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 통해 '공격 대상' 전달…미국과도 '사전 조율' 가능성

 

             26일 이란 공격관련 회의 참석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이스라엘 정부 제공. AFP=연합]
 

이스라엘이 26일(현지시간) 이란 군사 시설을 보복 공격한 가운데 이에 앞서 이란 측에 미리 표적이 뭔지 알리는 등 언질을 줬다고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날 공격에 앞서 카스파르 펠트캄프 네덜란드 외무장관을 포함한 여러 제3자를 통해 이같은 메시지를 이란에 전달했다고 복수의 소식통이 전했다.

한 소식통은 "이스라엘이 미리 이란에 전반적으로 공격할 대상과 공격하지 않을 대상을 분명히 알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또 이란에 이번 공격에 대응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만약 이란이 보복해 이스라엘 민간인이 숨지거나 다친다면 이스라엘이 더 중대한 공격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다른 소식통들이 전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와 관련한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악시오스는 전했다.

제3자로 거론된 펠트캄프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의 공격 수시간 전에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려 "이란 외무장관과 전쟁 및 역내 긴장 고조에 대해 이야기했다"라고 공개하기도 했다.

펠트캄프 장관은 "모든 당사자는 추가 확전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은 이날 3차에 걸쳐 이란 내 군사 시설에 대한 연쇄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이란이 지난 1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 등이 살해된 것의 보복이라며 이스라엘에 탄도미사일 약 200기를 발사한 데 대해 25일만에 이뤄진 것이다.

이번 타격 대상은 주로 이란 내 미사일 및 드론 기지, 생산 시설에 집중됐다.

이란 당국은 테헤란과 일람, 쿠제스탄 등 3개의 주에서 이뤄진 이스라엘 공격을 격퇴했다면서, 다만 이로 인해 이 지역에 "제한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CNN방송에 이번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매우 정교하게 준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공격이 "광범위했고 목표물을 겨냥했으며 정확했다. 이란 전역의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이었다"라며 "여러 면에서 정교하게 준비됐고 효과적으로 설계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이번 보복 공격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중동 순방을 마친 직후 이뤄진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이스라엘이 공격 시점을 '조율'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영국 런던에서 귀국길 오르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로이터=연합]
 

익명의 한 미국 당국자는 뉴욕타임스(NYT)에 이스라엘이 공격에 앞서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 관련 계획을 알렸다고 전했다. 다만 이 당국자는 미국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제공됐는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거부했다.

NYT는 미 백악관과 국방부가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을 겨냥한 공격의 범위와 목표물의 종류에 대해 긴밀히 논의해왔다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달 나스랄라 암살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암살 계획을 미국에 사전에 알리지 않았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바 있다.

아울러 이번 공격은 중동 순방을 마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탄 비행기가 미국 워싱턴DC에 도착한 뒤 이뤄졌다고 NYT는 전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번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에 대해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숀 사벳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대응과 자위 차원에서 이란 내 군 시설을 공격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 연합 이도연 기자 >

 

누가 '이란 폭격' 이스라엘 전투기 통과 묵인했나

'유력 후보' 요르단·사우디 '비공식 부인'

 

이스라엘 공군의 F-35 전투기 [EPA 연합]
 

이스라엘이 26일(현지시간) 새벽 이란 곳곳의 군사시설을 폭격하면서 전투기를 대거 동원한 것으로 드러나자 이들 전투기의 비행경로에도 이목이 쏠린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거리는 이스라엘이 폭격한 곳 중 하나인 테헤란주를 기준으로 직선거리 약 1천600㎞ 정도다.

지리적인 최단 거리로 비행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전투기는 요르단과 이라크, 또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영공을 지나야 한다.

