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인생이 반전의 연속이려니

● 칼럼 2018. 4. 11. 13:05 Posted by SisaHan
몇 해 전 어느 정당의 회의실 뒷 벽면에 ‘정신 차리자, 한 순간 훅 간다’는 문구가 등장한 적이 있다. 얼마 후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써 붙인 그대로 되었으니, 적중한 ‘백보드의 명 예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던 것이, 미투 운동이 활발한 요즘 ‘한 순간 훅 간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어서다.
차기 대통령 후보군으로 촉망받던 인물이 절제를 못한 ‘욕망의 덫’에 걸려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날아갔다. 서울시장을 하겠다고 의기충천하던 한 인물은 7년 전의 ‘입맞춤 미수사건’으로 졸지에 ‘자연인’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에게 ‘제왕같은’ 존재였다는 잘 나가던 연예인 교수는 돌연 목숨을 끊어버렸고, 평생을 조연에 머물다 ‘근검한’ 일상이 알려진 덕에 겨우 주연급 반열을 넘보게 된 한 방송인은 10년 전의 추행 한 건에 치명타를 먹고 갑자기 조연조차 못하게 되어 동정을 사기도 한다.

‘급전직하’의 반전은 ‘미투’에서만 보고 느끼는 게 아니다. 겨우 석달 만에 한반도는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급변의 소용돌이를 연출하고 있다. 폐쇄와 은둔의 왕국, ‘벼랑 끝 전술’로 생존을 담보하던 북녘의 돌변은 비단 남북간 소통뿐 아니라 미국과 마주앉게 되고, 중국을 전격 방문해 놀라게 했다. 부인을 동반한 북의 지도자가 언제 국제무대에 등장한 적이 있던가, 현란하고 요염한 걸그룹의 공연을 보고 싶었다며 그들과 손을 맞잡고 사진도 찍는 모습과, 취재 방해를 정중히 ‘사죄’하는 전례없는 일까지, 달라진 저들의 파격은 언제 핵무기와 유도탄으로 위협하던 때가 있었나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사람들 뇌리에 ‘한방에 훅 간다’ 혹은 ‘전혀 예상못한 급변사태’ 라는 느낌으로 와닿는 이들 현상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운동이나 첨예한 대결구도였던 북핵문제 등 비상한 관심을 끄는 사안들이어서 더욱 강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돌연변이적 현상은 우리들 일상 도처에 널려있고,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공연히 생겨난 조어인가. 지난 밤 건강한 모습으로 잠자리에 든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세상으로 가버린 충격적 경우의 수는 결코 제로가 아니다.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지진은 없다. 느닷없는 천재지변으로 빈털터리가 되고 목숨까지 잃는 사례가 드문 일은 아니다.

내일 일을 미리 아는 사람은 없다. 아니 몇 분 몇 초 후의 일도 잘 모르는 게 우리들 인간이다. 갑자기 졸도하기도 하고, 화장실을 달려갈 일도 생기고,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화재로 폭망하는가 하면, 주식 폭락으로 패가망신하는 일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날벼락’ 같은 일들은 ‘미투 돌풍’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어도 항상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 사람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허망한 존재들인가. 전혀 알지 못하고 대비도 할 수 없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를 구를 수가 있고, 저세상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물론 거꾸로 추락만이 아니라 급상승하는 벼락출세나 횡재의 인생역전이 찾아오기도 한다지만.
성경에도 ‘한 순간에 훅 간’ 사례가 등장한다. 구약 에스더서의 하만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권력도 재물도 감히 대항할 자가 없는 글자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대신이었다. 왕권을 넘볼 정도로 등등한 권세에 자만한 나머지 그는 왕을 살린 숨은 공신인 줄도 모르고 왕후 에스더의 인척인 모르드개를 매달고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무리수를 꾀한다. 그의 교만과 이기심, 안하무인의 악행은 에스더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순식간에 급반전, 다음 날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나무에 오히려 자신이 매달려 죽는 비참한 멸족의 참화를 당한다.

