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중재법 논란의 아이러니

● 칼럼 2021. 8. 27. 02:0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언론중재법 논란의 아이러니

 

국회 법사위에서 박주민 위원장대리가 야당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언론중재법 개정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용현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 강행에 맞서 ‘언론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드높다. 여기에는 사뭇 결이 다른 목소리가 섞여 있다. 25일치 <한겨레> 사설은 “언론중재법 개정 취지에 대한 반대와 법안 일부 조항에 대한 반대를 정확히 구분”할 것을 주문했다. 언론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법안의 디테일에서 언론자유 훼손 가능성을 진지하게 우려하는 목소리와, 기득권 지키기나 정치적 목적의 무작정 반대 목소리는 당연히 구분돼야 한다. 언론중재법 논란은 언론자유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언론자유 외침의 진정성을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공적인 인물·사안’에 대한 언론보도를 법적으로 제재하는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언론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권력 감시라는 건 상식이다. 이에 관한 현대적 법리를 구축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1964년)은 “(민주사회에서는) 정부와 공직자를 향해 격렬하고 신랄하고 때론 불쾌할 정도로 날 선 공격이 가능해야 한다”며 “그러다 보면 간혹 잘못된 사실을 언급하게 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를 보장하지 않으면 표현의 자유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숨구멍조차 막게 된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공적인 인물·사안에 관해서는 허위의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나 공격도 용인돼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 감시가 위축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연방대법원은 공적인 인물이 이런 공격까지 감내해야 하는 이유도 제시한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는 치밀한 검증과 비판을 받아야 하는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잘못된 보도에 반박 기자회견·인터뷰 등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일반 시민보다 우월하다는 점 등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우려하는 핵심 이유도 공적인 인물·사안에 대한 보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정안은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 대기업 임원, 공적 관심사 등에 대한 보도는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우회로나 틈새가 없는지 더 정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보도에는 법적 대응에 나서고 있다면, 언론자유를 외치는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사례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윤 전 총장은 부인 김건희씨 관련 의혹을 보도한 매체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최근엔 김씨의 이력서 허위 기재 의혹 보도가 나오자 언론사에 기사 삭제와 사과를 요구하며 “후속 조치가 없을 경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의혹 보도가 나왔을 때 이를 부인하는 윤 전 총장 쪽의 입장은 의혹 제기 보도를 압도할 만큼 대대적으로 보도되곤 한다. 그런데도 언론을 상대로 툭하면 법적 대응에 나서거나 으름장을 놓는 윤 전 총장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언론 재갈법’이라고 공격하는 모습은 아이러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도입하려고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보다 훨씬 더 가혹한 법적 제재인 형사처벌에 대해선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언론보도에 강하게 대응할 때는 형사 고소·고발을 한다. 민사소송보다 압박 효과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을 이유로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형성된 까닭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국경 없는 기자회’ 등 언론자유 옹호 단체들은 언론보도에 대한 형사처벌, 특히 징역형을 강하게 반대한다.

 

현대국가에서 대부분 사라진 태형처럼 반문명적 형벌로 취급한다. 유엔은 우리나라에도 폐지를 권고해왔다. 이런 제도를 놔두고 징벌적 손해배상이 언론자유를 침해하느냐 마느냐를 논쟁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한 <문화방송>(MBC) ‘피디수첩’이나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을 형사처벌하라고 주문하거나 이에 찬동했던 이들이 오늘은 언론자유의 수호자처럼 행세하는 건 웃픈 현실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언론의 권력감시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라면 명예훼손 형사처벌 폐지부터 주장해야 마땅하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규정된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될 정도의 허위보도라면 현행법상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더구나 형법상 명예훼손죄에는 이번 언론중재법 개정안처럼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 대기업 임원, 공적 관심사 등에 대한 예외 조항도 없다.

