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맞바람을 안고, 청와대는 평화로 나아갈까

● 칼럼 2020. 6. 20. 07: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시론] 다시 위기에 빠진 남북관계, 어디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실기한 것일까요?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요? 아니면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시 길이 날 수 있을까요?

남북관계 이야기입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말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2년여 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물로 남북 상시 소통의 장이었던 건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콘크리트 더미로 변했습니다. 남북은 날 선 말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세차례나 만나 백두산 천지까지 함께 오른 인연들 사이의 말이라고 하기엔 몹시 민망합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요. 시계를 되감아 보면 사실 남북관계는 14개월가량 전부터 멈췄습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은 의미 있는 전진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6월 판문점에서 깜짝 남북미 정상 회동이 있었지만 깜짝에 그쳤습니다. 하노이 이후 북한은 남쪽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 듯싶습니다. 당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에 관한 문 대통령의 중재안은 러시아 스캔들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강경파에 의해 거부당했고, 북한은 충격에 빠져 신뢰의 빗장을 걸어 잠갔습니다. 문 대통령의 충격과 당혹감도 적잖았습니다. 한 정부 책임자는 지난해 사실상 남북 간 의미 있는 연락은 끊겼다고 했습니다. 이달 초 북한이 남북 연락망 단절을 공식 선언하기 한참 전입니다.

그 뒤로 남북관계 활력은 눈에 띄게 잦아들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섣불리 어떤 것을 함께 도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는 미국에 기댔습니다. 하노이 중재 실패 후유증이 짙은 탓인지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한반도 운전자론대신 북미 협상이 우선이란 말이 많이 들렸습니다. 궁여지책 같기도 했고, 책임회피 같기도 했습니다. 남북관계에 한-미 공동보조를 맞추자는 명목으로 미국이 주도한 한-미 워킹그룹이 거부할 수 없는 제동을 걸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성에 익숙해졌습니다. 차근차근 신뢰를 쌓기보단, 트럼프의 미국이 통 크게 한 방터뜨려주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이야 북한 비핵화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것이겠지요. 무역분쟁과 화웨이 규제, 코로나19 책임 공격 등을 보면 미국의 눈은 중국에 가 있고, 이런 중국을 견제하는 데 북한은 버리기 어려운 카드입니다. 한반도, 정확히는 동북아, 더 정확히는 중국 견제에 북한을 빌미 삼는 것이 낫습니다.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북한의 쓰임새는 핵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북한의 쓰임새보다 못합니다. 청와대와 정부가 한동안 미국의 국익과 우리의 국익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요.

청와대와 정부는 통이 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은 역지사지란 말을 자주 씁니다. 상대 처지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인데, 남북관계에서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첫 정상회담 때 남한 시각에 맞춰 평양 표준시를 30분 앞당기고, 세번째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에게 15만명이 모인 평양 능라도 5·1경기장 연설을 허용한 것은 깎아봐도 북 내부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이를 감내했던 북한의 적극성에 견줄 만큼 청와대와 정부가 간절했는지, 남북관계가 얼음장같이 식은 지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 대통령도 잘못한 대처였다고 인정한 대북전단 문제에서 전단 살포를 진작부터 강하게 막지 않은 것은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이제 문 대통령은 전쟁 위기로 치닫던 2017년 세밑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적어도 남북 신뢰도 측면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시엔 북한이 불확실하나마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신이란 맞바람을 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청와대는 사리분별 못 하는 무례한 언행이라고 북한의 말폭탄에 맞대응했지만, 문 대통령의 말마따나 구불구불 흐르더라도 끝내 바다로 향하는 강물처럼남북이 가야 할 방향은 선명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20돌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 대신 “8천만 겨레앞에 함께한 약속을 언급하며 합의 정신을 강조한 것은 다시 신뢰의 기본기를 다지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남북관계는 길이 끊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길이 나곤 했습니다. 3년 전만 해도 그랬습니다. 문 대통령의 2017년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이 남북관계를 평창판문점백두산으로 이끌지 예상했던 사람은 적었습니다. 문 대통령 앞에 놓인 길도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숙명과 그의 사명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 성연철 기자 >


`1443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참가자들이 일본군 위안부피해 생존자 쉼터를 14년동안 지켜온 고 손영미 평화의 우리집소장을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일부 언론 쉼터 소장 의혹 보도 할머니 보살핀 요양보호사들 증언 인용 반박

방문·특별 요청때도 아들에 현금 제공” “길 할머니, 1일에도 3천만원 지급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최근 숨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마포 쉼터 평화의 우리집손영미 소장 관련 의혹 보도에 입장문을 내고 반박했다.

