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근세사... 쿠데타 배경과 전망 

60여년 집권한 군부의 선택은…미얀마 미-중 사이에서 줄다리기?

 

 

전 세계적으로 군부가 퇴조한 가운데, 미얀마 군부는 어떻게 60년 이상 정권을 유지했을까?

미얀마는 지난 2월1일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연일 쿠데타에 저항하는 거리 시위를 벌이고, 군부는 발포도 마다하지 않는 강경 진압에 나서는 대치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크게 세 가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160여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고 영국 식민지를 거친 미얀마의 특수한 역사, 그 속에서 군부의 역할과 위상, 여기에 더한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변화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향방을 문답 형식으로 전망해본다.

 

-미얀마에서 군부가 장기 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 나라 현대사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때문이다. 작금의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미얀마에서 군부는 건국과 독립은 물론 이후 국정을 주도한 정치 세력으로 그 만큼의 지분을 행사해왔다. 소련과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집권한 뒤 당 중심으로 권력을 운용했다. 미얀마에서는 독립과 건국 주도 세력이 군부로 남아, 권력을 승계해왔다. 군부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을 뿐이다.

미얀마의 원형은 서기 11세기부터 국토의 중심인 이라와디강 유역에 자리잡은 버마족 왕국이다. 몇차례 왕조가 교체되다가 19세기말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인도를 거쳐 침공한 영국은 당시 버마와 세차례나 전쟁을 벌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의 식민통치에 본격적으로 저항해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현재 군부의 기원인 버마독립군이다.

 

-버마독립군 세력이 어떻게 건국 중심 세력이 됐는가?

=버마독립군은 현재 군부에 의해 구금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이 일본에서 결성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에서 영국 세력을 축출하자, 아웅산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 독립을 추구했다.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편에 선 것이 현재 미얀마 비극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일본군이 영국 식민지인 버마를 침공할 때,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동참하기도 했다. 반면, 미얀마의 소수민족들은 영국 등 연합군 쪽에 섰다. 다수민족인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가 줄곧 서방 세계와 불화한 배경이다.

버마족 지도자인 아웅산은 1947년 미얀마 소수민족과의 협상을 통해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팡롱협정’을 맺었다. 아웅산은 임시정부인 미얀마행정위원회 부의장으로 취임해, 건국 작업을 하다가, 같은 해 정적에 의해 암살됐다. 그가 암살된 뒤 건국된 버마연방에서 초대 총리 우누 등 친서방 세력이 집권했다. 우 누는 아웅산과 달리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건국 주도 세력인 네윈 등 버마독립군은 군부로 남았다.

 

-건국 초기 군부가 국정을 장악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군정이 성립된 것인가?

=독립 이후 지속된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가장 큰 배경이다. 이에 더해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부군이 북부 국경지대를 점령한 것도 한 원인이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국부군에 대처하면서, 군부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미얀마는 총 160여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이중 정부가 인정하는 소수민족만 135개다. 언어도 100여개가 넘는다. 건국의 바탕인 팡롱협정도 소수민족들과 연방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건국 이후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 위주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뤄지면서 소수민족들이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무장투쟁이 분출했다. 북서부 변경주인 샨주의 샨족, 북부의 카친족, 남부의 카렌족 등은 독립 이후 지금까지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미얀마는 독립 이후 지금까지도 기술적으로는 내전 상태다.

국부군 패잔부대가 북부 접경 지대를 점령한 것은 더 심각한 위기였다. 미얀마는 중국과 갈등의 역사가 있는 데다, 국부군 패잔부대들이 주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내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네윈이 이끄는 군부의 권력이 커졌고, 허약한 우 누 정부는 1958년 네윈에게 임시총리를 맡아줄 것을 요구하며 권력을 넘겼다. 네윈은 선거로 다시 구성된 정부에 권력을 넘겼다가, 1962년에 쿠데타로 집권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군정의 길을 열었다.

 

-소수민족 문제는 언제부터 비롯된 것인가?