이 때문에 이날 공습 뒤 소셜미디어(SNS)에선 '이스라엘의 F-35 전투기가 저공 비행해 요르단 영공을 통과했다', '요르단이 이스라엘에 영공을 열어줬다', '요르단에서 새벽에 항공기 굉음이 들렸다'와 같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에 요르단 국영매체는 군 소식통을 인용해 "역내 분쟁 당사국의 군용기가 요르단 영공을 지나가도록 허용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경로는 홍해 상공을 비행하다 사우디아라비아를 가로지르는 방법으로, 요르단을 통과하는 길보다 약 3배 이상 멀다.

영공 통과 시비가 불거지지 않으려면 홍해 상공을 비행해 아라비아반도를 돌아 걸프 해역을 통과한 뒤 이란의 남부로 진입하는 공해(公海) 경로인데 이는 7천㎞ 안팎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와 관련, 사우디 당국자는 로이터통신에 "이스라엘의 야간 공습 작전에 우리 영공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영공 통과를 묵인했다고 가장 의심받는 요르단과 사우디 모두 이같은 익명의 관계자를 통한 언론 보도 외엔 민감한 시점인 만큼 공식적으로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라크 정부는 정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에서 "점령자 시온주의 체제(이스라엘)는 처벌받지 않는 노골적 공격으로 중동에서 공격적 정책과 분쟁 확대를 계속하고 있다"고 규탄했으나 영공 허용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주변국에 영공 사용을 통보하지 않고 주권 침해 논란을 감수하고 공습 작전을 벌였을 수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이란 정부는 최근 이스라엘의 공습 작전에 대비해 인근 중동 국가를 상대로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다. 이란은 특히 영공 불허에 공을 들였다.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무장관은 지난 22일 쿠웨이트 방문 중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의 모든 이웃 국가는 자신의 영토와 영공이 이란 공격에 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이스라엘의 전투기 공습으로 이같은 약속이 결과적으로 지켜지지 않은 셈이 됐다.  < 연합 강훈상 기자 >

수도 테헤란과 군사시설 등 …대응 수위 따라 확전 갈림길

핵·석유시설은 안 때려…확전 관리 위해 보복수위 조절했나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이스라엘군 F-35 스텔스 전투기 [EPA 연합]
 

이스라엘이 장고 끝에 26일(현지시간) 이란을 겨냥해 재보복을 감행하면서 작년 10월 가자 전쟁 발발 이후 악화일로를 걸어 온 중동 정세가 또 다시 기로에 섰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자국 본토를 겨냥해 약 200발의 탄도 미사일을 날린 시점으로부터 25일째인 이날 이란 수도 테헤란 등지를 겨냥해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군(IDF)은 이날 성명을 내고 "몇 달 동안 이어진 이란의 공격에 대응해 이란의 군사 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피해 상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란 국영 TV와 반관영 언론 등은 이날 테헤란과 인근 카라즈 시에서 몇번의 큰 폭발음이 들렸다고 보도했고, 소셜미디어에는 도시 한복판에서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유되고 있다.

이란이 이번 공격에 대응해 재차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한다면 이미 가자지구에서 레바논으로 확전된 전쟁이 이란과의 전면전으로까지 번지면서 중동 전체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이란 반관영 타스님 통신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이란 당국자의 발언을 전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란이 이달 1일 이스라엘을 겨냥해 대량의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돼 왔다.

지난 7월 31일 이란 수도 테헤란을 방문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암살됐을 때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공언해 온 이란은 지난달 27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마저 이스라엘의 폭격에 목숨을 잃자 이를 명분 삼아 미사일 200여기를 동원해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했다.

미사일 대부분이 중동 주둔 미군과 이스라엘 방공망에 막힌 까닭에 피해는 군사시설이 일부 파괴되는 수준에 그쳤지만 이스라엘은 즉각 재보복을 공언했다.

