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기소 당하면 인생이 절단난다”

● 칼럼 2021. 12. 1. 02:4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내로남불 무감각의 검찰주의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25일 ‘국민의힘 서울캠퍼스 개강 총회’ 행사에서 대학생들과 대화하며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이 만약 기소를 당해 법정에서 상당히 법률적으로 숙련된 검사를 만나서 몇년 동안 재판을 받고 결국 대법원에 가서 무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인생이 절단난다. 판사가 마지막에 무죄를 선고해서 여러분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법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형사법에 엄청나게 숙련된 검사와 법정에서 마주쳐야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다. 검찰의 기소라는 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기소하지 않고, 기소해야 될 사안을 봐주지 않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평생 검사로 살아왔고 검찰총장까지 지낸 이의 통찰이 담긴 말이다. 검찰권이 지니는 공적 무게감과 벼려진 양날의 칼 같은 위험성을 투박하지만 와닿는 언어로 표현했다. 그는 “범죄를 은폐하는 것은 그 범죄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도 했다. 윤 후보의 말은 최근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을 선명하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짚어내는 길잡이가 될 것 같다.

 

먼저 ‘고발 사주 의혹’. 요체는 검찰이 특정 인물들을 찍어 검찰에 고발하도록 국민의힘에 고발장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고발이 들어오면 수사에 착수해 기소까지 하겠다는 의지가 전제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기소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 특정 인물들에게 “재앙”을 선사하기 위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윤 후보가 말한 “함부로 기소”하는 위험성을 오싹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 특정 인물들 중에는 윤 후보 부인 김건희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을 보도한 <뉴스타파> 기자·피디도 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은 언론의 의혹 제기 이후 검찰 수사가 시작됐는데, 윤 후보가 검찰총장이던 시기에는 지지부진하다가 그가 퇴직한 뒤 수사가 급진전돼 권오수 회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대거 구속·기소됐다. 이제 김건희씨에 대한 수사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다. 결국 고발 사주는 검찰총장의 가족과 관련한 정당한 의혹 제기를 한 언론인들의 “인생이 절단”날 뻔한 사건인 셈이다.

 

만약에 고발 사주가 실제로 실행돼 기자·피디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면 주가 조작 사건 자체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아마도 묻혀버렸을 것이다. 이 점에서 고발 사주는 “기소해야 될 사안을 봐주”는 측면도 지닌다.

 

‘장모 문건’은 또 어떤가. 윤 후보가 검찰총장일 때 장모 최아무개씨가 연루된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최씨를 두둔하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고 대검찰청 대변인이 이를 언론에 적극 설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최씨는 이후 은행 잔고증명서 위조와 요양급여 부정 수급 혐의로 기소됐고 후자는 유죄 판결까지 받았다. 장모 문건 역시 “기소해야 될 사안을 봐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얼마 전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검찰의 공소권 남용을 인정해 기소 자체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씨가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은 뒤 관련 검사들이 징계를 받자 검찰이 예전에 기소유예로 끝냈던 외국환거래법 위반 사건을 끄집어내 유씨를 재기소했는데, 대법원이 ‘보복성 기소’라고 인정한 것이다. 간첩죄를 뒤집어 씌웠다가 무죄를 받자 다른 혐의로 다시 기소한 검찰의 행태는 “굉장히 무서운 것” 그 이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책임지는 검사는 없다.

 

이밖에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사건, 룸살롱 향응 검사 99만원 불기소 사건 등 검찰이 “법률적 숙련”을 이용해 기소를 불기소로 바꾸고 불기소를 기소로 바꾼 사건들은 부지기수다.

 

이렇게 검찰은 한없이 무거운 검찰권을 노리개 삼고, 검찰권의 사유화라는 위험천만한 유희를 벌여왔다. 윤 후보는 그 조직의 일원이었고 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신이 검찰총장으로서 ‘판사 사찰’ 문건 작성·배포, ‘채널에이(A) 사건’ 감찰·수사 방해 등 일그러진 검찰권 행사로 징계를 당했다. 법원은 이 징계 사유가 중대해 면직 처분도 가능할 정도라고 판결했다.