=소수민족 문제는 군정뿐 아니라 미얀마라는 나라의 최대 모순이다. 미얀마의 현재 영역은 영국 식민통치 때 성립됐다. 이라와디강 유역의 다수민족인 버마족이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갖기는 했으나, 과거에는 이런 영역이 성립된 적은 없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때 영국과 프랑스가 남아시아에서 세력분할을 하면서 타이 서쪽이 영국 세력권으로 획정됐고, 영국은 현재의 영국령 버마를 만들었다. 영국도 처음에는 남부 버마, 북부 버마, 변경지역 3개의 별개 지역으로 통치했다.

버마족은 팡롱협정에 의해 건국된 미얀마를 자신들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여겼다. 반면 나머지 소수민족들은 과거보다 자치나 독립의 공간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군부가 ‘버마족의 국가’ 미얀마를 지키는 보루로서 기능한 것이 군정 지속의 배경이다. 이 때문에 영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미얀마를 “지도 제작자들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 정치지도 위에 표시된 버마는 자연스런 지리적 혹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다”라며 “19세기말 영국 제국주의 무력 외교와 행정 편의의 창조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군부독재는 냉전과 분단을 배경으로 한다. 미얀마에서는 군정이 제도화된 셈인데, 국제적 배경이 있지 않나?

=미얀마 역시 냉전 전후의 지정학적 정세가 결정적이었다. 미얀마 군부는 반서방 버마민족주의에다가 사회주의 성향이었다. 군부는 미국과 영국이 미얀마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소수민족 분리독립을 부추긴다고 봤다. 군부가 건국 초기 국부군 패잔부대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협력하며,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1960년대 이후 베트남전 등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은 군부정권의 반서방 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군사정권은 이때부터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독자 노선을 취했다. 197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도 미얀마의 반서방 고립폐쇄 노선을 결정화하는 계기가 되는 역설을 낳았다. 미-중이 화해하면서 베트남전 종전이 가능했고, 종전 뒤 미국은 아시아에서 대중국 봉쇄망을 풀었다. 이는 중국 세력권의 인정을 의미했다. 미국 등 서방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였던 미얀마를 중국 세력권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개입을 중단했다.

네윈 정권은 베트남전이 끝난 1974년에 버마연방사회주의공화국 헌법을 제정했고, 형식적으로 군정을 종식했다. 전역한 군인들이 주도하는 버마사회주의프로그램당의 일당 체제로 전환했다. 미얀마는 이때부터 완전히 서방 등 국제사회와 절연되는 고립·폐쇄 노선으로 접어들었다. 1970년 중반까지 한국 축구의 아시아 경쟁자였던 버마와의 경기를 볼 수 없게 된 배경이다.

 

-미얀마가 다시 국제사회의 ‘문제’로 등장한 1988년 민주항쟁의 배경은 무엇인가?

=군부정권의 고립·폐쇄 노선으로 미얀마는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군부정권의 사회주의 프로그램은 군인들의 이권 축적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전 종전 이후 동남아에 경제개발 붐이 일고, 한국과 필리핀에서는 군부독재가 종식되는 물결이 일었다.

민생고에 시달린 미얀마 시민들은 1988년 ‘8888 항쟁’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반독재 시위 운동을 벌였다. 군부는 3천여명을 사망자를 낼 정도로 무차별 진압을 했다. 동시에 군부는 통치력을 상실한 네윈 정권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정 형태로 복귀했다. 당시 영국에 살던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가 어머니의 간병으로 귀국했다가, 버마 민주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군부는 민주화 압력 앞에서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군부는 이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를 내세운 야권 세력인 민족민주동맹(NLD)이 의석의 80%를 차지하는 압승을 하자, 선거 결과를 취소하고는 군정을 이어갔다.

 

-2015년 결국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으로 권력이 이양되지 않았는가?

=국내외적인 요인이 상호 작용을 했다. 첫째,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다. 1988년 항쟁 이후 미얀마에서는 시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2007년 8월에는 88년 항쟁에 버금가는 샤프론 혁명이라는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다.