정의연은 18일 입장문을 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92) 할머니의 양자 부부가 주장한 내용을 토대로 한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16년간 정성과 헌신으로 피해당사자들을 보살펴왔던 손영미 소장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정의연을 비리집단으로 몰며, 인권운동가의 삶을 실천해 오신 길원옥 할머니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다. 일방적인 주장에 기초한 악의적 보도를 당장 중단하고 사과하라고 밝혔다.

일부 매체는 최근 길 할머니의 양자인 황선희(61) 목사 부부의 주장을 인용해 길 할머니가 매달 받던 정부 지원금이 다른 계좌로 빠져나갔고, 이를 알게 된 조씨가 손 소장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손 소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손 소장이 길 할머니의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의연은 이러한 의혹을 일축하고 황 목사가 정기적으로 오랜 기간 길 할머니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정의연은 길 할머니를 보살핀 요양보호사들이 할머니는 양아들에게 정기적으로, 방문 시 혹은 특별한 요청에 따라 현금을 제공했다는 증언했다고 밝히면서 길 할머니의 돈을 받아간 것은 황 목사 부부라고 주장했다.

황 목사 부부에 대해 정의연은 더 이상 길원옥 인권운동가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말고, 손영미 소장의 삶을 폄훼하지 말아달라. 부디 가족으로서 할머니의 건강과 안녕만 생각해달라고 당부했다. < 이재호 기자 >

이하 정의연 입장문 전문.

일부언론은 고인이 되신 쉼터 소장님과 길원옥 인권운동가, 정의기억연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를 당장 중단하십시오!

길원옥 할머니의 양아들과 며느리의 일방적 주장을 근거로, 617일 조선일보 원우식 기자의 “[단독] ‘길원옥 할머니 통장서 돈 빠져이유 묻자 쉼터소장 무릎 꿇더라,’” 617일 중앙일보 이우림·정진호 기자의 “[단독] 길원옥 할머니 가족 "뭉터기로 돈 빠져나갔다" 진술”, 618일 조선일보 원우식·조유진 기자의 “2천만원, 5백만원치매 길원옥 할머니 통장서 뭉칫돈 나가,” 618일 조선일보 사설 “[사설] ‘뭉칫돈해명 요구에 무릎 꿇었다는 쉼터 소장, 너무 썩었다등 고인의 계좌 관련 기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16년간 정성과 헌신으로 피해당사자들을 보살펴왔던 손영미 소장님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정의연을 비리집단으로 몰며, 인권운동가의 삶을 실천해 오신 길원옥 할머니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정의연은 몇 가지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1. 길원옥 할머니 양아들의 법적 양자 취득 시기는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만약 조선일보 618일 보도대로 할머니가 이미 치매상태라면, 지난 5, 길원옥 할머니의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가져가 등록한 양아들의 법적 지위 획득 과정 또한 문제가 됩니다.

2. 양아들은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길원옥 할머니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고인은 물론 쉼터에서 할머니를 함께 보살피던 요양 보호사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할머니는 양아들에게 정기적으로, 방문 시, 때론 특별한 요청에 따라 현금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직접 방문이 어려워지자, 고인이 양아들의 은행 계좌로 송금하기도 했습니다. 61일의 경우, 두 차례에 걸쳐 1천만원과 2천만원, 합계 3천만원이 양아들에게 지급되었습니다.

3. 그간 마포 쉼터에는 네 분의 요양보호사분들께서 돌아가며 길원옥 할머니를 돌봐 주셨습니다. 매월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지급되는 보조금만으로는 모자라 정대협도 추가 보조금을 지원했습니다. 2019년 한해만, 1545만원이 정대협 계좌에서 간병비로 지급되었습니다.

4. 길원옥 할머니는 인권운동가의 삶을 실천해 오셨습니다. 전 세계를 돌면서 증언활동을 하시고 다른 전쟁피해자들을 다독이며, 수요시위를 비롯해 다양한 장에서 젊은이들과 만나고 적극적인 기부활동을 통해 인권의 가치를 널리 퍼트리셨습니다. 이 모든 활동은 쉼터에서 함께 생활하던 고인께서 주야로 할머니의 건강과 정서적인 안정을 온전히 보살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14~2019년 길원옥 할머니 해외 증언활동 프랑스, 미국, 독일, 호주, 일본 등 13