 

야당·언론단체 등이 진정으로 언론자유를 원한다면 언론보도에 대한 고소·고발부터 없애고 형사처벌 폐지에 나서야 한다. 여당도 이런 토대 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추진해야만 언론자유를 보장하되 약자인 시민들의 피해를 막겠다는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언론자유와 피해자 보호가 조화된 언론개혁을 하려면 언론중재법 개정 이상의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법 정비가 필요하다. 명예훼손 형사처벌은 폐지해야 한다. 최소한 공적인 인물·사안에 대해서는 그래야 한다. 민형사적 제재 수단 대신 정정보도·반론권을 실효적으로 보장하면 된다. 공적인 인물이 아닌 일반 시민들은 허위보도나 명예훼손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아야 한다. 이 경우에도 형사처벌보다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통한 제재가 바람직하다.

 

적어도 형사처벌과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이중처벌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잘못된 보도에 대한 개별적·직접적 제재 이외에도 언론의 책임성을 높이고 균형 잡힌 공론장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방안을 찾는 일도 시급하다. 부쩍 높아진 언론자유와 언론개혁 목소리가 언론중재법 개정안 찬반이라는 앙상한 구도로 소모되고 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1500 칼럼] 동경 2020

● 칼럼 2021. 8. 17. 04:1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동경 2020

 

박성민/ 소설가, 수필가

 

이제 그 말도 많고 말썽 많았던 동경올림픽이 끝났다. 자기들 스스로는 코로나를 극복한 성공적인 올림픽이라 말을 하지만, 특히 일본사람들은 역대 어느 올림픽에서보다 금메달을 많이 땄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끝난 올림픽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무엇보다 사상초유의 무관중으로 경기가 치러진데다가 세계 각지에서 관람객이 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성공적으로 끝난 올림픽이라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보아도 애초부터 잘못 치러진 경기였다. 코로나 때문에 애초 계획보다 일 년늦게 치러진 것으로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사실 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코로나에 더 적극적으로 효과있게 대응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그들은 확진자를 숨겼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올림픽 기간에도 많은 희생을 감춘 느낌이 든다. 이제 올림픽이 끝나고 무섭게 늘어나는 확진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올림픽이었는가? 나라가 국민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취급해야 할 일이 있는가? 그리고 전염병의 특성상 코로나에 의한 희생자가 일본에 한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퍼질 가능성도 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 두나라의 관계가 나빠졌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한국 탓이었다. 평화라는 올림픽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국가적인 큰 행사를 앞에 두고 어려운 일에 처했다면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애초에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도움을 청하기엔 일본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코로나에 대한 방역 문제에 관해선 한국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모범적인 국가인데, 그들은 처음부터 한국을 무시하는 길을 택했다. 오히려 독도와 욱일기 문제로 한국을 분노하게 하는 길을 선택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는 문제도 한외교관의 극단적인 발언으로 취소하게 만들었다. 그 말이 그 시점에서 외교관이 할 말인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어쩌면 의도적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그 단어를 말하기 전에 그는 분명 일본은 한국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힘에 있어 우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올림픽도 자신들의 힘의 우위를 과시한 마당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이번 올림픽에서는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영향을 주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 아래서 올림픽을 치르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 모른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그들은 한국을 공략해야만 했다. 그래야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번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하려 했다. 올림픽 공식 지도에 독도와 쿠릴 열도를 자신의 영토로 넣었다. 지금 분명 한국과 러시아의 영토이다. 이 사실은 일종의 정치적인 도발이다. 욱일기(전범기)를 가지고 경기장에 들어와 응원하려 했다. 무관중 경기가 되어 무산됐다. 개회식과 폐회식에서 기미가요를 불렀고, 히로시마 피해자에 대한 묵념 순서를 넣으려 했다. 그들은 방사능 오염에서 해방된 후쿠시마의 부활을 전세계에 알리는 올림픽을 말했지만, 어찌 보면 강한 국가의 부활을 알리려 했던 올림픽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림픽이 끝나고 바로 있을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어 헌법 개정까지 몰고 가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위대라는 방어적인 군대가 아니라 공격, 나가서는 해외파병 내지는 침략도 가능한 군대로 만들려 하고 있다. 만약에 코로나 팬데믹이 없었다면, 그들의 계획했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은 역대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따냈지만, 그와 동시에 엄청난 재정 적자를 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코로나 확진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곧 그들이 계획한 대로, 올림픽으로 한참 애국심이 고조된 시점에 선거를 치르게 되었지만, 정권을 연장하고 원하는 개헌을 할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를 부활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정치 문외한을 정치 지도자로 떠받드는 기괴함