 

서두에 인용한 윤 후보의 말은 ‘검찰의 중립성 보장 방안’을 묻는 질문에 답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는 ‘검찰 인사의 공정성’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검찰권이 아무리 불공정하게 행사돼도 조직 전체가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데 그 안에서 누구를 어느 자리에 앉히든 달라질 게 있을 리 없다. 고발 사주, 장모 문건, 보복 기소 등 비뚤어진 검찰권 행사를 엄히 단죄하는 것이야말로 공정한 검찰을 향한 출발점이다. “무서운” 권한을 주면 책임도 무섭게 묻는 게 민주국가의 원리다. 독일·스페인·노르웨이·덴마크 등 여러 나라에서 판검사의 직권남용·직무유기를 일반 공무원보다 더 중하게 처벌하는 ‘법 왜곡죄’를 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검찰 인사를 통해 중립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윤 후보의 답변을 보며 오히려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윤 후보는 그를 검찰총장에 앉힌 인사가 검찰 중립성을 위해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할까. 그는 검찰 중립성과 배치되는 행위로 징계를 받지 않았나. 무엇보다 검찰총장이 임기 도중 퇴직해 대선에 뛰어든 것 자체가 검찰 중립성 원칙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 아닌가. 이 질문은 대선 후보 윤석열에게, 그리고 만약 그가 당선되더라도, 묻고 또 물어야 할 태생적 질문이다. 다음에 윤 후보를 만나는 청년들도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 박용현 논설위원 >

                             [민중의 소리 최민의 시사만평]

좋든 싫든 가장 큰 영향을 주고받는 부부

배우자 공적 업무에 미칠 영향 가늠해야

 

 윤석열 · 김건희 씨 부부.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 수괴이자 학살자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두려움과 염치는 달리 가졌다. 둘을 가른 차이는 뭐였을까. 나는 이순자와 김옥숙이 아닐까 직관한다. “내 남편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우기고 돈은 뒤로 빼돌리고 대놓고 골프채 휘둘러온 이와, 자식을 통해 대리 사과라도 하고 추징금을 완납하고 줄곧 숨죽여 지내온 이를 각각 배우자로 둔 차이랄까. 부창부수라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수십 년 영욕을 함께해온 부부라면 삶의 태도, 특히 공적 태도는 일치하기 마련이다. 좋든 싫든 가장 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를 세트로 욕하고 세트로 예우한다. 저 사람이 왜 저런지 때론 배우자를 보면 퍼즐이 맞춰지기도 한다. 민망하지만, 사실이다. 저 여자(남자)가 왜 저렇게 괜찮은지(형편없는지) 오랜 커플(결혼) 생활을 해온 이라면 파트너(배우자)를 보고 미스터리가 풀린 적도 꽤 있다. 가령, 아무리 봐도 그릇이 아닌 듯한 빌 클린턴이 어찌 대통령이 됐는지, 누가 봐도 우월한 비주얼의 멜라니 트럼프는 왜 그리 표정이 썩어 있는지 말이다.

 

정치인의 배우자는 참으로 모순된 자리이다. 비선인데 늘 노출된다. 큰 관심을 받지만 소신이나 발언은 삼가야 하고, 최측근 실세이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책임은 없는데 또 공적 관리는 받는다. 나서면 나댄다 하고 가만있으면 구린 게 많다 한다. 압축성장의 과정만큼이나 배우자 역할에 대한 인식의 편차가 크고 거기에 또 남녀 성비 불균형과 성역할 고정관념까지 얽히고설켜 있으니, 그래서 그간 정치인 배우자들은 낯내기 좋고 욕은 안 먹을 봉사활동만 주야장천 해왔는지 모르겠다. 두 유력 대선 주자의 배우자인 김혜경씨와 김건희씨가 어떤 이유로든 목욕탕에 때 밀러 다니지 않는 것만 해도 역사의 큰 진전이라 해야 할까.

