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 칼럼 2021. 6. 17. 13:1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조선일보>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제훈의 남북관계 조망

 

1991년 7월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테니스를 치고 있다. 6개월 뒤인 1992년 1월6일 부시 대통령은 서울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한테 ‘북한이 핵무기 개발 포기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보일 때까지 한국은 북한과 협상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조용히 경고”했다고 당시 외무장관 이상옥은 증언했다.

 

‘북핵 문제’란 비대칭 탈냉전기 북한의 위험천만한 생존전략 탓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소련이 사라진 동북아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며 ‘잠재적 지역 패권국’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북한 악마화’와 더불어 남북관계를 제어할 목적으로 동북아 국제정치에 깊이 심어놓은 ‘트로이 목마’이기도 하다.

 

1991년 9월27일 오후 8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세계 각지에 배치된 미국의 지상·해상 발사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의 상응 조처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은, 패권국 미국의 전례 없는 일방적 행동 계획이었다. 놀란 건 저녁 식탁을 물리고 나른한 행복감에 빠져들던 미국 사람들만이 아니다.

 

북한은 바로 다음날 “미국이 실지로 남조선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게 되면 우리의 핵담보협정(국제원자력기구 핵안전조처협정) 체결의 길도 열리게 될 것”이라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으로 화답했다.

 

부시의 이 발표는 1990년대 초 비대칭 탈냉전 시기 남-북, 한-미, 북-미 양자관계에 연쇄 반응을 일으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미 삼각관계’를 성립·작동시킨 역사적 원점 구실을 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몰고 온다는 카오스 이론의 비유처럼.

 

발표의 직접적 원인은 한달 전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다. 그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겸 공산당 서기장을 흑해 연안 크림반도 포로스 별장에 50시간 동안 감금했다. ‘사흘 천하’로 막을 내린 이 쿠데타는 휘청이던 소련을 연방 해체의 낭떠러지로 떠민 결정타가 됐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소련의 핵무기가 ‘불량국가’ 등에 흘러드는 악몽의 현실화를 막으려 ‘전술핵무기 일방 철수’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부시 회견 여드레 뒤인 10월5일 고르바초프는 “전술핵무기 폐기를 포함한 광범위한 감축 조처를 취하겠다”고 화답했다.

 

30년 전 일을 새삼스레 꺼낸 까닭은, 부시가 ‘세계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와 별도로 지시한 한반도 관련 ‘극비 명령’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40개 남짓한 포병용 더블유(W)-33 포탄과 함정용 전술핵무기는 물론, 군산 공군기지의 에프(F)-16기에 장착한 60여기의 비(B)-61 핵탄두를 제거·철수시키라는 명령이다. 공군의 전술핵무기는 당시 주한미군 핵전력의 알짬인데다, 애초 부시가 철수 지시를 한 ‘지상·해상 발사 전술핵무기’가 아니다. ‘북의 우호적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유인책이었다.

 

북은 부시 회견 얼마 뒤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4차 남북고위급회담(1991년 10월22~25일)에서 ‘긴급제안’이라며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에 관한 선언(초안)’을 내놨다. 북쪽 단장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1·2차 회담에서 “미군과 그의 핵무기 철수”를 언급했으나 정작 3차 회담 때 내놓은 ‘북남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초안)’에선 주한미군 핵무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은 터다. 1~3차 회담에서 핵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던 북의 이 ‘긴급제안’은 이례적이었다. “남조선 배치 핵무기가 완전 철수되면 핵사찰에 응하겠다”는 연형묵의 4차 회담 발언은, 부시의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회담 전략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남쪽 수석대표인 정원식 총리는 4차 회담에서 “귀측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모든 핵물질과 시설에 대한 국제기구의 사찰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짚었다. 하지만 정원식의 A4용지 11쪽 분량 기조연설문에서 ‘북한 핵문제’ 관련 언급은 세 문장 아홉 줄이 전부다. 핵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언급한 정도에 그친 셈이다. 남이 ‘한반도 비핵화 등에 관한 공동선언(초안)’을 ‘긴급제안’으로 제시해 북의 핵문제 회담 의제화 전략에 적극 호응한 시점은 1991년 12월10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회담 첫날 전체회의였다.