● 칼럼 2021. 8. 12. 01:5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경선 후보 간담회’에 앞서 이준석 대표와 후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홍준표 유승민 박진 김태호 원희룡 후보, 이 대표, 최재형 안상수 윤희숙 하태경 장기표 황교안 후보. 윤석열 후보는 30일 입당했다.

 

정치 문외한을 정치 지도자로 받드는 정치인들의 모습만큼 기괴한 것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윤석열 최재형 캠프에 들어간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내에 훌륭한 자질을 가진 대선 주자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일까?

 

성한용 정치부기자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에 국회의원을 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사람은 박정희·최규하·전두환 세 사람뿐이다. 박정희·전두환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최규하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됐다.

 

지금 감옥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14·15대 국회의원을 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시장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15대부터 19대까지 내리 5선 국회의원을 했다.

 

국회는 민의(民意)의 전당(殿堂)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지방선거가 시작되면서 ‘정치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단체장, 또는 지방의원이 된다는 것까지 확대됐다. 정치인은 선출직 공직자다.

 

정치는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축구를 보는 안목은 프리미어 리그지만, 실력은 동네 축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축구도 그런데, 하물며 정치다. 뭐든 오래 해야 잘하는 법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하기만 해도 자동으로 정치 학습이 시작된다. 성장이 중요한지 분배가 중요한지, 보편적 복지가 옳은지 선택적 복지가 옳은지,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발전하는 방안은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어떻게 해야 ‘우리 편’이 선거에서 이겨서 집권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 당’이 민심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정무 감각은 모든 사안을 선거 유불리로 계산하는 얄팍한 능력이 아니다.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심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평생 검사만 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거의 평생 판사만 했다.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정치의 최고봉인 대통령 하겠다고 나섰다. 왜들 이러는 것일까?

 

윤석열 전 총장은 여론조사를 믿었을 것이다. 최재형 전 원장은 계시를 받은 것 같다. 미안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격 미달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날로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두 사람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두 사람에게 몰려드는 국회의원들이다. 정치 문외한을 정치 지도자로 받드는 정치인들의 모습만큼 기괴한 것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윤석열 캠프에는 윤창현·윤한홍·이용·이종배·이철규·장제원·정점식·정찬민·한무경 의원이 참여했다. 권성동·이양수·정진석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에 팔을 걷고 나섰다.

 

윤석열 캠프는 최근 이명박·박근혜 정부 참여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정책자문단까지 출범시켰다. 윤석열 캠프에서는 먹을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동물들의 냄새가 난다. 윤석열 전 총장이 대통령 되면 이들의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최재형 캠프에는 김미애·박대출·박수영·서정숙·이종성·정경희·조명희·조태용·조해진 의원이 참여했다. 최재형 전 원장을 닮아서 그런지 대부분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정치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쨌든 참 이상하다. 윤석열 최재형 캠프에 들어간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내에 훌륭한 자질을 가진 대선 주자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일까?

 

원희룡 전 제주지사는 수석이라는 단어를 이름처럼 달고 다닌 제주의 자부심이다. 보수 정당에 몸을 담고 있지만 늘 개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서울 양천갑에서 16·17·18대 의원을 하고 2014년 제주지사가 됐다. 입법 경험과 광역단체장 행정 경험을 함께 갖췄으니 ‘준비된 대선 주자’인 셈이다.