 

후보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격렬히 관심을 끄는 게 옳다고 본다. 그야말로 사생활이다. 사이좋게 손 흔들고 인사 다니는 정도까지만 허용하고 지켜보자. 가장 가까운 심기 경호인이자 열성 지지자니까. 후보의 공적 업무 수행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는 정도 이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하필 이것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는 크고 작은 구설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주가조작 연루 의혹이 검찰 수사 선에 올라 있다. 논문 표절이나 허위 경력 기재 등도 큰 논란거리다. 윤 후보가 유난히 공사 구별이 안 되는데다 “선거는 어차피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할 정도의 인식을 가진 까닭에 더욱 걱정된다. 저러다 대통령 되면 진짜 자기 가족만 봐주거나 배 불리는 게 아닌가 해서다. 가족의 범위는 쉽게 유사 가족으로 확장된다. 내 가족, 내 측근, 내 지지 그룹, 내 세력의 비즈니스가 돼버린다면? 김건희씨가 발언권도 없이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는 이유는 이런 남편 윤석열의 인식과 처신 때문이다. 국민 원망하지 마시라.

 

일을 더 그르치는 건 국민의힘이다. 이 와중에 배우자포럼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모임을 발족하려 한다. 원내외 당협위원장 배우자들이 모여 강의 듣고 토론하고 대선에서 할 역할을 고민해보자는 취지란다. 김건희씨의 ‘공개 활동’을 돕기 위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사실과 다르다”며 “당대표가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본인과 본인의 배우자가 나서서 진작부터 꾸려왔고 당 중앙여성위원회가 주관하는 공식 활동이라 했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배우자가 있고 그 배우자는 곧 여성이라는 전제도 우습지만, 아무런 법적 지위가 없는 배우자에게 당의 공조직이 지원하는 모양새도 부적절하다. ‘아내포럼’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은 게 다행일까.

 

비혼이라는 이유로 ‘자동 패싱’ 당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나마 이 일로 욕먹는 것은 피하겠다. 밖에다 대고 되지도 않을 성별 갈라치기 하지 말고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후진 일부터 걸러주면 좋으련만. < 김소희 칼럼니스트 >

[편집인 칼럼] 나라 망치는 언론과 교회의 타락

● 칼럼 2021. 11. 30. 07:4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언론이 사익추구와 수구 카르텔 정파의 도구로 전락

무속신앙 논란에도 무감각한  기독교 심각한 세속화


[한마당 칼럼] 김종천 편집인

 

 

임박한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국가의 명운과 흥망성쇠, 나아가 국제질서와 국내외 동포들 삶에도 크고작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후보자들의 소신과 품성, 이력과 역량 등을 검증하는 이유도 다름 아니다.

한국의 커진 위상을 보여주듯 이번 20대 대통령 선거는 세계 각국과 언론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세계 유수의 신문과 방송에는 한국 대통령 후보 윤석열 씨와 그 부인 김건희 씨의 무속논란을 비롯해, “(비판 언론을) 손 봐주겠다.” “(의혹 제기자들을) 청와대에 가면 감옥에 집어 넣겠다,” “미투는 돈을 안 준 때문”이라는 등의 발언 내용이 보도돼 국내외 한인들의 낯을 뜨겁게 했다.

 

세계 10위권의 국력과 상당 수준의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선진국’에서, 더구나 21세기 IT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 부부가, 원시적인 주술신앙과 샤머니즘에 빠져있다는 사실, 여성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천박한 인식, 거기에 비판을 수용할 줄 모르는 독선·독재적 성향과 보복심리를 은연중 드러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이해되지 않는 현상은 그런 후보자가 국내에서 지지율 1위를 다투고 있고, 다수 언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별 일이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독선과 보복도 괜찮다는 것인지. 자신과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칠 국정운영과 국가의 운명마저 역술가나 점쟁이 무당에게 의지하는 것도 상관없다는 의식수준들인 것일까.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과 그 부인이 반 인권적이며 언론자유를 무시하는 듯한 사고방식을 드러낸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지만, 일상의 길흉과 처신을 이른바 ‘도사’나 ‘법사’의 말에 의지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습벽이 몸에 배어 있다면, 정말 불안하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말의 요승 신돈, 제정 러시아를 몰락시킨 라스푸틴의 사례를 들 것도 없다. 바로 ‘최순실’의 전횡과 박근혜 탄핵만으로도 그 위험성은 증명되고도 남는다.

