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아내와 함께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트레일(산책로)을 걸으며 풍경을 보니, 겨우내 갈색이었던 나무와 풀들이 어느새 연초록색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나무에는 잎들이 움터 나왔고, 개나리와 벚나무는 벌써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습니다. 길가에는 이름모를 들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습니다. 봄이 온 것입니다.
가곡 ‘동무생각’(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가사로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땅에서 솟아나는 새싹들, 나무에 물이 오르며 연초록빛으로 돋아나는 잎들, 노랑, 분홍, 보라 등 총천연색으로 피어나는 꽃들,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자연의 변화를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진다’는 은유적인 가사로 표현했습니다.
그날, 육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의 귀를 감동으로 채우는 ‘봄의 교향악’을 듣고 보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봄은 이렇게 소리없이 우리 삶을 아름답게 채우며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주위에는 우리 귀를 잡아끌려고 들려오는, 소음에 가까운 소리들이 참 많습니다.이 소리들은 귀청이 울릴 정도로 우렁찹니다. 때로는 욕설과 다름없는 언어로 상대를 도발하고 자극하며, 때로는 확신에 찬 감언이설로 세력을 모으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소리를 발산하는 ‘빅마우스(허풍쟁이)’, ‘프로보커터(선동가)’들이 주목받는 것이 최근의 세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 분야와 각 진영마다 자리잡고서 “내 말만이 진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외치는 목소리의 크기에 달려있지 않음을 성경은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헤롯왕(헤롯 안티파스)에게 심문당할때 침묵으로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42:2-3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반면, 초대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왕(헤롯 아그립바)는 뛰어난 연설로 ‘신의 소리’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허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COVID-19 팬데믹으로 모두 어려운 시기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는 건강과 가정경제를 위협하고 공동체의 대면접촉을 막아 개인을 고립시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들리고 보이는 자극적인 소음들에 이전보다 더 많이 귀와 눈을 열어놓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소리없이 찾아온 봄처럼 조용하게 다가오는 주님앞에 오감을 열고 겸손히 귀 기울이므로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집어삼킨 뒤 36년 동안 조선 사람들을 왜식으로 마음껏 요리하며 부려 먹었다. 그런데 해방된 나라에서도 그들에게 비위 맞추고 앞잡이가 되었던 모리배들이 변신하고 득세하여 70여년 간을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왜풍'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오로지 권좌에 눈이 멀어 약삭빠른 배신자들을 끌어안아 숨통을 열어준 게 이승만이다. 역사적 단죄의 기회였던 ‘반민특위’를 일제의 부역자들 손으로 박살낸 것은 치명적인 민족범죄에 다름아니다. 단 한마디 회개나 사죄도 없는 교활한 자들에게 칼과 총을 쥐어주어 날뛰게 만들었고, 오히려 고난을 견딘 선량한 백성들에게 이념과 사상의 용수를 씌워 멸문지화를 불렀으니, 역사를 되돌리고 천심(天心)을 짓밟은 죄과를 어찌 지우겠는가.
이승만이 일제 잔재의 불씨를 되살린 바탕 위에서 4.19 혁명의 분노도 잠시, 아예 일제 빼닮은 정치로 친일의 뿌리를 넓고 깊게 만들어준 인물이 박정희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피로 충성을 맹세한 황군의 혈맥과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식민시절 득세했던 자들과 기업, 그 후예를 중용하여 ‘만년 기득권층’의 신분세탁과 권세영화를 궤도에 올려주었다.
