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유효수와 무효수

● 교회소식 2012. 9. 18. 12:41 Posted by SisaHan

숫자에는 유효수와 무효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1부터 9까지를 유효수라고 합니다. 반면에 0은 무효수에 해당합니다. 유효수는 많을수록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0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아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0일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유효수 뒤에 붙게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유효수 뒤에 붙은 0은 대단한 진가를 발휘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처럼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닌 수이지만 다른 유효수에 붙어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입증하는 것이 무효수의 특징이고 매력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 무효수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들도 무효수와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유효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주의 중심이며 존재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효수가 없이는 우리 무효수 인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가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습니까? 대단한 업적을 남기셨습니까? 공부를 잘해서 박사학위들을 헤아릴 수 없이 받았습니까? 부와 명예를 얻으셨습니까?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다 가지고 누리고 계십니까? 그렇지만 그것들 자체로서는 그냥 0일 뿐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대단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서는 전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들일 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가치를 지니고 의미를 가지고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효수가 앞에 붙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이 비밀을 일찍이 깨달은 시편 기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편 127편 1~2절)
 
우리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과 능력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별 것 아닙니다. 이처럼 별 것 아닌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엄청난 일을 행하고 위대한 사역들을 감당해내었던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그들은 한결같은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붙어 다니기’의 대가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놈보다 한 수 앞서는 고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붙어 다니는 놈’입니다. 아무리 나는 놈이라 해도 이 붙어 다니는 놈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날고 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붙어 다니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간에 보람과 기쁨과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외형적 성취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보람과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많은 외형적 성취, 그것은 또 하나의 0을 덧붙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끝없는 0의 행진이 무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게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만들어내는 0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법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보람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목회의 현장에서도 이런 경험을 종종 하곤 합니다. 교회가 성장해가는 것이 대부분 목회자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서 보람과 기쁨과 만족이 목회자에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라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만은 아니며 작은 교회 목회자라고 해서 모두 불행한 것만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회의 현장에서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목회자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그런 보람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에게 붙어있기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인생을 하나님은 결코 내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날마다 순간마다 붙어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부를 책임지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닫고 사는 자들이여! 복 있을진저.♥

< 이상천 목사 - 마니토바 새순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스쿠발로지

● 칼럼 2012. 9. 17. 18:04 Posted by SisaHan
나는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속으로 실소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글의 내용도 그렇고 제목도 그렇다. 
먼저 제목을 보자. 이 ‘스쿠발로지’란 옥스포드 사전이나 웹스터 사전에 나오지도 않는 영어 단어이다. 영어를 쓰는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라 해도 이 단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 이 단어를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세상에! 영어 단어를 만들다니. 이 단어의 출처는 헬라어의 ‘스쿠발론’인데 성경 빌립보서에서는 ‘배설물’이라고 한다. 이 스쿠발론에다 학문이나 론을 말하는 로지를 붙여 ‘스쿠발로지’란 단어를 만들었다. 
 
이 스쿠발론은 사람의 몸에서 배설되는 것으로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 이것은 최고의 것으로 만든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자신이 먹을 때는 어쨌던 최고 최상의 것으로 먹고 몸 속에 들여다 놓은 것이다.
둘째 늘 가지고 다닌다. 적절한 시간이 올 때까지는 몸 속에 늘 담고 있으며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셋째 그러다 적절한 시간이 되면 꼭 버려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만든 것이라해도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스쿠발론에 대한 나의 지론이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배설물 스쿠발론을 말할 때 자신이 가졌던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과감히 버렸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실소를 한 것은 나의 실수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는데 저자가 한 번은 전남의 한 사찰을 방문했다가 해우소(뒷간)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씌어진 글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의 내용은 이랬다. “ 대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세요.” 저자는 이 글을 읽고 해우소에서 나와 그 앞에서 쪼그리고 그렇게 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실수한 것은 이 글을 읽은 뒤 너무 감동적이어서 글의 내용만 기억하고 내 나름대로 각색해서 전달했다가 실제 내용과 약간 다른 것 같아 나의 실수에 실소를 했다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번뇌와 고민을 밀어내기 위해 얼마나 힘썼습니까? 그러니 원문과는 차이가 있으니 저자께서 아시면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
그런데 나는 내가 한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쿠발론을 결코 몸속에 가지고 있으면 안되기에 밀어내려고 얼마나 용을 쓰는가? 특히 변비 때를 생각해 보라. 안간힘을 쓰면서 힘을 주지 않는가.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스쿠발론과 같은 것을 과감히 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의 신앙생활하는 모습이다. 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하고 이제는 결별해야 할 때는 버려야 한다. 그것이 혹시 사랑스럽고 귀한 것이라 해도 버려야 한다는 각오를 했다면 용을 써야 한다.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쳐야 한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쿠발론을 그대로 몸 속에 둔 채 그냥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선택의 길이 아닌가? 
또한 내게 주어진 어떤 문제나 고통을 그리스도 앞에 내어놓고 기도할 때 또는 자신이 가진 교만이나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포기하려 할 때 그게 쉽지가 않아 고민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럴 때 해우소에 들어간 사람처럼 용이라도 써 봤을까? 그냥 그렇게 있다가 어정쩡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나 않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칼럼] 과거가 쏟아내는 질문들