 

윤 후보는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나와 조롱과 의심을 사더니, 신천지 압수수색 거부와 라이벌의 대권도전 여부, 공직 사퇴결정 등은 물론 토론날짜 택일까지 그들 주변의 여러 점술가들에게 의존했다는 소문이 무성히 나돌며 ‘무당정권’을 경고하는 소리가 심각하다. 더구나 김건희 씨는 자기가 후보인 것처럼 말하며 “내가 정권을 잡으면~”을 장담했다니, 그런 ‘부부정권’이 국가 최고권력을 쥐고 흔든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며,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주술부부가 과연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과 의미를 알기나 할까. 만에 하나 청와대에 들어간다면 ‘무속과 국정의 분리’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미 그들 일가는 검찰권력을 해결사로 삼아 갖가지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 왔다는 이른바 ‘본(인) 부(인) 장(모)’ 의혹도 따라다니고 있는 상태다.

 

한국의 다수 메이저 신문과 방송은 이런 불길하고 엄청난 걱정거리를 덮어버리고 오히려 인물 포장과 미화에 급급하다. 거의 무제한인 언론자유에 비례하지는 못할망정 거꾸로 신뢰도 세계 최하위권인 자신들 처지를 증명하려는 듯, 언론의 사명과 본분은 저버린 채 경쟁적으로 사익추구와 수구 카르텔 정파의 도구로 전락한 보도행태가 탄식을 자아낼 뿐이다.

 

거기에 더더욱 불가사의인 것은, 무속신앙 논란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한국의 기독교계다. 일부 교단과 NCCK, YMCA 등 단체, 정의구현사제단과 신학자들의 메아리 없는 경고의 외침이 들릴 뿐, 소위 대형교회와 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무반응이거나 되레 그런 후보를 감싸고 영합하는 기상천외한 모습들을 보여 아연실색이다.

 

십계명부터 떠올린 교인이 한 두명 일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부터, 어떤 형상의 우상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삼 계명까지,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라는 준엄한 신앙지침은 헛구호란 말인가?.

 

교회는 조상에게 절하는 제사조차도 금기시 한다. 단군상을 훼손하고 불교사찰을 찾아가 땅밟기 하는 극성 신도들도 있다. 그렇게 극진한 신앙심들은 다 어디에 묻어둔 것일까. 주일마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에덴을 쫓겨난 원죄부터, 우상을 섬김으로 징벌이 반복된 불신앙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며 다만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쳤다. 귀신들린 아이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질타하며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탄식했다.

 

의인이 한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을 용서하겠다는 성경말씀도 있다. 비록 세상이 혼탁해도 기독인들이 투철한 영적 분별력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한다면, 어찌 그 사회가 ‘지옥을 향한 묻지마 질주’를 하겠는가.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발표한 신학자들의 꾸짖음은 맘몬주의와 세속에 물들어 손가락질 당하는 한국교회와 ‘삯꾼’들을 향한 매서운 회초리로도 들린다.

“교회와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묵과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지와 연대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으니 그들의 신앙은 얼빠진 것이고, 그들의 신은 사실상 우상임에 틀림없다.…그들은 성경을 헛 읽었고, 기독교 신앙을 크게 오해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리고,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 행동하고 있다”         < 김종천 편집인 >

 

  "내로남불 먼저 시인하고 사죄하라"

[한마당] 공정과 정의의 이중 잣대

 

 

오스카상을 거머 쥔 ‘기생충’에 쏠린 찬사와 ‘오징어 게임’ 열풍, 그리고 ‘BTS’(방탄소년단)의 폭발적 인기 등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근래 세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 급등과 선망은 “우리가 언제 이렇게 덩치가 커졌지?“하는 상전벽해의 뿌듯함을 자아낸다.