하만의 일화에서 떠올리는 반전도 요사이 빈번한 ‘한 방에 가는’ 사례들에서 느끼는 공통의 인생무상과 허욕의 결말이다. 너도나도 성공에 목을 매달고 출세하겠다며 발버둥치는 세태, 남 보다 위에 앉으려 깔아뭉개고, 더 갖고 더 벌고 더 즐기려고 기를 쓰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욕망과 가식과 이기의 끝은 어디인가. 한 순간 하루 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질 수 있는 인생들임을 잊은 채… 그렇다고 기 죽어 무기력하게 요행수만 바라며 살 일도 아닐 터인즉, 공연히 과욕을 부리거나 허세를 좇지 않고 언제든 호사다마(好事多魔)에 청천벽력도 있다는 심적 여유와 평상심(平常心), 그리고 비움의 각오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저 바르고 겸허하게 늘 삼가며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받아들이는 삶의 지혜가 절실한 것 같다.

< 김종천 편집인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통령 개헌안’ 초안을 만든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몇가지 쟁점 사안의 여론 수렴을 위해 3월 초순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열었다. 4개 권역별로 시민 200명씩을 뽑아 기본 자료를 제공하고 한나절 토론을 진행한 뒤 토론 전후의 의견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정책 결정을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열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개헌 주체는 국민’이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시민이 직접 깊숙이 참여한 건 놀랍게도 이 토론회가 거의 유일하다. 국회가 끔찍이 싫어하는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과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권 유지’(국회의 총리 선출권 반대)라는 대통령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이렇게 결정됐다. 국회 개헌특위가 1년간 활동하며 시·도별 토론회를 열긴 했지만, 정치인·학자들이 주제발표와 토론을 하는 세미나 형식이었다.


토론을 전후한 시민들의 의견 변화를 살펴보는 건 흥미롭다. 국회의원 임기 중에 국민이 그 직을 중단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제’에 대해선 토론 전과 후 모두 찬성 의견이 70%를 넘었다. 하지만 토론 전에 비하면 토론을 거친 뒤에 ‘반대 의견’이 10%포인트 늘어난 게 눈에 띈다. 반면에 국무총리 선임 방식에 대해선,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국회의 총리 선출’에 반대하는 의견이 토론 전보다 토론 후에 월등히 높아졌다. 토론 전엔 절반 못 미치는 시민(48.3%)이 ‘국회의 총리 선출’에 반대했지만, 토론 이후엔 그 비율이 68.3%까지 솟았다.
국회가 총리를 선출하면 장관 제청권을 총리가 쥐고서 사실상 이원정부제와 같은 형태로 권력이 양분될 수 있다. 반대로 총리 임명권을 지금처럼 대통령에게 주는 건, 앞으로도 국무총리를 대통령의 바람막이 또는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엔 보기 힘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 정치면엔 ‘방탄 내각’이니 ‘친위 내각’이니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극단적 예시이긴 하지만, 두 사례 중 어느 게 더 바람직한가. 숙의 토론의 결과는,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제왕적 대통령’의 손에 권력을 쥐여주는 게 국회에 권력을 넘기는 것보다는 낫다는 시민들의 판단을 담고 있다. 국민의 국회 불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난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안을 정식 발의했다. 이제 공은 다시 국회로 넘어갔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다.
현재 의석 분포에서 대통령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을 내세운 3일간의 개헌안 설명이 ‘정치 쇼’라는 야당과 보수언론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대통령 발의가 의미있는 건, 1년 넘게 물밑에서만 떠돌던 ‘개헌 문제’를 국민의 관심권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때문이다. 3일간의 ‘정치 쇼’로 개헌안 주요 쟁점이 비로소 국민의 시야에 명료하게 들어왔다. 국회와 헌법을 무시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정식 발의하지 않았다면 ‘개헌’은 지금도 여의도 의사당 주변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개헌안과 관련해 국회가 극적인 타협을 이룬다면, 그 고리는 아마도 ‘국회의 국무총리 추천권’ 문제일 것이다. 정부형태의 핵심인 총리 선임 방식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토지공개념을 비롯해 다른 쟁점 사안들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타결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국회의 ‘총리 추천제’를 단지 여야 정치협상으로만 풀려고 해선 곤란하다. 그런 식의 타협은 여론이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 국회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서, 이 사안에 관한 사전 정보를 제시하고 시민 의견을 수렴하는 건 어떨까 싶다. 선거구제 개편을 비롯해 국회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안들과 연계해서 ‘총리 추천제’를 시민 토론에 부치는 방식이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에 관한 의견이 토론을 거치면서 상당히 변했듯이, 충분한 정보 제공과 토론은 어느 쪽이든 의미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8일 공개된 한국갤럽의 ‘주요 기관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국회 신뢰도는 15%였다. 조사 대상 17개 기관 중 최하위다. 행정부(41%)와 비교해선 물론이고 개혁 1순위로 꼽히는 검찰(31%)에 비해서도 월등히 낮다.
언제까지 정치가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댈 것인가. 국회와 정치권은 지금 당장 ‘국민 뜻’에 기반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 박찬수 - 한겨레신문 논성위원실장 >