둘째, 국제정세의 변화다. 샤프론 혁명이 일어난 2007년 이후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아시아태평양으로의 귀환’ 전략을 발표했다. 대중국 봉쇄망을 다시 구축하려는 미국이나, 이 봉쇄망을 뚫고 인도양으로 나가려는 중국 모두에게 미얀마는 중요 고리가 됐다. 미국은 미얀마를 더이상 중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재 강화라는 채찍과 경제지원이라는 당근을 동시에 제시하는 개입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미얀마 군부는 대외적으로는 개방, 국내적으로 타협이라는 이중 트랙을 통해 권력을 공유하는 연착륙 전략을 택했다. 군정은 이미 1997년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에 가입하며, 외교적 고립에 탈피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고립과 국제적 제재 앞에서 유일한 대외창구였던 중국의 영향력이 커진 것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시민들의 반중국 정서가 큰 데다, 군부 역시 커지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 이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샤프론 혁명 뒤인 2008년 5월 군부는 신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화 일정을 내놓았다. 헌법은 다당제 투표를 통한 민간정부 수립을 명시했으나, 군부가 의회 의석의 25%를 지명하는 한편 국방·내무·국경수비 부처 장관을 독점하도록 했다. 군부와 민간정부의 권력공유 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신헌법에 따라 2010년 치러진 총선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참가가 불허되고 사실상 군부의 연합연대개발당(USDP) 일당 선거였다. 이 선거에 따라 2011년 3월30일 군 총사령관에서 전역한 테인 세인을 대통령으로 하는 형식상의 민정이 성립됐다.

테인 세인 정부 출범 이후 국내적으로는 수치의 가택연금 해제와 민족민주동맹의 선거참여 허용이 이뤄졌다. 대외적으로는 2011년 12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문을 시작으로 서방과의 관계정상화에 들어갔다. 미얀마는 2012년 1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발표해, 국제사회 복귀를 일단락했다. 특히, 미얀마는 2013년 테인 세인의 백악관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인 미-중 등거리 외교로 전환해, 일방적인 친중 노선에서 탈피했다.

2015년 11월 치러진 총선에 민족민주동맹이 참가해, 투표로 결정되는 의석의 80%를 얻는 압승으로 집권했다.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가진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에 따라 수치는 국가고문 직책으로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군부는 헌법 개정 비토권 및 국가안보와 치안 권력도 유지했다. 이는 군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미국이 권력공유와 국제사회 복귀를 타협한 결과다.

 

-왜 군부가 권력공유 타협을 깨고 다시 쿠데타에 의한 군정 복귀를 택했나?

=이 역시 국내외적인 요인이 결합됐다. 첫째, 소수민족 문제가 군부와 수치 사이의 권력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군부는 2017년 서부 연안 라카인주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여, 70만명의 로힝야족 난민위기를 조성했다. 군부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로힝야족 소탕작전을 벌인 것은 자신들의 역할을 제고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수치의 입지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수치는 로힝야족에 대한 혐오가 큰 다수 버마족의 정서를 의식해, 이 작전을 옹호했다. 수치의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은 의석을 늘렸고, 군부의 연합연대개발당은 오히려 의석이 줄었다. 군부를 반대하는 시민들로서는 수치 외에는 대안이 없기도 했거니와, 수치가 소수민족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다수 버마족의 지지가 증폭됐다.

둘째, 로힝야 사태 이후 미얀마를 사이에 둔 미-중의 각축이 다시 격화됐다. 수치는 집권 직후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과 회담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확대를 추구했다. 로힝야 사태로 서방의 비난을 받은 수치는 한층 중국 쪽으로 밀착했다. 중국 역시 수치 정부에 대한 정책적 개입을 확대했다. 군부와 중국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냉랭해졌다.

군부로서는 ‘3중 포위’의 위기를 느꼈을 수 있다. 지난해 총선 결과가 예상보다 저조한 데다,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로힝야 사태로 다시 미국 등 서방의 제재 대상이 됐다. 군부는 수치 정부에게 총선의 불공정성 등을 문제삼아 조사를 요구하다가, 결국 지난 2월1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과 군부의 강경진압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사태가 바뀔 전기는 없는 것인가?