2017<길원옥여성평화기금> 5천만원 기부 등

2019~2020<김복동센터> 1천만원 기부

2019~2020<김복동의희망><길원옥장학금> 1500만원 기부 및 매월 5만원 정기후원으로 현재까지 총 75만원 기부

5. 이중 <길원옥여성평화상>의 경우, 전적으로 길원옥 할머니의 기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15한일합의이후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이 지불하는 1억원을 거부한 할머니는 2017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모인 <여성인권상> 상금 1억원을 받으셨습니다. 이중 5천만원을 정의연에 기부하시고 1천만원은 양아들에게 지급했다고 합니다. 정의연은 할머니의 숭고한 뜻을 받아 <길원옥여성평화기금>을 조성하고, 이 기금으로 운영되는 <길원옥여성평화상>을 만들어 여성인권평화에 기여한 분들을 매년 선정해 상금을 수여해왔습니다. 길원옥 할머니의 기부금은 공시에서 별도로 표시되지 않았을 뿐 기부금 전체 금액에 포함되어 있으며, 정의연 결산서류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언론의 보도는 길원옥 인권운동가의 삶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자, 당사자의 소신과 의지에 따른 여성·인권·평화 활동을 뿌리째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길원옥 인권운동가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개인의 삶조차 희생한 고() 손영미 소장님과 정의연을 파렴치한으로 매도하는 명예훼손 행위입니다.

2017528일 길원옥 할머니는 독일 베를린 방문 중 진행된 IS성노예제 피해자 마르바 알-알리코씨와의 간담회에서 내가 겪은 아픔은 마음으로 참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알고 해결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도록 계속 알리고 싸워야 해. 우리의 후손들은 나같은 피해를 당해서는 안돼. 힘들지만 함께 해요라고 말씀하시며 피해자와 손잡고 위로하셨습니다.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합니다. 길원옥 인권운동가께서 손수 실천하신 숭고한 가치를 지키고 계승하는 일입니다.

 언론에 요구합니다. 일방적인 주장에 기초한 악의적 보도를 당장 중단하고 사과하십시오. 길원옥 할머니의 명예와 존엄함에 더 이상 상처내지 말아 주세요. 그의 숭고한 실천정신에 감명 받아 새로운 희망을 품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흔들지 말아 주세요.

길원옥 할머니의 가족들에게도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길원옥 인권운동가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말아 주세요. 그의 삶을 빛나게 하며 그림자처럼 돌봤던 고() 손영미 소장님의 삶을 폄훼하지 말아 주세요. 부디 가족으로서 할머니의 건강과 안녕만 생각해 주세요. 할머니께서 쌓아온 업적과 명예가 훼손하지 않게 지켜 주세요.

길원옥 할머니의 몸과 정신의 강건함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 손영미 소장님의 평안한 영면을 기도합니다.

2020618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지난달 21일 정의기억연대의 회계부정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 직원들이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정의기억연대의 피해자 쉼터로 압수수색을 하기위해 들어가고 있다.

길 할머니 요양보호사들 양아들 매주 돈 받아가” “검찰 부르면 적극 증언할 것

매달 60만원 정기적으로 가져가고 주말마다 찾아와 현금 받아가

손영미 소장 횡령양아들쪽 주장에 터무니없어 인터뷰 나섰다밝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의 양자 황선희 목사 부부가 고 손영미 평화의 우리집’(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쉼터) 소장에 대해 횡령의혹 등을 제기하고 검찰도 수사에 나선 가운데, 황 목사가 수시로 길 할머니를 찾아 현금을 가져갔다는 복수의 증언이 나왔다. 길 할머니를 6~7년 동안 가까이서 돌본 쉼터 요양보호사들은 필요하면 검찰에 나가 진술하겠다고 밝혔다.

18<한겨레>와 만난 길 할머니의 요양보호사 2명은 황씨가 매달 60만원을 정기적으로 가져갔고, 매주 주말 찾아와 길 할머니에게서 현금을 받아 갔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이렇게 다달이 황씨가 챙겨간 돈이 100~200만원 선에 이른다고 봤다. 6년 동안 쉼터에서 돌봄 업무를 한 요양보호사 씨는 할머니 주머니에 항상 돈이 5만원짜리로 수십만원 있었는데 아드님이 오면 거의 다 주셨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교통사고, 손주들의 어학연수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수시로 돈을 받아 갔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황 목사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길 할머니가 키운 양아들이다.