 

그런데 왠지 어색함이 뒤따른다. 국력이 커진 만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는 게 당연할 테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자랑과 대단한 것들만 내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여전히 미숙하고 모자라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결함도 한 둘이 아니어서 어설픈 선진국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이 앞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민주주의 쟁취의 민권승리를 일궈냈음에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판의 풍경들은 한국의 아킬레스건이요 지극히 후진적인 모습의 대표격이다.

전례없이 세계적 화젯거리로 등장한 대통령선거가 그걸 말해준다. 쿠데타가 사라진 민주적 선거와 평화적 정권교체 정착, 대선 결과가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 분석 등에 쏠린 눈길이라면 감지덕지일 텐데, 속사정은 그런 게 아니라 가십(gossip)과 낯뜨거운 조롱이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후보자로 나선 여야 유력 인물들의 독특하고 비정상적인 이력과 캐릭터, 거기에 배우자를 둘러싼 온갖 추문과 풍설이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연유다.

 

화제의 주역 이재명과 윤석열은 벌써 글로벌 인물로 부상했다. 정책경쟁과 국정능력에는 눈감은 치열한 네거티브도 난무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후보의 상반되는 면모와 대처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명암과 취약한 정치현실을 읽는다. 소위 보수와 진보를 대하는 국민들의 선입견과 현실의 괴리도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본다

 

이재명 후보는 ‘개천에서 용’이 된 변방 출신이다. 그는 이른바 ‘형수 욕설’과 ‘여배우 염문’ 등에 ‘대장동’ 의혹과 ‘아들 리스크’가 이어지며 고전한다. 여전히 불신의 눈으로 보는 이들도 많지만 적극적인 해명과 사과, 그리고 법원 무죄판결에 헛다리만 짚는 검찰수사까지 이어지면서 상당히 희석된 듯하다. 화전민 출신의 불우한 가정사와 역경 속의 삶에 몸부림치며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입지전적 성공신화를 일군 의지와 저력이 뒤늦게 알려진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는 건 많은데 말이 많다 바꾸기를 잘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반면 윤석열 후보는 부유한 집안이 배경인 검사출신이다. 흔히 ‘칼잡이’라는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어 총장까지 됐지만, 자신을 발탁한 정권과 상관에 대한 우직한 배신과 항명으로 뜻하지 않게 대선후보 반열까지 올랐다. 문제는 이른바 본인·부인·장모를 뜻하는 ‘본부장’ 리스크의 심각성이다. 본인은 검찰의 정치중립 파괴에다, 재임 중의 숱한 선택적 수사와 내 사람 봐주기에 ‘고발사주’, 법원의 ‘징계 판결’ 등 부적격 논란이 거세다, 현재 재판 중인 장모 관련 비리 의혹들에 특히 부인 김건희 문제는 양파껍질 같아서 더 심각하다. 결혼 전후의 사생활 논란과 주가 조작 연루설, 스폰서 특혜 등 이권 의혹에다, 무려 18건에 달한다는 학경력 위변조는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혐의도 나온다. 어쩌면 투표 날까지 사상 처음 부인없이 혼자만 뛰는 후보로 두고두고 회자될 지도 모르게 생겼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기획이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사과에 인색하다. 이들 일가의 수많은 추한 행태에도 어떻게 대선 후보로 살아남는지가 불가사의일 정도인 한국 정치와 민도(民度)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윤석열 후보의 경우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 정의’란다. 불공정과 불의한 세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솔깃한 말이지만, 스스로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사람의 외침은 공허한 말잔치요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도 들먹여진다. 그가 특수통 검사로 독하게 수사했던 사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호출된 2007년의 ‘신정아 사건’은 그의 처 ‘김건희 의혹’의 도플갱어이고 빼박이다. 조국 사건의 ‘표창장’문제도 들먹여진다. “정경심이 4년 징역이면 김건희는 몇 년이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로남불’ 부메랑이라는 비아냥도 강하다.