 

이스라엘로 떨어져 내리는 이란제 탄도 미사일의 궤적들 [신화 연합]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이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고,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우리의 공격은 치명적이고 정밀하고 무엇보다도 기습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이스라엘의 이번 보복은 이란내 핵시설이나 이란 경제의 생명줄인 석유시설을 때리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스라엘 측이 확전을 막기 위해 보복수위를 조절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미국 CBS 방송은 소식통을 인용해 "이스라엘의 이날 공격은 이란 군사목표물만 겨냥했고, 핵·석유시설은 대상이 아니다"라고 보도했고, 이란 언론도 자국내 정유시설에는 화재 등 피해가 없고, 별다른 인명 피해도 없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언론도 현재까지 이란의 드론·미사일 공장, 미사일 발사대 등 이란 내 전략적 군사 시설 수십 곳을 타격했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재보복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무대응'에서부터 '탄도미사일 1천여기 발사'까지 시나리오별로 다양한 대응을 준비한 채 "비례적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해 왔다.

앞서 이란 정부 관계자들은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광범위한 파괴와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상응한 보복을 하겠지만 피격 대상이 군사기지 등에 국한된다면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 기준에 비춰보면 이번에도 이란이 확전을 불사하며 대대적 대응에 나설 정도는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란은 올해 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도 요격 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거나 군사 시설만을 노렸다.

이스라엘 역시 지난 4월 이란 공격에 따른 반격 당시 이란 중부 이스파한을 겨냥해 소규모 드론 공격으로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아 그동안의 양국의 직접 충돌은 사실상 '약속대련'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은 바 있다.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떨어진 이란제 탄도 미사일의 잔해 [AFP 연합]
 

이란의 미사일 공격 이후 이스라엘이 보복하기까지 25일이나 걸린 점도 주목할 지점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4월 이란이 수백기의 자폭 드론(무인기)과 탄도·순항 미사일로 자국 본토를 때렸을 때는 닷새 만에 이란 핵시설이 위치한 중부 이스파한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한달 가까이 장고를 이어갔다.

이런 상황엔 내달 5일 대선을 앞둔 미국이 가자 전쟁이 레바논에 이어 이란과의 전면전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이스라엘에 보복 시점과 수위를 조절할 것을 강하게 압박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보복 공격 준비 상황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미국 정보기관의 기밀문서 2건이 온라인에 유출된 것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보복 공격을 늦추도록 만들었다는 관측도 있다.

해당 문서에는 이란 공격을 위한 이스라엘 공군의 군수품 운반과 전투기를 동원한 훈련, 드론(무인기) 부대의 공격 준비 상태 등과 관련한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한편, 미국 폭스뉴스는 "이스라엘 측이 이날 공격을 감행하기 직전 백악관에 관련 계획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1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중동으로 파견해 네타냐후 총리 등을 만나게 했다. 블링컨 장관은 영국 런던을 거쳐 25일 귀국길에 올랐고 이스라엘은 그 직후 이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 연합 황철환 기자 >

 

이스라엘, 이란 수도 테헤란·남부 시라즈 2차 보복 공격

 

이란의 수도 테헤란 [로이터 연합]
 

이스라엘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대한 보복 공격 직후 곧바로 2차 공습을 단행했다.

로이터와 AP통신 등은 26일(현지시간) 현지 언론을 인용, 이스라엘의 1차 공습 직후 테헤란에서 또 다시 4차례에 걸친 추가 폭발음이 들렸다고 보도했다.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란 남부 시라즈 역시 2차 보복 공격 대상에 포함됐다고 전했다.

이란 국영 TV는 테헤란에 대한 2차 공습 직후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서 방공 시스템이 작동해 폭발음이 발생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앞서 이스라엘군은 이날 이란의 군사 시설을 대상으로 예고돼 온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이란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의 보복은 25일 만에 이뤄진 것이다.