이들은 황 목사 부부가 최근 언론을 통해 손 소장이 길 할머니의 통장에서 뭉칫돈을 빼냈고 할머니를 앵벌이시켰다고 주장하는 점이 터무니없어 인터뷰에 나섰다고 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회계부정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서부지검은 쉼터 회계관리와 관련해 황 목사 부부가 제기한 의혹도 수사 중이다. 앞서 서부지검은 황 목사 부부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길 할머니의 통장에서 인출된 현금의 사용처를 놓고 황 목사 부부와 정의연 쪽의 주장이 엇갈리는 만큼 양쪽 진술의 신빙성이 수사의 방향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요양보호사들은 검찰에서 부르면 가서 적극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요양보호사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매달 18일 길 할머니가 일정 액수를 현금으로 뽑아달라고 하면 손 소장이 정부·서울시 보조금 등 300~350만원이 들어오는 길 할머니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 할머니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7년간 쉼터에서 일한 씨는 손 소장이 돈을 뽑아 와서 드리면 할머니께서 현금을 가지고 쓰셨다. 아들에게 용돈을 얼마 주셨는지, 어디 쓰셨는지 손 소장이 기록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의연과 쉼터의 회계부정의혹이 불거진 뒤 황 목사가 2004년부터의 지출내역을 모두 달라고 요구하며 폭언을 이어가자 손 소장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고 이들은 전했다. 씨는 손 소장이 하도 걱정하기에 아드님이 가져간 돈들인데 어떻게 그걸 기록해놓겠나. 내가 뭐라고 할 테니 걱정 말라고까지 말했었다고 돌아봤다.

요양보호사들은 길 할머니가 연세 때문에 자주 사실관계를 혼동하거나 잊었지만 치매 등급을 받은 적은 없다고도 주장했다. 2016년 장기요양등급을 받긴 했지만, 치매 진단을 받은 적 없는 길 할머니를 언론이 치매 노인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손 소장의 장례기간에 아들 황씨가 어머니가 (충격 때문에) 1분 단위로 실신하셨다고 말한 인터뷰 내용을 보고 놀란 여성가족부 관계자가 쉼터에 연락했을 땐, 길 할머니가 전화를 바꿔 받아 멀쩡한 사람을 왜 쓰러졌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길 할머니는 지난 5월 하순 황씨를 호적에 올리는 일이 논의되자 또다른 수양딸 김아무개씨를 불러 1천만원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내가 정신이 멀쩡할 때 줘야겠다는 할머니의 요청에 손 소장이 현금을 뽑아왔고, 딸 김씨는 영수증도 써뒀다. 황씨와 달리 김씨는 성인이 된 뒤 길 할머니와 연을 맺은 사이다. 요양보호사들은 딸에게 돈을 준 사실을 아들이 알면 싫어할 거라고 손 소장이 걱정한 기억이 난다. 아들이 입적하기 전에 수양딸을 챙겨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손 소장과 길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요양보호사들은 손 소장의 오랜 희생이 폄훼되는 데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씨는 가족들이 명절에도 할머님들을 모셔가지 않고 할머님들도 쉼터에 계시고 싶어 해서 소장님은 명절에도 한번도 집에 가지 못했다. 황 목사님도 소장님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씨도 소장님이 진짜 고생 많이 했다. 할머니들 대소변도 직접 다 받았다. 나도 어머니 모시지만 그렇게 못한다고 전했다.

정의연은 앞서 손 소장 관련 의혹 보도에 대한 입장문을 내어 “‘일부언론은 고인이 되신 쉼터 소장님과 길원옥 인권운동가, 정의기억연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한겨레>는 황 목사에게 여러 차례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입장을 물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 채윤태 기자 >

WHO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15만여명…하루 기준 최다”

● WORLD 2020. 6. 20. 07:5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계보건기구(WHO)19(현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전날 최대치를 기록했다면서 확산세가 가속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열린 화상 언론 브리핑에서 18일 하루에만 코로나19 확진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15만 건 이상 보고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절반 정도는 미주 지역에서 보고됐으며, 남아시아와 중동에서도 많은 사례가 보고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세계가 새롭고 위험한 단계에 있다"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착용, 손을 깨끗이 씻기 등 개인위생 수칙을 지켜달라고 촉구했다.



히말라야 라다크 갈완 계곡서 중국-인도 수십명 숨지는 유혈 충돌

100년전 영국이 설정한 해발 4천미터 국경선 맥마흔 라인이 발단

        

중국과 인도는 왜 육박전을 하나?

중국과 인도는 지난 15(현지) 히말라야 산맥 자락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에서 군사충돌을 벌여, 인도 쪽에서만 적어도 20명이 사망했다. 두 나라의 군대가 서로 사망자를 낼 정도로 충돌했는데도, 양쪽은 화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몽둥이와 돌멩이를 가지고 육박전을 벌인 것이다.

두 나라는 과거 국경분쟁으로 전쟁까지 치렀다. 국경지대에서 분쟁 우려로 이 지역 등을 순찰하는 군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기로 서로 합의한 것이 육박전의 직접적인 배경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군사충돌에서 화기를 동원하지 않고 육박전으로 일관한 것은, 전쟁사에서 기이한 사례임이 틀림없다. 양국 관계의 오랜 역사적 맥락과 중국의 전략이 맞물린 결과다.