=현재로서는 군부가 물러서거나, 권력의 균열이 보일 조짐은 없다. 하지만, 1988년 직후와는 달라진 국내외 상황이 변수다. 당시 3천명을 희생시키는 전면적인 탄압에도 미얀마의 군부독재가 건재했던 것은 애초부터 고립·폐쇄 노선이었던 데다, 중국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버텨줬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개입도 미약했고, 그 실효성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는 상당한 수준의 개방이 이뤄진 데다, 군부를 받쳐줄 중국의 버팀목 비중은 낮아졌다. 중국 역시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줄었다. 군부가 1988년 때와 같은 전면적인 싹쓸이 탄압을 감행하면, 중국도 반군부로 돌아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이 미얀마 사태의 관건이란 말인가?

=중요 변수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직전인 지난 1월 군부와 수치 정부 사이에서는 타협이 모색됐고, 중국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치 정부의 거부로 타협은 무산됐고,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 이후 군부의 대중국 입장은 더욱 미묘해지고 있다. 군부는 미얀마가 중국의 영향권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군부에 고용된 아리 벤메나세라는 유명한 이스라엘인 무기거래 로비스트는 워싱턴의 로비업계 매체인 <포린 로비> 및 <로이터> 통신과의 회견에서 “아웅산 수치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에 알려진 것보다 큰 역할을 했고, 미얀마를 중국의 영향권으로 흘러가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벤메나세는 자신이 지난주 군부에 의해 고용돼 “미얀마의 진짜 상황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며 미국 등으로부터 오해받는 미얀마의 장군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그는 <로이터>와 회견에서 “(수치가) 중국에 더 접근하려는 데 반대해, 서방 및 미국 쪽으로 움직이려는 (군부의) 진정한 추동이 있다”며 “그들은 중국의 괴뢰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군부가 반중친미 노선을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또 “국가 지도자로서 로힝야족을 탄압한 이들 중 한 명이 아웅산 수치이며, 군부가 한 것이 아니다”라고도 항변했다. 그는 “군부는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한다”며 “하지만, 그것은 과정”이라고 말해, 군부가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벤메나세의 입을 빌린 군부의 이런 주장은, 미국에게는 화해를, 중국에게는 경고를, 수치 정부에게는 타협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그만큼 미얀마에 개입할 지렛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얀마 군부는 진압의 강도를 조절해 파국은 막아가며, 미-중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기자

  미테구 의회, '평화의 소녀상 안전보장 결의안' 다수결로 의결

"영구설치 실행까지 그자리에 머물도록 설치허가 내달라" 청원

 

베를린 소녀상 앞 세계여성의 날 집회 : 지난 6일(현지시간)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세계여성의 날 기념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집회는 현지 여성단체 코라지 여성연합과 코리아협의회가 공동주최했으며, 참가자들은 베를린시청 티어가르텐 지역사무소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지금 자리에 당분간 계속 머물게 됐다.

앞서 지역의회가 결의한 소녀상의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를 끝낼 때까지다.

 

베를린시 미테구의회는 18일(현지시간) 전체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의 '평화의 소녀상 안전보장 결의안'을 의결했다.

프랑크 베르테르만 의장(녹색당)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평화의 소녀상 안전보장 결의안이 다수결로 의결됐다"고 선언했다.

표결에는 구의원 52명이 참여해 39명이 찬성했고, 13명이 반대했다. 베를린 연립정부 참여정당인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좌파당 등 진보3당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는 기독민주당(CDU)과 자유민주당(FDP)에서 나왔다.

좌파당이 제출한 결의안은 평화의 소녀상을 미테구에 영구설치하는 방안을 마련해 실행할 때까지 소녀상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금 자리에 설치 허가를 계속 연장하라고 미테구에 청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미테구의회는 지난해 12월 1일 평화의 소녀상이 미테구에 계속 머물 방안을 구의회 참여하에 마련하기로 하는 내용의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결의안'을 의결한 바 있다.

