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마초문화와 #Me Too

● 칼럼 2018. 3. 6. 19:47 Posted by SisaHan

대학과 군대를 마치고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예상치 못했던 딜레마가 기억난다.
당시만 해도 선배를 따라 도제식(徒弟式) 훈련을 받아야 하던 시절이었기에, 첫 시련은 체질 자체를 거친 모습의 ‘진짜 기자같은 모습’으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신문기자로 필명을 날려보겠다는 의욕과 매섭고 날카로운 기사를 써서 불의와 부정을 들춰내 사회정의 구현의 첨병이 되겠다는 병아리 기자의 멋진 포부는 아직은 먼 나라의 순박한 무지개 꿈이었다. 당장 쏟아지는 미션들에 허덕이며 “야 임마, 그 정도 밖에 못해!”라는 선배들의 질책과 주눅도 그랬지만, “기자는 그렇지 않아?”식의 기자라는 직업인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단정적이고 정형화된 시각에 당황하며 수습기자로 밤낮없이 뛰어야 했으니 정말 정신없고 고달팠던 기억이 남는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흔히 “기자는 날렵하고 치밀하게 취재하며, 두둑한 배짱으로 취재원을 얼르고 달래는데 능숙할 뿐더러 자료를 빼내는 수완이 탁월하고, 글을 잽싸게 잘 쓸 뿐만 아니라, 술도 잘 마시고, 음담패설에 노는 데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는 ‘만능 인간상’이 유능한 기자의 등식처럼 회자되었다. 그렇지 못하면 ‘무능한 낙오기자’처럼 보이게 되니, ‘강짜 기자모습’ 구현이 수습시절 기자들에게는 정말 시급한 성취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심야나 새벽잠을 설치며 뛰쳐나가 일선 경찰서나 검찰청을 오갈 때는 험상궂게 생긴 큰형님 뻘 강력계 형사 혹은 검사들과 어색한 반말 수작에 젖먹던 용기까지 짜내고, 일 잘하는 기관장 공연히 다그쳐서 정보나 자료를 얻어내면 선배들 앞에 의기양양해 하는 범새끼 기자들로 희열을 느끼며 커가는 것이다.


문제는 만년 서생타입에 비윗살도 없고, 동료는 물론 후배에게도 심한 말 한번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는 ‘본질’ 이 쉬이 바뀔 리가 없어 정말 큰 고통과 심적 갈등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용하게도 그런 시절을 견디고 후배들이 늘어날 때쯤 되면서는 기자사회의 인식과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점잖으면서도 학구적인 기자들이 많아지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다행이랄까. 그래서 막말이 없어도 일하는데 큰 지장은 없게 되고…. 그럼에도 ‘마초적 기자상’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전히 저변에 흐르고, 지금도 사람들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그런 강성의 거친 체질, 마초적 스타일이 요구되고 환영받고 고착화된 것이 비단 언론계 뿐인가. 크고 작은 기업의 회사원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상사와 부하가 존댓말로 업무를 보고 서로 존중하고 받들며 일하는 직장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상사는 유약해선 안된다. 부하를 인격으로 유순하게 다루면 무능한 리더요 때로는 부하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다고 느낀다. 실제로 ‘무능해 보이는’ 윗사람을 무시하고 머리 위에 올라서는 일들도 비일비재하다. 범죄 피의자들을 다루는 경찰이나 검찰처럼 환경 자체가 거칠고 힘있는 기관일수록 ‘마초기질’은 권장된다. 최근의 성추문들도 그런 풍토에 연유한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거칠고 우락부락한 ‘호방 스타일’로 분위기를 휘어잡는 사람이 유능한 리더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인 현실에서 윗자리의 힘을 가진 갑의 사람들은 그에 충실하지 않으면 도태를 걱정해야 한다. 그 강성이 실력이 출중하고 능력이 탁월한데서 출발한다면 별 문제될 게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서 허장성세로 군림하려다 보니 비정상적인 상하의 인간관계, 비인격적인 위계질서와 혼탁한 직장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거기서 무리한 언어폭력이 나오고, 억압과 갑질의 풍토가 자리잡고, 남녀를 불문한 음담패설에 성적인 언행의 수위가 높아져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무감각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오랜 사회구조와 관습의 문제에 대한 도전으로도 보인다. 무조건 선배나 윗사람이라고 혹은 힘있는 권력자라고 관용하는 습성, 어떤 직업인에 대한 근거없이 고착된 정형의 이미지를 깨려는 거센 파도일 수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마초적 인간상을 갖는 게 당연하다’는 통념에 대한 반격이요 비정상과 불평등을 향한 통절한 외침으로 여겨진다.