일제 잔재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데 혁혁하게 기여하고 있는 친일 족벌 언론들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저들의 교묘하고 음습한 왜색 논조가 친일 후예들에게 든든한 우군이 되고, 독버섯을 번지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카르텔’까지 이루게 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독립투사들은 멸시당하고 설자리가 없어 북으로 피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들을 악랄하게 색출하고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제군관들이 떵떵거리며 살다가 지금도 국립묘지에 버젓이 누워 현충의 선열들로 참배를 받고 있다. 그들의 묏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친일부역자 파묘법 제정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인물과 카르텔이야말로 본색이 친일이요 왜색종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카르텔의 영향력을 믿는 자들과 친일의 피를 속이지 못하는 이들, 또한 일본우익의 ‘장학금’으로 학문적 ‘계급장’을 단 자들은 철면피한 반민족적 언동을 멈추지 않는다. 일본극우들이 외쳐대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독하고, 일본정부의 억지 변명을 대변하고 옹호하는데 기를 쓴다.
그들의 소리가 마침내 사법의 영역에서도 대놓고 터져 나왔다. 역사적인 강제징용 배상요구 소송을 각하 판결하면서 하는 소리 왈, “일본 포함 어느 나라도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한 나라가 없다”느니, “일본의 청구권자금이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고 일갈했고, “(배상을 위해 강제집행 했다가) 일본과의 관계나 미합중국과의 관계가 훼손될 수 있고 문명국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설파했다.
마치 일본정부나 일본법원이 했을 법한 말을 대한민국의 서울 중앙지법 부장판사가 대법원 판례까지 어겨가며 판결문이라고 외쳐댄 희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일말의 양심이나 염려는 있었는지,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이유로 선고일을 기습 변경해 소송당사자들도 참석하지 못했다니, ‘극우 판사의 친일쿠데타’라고나 할까.
친일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활개치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재판장을 일본으로 보내라”는 분노가 들끓고, “탄핵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폭발하는 것을 보면 결코 저들이 한국사회의 미래는 아닐 것이요, 시대와 세대가 흐르면 한민족의 정체성에 짓눌려 쇠락하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대다수 국민이 독도에 애착하고, 일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응원하면서 강제징용 배상을 외면하는 일본정부와 기업에 분노하는 민심을 보면 그렇다. 더구나 사죄는 커녕 적반하장의 치졸함에 정치 후진인 일본에 비해, 민주정치 선진에 부쩍 커진 한국의 국력과 활력의 자부심으로 믿음은 더 커지게 된다.
우리 이제 저들을 가여워하자. 오염과 중독을 벗어나려면 몇 배의 노력과 희석이 필요하니까. 허물은 쌓기 쉬워도 회개하고 용서받아 떳떳해지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세상은 약삭빠르며 사악한 자들이 설치게 되어있지 않나. 그렇지만 교활한 자들은 강자 앞에선 맥을 못추는 법이니.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교육과 노예근성을 떨치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 그래, 식민 노예근성의 마지막 발악들 해보라고 하자. 이제 70여년 흘렀으니 20여년 만 참고 견디면 친일 독버섯들은 햇볕아래 곰팡이처럼 자연 소멸되고야 말 것이다. 이 독한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제 종말을 향해 가고있지 않는가.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210610 >
[한마당 칼럼] ‘한번 저지르면 그만’
"개혁은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범죄적 통념과 악행을 뿌리뽑는 일이다."
조선시대 ‘보쌈’이라는 일종의 납치풍습이 있었다. 약탈혼, 즉 강제결혼 방식의 하나였다. 흔히 장가 못간 노총각이 처녀를 보에 싸서 납치해 결혼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절과부가 홀아비나 노총각을 보쌈해 과부처지를 면하곤 했다. 또 양반집에서 남편을 둘 이상 섬길 팔자라는 처녀 딸을 위해 총각을 은밀히 납치해다가 한번 동침시켜 ‘액땜’하고는 다른 남자에게 출가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보쌈 비슷한 ‘약탈혼’의 풍습은 다른 나라에도 많다. 정복자 칭기스칸도 어머니 호엘룬이 몽골판 보쌈을 당해 태어났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슬람 나라들과 아프리카 등에서 종종 그런 뉴스가 나온다.