 

남은 4차 회담 이전엔 ‘핵문제’의 의제화를 애써 피했다. 1~3차 회담 수석대표인 강영훈 총리의 기조연설문엔 “핵”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 남이 1~3차 회담에서 ‘핵문제’의 의제화를 회피한 데에는, 긴급현안이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이를 전면에 내세우면 남북관계 진전이 어려우리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고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은 회고록(<전환기의 한국외교>, 420쪽)에 적었다.

 

노태우 정부가 4차 회담부터 ‘핵문제’를 의제로 다룬 데에는 “요청”이라는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미국의 집요한 압박이 있었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1991년 5월10~12일), 로널드 리먼 국무부 군축처장(1991년 6월4~6일) 등이 잇따라 방한해 ‘재처리시설 포기 확약’ 등 핵문제를 남북고위급회담 의제로 다루라고 압박한 것이다.

 

부시의 ‘전술핵무기 철수’ 명령과 4~5차 고위급회담 때 남북의 회담 전략 전환을 동력으로 “한반도 비핵화”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그 뒤 30년째 한반도의 평화와 8천만 시민·인민의 삶을 인질로 잡을 ‘핵문제’가 그렇게 한반도의 자궁에 똬리를 틀었다.

 

남북은 5차 고위급회담 직후 ‘핵문제 협의 대표접촉’(1991년 12월26·28·31일, 판문점)을 벌였고, 12월31일 3차 접촉 때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유엔 동시·분리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 이어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1991년을 희망차게 마무리한 것이다.

 

그런데 남북은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국제비확산체제가 요구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자기 포박’을 확약했다.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1항)에 더해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3항)고 선언한 것이다. 핵재처리·우라늄농축시설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목적 이용”(2항)에도 필요한 것이라,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조처협정’도 금지하지 않은 시설이다. 당시 남북이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중대 난관을 초래할 재처리·농축 시설 포기를 공개 선언한 게 ‘비핵평화’라는 숭고한 가치 때문은 아니다. ‘미국의 압력’이 가장 큰 요인이고, 이를 뿌리치지 못한 노태우 정부, ‘워싱턴(북-미 관계 정상화)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든 뚫으려 한 북의 양보가 두루 뒤엉킨 전략적 선택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가 재처리시설을 갖겠다고 하면 한-미 동맹 관계가 깨지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고 회고록(<노태우 회고록> 하권, 371쪽)에 적어, 재처리·농축 시설 포기가 미국의 압력 때문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앞서 노 대통령이 1991년 7월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한테 밝힌 ‘한국 단독 비핵화 선언 구상’엔 재처리·농축 시설 포기가 없었다. 다만 1991년 5월 방한한 울포위츠 국방차관이 ‘남북이 핵재처리시설을 포기하는 방안을 남북대화에서 협의해달라’고 하는 등 미국의 압박은 집요했다. 요컨대 미국의 한반도 비확산 정책의 표적은 ‘북핵’을 넘어 ‘남북한 모두의 핵능력 제거’였다.

 

미국은 ‘핵’을 빌미로 남북관계에 깊이 개입했다. “상호 상대방이 선정하는 자기측 지역의 군사 및 민간 시설에 대한 동시사찰 실시”를 5차 고위급회담 남쪽 수석대표 기조연설문에 담게 하더니, 부시는 1992년 1월6일 청와대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 포기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보일 때까지 한국은 북한과 협상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노 대통령한테 “조용히 경고”했다고 당시 외무장관 이상옥은 증언했다(<전환기의 한국외교>, 494~495쪽). 1992년 2월23일 더글러스 팔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서울에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압박해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돼야만 본격적인 남북 간의 경제협력을 추진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핵문제 해결 병행 추진 기조’를 꺾고 ‘핵 포기 먼저 전략’을 관철한 것이다.