 

유승민 전 의원은 경제 전문가다. 17·18·19·20대 국회의원을 했다. 개혁 보수 소신이 무척 강하면서도 성과를 내는 정치인이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은 유승민 원내대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 낙인이 찍혔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홍준표 의원은 15·16·17·18대 의원을 했고 경남지사를 했다. 패거리를 짓거나 줄서기를 하지 않고 개인기만으로 원내대표, 대표를 했다. ‘재수 강세’의 우리나라 대선에서 2017년 출마 경험은 상당한 강점이다. 겉으로 비치는 이미지와 달리 실용주의자다. 정책의 이념성을 따지지 않는다.

 

국민의힘에는 세 사람 말고도 좋은 대선 주자들이 더 있다. 김택근 시인이 최근 <경향신문>에 ‘좋은 정치인은 갑자기 솟아날 수 없다’는 칼럼을 썼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성한용 정치부 기자

‘조국 수사’의 오염된 증거가 말하는 것

● 칼럼 2021. 7. 30. 04:1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브레이디 판결’은 미란다 원칙을 정립한 ‘미란다 판결’(1966년)과 함께 형사절차의 현대적 원칙을 빚어낸 최고의 판결로 평가된다. 캐나다 대법원도 1991년 ‘국가는 피고인의 혐의 입증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법정에 제출할지 여부와도 상관없이, 수집된 모든 증거를 피고인 쪽에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캐나다 대법원은 “수사를 통해 얻은 정보는 유죄 판결을 얻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국민 모두의 소유물이다”라고 밝혔다.

 

 

박용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A는 절도 혐의로 수사를 받는다.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절도가 벌어진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리바이를 증언해줄 사람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파티 참석자 한 명이 검찰에 와서 조사를 받는다. 파티에서 A를 봤다는 말을 잠깐 언급한다. 검사는 이 진술을 사건 기록에만 넣어두고 변호인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A를 기소한다.

 

미국에서는 검사의 이런 행위는 직권남용으로 위법이다. 검사는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형량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증언을 확보했을 때 피고인 쪽에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1963년 연방대법원 판결(브레이디 판결)로 확립된 원칙이다. 이를 어겼을 때는 무죄가 선고되거나, 기존 검찰 쪽 증거를 배척하고 재판이 진행된다.

 

미국변호사협회의 윤리강령도 ‘검사는 무죄나 감경 사유가 되는 증거 및 정보를 얻었을 때는 지체 없이 변호인과 법원에 알려야 한다’고 규정한다. 검사도 한 명의 변호사로서 변호사협회의 규율을 받는 미국에서는 이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할 경우 변호사 자격이 박탈돼 검사직을 잃을 수도 있다.

 

‘브레이디 판결’은 미란다 원칙을 정립한 ‘미란다 판결’(1966년)과 함께 형사절차의 현대적 원칙을 빚어낸 최고의 판결로 평가된다. 캐나다 대법원도 1991년 ‘국가는 피고인의 혐의 입증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법정에 제출할지 여부와도 상관없이, 수집된 모든 증거를 피고인 쪽에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캐나다 대법원은 “수사를 통해 얻은 정보는 유죄 판결을 얻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국민 모두의 소유물이다”라고 밝혔다.

 