중국에 전쟁은 심리전이다. 이를 위해 상대나 주변의 예상을 깨는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보를 한다.

현대 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전 주석에게 전쟁이란 심리전이다. 또 전쟁의 승리란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적이 자신을 깔보지 않게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했다 해도, 적에게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심지 못하면 결코 승리한 것이 아니다. ,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해도, 적에게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심었다면 승리한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과 중국 지도부의 일관된 전쟁관이다. 건국 이후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 1958년부터 20년간 계속된 진먼 포격전, 1962년 중-인 전쟁,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중-(중국-베트남) 전쟁을 벌여왔다. 이 전쟁이나 분쟁에서 중국은 중-인 전쟁을 제외하고는 군사적으로 승리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은 이 전쟁들에서 상대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심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에게 이 전쟁과 분쟁은 모두 승리한 것이다.

중국은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나 주변의 예상을 깨는 전격적인 개전 등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보를 한다. 전격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면서도 결코 일정 선을 넘지 않는 치밀함을 보인다.

전격적인 참전을 하며 100만대군을 파견한 한국전쟁, 대만이 장악한 진먼섬에 갑자기 몇만 발의 포탄을 쏘고, 이를 20년 동안 주기적으로 감행한 진먼 포격전, 전쟁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됐던 히말라야 산악 지대를 전격적으로 침공하고는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한 중-인 전쟁, 소련(옛소련)의 국경침입에 대규모 군을 동원해 정규전까지 벌인 중-소 국경분쟁, 전격적으로 침공하고는 전격적으로 철수한 중-월 전쟁 모두가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이 분쟁들에서 중국은 전격적인 개전과 참전 등으로 예기치 않던 선공을 하며, 상대를 충격과 혼란에 빠트려놓고는 일방적인 철군과 휴전으로 매듭을 짓거나, 긴장을 꾸준히 관리했다.

1979223일 베트남 군인들이 랑손성 경계선 230를 따라 침공해 온 중국군에 맞서 포를 쏘고 있다.

중국은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해 2주간 제한된 징벌적 공격을 실시하고는 즉각 퇴각했다. 일종의 긴장 관리.

한국전쟁 때 미국은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안북도까지 진군해 출몰하고 나서야, 중국의 참전을 파악했다. 미군은 충격과 공포의 대혼란 속에서 다시 38선 이남까지 후퇴해야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이기지 못한 첫 전쟁이었다. 중국은 미국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효과를 거뒀다.

진먼 포격전은 중국이 분쟁을 어떻게 이용하고 관리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장악한 진먼섬은 중국 본토에서 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대만에게는 최일선 방위선이고, 본토의 중국에게는 유사시에 본토로 침공할 수 있는 전진기지가 될 우려가 있는 섬이다. 국공내전 때 인민해방군은 이 섬을 놓고 국부군에게 큰 패퇴를 당하기도 했다. 중국에게 진먼섬은 자신의 안위뿐만 아니라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소재였다.

중국은 1958823일 전격적으로 진먼섬에 포격을 가했다. 전투 개시 2시간 만에 4만발, 그날 하루만 57천발의 포탄이 퍼부었다. 양쪽은 한달 동안 이런 국지전을 계속했다. 2차 대만해협 위기라 불린 이 사태 때 미국은 전면전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미국이 대만 국민당 정부에 진먼섬은 미-대만 방위조약의 대상이 아니라며 포기할 것을 종용한 사실이 훗날 알려지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을 다시 심리적으로 제압한 것이다.

한 달 동안의 국지전이 멈춘 뒤에도 중국의 포격은 계속됐다. 중국은 10월 들어 ‘7일간의 포격 중지를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포격을 완화했다. 10월 말에는 하루씩 걸러 포격한다고 발표하고는 포격 주기를 넓히다가, 197911일 미-중이 정식 수교하자 포격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동안 중국은 진먼섬에 대한 포격을 의례처럼 주기적으로 실시했었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임을, 그래서 대만 문제를 가지고 중국에 도전하지 말라는 긴장 관리였다.

-월 전쟁은 중국의 전쟁관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다. 중국이 핵심이익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고는 심리적인,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한 사례다. 중국과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에 맞서 같이 싸웠던 사회주의 혈맹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소련과 밀월관계로 들어가자, 양국 관계는 악화했다. 특히, 베트남이 전쟁 때 미군의 해군기지로 사용됐던 깜라인만 기지를 소련에 조차하겠다고 하자, 중국은 행동에 나섰다.