요즘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투’(Me Too) 고발에,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과연 자유로운 분야나 직장이 있겠는가. 여성은 다소곳하며 순종적이어야 하고, 남성은 강한 지배자 체질을 갖춰야 한다는 오랜 관념과 관습, 여전히 ’유리천장‘ 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은 환경에도 그 근인(根因)이 있다고 본다면, 사회전반의 ’마초 리더쉽 철학‘을 뜯어고치고 무력화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 최종적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 김종천 편집인 >


이명박 전 대통령(MB) 소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검찰은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놓고 한창 여론 수렴 중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13일 실시한 정례여론조사에선 국민의 74.2%가 구속에 찬성했다. 검찰은 그가 ㈜다스의 ‘실주주’라고 이미 못박았고,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빼돌린 김백준 전 기획관 공소장엔 그를 ‘주범’으로 표시했다.


원세훈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가 정치·선거에 개입하는 과정에도 그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은 ‘에스엔에스(SNS)의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2011.11.8 작성) 문건으로 여당의 선거운동 방법을 제안하고 ‘10·26 재보선 선거사범 엄정처벌로 선거질서 확립’(2011.11.7 작성)해야 한다며 검경의 야당 압박 방안까지 청와대에 올렸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 야당 단체장들을 규탄하는 우익단체 집회나 광고도 배후조종했다. 하나같이 청와대에 보고하며 진행한 일들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문화·연예계 인사 퇴출 공작도 청와대 민정·홍보수석의 깨알지시를 받고 진행했다. ‘일일 청와대 주요 요청 현황’에 따라 ‘브이아이피(VIP) 일일보고’ 한 기록까지 남아 있다. 과연 엠비가 몰랐을까.
그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며 반발했다. 특수공작비 10억여원을 빼돌려 ‘김대중·노무현 비자금’ 소문 추적하고 ‘김대중 노벨평화상 취소 요청’ 공작까지 벌인 게 원세훈 국정원이다. 노 전 대통령 표적 세무조사에 이은 표적수사가 이명박 청와대 재가 아래 진행됐다면 두 공작도 엠비에게 보고됐다고 보는 게 상식에 맞는다. 2012년 대선 때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까지 여당에 보내 색깔론 소재로 써먹었다.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심리전단의 사이버 음해까지, 할 수 있는 공작을 다 동원했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먼저 ‘정치보복’이란 말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스가 100억원 이상 별도 비자금을 조성했다니 실소유주인 엠비에게 횡령·탈세죄가 적용될 수 있다. 소액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140억원을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 소송비용까지 재벌사에 대신 물렸다. 그의 행태로 보면 사면권으로 거래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어 보인다. 간첩 잡으라는 국정원 특활비가 가족들에게 흘러간 정황도 뚜렷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20년간 온 국민을 속여온 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1992년 전국구 의원 때부터 총선, 서울시장 선거, 대통령 선거까지 최소한 네차례 이상 가짜 재산등록으로 온 국민을 속였다. 다스뿐 아니라 언론 추적보도로 드러난 차명 부동산도 여러건이다. 지금까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소송으로 틀어막았다. 비비케이 수사도 넘겼으니 이번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수 언론·야당까지 정치보복이라며 자기편 들어줬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제 가면이 벗겨지고 벌거숭이가 됐는데도 임금님만 모르는 것 같다. 청와대 시절 참모들만 연일 불러들여 괴롭히고 있다. 법대로 하겠다며 ‘차명재산 관리인들이 거짓말한다’는 논리로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이미 구속된 부하들에게 책임 떠밀고 혼자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이다. 법대로 하겠다면 그렇게 해줄 수밖에 없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 1258명이 법원에 넘겨져 대부분 벌금형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일부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판에 시달리고 있다. 임기 만료 25일 전 최시중·천신일씨 등 측근까지 셀프사면하면서도 촛불시민들은 끝까지 보복했다. 그게 엠비 방식이다. 그대로 돌려줘야 공평하다.