이란은 지난 1일 이스라엘에 탄도미사일 약 200기를 쏘며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 등이 살해된 것의 보복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대응 공격 방침을 확인하고 재보복 시기와 방식을 숙고해 왔다.  < 연합 김경희 임지우 기자 >

휴전안 믿었던 헤즈볼라 나스랄라 무참히 피살
우크라전쟁, 북한-이란 핵문제 키운 것도 미국

전 CIA국장 "우리는 사기 치고, 속이고, 훔친다"
'망상에 가까운 패권 전략' 미국 역사 그 자체

 

미국 대선과 총선이 채 두 주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 내에선 당연히 관심이 높지만, 세계인들의 눈과 귀는 미국 대선 이상으로 요동치는 세계 정세에 쏠려 있다. 러시아의 승리를 목전에 둔 우크라이나 전쟁, 3차대전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이란-이스라엘의 격돌, 고조되는 중국-미국의 경제전쟁과 군사적 긴장 등.

여기서 기이한 것은, 패배를 눈앞에 두고도 ‘끝까지 싸워 승리!’를 외치는 우크라이나, 국제적 고립과 전략적 패배를 알면서도 ‘학살, 암살, 테러, 공습!’을 외치는 이스라엘, 불길한 후폭풍을 예감하면서도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자극하는 남한 일본 대만 필리핀 등의 행태다.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미국을 뒷배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적이 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친구라고 믿다간 죽어.” 이들에게 미국의 정체를 간명하고 날카롭게 묘사한 키신저의 경구를 일깨워주고 싶다. 적이든 동맹이든 필요하다면 가차 없는 폭력과 사기에 가까운 이중성을 발휘하는 게 미국이다. 이런 미국을 제일 믿는 건 이스라엘이다. 힘을 믿고 밀어붙이고 있지만, 둘 다 국제적 고립이라는 전략적 패배의 딜레마로 빠져들고 있다.

지금 일촉즉발인 이란-이스라엘 격돌의 결정적 계기는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의 암살이다. 그의 죽음은 이 금언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믿을 걸 믿어야지, 미국을 믿다니.’

임시 휴전안 수락 발표 직전 H. 나스랄라 암살?

이미 널리 알려졌듯, 한 달여 전인 9월 27일 이른 밤(베이루트 시각),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 남쪽, 헤즈볼라 사령부를 공습, 회동 중인 지도자 나스랄라를 포함, 일군의 정치 및 군사 지휘부를 암살했다.

 

(왼쪽) 폭격으로 깊게 파인 헤즈볼라 사령부 공습 현장. 출처: 뉴욕 포스트 9월 30일 (오른쪽) 나스랄라 암살에 사용된 미제 무기 벙커버스터. 출처: 인도 매체 리퍼블릭 TV. 9월 30일
 

당연한 일이지만, 헤즈볼라는 지도부의 안전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암살 관련 보도나 시사 유튜브를 종합해보면, 그날 헤즈볼라의 경계는, 이란의 사전경고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왜 그랬을까? 결정적 이유는 임시 휴전안 때문이다.

9월 하순 유엔총회 및 안보리 기간, 프랑스와 미국 등은 헤즈볼라-이스라엘 간에 21일 동안의 임시 휴전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휴전안은 레바논을 통해 헤즈볼라로, 미국을 통해 이스라엘로 전달됐고, 두 당사자도 동의했다. 그래서 유엔 주변에서는 네타냐후가 금요일, 27일의 총회 연설에서 휴전안 수락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실제는 달랐다. 금요일 오전(뉴욕 시각), 총회장으로 가기 직전, 네타냐후는 군의 헤즈볼라 지도부 암살 작전을 승인했다.(사진 참조).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을 나섰다.

 

유엔총회 참석차 머문 뉴욕 숙소에서 전화로 군의 헤즈볼라 공격을 승인하는 네타냐후. 서 있는 사람 왼쪽 비서실장, 오른쪽. 군 각료. 출처: 9월 27일 예루살렘포스트에 실린 총리실 배포 사진
 

회의장에 도착, 연단에 선 네타냐후는 1시간 가까운 연설을 이어갔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모든 곳, 또 중동 어디도 공격할 수 있다’가 핵심 메시지였다. 맘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 협박을 사실로 입증하듯, 연설이 끝난 직후, 이스라엘 공군은 베이루트로 출격, 나스랄라에 대한 테러 공습을 벌였고 죽였다.