소련 견제를 위해 이미 미국과 화해를 시작한 중국은 197911일부로 미국과 정식수교했다. 수교 뒤 미국을 방문한 중국의 당시 지도자 덩샤오핑은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베트남 응징을 통보했다. 그는 어린아이가 못되게 굴고 있다. 이제 볼기를 맞을 때라며 제한적인 적절한 교훈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이는 베트남을 때려서 소련을 으르는 전형적인 중국의 성동격서 작전이었다. 미국은 군사위성을 띄워서 중국에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런 의사를 밝힌 지 2주 뒤인 19792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14개 사단병력을 동원해 전격적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316일까지 2주간 동안 진행된 이 전쟁에서 중국은 제한된 징벌적 공격을 실시하고는 즉각 퇴각했다. 중국은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까지 진격할 수 있는 전과를 올린 뒤 퇴각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전쟁은 현대 중국이 치른 전쟁 중 가장 군사적으로 실패한 전쟁이었다. 중국군은 베트남전에 단련된 베트남군의 반격을 받아서 전술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이 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의 전사자는 10년 넘게 누적된 미군의 베트남전 전사자보다도 많았다. 인민해방군 퇴각은 애초에 계획된 전략이기도 했으나, 전쟁이 계속됐다면 베트남의 반격에 밀려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소련과 베트남을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견제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겨냥했음을 고려하면, 성공한 전쟁이었다. 반소 미-중연대를 실질적으로 가동했고, 중국은 자신의 핵심이익이 침해되면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단호함을 보여줬다. 전쟁 뒤 화궈펑 당시 주석은 소련을 겨냥해 우리는 결국 호랑이의 엉덩이를 만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1962년 중국은 이번에 육박전이 벌어진 인도와의 국경 지역을 전격 침공했다. 32일간의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전쟁이었다.

이번에 육박전을 벌인 중국과 인도의 관계 역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심리적으로 제압하고는 긴장을 관리하는 중국의 전략에 따라 주도됐다. 두 나라의 분쟁거리인 국경 문제는 사실 서로를 견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이다.

-인 국경분쟁의 기원은 영국이 만들었다. 현재의 중국-인도 국경선은 영국이 그은 것이다. 중국에서 신해혁명(1911)으로 청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자, 1913년 인도와 접경한 티베트가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이 이를 인정했다. 당시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영국은 티베트도 자신의 영향권을 만들어, 청뿐 아니라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영국은 이를 위해 티베트의 독립을 공인한 뒤 인도-티베트 국경선을 획정하는 1914년 심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을 따서 맥마흔 라인이라고 불리는 인도-티베트 국경선은 양쪽의 역사적 국경지대인 히말라야 산맥 지역의 많은 부분을 인도로 넘기는 쪽으로 그어졌다. 히말라야 산맥 동단인 현재의 아루나찰프라데시 등을 인도령으로 확정한 것 등이 대표적 예다. 남한의 3분의 2가 넘는 83면적의 아루나찰프라데시는 역사적으로 티베트권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번에 중국과 인도가 육박전을 벌인 라다크가 포함된 카슈미르는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이 서로 영유권 분쟁을 벌여, 아직도 정식 국경이 획정되지 않은 곳이다. 맥마흔 라인 때문이다.

맥마흔 라인이 그어진 심라조약 체결 당시 중국은 이 맥마흔 라인을 인정하지 않고 퇴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줄곧 식민시대 때 제국주의 영국의 이익에 따라 그어진 중-인 국경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중국과 인도의 국경은 히말라야 산맥이다. 이번에 육박전이 벌어진 라다크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 사면에서 더 북쪽으로 들어간 곳이다. 중국은 인도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북쪽으로 쑥 들어와 영토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1949년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전격적으로 티베트를 다시 점령하고 중국의 일부로 선포했다. 그러면서, 맥마흔 라인이 중국에 불리하게 그어졌다고 주장하며 중-인 국경 문제를 제기해왔다. 중국에는 국경 자체도 문제이기는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티베트 문제 때문이다. 티베트 문제에 대한 외부의 개입을 막는 구실이다. 티베트와 접경한 인도와의 분쟁을 관리하며 티베트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인도의 개입도 막으려는 것이다.

19621020일 중국은 이번에 육박전이 벌어진 카슈미르의 중국령 지역인 악사이친과 맥마흔 라인의 주요 대상인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양국의 국경분쟁 지역을 전격적으로 침공해, -인 전쟁을 개전했다.