우리 대법원도 2002년 “검사가 수사 및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위하여 이를 법원에 제출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검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도 제출해야 한다는 건 이렇게 문명국가의 보편적 형사절차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23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의 재판에서 나온 조 전 장관 딸 친구들의 증언을 보며 이 원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 전 장관 딸 조아무개씨의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인턴십 확인서가 허위라는 게 검찰의 기소 내용이고, 이와 관련해 2009년 공익인권법센터 세미나에 조씨가 참석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의 하나다. 이는 공범으로 기소된 조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 재판에서도 쟁점이 됐다. 1심 재판부는 세미나에서 조씨를 봤다는 여러 증언을 배척하고, 당시 세미나에 참석했던 조씨의 친구 박아무개·장아무개씨의 ‘현장에서 조씨를 본 기억이 없다’는 증언을 받아들여 유죄 이유로 삼았다. 정 교수는 세미나 장면을 찍은 동영상 속의 여학생이 딸 조씨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23일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박씨가 “검찰 조사에서 동영상을 보자마자 ‘저건 조씨다’라고 말했다”며 “검사가 ‘증거들을 보면 아니지 않겠느냐’고 질문해, ‘그럼 아닐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또 “명확하게 조씨를 그(세미나) 자리에서 봤다는 기억이 있다면 검사 질문에 ‘아니다, 조씨다’라고 말했겠지만, 10여년 전 상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저건 조씨다’라는 진술과 ‘그 자리에서 봤다는 기억이 없다’는 진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있었어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더구나 ‘조씨가 세미나에 참석했는지 여부’를 증명하는 데 있어, 당시 현장을 찍은 동영상 속 인물이 조씨인지 여부와 그 자리에서 조씨를 본 기억이 있는지 여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명확하고 객관적인 증거인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자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동영상을 ‘보자마자’ 나온 친구 박씨의 ‘저건 조씨다’라는 진술은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검사의 추가 질문 끝에 나온 희석된 진술들만 증거로 제출했다. 박씨의 애초 진술을 변호인 쪽에 알려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다른 친구 장씨도 이번 재판에서 “동영상에서 확인된 여학생이 99% 조씨가 맞다”고 증언했다. 장씨는 이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현장에서 조씨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저는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조씨가) 아예 오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라며 “저의 증오심과 적개심, 인터넷으로 세뇌된 삐뚤어진 마음, 즉 우리 가족이 너희를 도와줬는데 오히려 너희들 때문에 내 가족이 피해를 봤다라는 생각이 그날 보복적이고 경솔한 진술을 하게 한 것 같다”고 했다. 장씨는 조씨를 논문 제1저자로 등재한 단국대 장아무개 교수의 아들로, 장 교수는 검찰 조사를 받고 출국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씨가 세미나에 참석했다는 진실을 덮은 것이 박씨나 장씨의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검찰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도 객관적으로 다루는 공정한 태도를 지녔다면 이 사안은 기소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건 조씨다’라는 진술이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부터가 검찰의 객관성을 허문다.

 

조 전 장관 수사는 이 밖에도 여러 형사절차적 문제를 노정했다. 검찰이 주요 증거인 동양대 강사휴게실 피시(PC) 포렌식 결과를 일부만 선별 제출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는 또다른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의 제출 원칙’ 위반일 수 있다. 이 피시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형사소송법 절차를 위반했다는 법원의 판단도 나온 바 있다.

 

이러한 문제는 조국 개인에 대한 비난과 옹호로 열뜬 논란에서 한발 떨어져 봐야 할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형사절차의 원칙과 실행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씨와 장씨처럼 친구 부모의 수사·재판에서 사실대로 진술하는 게 어떤 이유로든 어려웠다면 그것은 문명사회의 형사절차가 아니다. 동영상이 증거로 남아 있는데 거기에 찍힌 인물이 조씨라는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데 결과적으로 2년 가까운 법정 공방이 필요했다는 이 비합리성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조 전 장관의 딸은 지난달 법정 증인으로 나와 “재판에 유리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친구들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형사절차가 객관성을 잃어버린다면 전근대적 여론재판과 다를 게 없다.

 

이럴 때 중요한 게 형사절차를 개시하고 끌고 가는 능동적 주체인 검사의 역할이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피고인일지라도 검사는 그와 대립하는 상대방의 위치에 머물지 말고 객관성과 공정성의 담지자가 돼야 한다. 그런 검찰의 역할에서 바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의 제출 원칙’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검찰은 결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수사를 하는 집단이고, 그 전형의 하나가 조 전 장관 수사였다.

 

이번에 박씨와 장씨의 ‘오염된 증언’이 바로잡힌 것은 조씨의 세미나 참석이라는 단편적 사실을 확인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검찰이 이 사건 수사에 임한 태도의 문제점을 극명히 드러내줬다. 수사는 사냥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형사절차는 야수의 본능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두 젊은이의 고백적 증언은 조 전 장관 부부의 유무죄에 미치는 영향보다 아직 야만의 티를 벗지 못한 우리 형사사법제도의 현주소에 대한 경종으로 더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