[칼럼] ‘촛불시위’ 앞에 선 아베

● 칼럼 2018. 4. 11. 13:00 Posted by SisaHan

일본 공문서 조작 스캔들에 대한 국회 집중 심의가 열렸던 지난달 19일. 저녁 7시께가 되자 중의원회 회관 주변 인도를 시민들이 가득 메웠다. 인원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 1000명은 넘어 보이는 인파가 아베 신조 정부의 공문서 조작 스캔들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모리토모학원이 소학교를 설립한다며 국유지를 정부 감정가(9억5600만엔)의 14%에 불과한 1억3400만엔에 사들인 곳인 오사카 도요나카시의 기무라 마코토 시의원이 “아베 총리는 지금 당장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시민들은 “그렇다”, “바로 그거다”라며 호응했다. 기무라 시의원은 2015년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서 강행 처리한 안보법제 제·개정 이야기를 꺼내면서 “안보법제 통과 때도 헌법학자들이 (안보법제가) 모두 위헌이라고 했는데, 아베 총리는 ‘내가 괜찮다면 괜찮다’는 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무라 시의원의 발언에서 한때는 ‘아베 1강’이라 불릴 만큼 견고해 보였던 아베 정부가 위기를 맞은 이유는 공문서 조작 스캔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2일 재무성이 모리토모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매각했다는 의혹과 관련한 내부 공문서 14개에서 300곳 이상을 고쳤다고 보도하면서 아베 정권의 위기가 표면화됐지만,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아베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공문서 조작을 계기로 분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공문서 조작 항의 시위에서는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한국의 촛불시위를 언급하는 발언도 자주 들린다. 19일 시위에서도 “한국에서 촛불시위로 부정부패에 휩싸였던 정부가 무너졌다”, “옆나라 한국에선 전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갔다. 아베 총리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이전부터 한국 촛불시위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심포지엄 등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신문사 소속이라고 소개하면 촛불시위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가 추진한 미-일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 30만명이 운집한 적이 있지만, 80년대 이후 일본에서 대규모 시위는 드문 일인데다 촛불시위가 정권 퇴진까지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에서도 한국의 촛불시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베 총리는 공문서 조작 스캔들로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야당인 자유당의 야마모토 다로 의원이 2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총리 언제 그만둘 겁니까?”라고 묻자, 아베 총리는 “(지난해 10월 중의원) 선거에서 신임을 얻었다. 약속한 것을 추진하는 게 나의 책임이다”라며 사임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자민당 파벌인 ‘누카가파’의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다케시타 와타루 의원은 “솔직히 말해서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라는 존재가 정권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리토모학원 스캔들) 의혹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과 폐를 끼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아베 총리 본인과 정권 차원의 문제와는 선을 그으려는 발언이다.


아베 총리가 공문서 조작 스캔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각할지 아니면 돌파구를 찾아서 장기 정권을 이어갈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아베 정부가 국회 앞과 신주쿠역에서 모여 정권의 오만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시민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시민의 힘이 아닐까.