‘보쌈’은 아무리 선의이든 절박한 사정이 있었든,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므로 명백한 원시적 강력 범죄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결행하고, 일부에서 ‘묵인’해 온 관행은, 어느 경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번만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통념이 바탕에 깔려있다. 다시 말해 여자든 남자든 한 차례 범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사람이 되고, 결국 인정받지 않느냐는, 강제적 체념과 이기적 범죄 합리화의 산물이다. 요즘 일부 젊은 층의 성범죄와 스토킹 등에서도 그런 의식의 흐름의 저류에 있다고 본다.
문제는 ‘한 번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인식과 행태가 비단 남녀 관계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게 옳든 그르든, 선이든 악이든 따지지 않고 무조건 저지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마치 보쌈하듯 해치우고도 뭐가 어떠냐는 식의 범죄적 인식과 언행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분노하다가도 은연 중 체념해버리는 ‘정의의 상실과 무감각화’ 현상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유린 한 뒤 궁궐터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동물원까지 만들어 버렸다. 정기어린 명산들의 정상에는 쇠말뚝을 박았다. “자, 이쯤 해놓으면 너희들이 대대손손 굴복하지 않고 어쩌겠느냐”는 악질 범죄자의 흑심이었다. 그들 노림수대로 체념할 뻔했지만, 총독부 건물을 과감히 헐고 경복궁 창경궁을 복원하여 민족 혼을 되살렸다. ‘한 번 저지르면 그만’인 통념에 철퇴를 가해 민족 정의를 바로 세운 사례다. 그런데 “한 번 저지르면~”의 범죄적 소산을 뿌리 뽑고 “~안된다!”는 정의를 되살린 일들이 얼마나 될까. 역사에서, 공동체에서, 개인의 일상과 인륜에서…
최근 ‘개혁’의 화두가 뜨겁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등 여러 분야가 대상이다. 개혁은 불법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켜켜이 쌓인 적폐를 혁파하고 쇄신한다는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무엇보다 ‘저지르면 그만’인 범죄적 악행을 근절하고 징벌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보면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속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삶이 무너지고, 사회가 뒤틀리고, 민주주의와, 정의와 선이 어그러졌는가.
독재와 사욕의 정치인들이 죄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패가망신 시킨 일들, 멀쩡한 기업을 공중분해 했고, 국토를 마구 파헤쳤으며, 역사를 거꾸로 돌렸던 일들까지. ‘나라를 통째로 보쌈한’ 범죄적 행태들. 그런데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발상이 검찰에서 나왔었다, “이미 저지른 걸 어쩌느냐”는 것이다.
검찰의 그런 망발은 그들의 통념이고 습성이었으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자의적 악행과 범죄들이 너무 많았다.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기도 했던…, 그들은 여전히 그 버릇을 팽개치지 못하고 혐의 조작과, 조직 이기의 선택적 수사에, ‘한 번 기소하면 무죄가 나와도 상관없는’ 기소 독점권을 휘둘러, 재판으로 3~4년을 고생하게 만든다. 검찰개혁은 그 못된 버릇을 고쳐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악습과 통념의 연장선에서 역시나 잠깐 감옥에 갔던 전두환과 그 일당은 지금껏 철면피한 언행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갓 재판이 끝난 이명박과 박근혜도 사면하자고 한다. 권력자가 ‘한번 저질렀으니 봐주자’는 개탄스런 통념의 무감각화다.
언론은 어떤가. 엄청난 비리처럼 떠들다가 사실이 아니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그걸 막자는 것이다. 처음 떠든 것처럼 아님이 밝혀졌으면 그 또한 크게 떠들고, 가짜와 거짓으로 피해를 입혔으면 합당하게 보상하라는 경고다.
최근의 선거에서 일부 후보자는 수많은 비리와 의혹이 나왔고 고발도 됐다. 하지만 이를 검증해야 할 언론은 극히 편파적으로 선택적 보도를 했다. 의혹을 선전하고 고발도 했던 정치권은 선거 가 끝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선거판의 언론 못지않게 정치인들의 ‘한번 저지르면 그만’, ‘당선되면 그만’인 습관적 고질병이다. 유권자들도 의례 그러려니 한다. ‘저지르면 그만’이 바로 악행이며 범죄라는 인식과 징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마 다음 선거에도 그런 양상일 테니, 어느 세월에 선거가 참 민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인가.