 

어느 후보든 설령 당사자에게 흠결이 있고 배우자의 심각한 치부가 드러난다 해서 대통령이든 영부인이든 못할 것이야 없다. 하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감싸안고 남의 눈의 티끌만 호되게 매질하는 허울좋은 공정과 정의라면 선량한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하고 국가권력 조차 사유물로 여길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비리와 의혹 투성이 후보가 우매한 군중들로 인해 대통령이 된다한들 어쩌랴!. 판단과 선택은 국민의 몫이다. 혜택을 누리는 것도, 피해를 입고 눈물을 삼키는 것도 결국은 다수 국민이다.

 

그래도 하나만 강권한다. 열심히 뛰어 대통령이 되라. 다만 전제가 있다. 대권을 그렇게 쥐고 싶거든, 제발 ‘내로남불’을 시인하고 사죄하라. 가족 누구든 비리와 범죄 혐의라면 인정하고 스스로 징벌을 요구하라. 그러면 그저 나리들의 하는 꼴을 지켜보며 먹고살기에 바쁜 범생이들은 잘난 놈들 세상만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한마당] 업보는 비켜가지 않는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것들 중 하나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 때문이다. 흔히 말들 하듯이 대개 선하고 착한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드물다. 처세에 능하지 못해 높은 자리나, 이른바 ‘황금보직’에 가기가 어렵다. 무슨 이유인지 빨리 죽는 사람들도 많다. 거꾸로 악행과 술수에 능하고 위선으로 포장한 자들이 승승장구 출세하고, 돈 잘 벌어 부귀영화와 장수까지 누리니, 복 받은 인생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도 선한 자의 불행과 악한 자의 형통에 대해 거론하는 부분이 여럿 있다. 가령 시편(73)을 보면 악인들이 잘되는 모습이 이렇게 그려진다.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입는 옷이며…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이런 부조리를 접한 시편기자는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헛되고 헛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 것을 깨우쳐 준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옷깃을 여미고 고인을 추모하는 게 상례지만, 엊그제 90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전두환은 사후에도 온갖 욕설과 수모를 당하고 있다. 바로 ‘악인의 형통’을 누린 자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를 때까지는 그야말로 영광스런 삶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인생의 내리막 길에는 고통과 저주가 밀려들었다. 어쩌면 그의 잘못된 인생행로로 인해 후손들마저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운 불행한 가문으로 전락해 버린 건 아닐까.

우리는 그의 경원당하는 쓸쓸한 죽음을 목도하며 한낱 ‘권불십년(權不十年)’에만 그치지 않는 많은 삶의 교훈들을 떠올리게 된다. 본분(本分)을 망각하면 쓴물을 들이켜야 한다는 것,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원한과 갈등을 만들면 복수의 저주가 따른다는 것, 자신의 악행을 분별하거나 참회할 줄도 모르는 철면피야말로 어리석은 최악(最惡)이라는 것, 죄악(罪惡)의 업보는 틀림없이 져야한다는 것, 악인의 형통은 신기루와 같다는 것….

그가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으면 말년도 편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의 탐욕과 오판의 유혹에, 가서는 안될 길, 해서는 안될 권력도박의 불판으로 내달렸다. 군인의 기개와 오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민주주의 시민정신을 총칼 압제로 찍어 누르려다 역사에 상흔을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 피눈물을 쏟게 했다. 그렇게 역사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와 남긴 상처는 심히 위중하고 오래 갈 것이다.

 

자고로 사람들에게 한을 남긴 자들, 세상에 갈등과 대립을 불러일으킨 자들의 말로가 행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해악이 깊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설령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린다 해도, 그들의 죄과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3~4대 자손까지 이른다는 성경의 경고는 그래서 두렵다.

한반도를 짓밟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일본이 갈수록 쇠락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이 조선 땅에 남긴 깊은 상처는 오늘까지 분열과 갈등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 그 원한과 저주가 영혼과 심장을 옥죄지 않겠는가.

