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다름과 잘못

● 칼럼 2018. 6. 12. 16:52 Posted by SisaHan

오랜 만에 만난 지인이 내게 넌지시 권한다. ‘구자억 목사’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봐요. 재미있을 걸요.” 얼핏, 처음 듣는 이름이라 쇼맨십이 강한 설교로 유명한 목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그는 뽕짝(트로트)가수 목사라 한다. 어떻게 평신도도 잘 부르지 않는 뽕짝을 목사가 대중 앞에서 부르며 교단에 설 수 있을까? 일단 인터넷에 올라온 그의 노래도 듣고, 목사로서 왜 뽕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도 알아보고, 설교도 여러 편 들어보았다. 확실히 날라리 목사는 아니다.

구자억 목사는 일반 뽕짝 가수와는 다르다. 곡명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뽕짝 노래지만 가사는 복음적으로 바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왜 목사로서 세상과 구별되지 못한다는 오해와 거룩한 강단을 더럽힌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는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쳐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감리교 소속 목사로 안수도 받았다. 전도사 때, 청소년들의 열광적인 찬양예배를 문 밖에서 서성대며 흥미롭게 바라보는 장년과 노년층을 목격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오늘 날 교회 문화가 젊은 세대에 치중하여 어르신들이 소외된 것을 보고, 그들과 비신자들을 위한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른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교회 울타리 안에만 있지 말고 울타리 밖의 험난한 세상살이(고통 받고, 병들고, 위로가 필요한)에 지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봉사 대부분이 자족적인 교회 안 사역에만 있기에 자신은 교회 밖의 사역을 만들어 예수그리스도와 사람 사이에 이음새가 되는 목회를 하겠다는 꿈을 펼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수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45년째 서양문화 속에 살면서도 아직도 예배만큼은 보수적 정서를 선호하고 있다. 나름대로 목사에 대한 선입견도 철저하다. 그런 면에서 뽕짝 가수 목사는 큰 실망을 준다. 아무리 신앙 안에서 소신이 뚜렷하다고 해도 평신도인 나도 뽕짝을 멀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목사가? 경박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요즘 추세가 클래식보다 가요가 훨씬 대중화된 점을 고려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과거의 문화와 가치만을 고집하는 단단한 벽을 한번 허물어 보려고 한다.

한때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교회생활 중 나를 가장 낯설게 만든 것은 찬양이었다. 기존 찬송가 대신 복음성가를 주로 불렀고 가끔 율동도 했는데 내가 자라온 예배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찬송가를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그것도 조용한 반주로 들을 때 가장 감동을 받는 나였으니 교인 등록을 앞두고 망설일 수뿐이 없었다. 이 갈등에 대해 상담을 했는데 이런 설명을 들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객은 모두 한 코스로만 올라가지 않는다. 여러 코스를 통해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자기와 다른 코스로 올라왔다고 잘못된 등산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못(Wrong doing)과 다름(difference)을 구별하라는 조언이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름을 받아들이는 훈련도 필요하다는 설득력에 낯선 예배에 익숙해지려 노력했으나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다만 바르게 살아가는 분별력의 잣대로 ‘잘못과 다름의 구별’이란 명제가 가슴에 남았을 뿐이다.

뽕짝 가수 구 목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세상이 폄하하는 뽕짝이 경건한 예배와 강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가능하리라. 한때 내게 낯설었던 복음성가나 흑인교회의 열광적인 찬양과 춤을 곁들인 예배도 지금은 부담 없이 받아들여지듯 말이다.
오늘도 많은 기독교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고 혐오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구 목사에게 응원은 못해도 돌은 던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오랫동안 염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지 8일 째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부터 설레임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한달 이상의 기간 동안 무려 800km가 넘는 길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난히 소화 할 수 있을지, 숙식은 매일 어떻게 해결하며 하루의 일정은 어떤 식으로 조정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물론 순례길에 대한 책도 몇 권 읽고 여러 사이트를 통해 정보 수집도 많이 했지만 그저 이론에 불과 할 뿐 실전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드디어 첫 날, 순례길 사무실에서 전 구간을 세분화하여 짜여진 일정표와 각 지역에 산재한 숙소리스트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자원 봉사자와 함께 순례자 여권에 첫 스탬프를 찍으면서 우리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다. 조가비 문양따라, 노란 화살표 따라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그 길에 첫 발을 내딛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십여 명의 초보 순례자들은 어디로 흩어져 갔는지 바람부는 언덕길을 우리 부부만 호젓하게 올랐다.