< 조기원 - 한겨레신문 일본특파원 >


[1500자 칼럼] 그게 뭐길래

● 칼럼 2018. 4. 4. 11:02 Posted by SisaHan

성형전문의 자격을 갖고 있는 우리 가정의는 가끔 내게 묻는다. “혹 보톡스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 비서에게 문의하세요”. 신 세대와는 달리 성형에 대해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나는 보톡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이 생긴다. 그런 나도 캐나다에서 태어나 서양인과 결혼한 딸에게 쌍꺼풀 수술을 제안했다가 강한 항변을 되받은 적이 있다. 자기 남편은 현재의 동양적인 자신의 외모와 성품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며, 불가피한 결함이나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면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 곧 최선의 자기모습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었다. 딸도 어렸을 때 서양 아이들로부터 일자로 찢어져 끝이 살짝 올라간 ‘Chinese eye’로 인해 놀림을 받았다. 다만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후에는 바로 그 점이 한국인인 자신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양인의 눈을 굳이 서양인의 눈으로 바꿔야 할 명분이 없다며 잘못하면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잃기 쉽다고 말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본 TV 단막극이다. 제목이나 작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내용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얼굴 생김새를 가진 청년이 일류대학을 나왔으나 번번히 직장 면접에서 떨어졌다. 거칠게 생긴 못난 외모가 문제였다. 그는 못난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죽고 싶을 만큼 컸다. 결국 자살 대신 성형을 결심하고 미남의 남자로 변신하고 만다. 그 후부터 그의 삶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좋은 직장도 얻고, 미모의 여성과 결혼도 하고, 아이 아빠도 된다. 그런데 그들의 아이가 이 청년과 그의 아내를 전혀 닮지 않은 데 문제가 생긴다. 의심은 서로간에 불신을 낳아 끝내 이혼을 결심하기에 이르는데 우연히 길에서 한 성형의사를 만남으로서 그 답이 풀리고 만다. 청년은 물론이고 아내 역시 성형을 했던 것이다. 서로 상대방을 향해 “당신, 성형을 한 거야” “ 당신도?…” 외치며 자신들을 전혀 닮지 않은 갓난아이에게도 성형을 시켜야 할지 말지 난감해하는 내용으로 끝난다. 오늘까지도 시대적, 사회적 이슈를 날카롭게 지적한 좋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멋진 외모가 한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보통사람은 생김새가 험악하거나 얼굴이 못생긴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기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외모나 결정적인 신체적 결함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실제로 우린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선천적 장애인을 돌보다 결혼하는 건강한 여인과 남성을 보면 참으로 감동을 얻는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나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중환자와도 결혼하는 날개 없는 천사들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어 영혼의 합일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라 여기고 있다.

요즘은 성형이 유행이 된 시대다. 고출력 레이저로 피부관리와 피부치료도 대중화 되었기에 어쩌면 이런 글을 쓴다는 자체도 시대에 뒤떨어진 건지도 모른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성형수술로 인한 크고 작은 범법자까지 생겨났다. 너도나도 무분별한 성형을 함으로서 그 부작용이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까지 등장한 것이다. 가짜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고, 부주의한 약물로 인한 수술 후유증으로 생명을 잃거나 일생을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시술이 불가피한 재수술로 이어져 급기야 성형중독에 빠지게 된 경우도 많다. 결국 본래 모습보다 훨씬 못한 성형괴물이 되는 폐해가 뒤따름은 기정사실이다. 범법자가 성형수술로 얼굴을 변형시켜 추적하는데 시간을 소모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5년간이나 추적해온 범인을 바로 눈 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는가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 중 하나지만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 만약 아름다움 자체가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분명히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은 주나 곧 한계점에 이르고 말 것이다. 현대는 개성의 시대라 예전과 달리 외모가 출중하지 않아도 자기만의 테크닉으로 연예인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자신의 개성을 살리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진정 고민해야 할 시대에 우리가 서있다. 이 모습 이대로 자신있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외모 콤플렉스를 버리고 내면의 힘(만족, 평안, 절제)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지 싶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