미국의 이중 플레이

나스랄라는 휴전안을 믿었다. 프랑스와 미국 역시 외교 노력이 성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미국, 나스랄라 모두는 속았고, 그는 처참하게 살해됐다.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은 휴전은커녕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을 당겼다. 4일 후인 10월 1일, 이란은 철통같다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방공망을 뚫는 대규모의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그동안 미국의 공식 입장은, ‘헤즈볼라와의 군사적 대결은 중동 전역으로의 확전이 우려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레바논 공격 자제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미국은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벌였다.

 

‘이스라엘에 헤즈볼라 공격을 은밀히 부추긴 미국 관리들’이라는 제목의 9월 30일 자 온라인 매체 폴리티코의 기사.
 

일군의 백악관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공식 입장과 반대로 이스라엘에 대 헤즈볼라 군사작전을 부추기고 다녔다.(관련 기사 사진 참조) 이해영 교수는 “바이든은 NSC(국가안보위) 중동 조정관과 이스라엘군 출신 안보 보좌관을 통해 ‘사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전쟁을 추동해 왔다”고 지적했다. 즉, 협상을 강조하지만, 백악관은 이스라엘의 작전을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이들은 레바논 공격을 준비하던 네타냐후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달리 말하면 휴전안을 미끼로 벌인 미국의 이중 플레이에 나스랄라는 암살되고, 가자에서 레바논, 시리아, 결국 이란까지, 전쟁은 확대됐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이젠 레바논에 주둔한 유엔평화유지군까지도 공격하고 있다.

거짓과 속임수는 미국의 주특기

트럼프 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냈던 M. 폼페오는, 지난 2019년 한 대학 강연에서 “웨스트포인트 생도규범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속임수 쓰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지만, CIA는 사기 치고, 속이고, 훔치는 조직이다”라고 자랑하듯 털어놓은 적이 있다.(사진 참조). 그것이 실은 CIA뿐 아니라 국무부와 백악관을 포함, 미국 정부의 일관된 대외정책의 기조(?)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민스크 협약이 사실상 사기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이뤄진 종전 협상마저 미국의 반대로 파기됐다. 대리전에 나선 우크라이나는 패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북한의 핵을 오늘날처럼 키운 계기도 미국의 협력 약속 불이행이다. 1994년 미국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을 조건으로 제시한 제재 해제, 발전소 건설 및 에너지 지원 약속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철천지원수(?)처럼 대하는 이란과의 문제 한복판에도 미국의 책임이 놓여 있다. 2015년 미국과 이란은 독일, 러시아, 영국, 유럽연합, 중국, 프랑스 등과 함께 ‘포괄적 이란 핵협정(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약칭 JCPOA)’을 타결한다. 이란 핵무기 개발중단과 경제제재 해제를 맞교환한 것으로, 이란과 미국의 오랜 긴장 관계를 푸는 매우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협정 타결의 이면에는, 핵발전 연료 생산을 위한 이란의 우라늄 농축, 즉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미국의 약속이 있었다. 이란은 협정을 준수했고, 이는 국제적으로도 확인됐다. 그런데 정작 제재 해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트럼프는 2018년, ‘부실한 협정이고 이란이 약속을 위반했다’며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애초부터 협정반대-협정탈퇴를 위해 노력해온 이스라엘 정부와 로비 단체는 트럼프의 결정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들에게 미국의 외교는 사기에 가까운 이중적 행태의 다른 말일 뿐이다.