그렇다, 개혁은 뭐니 뭐니 해도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구석구석의 통념과 악행을 뿌리뽑는 일이다.
‘공정과 실리를 우선하는 MZ세대’ 어느 보수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공정’과 ‘실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양립 가능할지 혼란스럽다. 공정함과 실리는 양자택일은 아니라도 양립이 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보수 언론이 공정을 내세우는 저의가 궁금해진다.
그들은 젠더 문제가 가장 큰 이슈였다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20대 여성이 40대 남성과 함께 여당 후보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낸 것과 달리 20대 남성이 전통적 보수지지층인 60대 이상의 세대보다 높게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젠더 문제에 더 민감할 20대 여성보다 20대 남성이 젠더 문제로 표심을 바꿨다는 것인데 ‘안티페미니즘’ 성향이 비교적 강한 그들이 각성해서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기라도 한 것일까?
다른 이슈도 마찬가지이다. 부동산 문제에 공정하지 못해서라는 분석이 맞다면 부동산 문제에 훨씬 더 흠결이 큰 야당 후보를 지지할 수가 없다. ‘조국, 엘에이치(LH) 사태’ 운운도 동의하기 어렵다. 조국 사태가 문제라면 지난해 총선에서도 여당이 패배했어야 하는데 사상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고 20대도 마찬가지다. 엘에이치 사태가 권력형 비리가 아님을 20대가 모를 리가 없으니 더욱 그렇다.
본질은 2007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묻지 마 실리’이다. 대학에 있던 필자는 그 당시에 학생들이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 경제가 살아나 취업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 사실을 생생히 기억한다. 필자는 ‘현재도 경제지표는 좋다. 문제는 그 성과가 일부에게 치우치는 것과 아울러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이다’라고 말을 했지만 젊은이들뿐 아니라 기성세대조차 근거 없는 기대감에 차 ‘묻지 마 투표’를 했다. 이성이 작용할 여지는 전혀 없었을 정도였다. 그에 따른 선거 결과나 이후 실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부동산 정책 때문에 여당을 버리겠다는 사람들이 필자의 주변에 지천으로 깔렸는데 어디서 원인을 찾는가? 심지어 세금 때문에 ‘위장 이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쳤다. 국민은 피로감을 폭발시킬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현 정권을 골랐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이 정부의 개혁 의지가 꺾여 검찰개혁의 완성과 함께 언론개혁, 그리고 수요억제의 부동산 정책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기도 1년 정도 남았는데 이번 선거의 패배가 개혁에 결정타를 날릴까 심히 염려된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세워진 정권이니 명분상으로도 안 되지만 실리를 따져도 마찬가지이다. 함부로 타협하고 나선다면 산토끼는커녕 집토끼마저 잃을 수 있다. 이번 20대의 표심 변화가 보수 언론의 분석대로 ‘젠더’나 공정의 문제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처럼 눈앞의 이익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일본 사회당의 몰락이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1993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대승을 거두어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연립내각의 여당이 되었으며 1994년 6월에는 마침내 47년 만에 자당의 총리를 배출하며 기세등등하게 나아갔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은 사회당이 내건 가치를 훼손하였고 결국 다음 선거에서 사회당은 교섭단체도 결성할 수 없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이 바로 일본 공산당이었다. 사회당의 지지층은 좌우로 찢어졌고 좌측 지지의 상당수는 공산당으로 향했다.