우리 역사만 보아도 수많은 사례가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나중 함흥차사의 수모를 겪었고, 5백년 왕조라 하나 분란이 끊이지 않다 망했다. 세조의 경우 동생 안평·금성대군과 조카 단종, 김종서 등 충신을 죽이고 셀프 등극했다가 원혼의 저주와 질병으로 고통 중에 단명했다. 가까이는 부하의 총탄에 죽은 박정희의 비극에, 권력 앞잡이로 생사람을 잡았던 검찰주의자의 외아들이 비명횡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사치의 길을 벗어나 나라를 통째로 밑천 삼으려던 이명박의 거짓과 위선은 철창으로 귀결됐다. 아버지 후광과 아첨 친위 카르텔의 위장술 덕에 권좌에 오른 박근혜의 말로 역시 불행하기 그지없다.

 

전두환의 죽음을 보며 이 시대를 사는 모두가 되새길 일이다.

본분을 저버린 탐욕, 민심과 천심을 거스르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 원한과 갈등을 만들고 남기는 자, 분별과 참회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복수와 저주가 뒤따르며 악행의 업보는 결코 비켜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무엇보다 거짓과 위선이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으며, 악인의 형통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1500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 칼럼 2021. 11. 3. 02:1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1500자 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임순숙 수필가

 

크리스마스를 불과 일주일 여 앞둔 오늘, 이곳엔 온종일 눈이 내렸답니다.

예전 같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즐거워했겠지만 녹록하지 않은 현실 앞에 한없이 마음이 가라 앉는군요. 어느날 갑자기 밀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욕심내기보단 현 상태로 유지되기를 염원하며 자신을 다독였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라 안팎 소식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눈발이 옅어질 무렵 저녁산책에 나섰습니다. 차가운 눈바람에 간간이 휘청거리긴 했어도 폐부 깊숙이 박히는 상쾌함은 집안에서의 우울했던 기분을 전환시켜 주어 그런대로 좋았답니다. 집집마다 개성 껏 멋을 부린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과 소담하게 쌓인 눈과의 조화로움에 한동안 감탄하다 말고 그 마음조차 깊은 고요함에 함몰되었지요. 가가호호 현란한 불빛은 내걸었지만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난제에 빠져있을 이웃들의 고뇌가 눈바람 속에 실려오는 듯 했으니까요.

적적한 동네의 길모퉁이에서 홀로 눈을 치우고 있는 이웃 주민을 향해 다소 과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염원하는 2022년 4월의 그 길도 누군가 힘있게 열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명치끝까지 올라왔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공통의 길이 있지요. 쉼 없이 온몸으로 기도하게 하는 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정을 쌓았지요.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미주네 가족과 모처럼 푸짐한 한식으로 석식을 함께했던 어느 저녁, 그리고 아껴두었던 누룽지를 서슴없이 꺼내어 아침 식사를 준비한 Mr. 우 부부의 지극한 배려로 인해 만시야에서의 강행군에 큰 힘이 되었지요. 그런 따뜻한 두 가족 옆에서 우리부부는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 돌아보니 늘 부족하여 미안함만 가득하군요.

비, 바람, 추위 등 자연의 온갖 심술을 길 위에서 겪어낸 후,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우뚝 서던 그날의 감격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런지요.

 

우리 부부는 800 km 프랑스 길을 완주하고 돌아와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병명도 모른 채 그쪽만을 바라보며 한동안 그리움을 키웠지요. 얼마 후에야 그곳을 다녀온 경험자들에 의해 우리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일컬어 까미노 블루(Camino Blue) 환자라고 불리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밖에서 길들여진 길을 일상에 들여놓고 하나의 그리움으로 애닯아 하는 현상을 일컬음이라는군요.  