스스로에게도 사기 치는(?) 미국

생각해 보면 키신저의 말은 다른 나라는 물론 미국 자신도 되새겨야 한다. 더는 사실이 아닌 ‘미군 최강! 미국 최고!’를 믿는 것이 스스로에게 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중국, 북한 등과 세 개의 핵전쟁을 동시에 치러 승리할 수 있다며 자신을 독려한다. 목전에 다가온 우크라이나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미국 중동외교의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암살 테러가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킨다는 걸 알면서도 참수 작전의 승리라고 자축(?)한다. 중국과의 격돌을 감당할 역량이 모자라면서도 군사적 긴장상태를 조성한다. 남한, 대만, 일본, 필리핀 같은 나라들이 중국을 자극하도록 부추긴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다극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지정·경학적 변동의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쪽에는 G7 다른 한쪽에는 브릭스를 그린, 다극화 시대를 상징하는 삽화.
 

요약하면 미국은 자신이 지구적 범위의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동시에 미국 밖에서 지구적 범위의 거대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 때문에 미국의 위상과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미군 최강, 미국 최고’라는 망상,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자유, 민주, 가치 질서 같은 허황한 구호가 합작해 빚어내는 엄중한 현실이다. ‘믿을 걸 믿어야지, 미국을 믿다니’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미국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금언이다.

패권 망상에 매달리는 미국

협상이 아니라 사기에 가까운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대화가 아니라 우선 총부터 드는 미국.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미국 역사가 그렇다. 미국은 건국 이래 19세기까지 조약 파기는 물론, 침략과 정복 전쟁으로 원주민 인디언을 죽이고 밀어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남미를 장악했고,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을 거스르거나 반대하는 정부나 집단은 봉쇄, 암살, 회유, 쿠데타, 경제제재, 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어 또는 제거하고 있다.

두 번째는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이 수립한, 특히 1960년대 이후 변함없이 이어지는 미국의 헤게모니, 즉 ‘패권 유지’라는 거대전략이다. 군사적 개입과 상대를 기망하는 이중적 외교는 이 전략의 실천 전술 중 하나고,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주체는 군산정언학 복합체다. 이 복합체의 일부로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트럼프가 자신이 당선되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은 좀 더 일찍 수습에 들어가겠다는 것일 뿐, 미국의 패권 전략이나 군사 개입 노선 자체를 바꾸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패권은 하락 중이고 패권 전략은 안팎의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미국은 강한 나라다. 그러나 영구전쟁으로, 이중적 사기술로, 천문학적 빚더미로 위기 극복의 역량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변하지 않는 한, 미국은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이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9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볼가강 유역의 도시 카잔에서는, 이번 22일부터 24일까지 열여섯 번째 브릭스 정상회의가 열린다. 다른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 민들레 김평호 전 단국대교수, 저술가 >

전쟁, 기후변화 등 현재의 위기 해결에 무능 드러내

인류 미래 위한 새로운 세계적 사회계약 수립해야

 

24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제79주년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유엔기가 펄럭이고 있다. 2024.10.24 [부산시 제공]
 

24일은 '국제연합(UN)의 날'이었다.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아 정부로 정식출범하는 근거를 제공해 줬으며, 한국 전쟁 때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16개 국이 참전했던 이 국제기구에 대한 대한민국의 애정은 각별하다. 대한민국은 1950년부터 1976년까지 '유엔의 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했다. 지금도 법정기념일로 남아 있지만 24일 '유엔의 날'에 한국의 언론 어디에도 유엔을 언급하는 곳은 없었다.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은 이를 지적하며 “이젠 그만큼 존재감을 상실한 조직으로 전락했다”면서 “이런 배경에는 2차대전 이후 유엔 설립을 주도하며 뉴욕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재정의 상당을 지원해온 미국에게 의존당한 한계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의도대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 간 온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유엔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소비에트 붕괴 이후 유엔의 위상은 미국 국무부의 한낱 일개 부처에 지나지 않았다.”