● 칼럼 2012. 9. 17. 17:53 Posted by SisaHan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하지 말고, 보라’고 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규칙을 알려면 생각하기 전에 일단 보라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을 일단 보자.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하루에도 몇 건씩 보도된다.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왕따와 학교폭력, 입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청소년의 자살 소식도 매일 들린다. 박근혜 후보가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을 방문하여 악수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쌍용차 노조원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박근혜 후보는 “민생 현장을 많이 다니면 그런 분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월 박근혜 후보와의 만남을 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에스제이엠(SJM) 노동자의 파업 현장에 투입된 경비업체 컨택터스의 무차별적 폭력을 경찰은 코앞에서 보고도 방관했으며 신고 역시 무시했다. 약 22조원을 들여 파헤친 4대강에서 심각한 녹조현상이 일어났다. 4대강 사업에 참여한 건설사의 비리와 짬짜미가 밝혀졌다. 이명박 취임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내곡동 투기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면,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어떤 규범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인지. 그리고 또 생각해보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유신정권 시절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죽음과 폭력과 기만과 약육강식으로 뒤덮인 지금과 같은 세상이었을까? 
유신이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처였다는 홍사덕 전 의원의 발언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앞으로도 그러한 독재를 다시 반복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경제를 살리겠다고만 하면 범법자를 대통령 자리에 앉힐 만큼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를 가장 먼저 원한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힘을 가진 자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고 힘없는 자의 생존권은 짓밟아버리는 정책도 수긍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죽여 없애거나,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그만이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하고 돈 많이 벌어서 출세해야 한다고 자식들을 가르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일까. 범죄율과 자살률이 낮은, 더불어 행복한 세상.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더라도 행복지수가 높은 세상을 함께 꿈꿀 순 없을까.
 
지나간 것은 미화하기 쉽다. 하지만 현재를 제대로 살려면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진실을 밝히고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진실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위험하고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일이다. 전태일의 분신과 쌍용차 해고자의 죽음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일본 총리의 발언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난무하는 죽음과 폭력과 기만 사이로, 과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집요한 질문이 들리지 않는가. 
일단 보았다면, 괴롭더라도 생각해야만 한다. 대충 처박아둔 과거와 외면하고 싶은 현재의 문제에 대해. 그래야 내일을 꿈꿀 수 있다. 과거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일단 멈추라고. 생각하라고. 부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 최진영 - 소설가 >


모처럼 남북관계와 관련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 정부가 지난 3일 수해지원 의사를 밝힌 데 대해 북쪽이 일주일 만에 조건부 수용 뜻을 밝히고 나왔다. 남북 사이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남쪽이 인도적 문제로 손을 내밀고 북쪽이 뿌리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은 홍수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도움뿐 아니라 상호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북쪽은 그제 남쪽의 수해지원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면서 지원 품목과 수량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바로 직전, 추석을 맞아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협의를 하자는 남쪽의 제안을 5·24 조처의 철회와 금강산관광 재개를 요구하며 사실상 거부한 것과는 사뭇 다른 자세다. 북쪽이 이산가족 상봉보다 수해지원에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인적 교류보다 물자만 받는 수해지원이 정치적 부담이 작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물론 7, 8월의 연이은 폭우와 태풍으로 수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봐 외부의 지원이 어느 때보다 절박한 상황이기도 하다. 북은 지난 8, 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적십자 회의에서도 홍수 피해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북이 남의 제안을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 지원 품목과 수량을 알려달라고 토를 단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부에서는 남쪽이 제시하는 품목과 수량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오만한 태도’라고 비난하지만, 지난해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다. 지난해 여름 북에 수해가 났을 때도 역시 우리 정부는 50억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고, 북은 식량과 시멘트 등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런 품목은 군용으로 전용될 우려가 있다며 초코파이와 영유아용 과자 등을 보내겠다고 고집하고 북이 이를 거부한 일이 있다. 마치 물이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커피를 주겠다고 우긴 꼴이다.
정부는 이번엔 지난해 초코파이 파동을 교훈 삼아 북쪽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통크게 지원하기 바란다. 다른 나라에도 ‘한 손 아닌 두 손으로 하는’ 원조를 하라고 하면서 동포에 대한 인도지원에 인색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