영구설치 길 열린 베를린 미테구 모아비트 소재 평화의 소녀상.

결의안은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철거명령을 철회하고 당초 올해 8월 14일이었던 설치기한을 올해 9월 말까지로 6주 연장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좌파당 틸로 우르흐스 구의원은 "지난해 12월 1일 평화의 소녀상을 영구설치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로 결의했고, 오는 5월 10일까지가 처리 기한인데 거듭된 요청에도 구청에서 미온적이어서 아직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해 우리는 코로나19로 봉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곧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고, 그 이후에는 선거가 있다"면서 "이런 과정에서 소녀상이 설치허가가 종료됐다는 이유로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안전보장 차원에서 마련한 결의안"이라고 설명했다.

우르흐스 의원은 "소녀상은 단순히 한일문제 차원에서가 아니라 군사분쟁과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라는 근원적 문제 차원에서 봐야 한다"면서 "이번 결의안은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의 속도를 내기 위한 표지로 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미테구청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이 국제적인 전쟁 피해 여성의 인권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 지난해 7월 설치를 허가했고, 소녀상은 지난해 9월 말 미테 지역 거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치 이후 일본 측이 독일 정부와 베를린 주정부에 항의하자 미테구청은 지난해 10월 7일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베를린 시민사회가 반발하고 소녀상 설치를 주관한 현지 시민단체인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가 행정법원에 철거 명령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자 미테구가 철거 명령을 보류하며 한발 물러섰다. 이후 미테구의회는 지난 11월 7일 철거명령 철회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베를린 소녀상 설치' 추진한 코리아협의회 대표: 독일의 수도 베를린시에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코리아협의회(KoreaVerband) 한정화 대표.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는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결의안인 만큼, 베를린 소녀상이 영구거주증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앞으로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가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협의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소녀상 영구설치 촉구 여성의날 시위…램지어에 "헛소리"

미테구청, 소녀상 영구설치 위한 후속조처 착수 안해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6일(현지시간)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여성의 날 기념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현지 여성단체 코라지 여성연합과 코리아협의회가 공동주최했으며, 참가자들은 베를린시청 티어가르텐 지역사무소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평화의 소녀상은 베를린에 머물러야 합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6일(현지시간) 113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시위가 열렸다.

현지 여성단체 코라지 여성연합과 코리아협의회가 공동 주최한 이 날 행사에는 100여 명이 참가해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와 성평등, 성별 임금격차 철폐 등을 촉구했다.

안네 회커 코라지 여성연합 베를린 미테구 대표는 이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소녀상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상징이자 성폭력과 전쟁범죄에 대한 경고의 기념물이라는 점에서 이곳에서 여성의 날 집회를 주최하게 됐다"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소녀상이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함께 싸워왔다"고 말했다.

그는 소녀상의 영구설치와 관련해서는 협의가 계속돼야 하겠지만, 이날과 같이 집회 등을 하면서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면, 소녀상이 계속 머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베를린시 미테구의회는 지난해 12월 1일 전체회의를 열고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결의안을 의결하고, 평화의 소녀상이 미테구에 계속 머물 방안을 구의회 참여하에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관할 미테구청은 아직 아무런 후속조처에 나서지 않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단 올해 9월 말까지 머물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상태다.

회커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로 비하한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는 "그것은 헛소리"라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로 성노예화 된 전쟁범죄의 피해자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정화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이날 집회에서 "오늘은 처음으로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독일 시민들과 함께 여성의 날을 축하하게 된 날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면서 "이는 전쟁범죄에 대한 침묵과 부정은 이제 끝나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소녀상은 75년 전 국가가 조직적으로 소녀들과 여성을 강제로 성노예화한 범죄에 대한 상징이자, 함께 연대해 범죄에 대해 증언하고 피해자에서 평화활동가가 된 여성들에 대한 상징"이라며 "그들이 바란 것은 제대로 된 사과와 공식적인 배상, 이같은 범죄가 반복되지 않게 아이들을 교육하겠다는 약속"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녀상이 이곳에 계속 머물러 베를린의 차세대에 여성의 권리와 세계 평화에 관해 얘기해주기를 바란다며 "평화의 소녀상은 영원히 베를린에 머물러야 한다"고 구호를 외쳤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6일(현지시간)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여성의 날 기념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현지 여성단체 코라지 여성연합과 코리아협의회가 공동주최했으며, 참가자들은 베를린시청 티어가르텐 지역사무소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이날 시위에는 한국과 독일은 물론, 폴란드, 스리랑카 출신 여성들이 참석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여성들의 상황에 대해 연설을 이어갔다.