이 명예이사장은 “그럼에도 최근 안토니오 쿠테흐스 사무총장 취임 이후 미국의 방해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세계기구로서 유엔을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예컨대 서방이 주도하는 우크라 평화회의를 보이코트하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카잔의 BRICS+ 회의에 참석한 쿠테흐스 총장의 최근 행보, 또한 서구가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강화하고자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을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추가하려는 미국의 집요한 요구를 거부하고 아프리카연합과 글로벌사우스 주요 국가들을 상임이사국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주목할 만한 일로 들수 있다”고 말했다.

이달 초 이스라엘 정부가 구테흐스 사무총장을 자국에 대한 이란의 사악한 공격을 명확하게 비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피 인물’로 선언하고 이스라엘 입국을 금지했다고 밝힌 것도 이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한 사례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인류가 직면한 중대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엔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칼럼이 아랍권 최대 뉴스 네트워크인 알 자지라에 실려 주목을 받았었다.

헤바 알리(Heba Aly, 유엔헌장개혁연합 코디네이터) 브렌다 모퍄(Brenda Mofya, 옥스팜 인터내셔널 유엔 사무소장) 안드레아스 부멜(Andreas Bummel, 국경없는민주주의 이사) 3인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 글은 "우리의 글로벌 거버넌스 기관인 유엔은 우크라이나, 가자, 수단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부터 기후 변화의 영향이 커지는 것까지,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적 사회계약'으로서의 유엔헌장을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민들레 이명재 기자 >

다음은 칼럼의 전문이다.

유엔 헌장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미래를 위한 유엔 정상회의의 혁명적이지 못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절실히 필요한 변화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유엔헌장의 개혁을 통해 시작될 수 있다>

지난 일요일에 세계 정부들은 뉴욕에서 열린 유엔 미래 정상회의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를 변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공약을 했다. 야심찬 이름의 정상회의는 "우리의 미래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글로벌 합의를 만들어내는" "한 세대에 한 번 있는 기회"로 묘사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긴급하게 변화가 필요한 중요한 시점에 있다.

세계는 "역사적 위험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핵전쟁부터 지구적 비상사태까지, 지속적인 빈곤과 불평등 확대부터 인공지능의 무제약적 발전까지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위험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는 순전히 개별 국가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세계적인 과제이다. 전 세계 사람들은 좀 더 조율된 세계적 행동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글로벌 거버넌스 기관인 유엔은 우크라이나, 가자, 수단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부터 기후 변화의 영향이 커지는 것까지,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점점 다극화되는 세상에서, 현재의 시스템, 특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구성이 불공평하고 대표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신흥 강대국들은 다자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으며, 다자주의에서 완전히 철수할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이는 소위 강대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회원국들은 이번 미래정상회담이 제공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 일부 회원국은 몇몇 방해꾼 때문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정상회담에 앞서 몇 달 동안 정부 간 협상에서는 논쟁이 벌어졌고, 국제금융 구조개혁, 인권과 젠더 지원, 기후 변화 대응과 군축을 촉진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제안된 내용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2년 이상의 준비와 여러 차례의 개정, 그리고 수많은 외교적 노력 끝에 정상회담은 "미래를 위한 협정"이라는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이 문서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점진적인 단계를 밟는 형태이지만, 주로 원칙 및 기존 약속의 재확인 수준에서 이루어졌을 뿐 구체적인 행동은 아니다.

"협정"에서 이뤄진 적잖은 진전, 즉 아프리카의 역사적 불의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낮은 대표성을 바로잡을 필요성에 대한 인식, 미래 세대의 요구와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약속, 인공지능 거버넌스에 관한 최초의 국제 협정, IMF와 세계은행의 의사결정 거버넌스에서 개발도상국의 발언권 확대에 대한 지원 등은 많은 시민사회 단체와 일부 정부가 옹호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고려하면 '미래를 위한 협정'에 개괄한 내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 질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제안한다. 이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오늘날 국제 관계의 창립헌법 문서인 유엔 헌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 정상회담를 준비하면서 벌어진 양극화한 협상 가운데, 유엔헌장에 명시된 개괄적인 원칙은 협상 참여국들이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확실히 말하자면, 몇몇 핵심 원칙은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실제적용을 현대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른 규칙들도 함께 개정되어야 한다.