침대 윗칸에서 들썩거리는 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었다. 잠을 좀 더 청하려는데 여기저기서 바스락거리는 소리하며 일부는 배낭을 메고 살그머니 문을 나선다. 깜깜한 신 새벽에 길을 나서는 사람들,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다. 나도 잠자기를 포기하고 단숨에 일어나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짐을 꾸린다. 한 일주일 간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환경에 적응하는 눈이 열린 듯하다.
다국적 사람들이 모인 주방에서 시리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준비해 둔 점심을 챙겨 대문을 나선다.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하여 옷깃을 여미는 사이 “부엔 까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 하며 몇 사람이 우리를 스쳐 간다. 채비를 마친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길을 잡는다. ‘시작이 반’ 이라는 옛말이 어쩜 이리도 명쾌한지 일단 시작하고 나니 그 많던 걱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로지 걷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 길을 꼬불꼬불 돌아 산길로 접어들자 가까운 능선위로 검붉은 해가 막 떠오른다. 오늘 하루도 저 태양처럼 뜨겁게 살기를 다짐하며 한 컷 담는다. 우리의 뒤를 따르던 필립 씨도 월출 광경에 연신 셔터를 누르며 흥얼거린다. 그와는 며칠 전 비 내리는 피레네 산맥 줄기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중 산행을 함께 한 처지라 그의 환호에 충분히 공감한다. 길 위에선 조그만 인연이 긴 호흡으로 이어져 동행이 되고 때론 동지가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 한다.
일회용 밴드로 물집 잡힌 양 발을 도배하고 나선 이 아침도 마음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큼하게 걷는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내려야 하는지 같은 고답적인 물음은 시간이 해결 해 주리라 믿고 소풍 길 가듯 밀밭과 포도밭 사이를 걸으며 동행들과 담소도 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를 향하여 30킬로미터 남짓 걸었다. 얕으막한 산을 몇 구비 넘고 하산 길도 꽤나 어려웠는데 무난히 잘 마쳐 뿌듯하다. 갈 길이 멀어 가능하면 무리하지 않으려하나 조용한 숙소를 찾다보니 발을 꽤나 고생시켰다. 다행히 산중턱 조그만 성당에 숙소를 잡았고 저녁 식사는 십여 명의 순례객과 성당 관계자들이 함께 만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다락방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식대로 기도를 드리고 앞서간 순례자들이 남긴 편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낭독했다.
‘날이 거듭될수록 다리는 튼튼해지고 가슴은 더 뜨거워 질 것’ 이라는 멘토가 진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내일을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듯하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

● 칼럼 2018. 5. 23. 13:10 Posted by SisaHan

요즘 아이들은 꿈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똑같은 질문을 자꾸 받으면 정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진짜 꿈을 이야기하다가(‘마법학교에 다니고 싶다’) 점점 어른들의 기대에 맞추어 대답을 바꾼다(‘해리 포터를 뛰어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아이들의 꿈의 세계를 이렇게 식민화하는 일이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한술 더 떠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려면 초등학생에게 창업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진로를 일찍 결정하는 것이 과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까? 4차 산업혁명이 예고하는 변화의 핵심은 직업구조의 전면적인 재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직업의 40%가 사라질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다. 그 말은 특정한 직업을 준비하는 데 청소년기 전체를 바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라는 뜻이다.


