쩌면 사람보다 더 뛰어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챗GPT의 탁월한 언어 능력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반향과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가장 먼저 논란이 일어난 분야는 교육 분야이다. 챗GPT를 통해 학교 과제와 논문 등을 작성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자 교육계에서는 챗GPT의 사용을 두고 찬반 논란이 과열되고 있다. 왜냐하면 챗GPT는 학교 과제와 논문 뿐만 아니라 시험에도 부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챗GPT가 미국에서 의사, 변호사, 회계사 시험을 치른 결과 모두 통과하였다. 그러므로 엄청난 정보와 지식을 가진 초거대 인공지능인 챗GPT가 만약 악한 사람들에 의해 악한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엄청난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챗GPT의 오용과 윤리 문제는 기독교계 안에서도 실제적인 논쟁과 이슈가 되고 있다. 이미 여러 목회자들이 챗GPT를 이용하여 내용적으로 아주 훌륭하고 논리적으로 흠이 없는 설교문을 짧게는 몇 십초 안에 길게는 몇 분 안에 만들어 내는 작업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 “챗GPT를 목회와 신학에 활용할 수 있는가?”하는 논쟁들이 불붙기 시작하고 있다.

 

과거 인터넷이 등장하였을 때처럼 인공지능 챗GPT 역시 목회와 신학교육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챗GPT가 끝없이 발전하여 인공지능이 인류지능을 넘어서는 기점(singularity)에 도달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을 앞설 수는 없다. 챗GPT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심오한 설교문과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기도문을 작성할지라도 그것을 로봇이 썼다는 사실은 결코 변화지 않는다. 기도해본 적도 없고, 성령을 체험해 본적도 없는 기계가 쓴 설교문이 참된 설교가 될 수 있을까? 설교자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설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기도없이 준비한 설교는 영성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설교가 사람의 영을 움직이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챗GPT에게 적절한 주제와 조건 값을 입력해서 만들어낸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설교문을 통해 과연 영적 은혜가 임할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챗GPT가 시간 절약을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나 창조적 영성 등은 결코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의 문제를 챗GPT에게 맡긴다면 챗GPT가 우리의 우상이 될 것이다.

 

바벨탑처럼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고 있는 과학 기술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장과 혼란은 미리 대처해야 한다. 그러므로 챗GPT의 오용과 악용의 문제, 정보의 오류 문제, 그리고 윤리와 도덕 문제 등을 올바르게 인식하면서 우리의 영성이 약화되지 않고 더욱 강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기계와 기술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점점 더 과학 기술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영과 진리에 영감받은 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하기 위해 더욱더 기도에 힘써야 한다.       < 시사 한겨레 230223 게재 >

[목회 칼럼] ‘가스라이팅 vs. God’s light’

● 칼럼 2023. 3. 1. 11:3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이진우 목사 / 낙원장로교회 담임목사

 

지난해 말 미국의 유명 사전출판사 메리엄웹스터는2022년의 단어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선정했습니다. ‘가스라이팅’ 검색건수가 2021년에 비해 1740% 늘어나는등 이 단어의 활용빈도와 관심이 급증한 것이 선정이유였습니다.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지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가스라이팅은 1938년 연극으로 무대에 올렸고, 이후 영화로 상영된  ‘가스등’(Gas Light)에서 유래합니다.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의 남편은 여주인공의 이모가 남긴 보석을 욕심내어 이모의 유품을 보관한 다락방에 밤마다 몰래 들어가 보석을 찾습니다. 다락방의 등을 켜고 유품을 뒤지며 움직일때마다, 아래층의 가스등이 어두워지고 발소리가 들리지만, 아내가 “등이 어두워졌었고,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당신이 잘못 보고 들은 것” 이라고 강압적으로 말하며 무시합니다. 남편은 브로치, 그림 등 집안의 물건을 몰래 감추고 그 분실책임을 아내에게 물으며 정신이상으로 몰아가, 결국 아내가 자존감과 현실감각을 잃고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통제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정신세계까지 조작해 지배하는 행위인 ‘가스라이팅’은  내밀한 가족관계에서 직장내의 상하관계, 공공적인 정치현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리엄웹스터 편집인은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허위정보로 추종세력을 선동하는 행위 등을 예로 들며 “가스라이팅은 이익을 보기위해 타인을 속이는 행위, ‘거짓말’을 표현하는 단어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종할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가스라이팅은 인간안에 깊이 숨어 있는 죄성의 민낯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가스등’이 이렇게 인간의 죄성과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불확실한 빛이라면, ‘God’s light’는  우리의 참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춰 주시는 구원의 빛입니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 요1:9)’이 되신 예수님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는 말씀처럼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참 빛’되신 예수님은 상대방을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했습니다.  ‘수가성 여인’, ‘니고데모’, ‘맹인 바디메오’, ‘로마인 백부장’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때 그들을 전혀 얽매거나 조정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8:32)”말씀처럼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주님안에서 참된 자유와 자존감을 가진  ‘의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인해 ‘가스라이팅’이 들불같이 번져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분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가스라이팅’을 분별해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로 진정한 자유와 자존감을 가진 새사람이 되었슴에 감사하며,  섬김과 존중으로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편집인 칼럼] 정적 제거의 흑역사

● 칼럼 2023. 2. 28. 00: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영국작가 조지 오웰이 쓴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년’은 소련의 스탈린 공포정치 시대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의 공산 독재와 나치, 파시즘을 비판한 이 소설 속의 빅 브라더가 바로 스탈린이고 임마누엘 골드슈타인은 트로츠키를 모델로 했다는 것이다.