참가자들은 이날 베를린시청 티어가르텐 지소까지 거리 행진을 벌인 뒤 다시 평화의 소녀상 앞으로 돌아와 3시간여에 걸친 시위를 마무리했다.

 

베를린 소녀상 앞 여성의 날 첫 집회 “여성 인권 보편적 상징”

 

6일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시민들이 세계 여성의 날 기념집회를 열고 있다.

 

“오늘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이다. 베를린 사람들, 특히 이곳 모아비트에 계신 분들과 함께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세계 여성의 날’ 이틀 전인 6일 낮 1시30분께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 모아비트지구에 자리한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한정화 코리아협의회 대표가 힘주어 말했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세계 여성의 날 기념집회가 열리기까지는 여러 고비가 있었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해 가을 독일 공공장소에는 처음으로 세워졌으나, 이후 일본 정부는 전방위 철거 압박을 가했다. 미테구도 한때 철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독-한 단체인 ‘코리아협의회’와 독일 시민들이 법정 투쟁까지 벌여 지난해 연말 존치 결정을 끌어냈다. 최근에도 독일 자유민주당(FDP) 소속 구의원 3명이 “전쟁 성폭력을 상징하는 미술작품 공모전을 다시 열어 (평화의 소녀상 대신) 일반적인 전쟁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세우자”는 안건을 내놓는 등 철거를 꾀하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이날 집회는 평화의 소녀상 설치에 힘을 합쳤던 코리아협의회와 독일 여성단체 ‘쿠라제’가 함께 이끌었다. 베를린 시민단체 회원들과 현지 한국인 등 200여명이 모였으며, 참가자들은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이다’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뿐만 아니라 여성과 인권 관련 다양한 목소리가 집회에서 나왔다. “가정폭력 반대”에서부터 임신중지, 소수민족 인권 문제까지 제기됐다. 인도 동남부와 스리랑카 동북부 등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타밀족의 단체는 “국제법적 진상규명 없이 타밀족의 자유와 평화는 없다”고 외쳤다. 유엔은 싱할라족이 다수인 스리랑카에서 1993년부터 2009년까지 벌어진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 사이 내전 때 8만~10만명이 희생됐다고 추정한다. 내전 과정에서 타밀족 민간인 학살 같은 전쟁범죄 의혹도 제기됐다.

한정화 대표는 “평화의 소녀상은 성노예를 강요당한 여성을 상징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가부장제에 도전장을 낸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라며 “평화의 소녀상은 베를린에 존치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폭력 반대, 여성인권, 세계 평화를 보편적으로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은 독일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최영숙 한민족유럽연대 대표는 “평화의 소녀상은 모든 전쟁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성을 기억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가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고 했다.

시위에 참여한 정순영씨는 “지역사회에서 오래 활동한 분들이 많이 참여하셨다고 들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는데도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 끝까지 참여하신 게 놀랍다”고 소감을 말했다. 시위에 참가한 타밀족 출신 학생 미투샤 센틸콰라(16)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 인권에 주목해야 할 때 이렇게 소녀상 앞에서 시위하는 것이 뜻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베를린/글·사진 한주연 통신원

작년 전함 360척, 미국보다 60척 많아… "위력은 미국에 못미쳐"

비 핵추진 항모 2척 운용하지만 작전반경·함재기 가동능력 낮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항공모함.

 

중국의 해군력이 양적인 면에서 미국을 넘어 세계 최대 규모에 이미 도달했지만, 실제 작전능력과 위력 면에서는 미 해군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CNN 방송이 보도했다.