그가 전직 대통령의 명예라도 지키겠다면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 있다. 감사원이 이명박 청와대의 책임이라고 한 4대강 공사 때문에 수자원공사가 진 빚 갚아주는 데만 매년 3천억원 안팎의 세금이 들어간다. 복원 예산도 만만찮다. 세금 축낸 것만이라도 결자해지하기 바란다. 다스 주식에 차명부동산 일부만 내놔도 재원은 충분할 거다. 그가 거부하면 법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딱 맞는 법도 이미 박주민 의원 등이 발의해놓았다. ‘재정민주화를 위한 국민소송법’은 위법한 재정사업으로 생긴 손해의 배상 책임을 정책당사자에게 물을 수 있게 했다. 국회라도 나서야 한다.

< 김이택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집단학살한 장면이 담긴 충격적인 영상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27일 열린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콘퍼런스’에서 공개된 19초 분량의 흑백영상은 1944년 중국 윈난성 텅충에서 패주하는 일본군에게 위안부들이 총살당한 뒤 버려진 참혹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영상은 당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미·중 연합군이 촬영했다고 한다. 이런 영상을 앞에 두고도 일본은 계속 ‘위안부 책임’을 회피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성적인 도구로 사용하다 학살했다는 증언과 보고는 다수 있었지만 관련 물증은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다. 이번 영상을 발굴한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은 2016년 위안부 학살 현장 사진를 찾아낸 뒤 발굴 작업을 계속해 사진 속 주검과 옷차림이 똑같은 여성들의 학살 영상을 찾아냈다고 한다. 미·중 연합군 기록 문서에는 “(1944년 9월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이 영상을 뒷받침한다. 영상이 공개된 이상, 이제 일본 정부가 답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위안부 강제동원조차 부인하다가 관련 증거가 나오면 마지못해 사과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때도 형식적인 사과와 면피성 태도로 일관했다. 지난해 말 문재인 정부가 ‘12·28 합의 검토 결과’를 발표해 합의 내용과 과정의 문제점을 밝혀낸 뒤에도 일본 정부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우리 정부에 오히려 합의를 지키라고 윽박질렀다. 이런 적반하장식 태도는 지난 26일 강경화 외교장관이 유엔인권이사회 연설에서 12·28 합의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결여됐다’고 밝혔을 때도 그대로 되풀이됐다.


위안부 문제는 외교 문제이기 이전에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다.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일은 소멸 시효가 없으며, 국가 간의 적당한 정치적 타협으로 끝날 수도 없다. 일본 정부가 진솔하게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죄와 함께 배상을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올바른 시작이다. 그러지 않는 한 위안부 문제는 가해국 일본의 멍에로 남을 뿐이다. 충격적인 학살 영상까지 드러난 마당에 일본 정부는 이제라도 태도를 바꿔 인류 양심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1500자 칼럼] 닫히며 열린 창