정권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신념을 함부로 버리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사회당의 몰락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여당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개혁은 시대적 과제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이제 와서 적당히 타협한다면 실리적으로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 혹여 정권을 내놓더라도 180석이 넘는 개혁지지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 개혁이 계속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부활은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소생, 혹은 회생을 뜻하기도 한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당연히 놀랍고도 기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기적이다.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던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창에 찔려 온 몸의 피와 물을 쏟아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도 자신이 예언한대로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신비로움의 대상이다.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고 다시 살아났다는 구원과 부활의 섭리는, 전능한 신의 논리가 아니면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 세계에선 불가능한 생명의 부활이기에, 신성(神性)의 예수와 구원의 역사를 믿으면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부활신앙이 확증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부활을 기뻐하고 영생의 소망을 품으며 부활절을 축하하고 찬미한다.
비단 예수의 경이롭고 신령한 부활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사에서 흔히 접하는 부활이라는 단어는 반갑고 기뻐할 일들에 많이 쓰인다.
패가망신 했던 사람이나 가문이 다시 일어나 흥성하면 부활이라고 한다. 쫄딱 망했던 회사나 사업이 되살아나 번창하면 부활한 것이다. 한 때 날리던 선수가 형편없이 추락했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예전의 기량을 다시 뽐내는 것도 부활이라고 한다. 프로골프를 평정해 ‘황제’ 별칭을 얻은 타이거 우즈가 중년에 접어들고 몸이 고장나며 차츰 하위로 쳐지자 사람들은 이젠 끝났다보다 여겼다. 그런데 14년만인 2019년 상금 207만 달러를 거머쥐는 마스터즈 대회를 제패해 엄청난 부활의 환호를 받았다. 최근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그가 재활에 성공해 다시 부활하게 될지, 또 구름떼 갤러리를 몰고 다닐 수 있을지, 골프팬들은 궁금해 한다.
‘부활’의 어의(語意)가 지닌 긍정적인 의미 그대로 반갑고 좋은 부활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제발 부활하지 말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과 현상들 또한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요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 COVID-19 팬데믹이 중세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 그리고 사스와 메르스 같은 전염병의 재현이라는 사실은 익히 거론됐으니 차치해 두자.
40여년 전 광주에서 보고 겪었던 쿠데타 군인들의 무자비한 학살 망령이 미얀마에서 되살아난 것을 본다. 그런 비인간적인 만행에도 손을 쓰지 못하는 유엔이나 국제사회의 대립구도 역시 옛날의 되돌이 판 같다. 몸집이 커진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격화되는 대립상은 30여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였던 냉전의 부활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한동안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도 그렇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동키호테식 처신과 바이든 대통령의 ‘원칙주의’에다 ‘방해꾼’ 일본까지 끌어들이면서 다시 냉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참 답답한 분단민족의 현실이다. 백인 우월주의와 유색인종 차별을 격화시킨 ‘거짓선동’ 정치인 트럼프가 대선 패배 이후 재기와 부활을 노린다는 소식은 전혀 반가울 수가 없다.
태평양전쟁의 패퇴로 숨이 끊어졌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질긴 생명력으로 되살아 난 것 또한 우리를 불유쾌하게 만든다. 독도문제, 군대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동해문제, 무역제재와 국제기구(WTO) 수장 반대…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졸렬함에서 한때 고개를 숙인 듯 했던 저들의 극우적 마각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부활의 국제적 폐해를 본다.
역시 해방이후 지리멸렬했던 친일 세력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이승만의 반민족적 ‘공로’로 부활한 것은 한국 근대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말았다. 친일의 독버섯은 민족정신을 오염시켰고, 대대로 특권과 이권을 누리면서 나라를 병들게 하고 국민을 이간질했으며 분단대결을 심화시켰다. 민주주의를 압살한 연이은 개발독재 군사독재와 토건비리 · 정경언 유착, 그리고 국정농단에 헌정유린까지… 동학과 삼일정신, 민주항쟁의 기개로 무장한 깨시민들이 분기하여 이제 겨우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들 독버섯의 속성과 카르텔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근 선거열기로 뜨거운 한국의 정정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그 슬프고 짜증나는 부활현상에 답답해진다. 사람들은 다시 저들이 설치는 세상으로, 옛날 그 시절의 부활을 원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