한 달 하고도 하루가 더 걸린 32일간의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전쟁이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해발 4m 이상에서 벌어졌고, 대부분의 보급은 인력으로 직접 조달됐다. 이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을 못했는데, 중국은 그 허를 찌른 것이었다.

중국은 이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압승했다. 중국은 카슈미르에서 인도령 깊숙히 진군해 점령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도군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중국은 그 점령한 영토를 자신의 영토로 영유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한 뒤 철군했다. 그리고는 맥마흔 라인에 따라서 대략 그어진 실질통제선밖으로 물러났다.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는 1959년 자와할랄 네루 인도 당시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맥마흔 라인을 존중하는 실질통제선을 선포했다. 자신들이 주장하던 영유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할 기회였는데도, 중국은 이를 추구하지 않았다.

중국군과 인도군의 충돌이 일어났던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을 찍은 위성사진. 사진은 양국 충돌 전인 지난 9일에 찍은 것이다.

 ‘-전쟁 원인은 영유권보다 티베트 문제였다. 인도가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티베트의 독립기지로 허용했던 것이다.

그럼 중국이 악전고투의 가장 높은 전쟁을 치른 이유가 무엇인가? 티베트 문제 때문이었다. 1959년 티베트에서 반중국 폭동이 일어났고, 중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세웠다. 인도가 달라이 라마를 망명을 받아들이고, 인도를 티베트의 독립기지로 허용한 것이다. 인도는 또 실질통제선에서 중국군의 순찰을 방해하고, 중국령 쪽으로 들어와 초소를 세우기도 했다.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는 중국의 요청도 거부했다.

중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인도를 제압한 것이다. 군사적으로 승리했을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중국에 대한 도전을 단념케 했다. 만약 중국이 점령한 지역을 자국령으로 선포했다면, 인도의 도전은 계속되고 관계가 회복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해줌으로써, 인도의 체면도 살려줬다. 긴장을 관리하려 한 것이다.

그 후에도 양국의 국경분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이 국경분쟁은 양국에 사실 심각하고 실질적인 안보문제가 아니다. 두 나라의 지정적인 상황 때문에 역사적으로 서로에게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은 두 나라의 역사적인 교류를 항상 제한해왔다. 접경하고 있으나,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교류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중국과 인도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별개의 세력으로 살아왔다. 현재도 안보 측면에서 정면으로 충돌할 여지는 거의 없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한다면, 원만한 관계가 안될 수 없다. 하지만 티베트 문제 등 서로의 영역을 건드릴 땐, 국경분쟁도 심화하는 등 양쪽은 긴장을 고조하고 관리했다.

1962년 전쟁 뒤 냉각관계였던 양국의 관계는 인도를 지원하던 소련이 해체된 뒤 전기를 맞았다. 이미 양국은 1975년을 마지막으로 총격을 교환하는 분쟁은 하지 않았다. 양국은 1997년 상호조약을 체결하고는 실질통제선의 2안에서는 어느 쪽도 화기를 발사하지 않고, 명백한 군사작전이나 총과 폭발물을 동원한 사냥도 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그 이후에도 양국의 국경분쟁은 계속됐으나, 이번처럼 화기를 동원하지 않은 육박전으로 일관했다. 육박전을 주기적으로 벌이면서도 양국 정상이 회담하는 기묘한 관계를 연출해왔다. 지난 2018년에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우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는 양국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기도 했다.

인도 군인들이 18(현지시각) 남부 수라야펫에서 열린 동료 군인 산토쉬 바부 대령의 장례식장에 참석해 있다. 바부 대령은 지난 15일 중국과 접한 라다크 지역에서 빚어진 양국간 충돌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인도가 호응하자 육박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양국은 즉각 전화회담을 갖고 긴장 완화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양국의 국경분쟁은 다시 재현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중국을 포위하려는 새로운 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이 나오고, 인도가 호응하면서부터다. 지난해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에서 양쪽의 충돌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고, 이번 5월 들어 라다크의 판공 호수에서 충돌했다. 사실상 중국 쪽이 먼저 도발한 것이다.

이번 충돌도 중국군 병력이 압도적인 것을 고려하면, 중국 쪽이 사실상 도발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 쪽에서만 20명 이상이 사망했으니 1962년 전쟁 이후 최악의 분쟁이다. (중국은 사상자 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양쪽은 육박전으로 일관했고, 양국 외교장관은 즉각 전화회담을 갖고는 긴장 완화를 다짐했다. 모디 인도 총리는 자국군 병사들이 수십명이나 사망했는데도 중국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희생당한 자국군 병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며 인도는 평화를 원하나, 도발을 받았을 때는 그것이 어떠한 상황이라도 적절한 대응을 할 능력이 있다고만 말했다.