스탈린 독재치하 소련인들은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살았다. 혐의자 한 명이 체포되면 그 주변인들이 줄줄이 끌려가 고문과 살해를 당했다. 친구나 친지도 의심하며 상호 고발이 장려됐다. 부부, 연인이 증오로 변하고, 상대방 고발 전에 먼저 고발해야 목숨을 부지했기에 의도적인 무고도 횡행했다. 냉혈한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은 간첩·모반죄를 씌우면 그만이었다. 트로츠키를 내쫓고 삼두체제를 구성했던 혁명동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연루자 160명과 함께 처형했다. 당시 비밀경찰 수장 겐리흐 야고다의 손을 빌려 25만명의 당원을 내쫓거나 처벌했는데, 그가 불안해하자 총살시키고 니콜라이 예조프를 앉혀 대숙청을 벌였다. 예조프도 스탈린의 사냥개가 되어 날뛰었지만, 역시 총살당해 팽(烹)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만 100만명 안팎이 처형됐다고 한다. 하루평균 1500명을 총살했다니 스탈린은 ‘인간 백정’소리를 들으며 피로 지탱한 권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도 빼놓을 수 없다. 총리 취임 이후 6개월 만에 전권을 쥔 그는 자신의 경호조직인 SA(Sturmabteilung:돌격대)가 세력이 커지자 게쉬타포와 군대를 동원해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 사건을 일으켰다. SA 대장 에른스트 룀과 그의 부관 하이네스 등을 처형하고, ‘떡 본 김에 제사’격으로 최대 정적 폰 슐라이허 전 총리와 반대파 클라우제너, 나치당내 거물 슈트라서, 자신의 반란 미수 사건인 ‘뮌헨 폭동’을 진압했던 폰 카르도 등을 일거에 제거한다.

 

중국의 정적 제거 고사는 셀 수가 없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뒤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를 상장군, 문종을 승상으로 임명하지만, 범려는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영화를 함께 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구천을 떠난다. 그는 문종에게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良弓藏 狡兔死走狗烹)"는 편지를 보내 피신하라 충고했지만, 문종은 주저하다가 반역의 의심을 받아 자결하고 만다. 원조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연원이다. 명장 한신이 유방을 도와 전국을 통일하고 황제에 오르게 하지만 반역을 염려한 유방에게 참수당하고 삼족 멸문지화를 입는 비운의 고사도 유명하다.

 

원래 정적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독재권력의 속성이다. 왕조시대 전권을 휘두른 군왕들 조차 비판적인 신하와 반대파, 공신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고 숙청을 일삼았다. 이는 정적의 쓴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권력에 도전하는 불안요소로 여긴 포용력의 한계와 추종자들간의 다툼, 이간질에 기인한 바가 컸다.

한국사에도 여러 사화를 비롯해 사례(史例)는 부지기수다. 조선 초 벌어진 정적 제거전은 어지럽고도 잔혹한 피의 난무였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암살당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과 개국공신 정도전 등을 살해한다. 1차 왕자의 난에 방원과 합세했던 형 방간은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을 죽이려다 패해 유배조치를 당했다. 역성혁명의 주역인 태조가 피튀긴 권력쟁탈에 얼마나 상심했으면 왕위를 던지고 함흥으로 떠나버렸을까. 그후 세조가 사육신을 필두로 수백명을 학살하고 단종을 죽인 사실도 널리 회자된다.

근현대에 들어 이승만이 김구 암살을 사주한 사실, 조봉암을 사법살인한 것도 독재권력의 잔인한 만행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야권의 거두 김대중을,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이려고 안달했던 사실은 국민들 뇌리에 새겨져 있다.

북한 세습정권도 반대파 숙청의 많은 기록들이 있다. 김일성 시절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과 이승엽 등 13명을 간첩과 정권 전복음모 등 혐의로 처형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김정은 정권 초기 실세였던 고모부 장성택과 그 일파를 처형한 사건도 정적을 두고보지 못하는 독재권력의 속성 그대로다.

 

나중에 자업자득의 비참한 말로로 귀결되기 일쑤지만,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이 정적 말살을 꾀하는 것은 정통성이 결여된 무소불위 권력의 취약과 불안감에 위기와 도전이 두렵기 때문이다.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정치 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다수 제1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야당대표를 범죄자로 간주한 검찰권의 총동원 수사가 끝도없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검찰독재’의 실증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정적제거 공작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엄청난 국력 낭비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