만일 어떤 학생이 통역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 내내 준비했는데, 졸업할 무렵 이 직업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장래 희망을 3년 내내 통역사로 적어 냈고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도 모두 거기 맞춰서 했다. 그가 뒤늦게 진로를 수정한다 해도, 이런 학생부를 가지고 ‘학종’으로 원하는 과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평생 5~6개의 직업을 갖게 되리라고 한다. 현재의 진로교육은 그중에서 첫번째 직업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러 나라는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우리와 크게 다르다. OECD 국가들의 일반적인 전략은 기초교육, 특히 수학,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성인의 재교육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수학 시간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트래킹이 약화되고 있다. 트래킹(tracking)이란 실업계와 인문계, 영재 코스와 일반 코스 등으로 트랙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트래킹은 학업성취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독일은 2000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냈는데, 인문계와 실업계의 구별이 너무 일찍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폴란드는 15세에 이루어지는 트래킹을 16세로 늦추는 것만으로도 PISA 점수가 크게 올랐다. 핀란드는 영재코스를 따로 만들지 않고 앞서가는 아이가 뒤처지는 아이를 도와주게 하는데, 덕택에 핀란드 아이들은 다들 수학을 잘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로, 수학 시간을 줄이고(현재 OECD 국가 중 한국이 제일 수학 시간이 적다) 트래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수능에서 기하를 뺀 것이 그 예다. 다른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기하를 배우는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만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한 교육부의 대답은 이렇다. “수학은 똑똑한 애들만 하면 된다.” 사실 수능은 ‘영재 트랙’에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학생들을 위한 제도로 바뀐 지 오래다. 수능을 치지 않는 영재고 학생들은 이러나저러나 기하를 공부할 것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1%의 영재가 99%를 먹여살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디 그들이 이 말을 한 사람이 이건희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수학 공부를 1%의 영재에게 맡기는 한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기술관료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최종 심급에서 ‘삼성의 지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핀란드가 어떻게 노키아 없이 살아남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 김현경 - 문화인류학자 >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차녀 조현민씨의 ‘물컵 투척’ 사건이 세간에 불거진 지난달 13일 이후 한달 동안 쏟아진 회장 일가의 비리 행태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업무방해, 폭행, 밀수, 수백억원대 상속세 탈루에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를 불법 채용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
검찰과 경찰, 관세청, 국세청에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까지 조사에 나선 배경이다. 회사 직원들까지 총수 일가 퇴진 운동에 나섬에 따라 조 회장은 리더십을 상실한 지경에 빠졌다. 조 회장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야 할 시점이다.


정부 당국의 전방위적인 조사 못지않게 조 회장 일가 쪽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은 내부 직원들의 공공연한 반발이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지난 4일 1차에 이어 12일 저녁 2차 촛불집회를 열었다. 주말이고 궂은 날씨였음에도 300명 넘게 모여 총수 일가 퇴진을 촉구했다. 대한항공은 물론, 진에어와 한국공항, 인하대 등 한진그룹 여타 계열사 직원들도 가세해 외연은 더 넓어졌다.
외부 시민들의 호응이 커짐에 따라 직원들은 3·4차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업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왕의 행적만큼이나 경악스러운 것은 불거진 사태에 대한 조 회장 일가의 느슨한 인식과 태도이다. 조 회장은 지난 10일 한진 계열 중 가장 작은 덩치의 진에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나마도 사내이사직은 계속 유지하기로 해 ‘꼼수 사퇴’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한진그룹을 통해 내놓은 ‘대리 사과’도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영상으로 확인된 일부 폭행 사실만 인정했을 뿐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다.


대한항공은 직원들의 땀과 정부 지원, 국민 성원 덕분에 세계적인 항공사로 성장했다. 조 회장 일가는 여러 이해당사자들 중 한 축(주주)의 일부일 뿐이다.
대한항공의 기업가치가 더 추락하기 전에 조 회장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일가가 모두 물러나고 독립된 전문경영인에게 경영 쇄신을 맡겨야 한다. 꼼수 사퇴로 당장의 난관을 피해 가려는 얄팍한 주판알 튀기기 식 태도 또한 버리는 게 더 큰 곤경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2선으로 잠시 후퇴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잠잠해진 여론을 틈타 다시 복귀하는 일은 선대 조중훈 회장 시절의 구태로 그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