중국은 다시 진먼섬 포격전 같은 긴장 관리 분쟁을 선택했고, 인도 역시 그에 맞춘 대응을 할 것을 시사한 것이다. 일종의 약속 대련 같은 것이다. 가장 높은 지역에서 육박전으로 일관하면서도 정상회담을 갖는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전쟁과 평화가 동전의 양면임을 새삼 말하고 있다. < 정의길 기자 >

중국군은 그날 밤 인도군에 못 박힌 쇠막대를 휘둘렀다

인도 군사 전문가 관련 무기 사진 공개인도 여론 들끓어

중국군과 인도군의 국경 충돌로 수십 명의 사망자 발생한 가운데 17일 중국 베이징 주재 인도대사관 앞에서 중국 공안이 경비를 서고 있다.

중국군이 지난 15일 인도군과의 국경 무력 충돌 때 못이 잔뜩 박힌 쇠막대를 휘둘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인도 군사 전문가 아자이 슈클라는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중국군이 인도군을 공격할 때 사용한 무기라며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BBC는 이 무기는 못이 박힌 쇠막대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슈클라는 "이런 야만적인 행위는 반드시 비난받아야 한다"며 이것은 깡패짓이지군인의 활동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이 사진이 공개되자 인도 네티즌은 중국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분노했다. 인도와중국 정부는 아직 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상태다. 앞서 중국군과 인도군 600여명은 15일 밤 인도 북부 라다크지역 분쟁지 갈완계곡에서 무력 충돌했다.

인도 육군은 이 충돌로 자국 군인 20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중국 측은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았지만 역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와 중국은 국경 문제로 1962년 전쟁까지 치렀지만, 아직도 국경을 확정하지못하고 3488에 이르는 실질통제선(LAC)을 사실상 국경으로 삼고 있다.

이후 양국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 국경 지대 최전방 순찰대는 총기나 폭발물을 휴대하지 않기로 1996년 합의했다. 설령 총기를 휴대하더라도 탄창을 제거한 채 등에 메야 한다. 이 때문에 양국 군인은 과거 국경 충돌 때 총격전 대신 난투극이나 투석전을 벌였다.

하지만 인도 측은 이번에 중국군이 전례없이 치명적인 무기를 동원해 비무장 상태인 인도군을 계획적으로 공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도군 일부는 무기에 희생됐고 일부는 계곡 아래 강으로 밀려 떨어져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인도 군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경 지역 교전 대응 방식을 수정하는 방안등을 검토 중이라고 인도 언론은 보도했다.

중국, 인도 국경에 격투기 선수들 보낸다

난투극 때 이기려 우수선수들 선발 총기·폭발물 없이 이길 무쇠주먹’”

중국이 인도와의 국경 갈등 속에 격투기 선수 등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새로 편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19일 중국 인민해방군 뉴스포털인 중국군망에 따르면 인도와 인접한 시짱(西藏·티베트) 지역에 주둔하는 시짱군구 등은 15일 라사(拉薩) 경비구역 민병훈련기지에서 새로 창설한 5개 민병대에 대한 깃발 수여식 행사를 열었다.

특히 홍콩매체 명보에 따르면 이번에 만들어진 쉐아오(雪獒·사자개) 고원반격부대는 국내외 대회에서 수차례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격투기 클럽 팀원으로 구성됐다. 왕하이장(汪海江) 시짱군구 사령관은 쉐아오 부대에 대해 "반격해 상대를 제압하는 '무쇠주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민병대 창설은 군이 직접 나설 때에 비해 우발적 충돌이 확전되는 것을 막는 한편, 싸움에 특화된 격투기 선수들을 투입해 난투극 발생시 인도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양국은 국경지대에서의 확전을 피하기 위해 최전방 순찰대의 총기·폭발물 휴대를 금지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핵보유국인 양국의 군인들은 국경지역에서 충돌 때 총격전 대신 난투극이나 투석전을 벌인다.

양국군이 지난달부터 접경인 라다크 지역에서 긴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 15일 또다시 무력 충돌이 발생해 양측에서 수십명씩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는 상황이다.

쉐아오부대 뿐만 아니라 새로 창설된 쉐잉(雪鷹·) 공중순찰부대는 기업체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공중순찰 및 삼림감시 등을 담당한다.

이밖에 쉐거(雪鴿·비둘기) 극지통신부대에는 '고원 응급통신 경호'라는 통신기업이, 쉐랑(雪狼·늑대) 극지등반부대에는 유명 등산팀과 고냉지대 등산훈련학교 등이, 병참부대인 쉐후(雪狐·여우)에는 모 광업개발기업 파견팀이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