● 칼럼 2018. 2. 27. 20:44 Posted by SisaHan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활짝 웃으며 “안경을 안 쓰니 썼을 때보다 훨씬 예쁘네” 한다. 듣기에 좋아 정말 그런가 싶어 마음이 흡족해졌다. 어느 날 다른 친구가 “안경을 벗으니 전혀 너 같지가 않아. 안경 쓴 네 모습이 훨씬 보기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기실 내 생애 반세기 동안 안경을 써왔으니 당연한 코멘트라 여기면서도 왠지 안경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왔다.
불현듯 이솝 우화 ‘당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남의 말만 듣고 당나귀 등에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는 걷다가 다시 아들은 걸리고 아버지만 당나귀를 타고, 또 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당나귀 등을 타고 가다가 끝내 당나귀를 그들의 등에 짊어지고 장터로 가던, 줏대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말이다.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 4년 전부터 시작한 백내장으로 시간이 갈수록 사물이 뿌옇게 보이며 시력장애가 심해졌다. 워낙 약시인데다 설상가상으로 백내장까지 있게 되어 더 이상 안경으로 내 시력을 조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백내장 수술 시 근시를 조절하는 인공렌즈를 삽입하게 되었다. 오른쪽 눈을 먼저 수술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창 밖의 불빛마다 빛 무리가 큰 원처럼 매달려 번쩍번쩍 강한 빛을 발하였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대신 여태 안경을 끼고도 읽을 수 없었던 TV 화면글씨를 읽을 수 있었고, 창 밖 먼 거리에 있는 희미하던 집과 숲도 선명하게 보여서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단지 아직 수술을 안 한 왼쪽 눈과 인공렌즈로 바꿔 낀 오른쪽 눈의 시력차이로 초점 맞추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다른 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2주 만에 신속하게 해줘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전과 달리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수술 전에는 근시가 아무리 심했어도 가까운 거리는 안경만 벗으면 작은 글씨도 읽을 수 있었는데, 수술 후 그 반대 경우가 된 것이다. 불편하고 난감했다. 전에 잘 보이던 글자를 돋보기를 껴야만 읽을 수 있고, 전에 못 보던 먼 곳은 안경 없이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 해야 할지 잘못된 일이라 해야 할지… 신문과 책을 자주 읽는 내겐 마치 재난처럼 느껴지기만 했으니 말이다.

흔히 신체의 창을 눈이라고 비유한다. 나도 이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즐기며, 일하며 살아가는데 그 창에 문제가 생긴 셈이다. 백내장 수술 후 검안을 하니 한쪽 눈에 난시까지 생겨 두 시력차이로 돋보기를 새로 맞춰야 했다. 50년이나 써온 돗수 높은 안경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점은 분명 신기하나, 한편으론 작은 글씨 하나라도 읽으려면 돋보기를 찾아야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제 보니 각종 서류 글씨는 어찌나 작은지 아예 읽으려는 시도도 할 수 없다. 나이와 함께 온 퇴행성 증세의 하나로 알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더 이상 쓸모 없는 사람이 된 무력감이 느껴질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삶 속에는 새로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기 마련임을 일깨우고 있다.


새 창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안경 없이도 하늘과 숲이 선명하게 보인다. 불현듯 내 젊은 날에 먼 거리를 볼 수 없었던 것 같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도우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 점이 떠오른다. 오로지 나, 내 가족, 내 교회, 내 친구들만 챙겼지 싶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쩌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라도 새 창으로 바꿔 끼워야 했던 게 아닐지. 이제부터라도 나 아닌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바라보며 도우라고, 또 그들의 처지와 입장을 돌아보며 나 자신만을 보듬지 말라는 충고로 이해하고 싶다면 지나칠까. 그래서 멀리 볼 수 있는 창은 넓게 열리고, 더 이상 나만 보지 말고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까운 창은 닫혀 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참으로 공평한 처사가 아닌지…이제부터라도 젊은 날에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을 고쳐 나가라고 새 창은 내게 그리 충고하는 것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닫히며 열린 세상, 바로 이것이 백내장수술 후 내가 깨달은 세상이치다.

드디어 새 안경을 맞췄다. 수술한지 일년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난시가 생기긴 하였으나 마침내 내게 익숙한 안경 낀 내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전과 달리 가끔은 안경을 벗고도 세상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돋보기 사용도 익숙해가고 있다. 열린 창에 가득 채운 밝은 빛으로 활기찬 오늘을 맞는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