 

프랑스 길을 다녀 온 일년 후, 우리부부는 ‘까미노 블루’ 환자임을 핑계삼아 여러갈래 순례길 코스 중 가장 어렵다는 북쪽길(El Camino Norte de Santiago)을 택했지요. 더 멀고 더 긴 시간동안 비우고 다스리기를 거듭하며 고행을 자처한 끝에 드디어 까미노 블루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실행에 옮기자구요. 그래서 또 거룩한 계획을 세웠답니다. 2022년 4월엔 은의 길( Via de la Plata),  장장 1,000 km 넘는 길에 감히 도전장을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르퓌에서 출발하기를 희망하는 Mr. 부부, 언제든 출발 날짜만 알려달라던 미주 아버지, 언젠가 그때처럼 위에서 만나지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우리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라는 난적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까미노: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줄여서 까미노라 함.

-알베르게: 순례자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

 

[1500자 칼럼] 가을비와 감자탕

 

임순숙 수필가

 

곱게 물든 단풍을 제대로 품어보기도 전에 얄궂은 가을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기나 긴 겨울을 탈없이 지내려면 활화산 같은 풍경화 몇 점 정도는 가슴 속에 저장해야 하련만,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단풍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계절 막바지에서 야외 나들이를 계획했다가 일기관계로 접고 나니, 뜰 안 가득 내려앉은 물먹은 낙엽처럼 마음도 침울해진다. 이런 때 일수록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일거리를 궁리하다가 예정에 없던 감자탕을 떠올리며 인근의 중국마켓으로 향했다. 매장엔 때이른 아침녘인데도 다른 날보다 더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처럼 애궂은 날씨 때문에 일정을 우회한 이들이 아닐까 단언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나의 쇼핑 카트가 그득해졌고, 침울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요리할 즐거움에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두툼한 살고기가 붙은 돼지 등뼈는 핏물을 뺀 다음 스토브에 올리고, 제철에 손질하여 저장해둔 우거지와 고사리, 깻잎 등을 냉동고에서 꺼내어 해동시킨다. 대부분의 한식이 그렇지만 감자탕은 특히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평소엔 이틀에 걸쳐 끓이기 일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기꺼이 끝을 보려 안간힘을 쓴다.

 

주먹만한 감자 여섯 개를 골라서 껍질을 벗긴다. 순간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의 감자가 따끈하게 폐부를 파고 드는 듯 하다. 감자탕에서 빠지면 섭섭한 노란 감자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오묘한 맛으로 고기와 야채 틈새를 파고 들며 늘 존재감을 과시한다.

한때 감자탕의 ‘감자’는 돼지 등뼈 부위를 지칭한다고도 했고, 또는 고깃국에 감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애매모호한 돼지등뼈와 감자의 관계, ‘감자탕’이란 이름의 어원이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가지 설만 난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돼지뼈가 음식의 주재료로 쓰이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해 감자를 내세웠다는 설과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뼈 우린 국물에 감자를 넣어 끓여 먹었다는 설이다.

또한 ‘감자탕’은 영어명에서도 혼돈을 초래한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명칭과 실제요리가 매치가 되지 않아 해외 유튜브 등에서는 Pork Bone soup 으로, 국내에선 Pork back-bone stew 를 표준화된 명칭으로 표기한다.

평범한 하나의 음식에 엄청난 사례와 관심, 끊이지 않는 변화와 발전은 그만큼 대중의 사랑이 깊다는 의미이리라. 감자탕의 주인공이 돼지 등뼈면 어떻고 감자면 또 어떠하리.

 

누릇한 돼지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고기 솥에 잘 익은 된장을 넉넉히 풀고 주인공이라 자처하는 감자들을 제일 먼저 투척한다. 연이어 준비된 배추 우거지와 고사리, 버섯 등 각종 채소들을 차례대로 들이밀며 화력을 조금 높이면, 금방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는 화합의 율동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뭐니뭐니 해도 감자탕 최후의 화룡점정은 넉넉한 마늘과 들깨 가루 그리고 쭉쭉 찢어 넣은 대파가 아닐까.

 

투박한 질그릇에 김이 풀풀 나는 감자탕을 그득 담아 식탁을 차렸다. 국그릇을마주한 가족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해 보인다. 가을비 질척이는 저녁,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단풍이 지건, 기나긴 겨울이 문앞에서 서성이건 이젠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