이 헌장은 1945년에 단지 51개 국에 의해 채택되었다. 아프리카 대부분과 아시아 일부가 여전히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헌장은 2차 세계대전의 승자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 오늘날까지 독일, 일본 및 기타 '추축국' 세력을 언급할 때 '적국'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인공지능'은 물론 '기후 변화' 또는 '환경'이라는 단어는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는다.

유엔 헌장은 항상 살아있는 문서가 되고자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헌장이 채택됐을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이 헌장은 …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장되고 개선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이 지금 최종적이거나 완벽한 도구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정된 틀에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변화하는 세계 상황은 재조정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세계적 과제에 조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세계적 사회계약'을 만드는 것이다. 즉, 1945년 이후 국제적 힘의 균형이 변화했음을 인정하고, 국가 주권보다 세계적 공유재의 공동보호를 우선시하며, 근시안적인 국가이익보다 세계 국민과 미래 세대를 우선시하는 계약이다.

새로운 헌장을 만듦으로써 권력을 보다 공평한 방식으로 재분배하고 기후 변화와 인공지능과 같은 위협을 심각하게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행과 책임을 강화하여 유엔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전염병, 기후 변화, 사이버 위협이 상호 연결된 시대, 사람들이 자국 국경 밖에서 내려지는 결정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요즈음이다. 새로운 헌장은 전 세계 사람들이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된 의회를 도입하여 그들에게 세계적인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 발언권을 줌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포용과 대표의 시대를 열 수 있다.

새로운 헌장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자세한 제안은 글로벌 거버넌스 포럼의 보고서에 제시되어 있다. 명확히 말하자면, 글로벌 거버넌스에 필요한 수많은 개선 사항은 헌장 개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과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훨씬 더 온건한 개혁을 두고도 미래 정상회담과 관련된 협상이 지난했던 점을 감안해,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절차적으로, 유엔헌장을 개혁하려는 우리의 제안은 헌장 규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제109조는 유엔 총회에서 3분의 2 이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사국 9개 국이 찬성하면 헌장을 재검토하기 위한 총회를 개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갖는 것에 반대하는 많은 국가에 대한 양보로 헌장에 포함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협정을 재검토하고 개정하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유엔 헌장 개혁은 애초 계획된 것이었다.

작년에, 다자주의를 좀더 효율화하기 위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위자문위원회가 유엔 사무총장에 의해 임명됐다. 전 스웨덴 총리 스테판 뢰벤과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엘렌 존슨 씨리프가 공동 의장으로 활동했다. 위원회의 권고안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제109조를 활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헌장을 재론하는 것을 두고 매우 타당한 우려가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양극화된 분위기에서 인권 등 이전에 합의된 개념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면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정부와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 국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는 한 헌장에 대한 개혁은 채택될 수 없다. 그러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현재 헌장은 유지된다. 일종의 퇴보 방지용 안전판인 셈이다. 개정과정이 위험을 수반할지라도, 세계가 현재 나아가는 방향은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작금 정치적 분위기가 협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기의 시기에 돌파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국제연맹과 유엔은 모두 세계대전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더 나은 시스템을 마련하려면 3차 세계대전을 기다려야 할까?

현재 글로벌 거버넌스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지금 당장 그 변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하라고 호소한다. 유엔 헌장을 개혁하는 과정은 수 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 정상회담은 세계가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고 집단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협력을 이룩하려는 유엔의 목표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데 필요한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티핑포인트는 결국 올 것이다. 미래의 그 시점에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