 

이렇듯 ‘북핵 문제’란 비대칭 탈냉전기 북한의 위험천만한 생존전략 탓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소련이 사라진 동북아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며 ‘잠재적 지역 패권국’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북한 악마화’와 더불어 남북관계를 제어할 목적으로 동북아 국제정치에 깊이 심어놓은 ‘트로이 목마’이기도 하다.

 

이게 ‘편견에 찬 반미적 분석’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부시 행정부가 1990년 4월 발표한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 Ⅰ)을 되짚어보는 게 좋겠다. 이 구상의 “동북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 8개항”엔 “역내 헤게모니 국가의 출현을 막을 힘의 균형 유지” “미국의 정치경제적 접근성 유지” “핵확산 억지” 따위가 목표로 적시돼 있는데, 이후 순서대로 △중국 견제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거부·차단 △‘1차 북핵위기’로 현실화했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통일외교팀 기자

▲이제훈 기자는=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목회칼럼] 하나님의 나라

● 칼럼 2021. 6. 13. 14:2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쁨과 소망] 하나님의 나라 

송민호 목사/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시고 구원이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이시기에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죄악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인종 차별이 심각한 세상입니다. 1년 전 오늘 미네소타주에서는 백인 경찰관이 한 흑인 용의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목을 눌러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죠지 플로이드라는 이름은 정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을 거부하는 운동이 세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이제는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공정한 세상뿐만 아니라 투명한 세상이 되길 기다립니다. 지난 15개월 동안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은 코로나 19의 기원설이 또다시 수면으로 올라왔습니다. 미국 정부가 중요한 증거를 입수했다는 기사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습니다. 우한바이러스의 첫 타격이 2019년 12월이었다는 주장을 의심케 하는 내용인데, 이미 한 달 전에 (2019년 11월)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직원 3명이 코로나 19와 유사한 증세로 치료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우한 연구소에서 새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을 줍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중국 정부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갈망합니다. 공의와 진실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다시 심판주로 오실 때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증인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며,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7:21).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증인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팬데믹 속에 악전고투 촬영 중 제작진 감염

정기 검사 한 명 양성 반응…14일까지 중단

 

'미션 임파서블 7' 촬영현장에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톰 크루즈 [로이터=연합뉴스]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가 주연하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7' 촬영이 제작진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으로 중단됐다.

3일 미국 매체 더힐에 따르면 '미션 임파서블 7' 제작사는 스태프를 상대로 한 정기적인 코로나19 검사에서 양성 결과가 나와 오는 14일까지 촬영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제작사는 "안전 프로토콜을 따르고 있고 상황을 계속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화계 한 소식통은 제작진 가운데 1명이 양성 반응을 보였고, 더 감염자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미션 임파서블 7' 제작사는 팬데믹으로 지난해 2월 촬영을 중단했고, 이후 촬영 재개 이후 엄격한 방역 가이드라인을 적용해왔다.

 

로마서 '미션 임파서블 7' 촬영하는 톰 크루즈 [EPA=연합뉴스]

 

해당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크루즈는 지난해 12월 촬영 현장에서 거리두기 지침을 어기고 컴퓨터 앞에 가까이 있는 두 명의 직원에게 욕설을 동원해 격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한 번만 더 거리두기 어기면 당장 해고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우리는 지금 영화를 통해 수천 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있어 이 XX야"라며 "내게 사과할 게 아니라 코로나19 셧다운으로 집을 잃은 영화인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확산한 후 해당 직원들은 영화 제작 현장을 떠났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팬데믹으로 영화계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점을 감안해 크루즈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는 반응이 많았다.

크루즈는 지난 1월에는 제작진의 방역 지침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로봇을 거액을 들여 구매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크루즈는 지난 4월 움직이는 기차 지붕 위에서 스턴트 장면을 찍던 중 발을 헛디뎌 추락할 뻔한 카메라맨을 구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미션 임파서블 7'은 팬데믹으로 개봉이 미뤄져 내년 5월 극장에 걸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