CNN 6일 홍콩발 온라인판 분석 기사에서 미 해군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등의 분석을 인용, 중국이 2015년과 현재 사이에 양적인 면에서 세계 최대 해군력을 보유했다고 진단했다.

미 해군정보국(ONI)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이 보유한 전함은 2015년 255척에서 작년 말에는 360척(추정)으로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미 해군이 현재 보유한 전함보다 60척이 많은 것이다.

4년 뒤 중국군 전함 보유량은 400척으로 늘어날 것으로 ONI는 예상했다. 반면에 미 해군은 전함을 장기적으로 355척까지 늘린다는 계획이지만, 국방예산 증액 난관 등의 이유로 언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미 해군, 해병대, 해안경비대 사령부가 작년 12월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해군력은 지난 20년 사이 규모 면에서 세 배 이상으로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중국이 이미 세계 최대의 해군력을 보유한 가운데 전투함, 잠수함, 항공모함, 강습상륙함, 전략 핵잠수함, 연안초계함, 쇄빙선 등을 놀라운 속도로 건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의 선박제조 능력을 갖춘 중국의 국영 조선소들은 해군력 증강의 핵심이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배수량 기준으로 중국의 조선 능력은 2018년 세계 전체의 40%를 차지했다. 중국이 최근 1년간 건조한 선박 수는 미국이 과거 2차 세계대전 기간 4년간 건조 능력을 풀 가동해 건조한 선박보다도 더 많다고 한다.

이런 중국의 막강한 건조 능력은 자연스럽게 해군력 증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전쟁이나 분쟁 상황에서 막강한 선박제조 능력은 해군력의 핵심으로 평가된다.

중국의 일부 해군 전력은 미국이나 다른 해군 강국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이 보고서는 전망했다.

미 해군대학 앤드루 에릭슨 교수도 이달 내놓은 보고서에서 "중국군은 자국 조선업에서 공급받는 물량에 더해 점점 더 정교하고 성능 좋은 전함들을 건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가운데 병력 수천 명을 한꺼번에 상륙시킬 수 있는 공격용 강습상륙함과 최신형 구축함 등은 미국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특수전부대 [신화=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이런 양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해군력은 질적인 면에서 미 해군에 아직은 크게 못 미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단 해군 장병의 숫자에서 중국 해군(25만명)은 미 해군(33만명)을 따라가지 못한다.

배수량이 큰 구축함이나 순양함 등 위력적인 전투함의 보유량도 미 해군이 압도적으로 많다.

미 해군의 공격잠수함 50척은 전부 핵 추진으로 가동해 작전 범위가 매우 넓지만, 중국은 공격잠수함 62척 중 7척만 핵 추진 방식이다.

아울러 미국이 해상 미사일 발사대가 9천기에 달하는데 중국은 1천기에 불과하다.

대양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항모전단의 규모와 작전 능력도 미국에 크게 못 미친다.

현재 중국군이 운용하는 항모는 2척으로, 모두 핵 추진이 아닌 재래식에 오래된 소련제 디자인을 기반으로 건조됐다. 작전반경이 좁고, 함재기 운용 능력도 미 해군항모전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국 항모는 재급유를 하지 않을 경우 작전 기간이 채 일주일도 안 돼 원양에선 작전이 불가하고 남중국해용이라고 한다.

반면에, 미 해군은 현재 11척의 항모를 운용하는데 항모 한 척의 전투력이 대개 한 나라 전체의 공군력보다도 더 강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중국은 향후 원자로를 갖춘 핵 추진 방식에 전자식 사출장치를 갖춘 신형 항모 건조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대양에서 작전하는 미 해군 항모전단의 위력적인 이미지는 인민 해방군이 항상 바라던 것이라고 CNN은 지적했다. 연합뉴스

미국 해군 항공모함 전단

두번째 성희롱 증언 뒤 하루 만에 “오해됐다면 미안”
주 검찰총장이 지명하는 외부 법률가의 조사도 수용
요양원 발생 코로나-19 사망자 수 축소 보고도 조사

 

앤드류 쿠오모 미국 뉴욕 주지사. AFP 연합뉴스

 

앤드류 쿠오모(63·민주당) 미국 뉴욕 주지사가 옛 참모의 성폭력 피해 주장에 사과를 표하고 독립적 조사를 수용하기로 했다. 지난해 투명하고 신속한 코로나19 대응으로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던 쿠오모는 최근 코로나19 사망자 축소 발표 의혹에 이어, 두 명의 옛 참모가 성추행·성희롱 피해를 잇따라 폭로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쿠오모는 28일 성희롱 주장과 관련해 성명을 내어 “내가 말한 것들 중 일부가 원치 않는 추파로 오해됐다는 것을 인정한다”며 “그렇게 느껴졌다면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밝혔다. 그는 “명확히 하자면 나는 누구도 부적절하게 만지지 않았고 같이 자자고 하지 않았으며 불편하게 느끼도록 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와 별도로 쿠오모 주지사실은 성명을 내어, 성희롱 주장에 대한 독립적 조사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쿠오모 쪽은 애초 이 조사를 자신과 가까운 변호사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티시 제임스 뉴욕주 검찰총장이 반발하자 제임스 총장에게 민간 변호사를 선임하도록 물러섰다. 이 변호사는 증인소환권 등을 갖고 독립적인 조사를 하게 된다.

쿠오모의 이날 발표는 전날 그의 전 비서 샬럿 베넷(25)이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쿠오모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한 뒤 하루 만에 나왔다. 베넷은 쿠오모가 지난해 자신에게 한 사람과만 성관계를 하는지, 나이든 사람과 잔 적 있는지 등 성생활에 관해 물었다고 말했다. 쿠오모는 베넷에게 20대 여성과 사귈 수 있고 주청사가 있는 앨버니에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베넷은 주장했다. 베넷은 “쿠오모가 나와 자고 싶어하는 걸로 이해했고, 끔찍하게 불편하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 24일에는 경제개발 참모였던 린지 보일런이 쿠오모가 2016~2018년 맨해튼 사무실에서 자신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고,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스트립 포커’(옷 벗기기 카드 게임)를 하자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성폭력 피해 주장이 잇따라 나오자 민주당 안에서도 비난이 들끓었다. 알레샌드라 비아지 뉴욕 주상원의원은 28일 트위터에 쿠오모를 향해 “당신은 괴물이고 지금은 물러날 때”라고 적었다. 이날 뉴욕 주의회의 민주당 여성 의원 20여명은 쿠오모와 무관한 인사에게 독립적이고 강력한 조사 권한을 줘야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날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시엔엔>(CNN) 인터뷰에서 “여성으로서 (베넷의 폭로 기사를) 읽기 힘들었다”며 조 바이든 대통령도 관련 조사를 지지한다고 전했다.

쿠오모는 2018년 브렛 캐버노가 성폭행 의혹에도 대법관에 임명되자 여성 권리에 일격을 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투(MeToo) 운동이 번지던 2019년에는 직장내 여성 보호 법안에 서명하고 “용기를 내어 (성폭력 피해) 얘기를 해준 여성들을 존경하자”고 말했다.

쿠오모는 성폭력 피해 주장들이 나오기 전에 이미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축소 보고한 의혹으로 연방 수사당국의 조사 대상이 됐다. 뉴욕주 요양원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8500명이라고 했다가 뒤늦게 1만5000명이라고 시인한 것이다. 쿠오모는 지난해 코로나19 대응에서 거짓과 무시로 일관한 도널드 트럼프와 대조를 이루며 한때 국민적 영웅으로 추어올려졌으나, 올들어 급격하게 나락으로 향하고 있다.

쿠오모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을 지내고 뉴욕주 검찰총장을 거쳐 2010년 11월 이후 뉴욕 주지사에 3연속 당선돼 10년 넘게 재임하고 있다. 아버지 마리오 또한 1983년~1994년 뉴욕 주지사를 지냈고, <CNN>의 유명 앵커 크리스가 그의 동생이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