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복감 좌우‥ 친구 사귀기

페이스북 같은 SNS가 발전하면서 친구(?)들이 부쩍 많아진 시대가 됐다. 수백명은 기본이고 수천, 수만명의 온라인 친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존 오프라인 중심의 교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 네트워크 덕분에 그만큼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간편해진 덕분이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평균 페친 수는 338명이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로 맺어진 이들과의 관계를 진짜 친구 사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친구관계 최대범위 ‘던바의 수’, 150명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안정적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돼 있다. 이는 인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어 일정 규모 이상의 인간 관계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인지과학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던바는 그 범위를 100~230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중간값인 150명을 일반적인 친구 관계 최대 범위라고 주장했다. 이를 ‘던바의 수’라고 부른다. 던바의 개념 규정에 따르면 “초대받지 않은 술자리에서 우연히 동석해도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 이 범주에 포함되는 사람이다.
과학자들이 친구 수에 관심을 갖는 건 친구가 삶의 행복감, 만족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 사회적 친교 정도를 보면 30년 후의 고독감, 웰빙, 우울감 정도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선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많은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의 경우 사람들과 교류에 쏟는 시간은 하루 평균 41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TV나 출퇴근에 보내는 시간의 3분의 1 수준이다.
또 친구 관계라 해도 친밀감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친구 또는 절친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도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추정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미 캔사스대 연구진이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캔자스대 제프리 홀(Jeffrey Hall) 커뮤니케이션학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사회와 개인 관계 저널> 3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친구나 절친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추정했다.

지인-그냥 친구-정식 친구-절친
연구는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됐다. 우선 연구진은 지난 6개월 안에 이사를 해서 새 친구를 사귄 성인 3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사 후에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지해 왔는지, 즉 그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조사했다. 이와 함께 응답자들에게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네개의 범주로 구분하도록 했다. 아는 사이(지인, acquaintance), 그냥 친구(casual friendship), 정식 친구(friend) , 가까운 친구(절친, close friend)로 나눠보도록 했다. 그리곤 이를 통해 사람들이 각각의 단계에 해당하는 친교를 쌓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추정했다. 지인의 개념은 “알고는 있지만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연구진은 이 단계에선 같이하는 시간이 10시간 늘어날 때마다 친구가 될 가능성이 3.9%씩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했다. 다른 한 연구는 112명의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연구진은 학생들에게 개학 이후 최근 2주 동안 만난 사람 중 2명을 고르도록 했다. 그리고 4주와 7주 후에 이들과의 친교가 어떤 단계까지 발전했는지를 추적했다.
연구 결과 그냥 친구 관계가 되는 데는 40~60시간이 걸렸다. 정확하게는 만난 지 첫 3주 동안 43시간을 함께 보낼 경우 친구가 될 확률이 50%를 넘었다. 그 다음 단계인 정식 친구가 되는 데는 80~100시간이 걸렸다. 대학 신입생의 경우엔 첫 3주 동안 57시간, 성인그룹의 경우엔 3개월 164시간이 친구 단계가 격상하는 지점이었다. 최고 단계인 절친이 되는 데는 200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생은 3주간 119시간, 성인은 3개월간 219간을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친교에 공들인 시간과 우정의 정도가 비례 관계를 보인 것이다. 연구진은 “종합해 보면 3주에 걸쳐 120~160시간을 보낼 경우 절친관계로 발전해갈 수 있지만, 실제 그런 관계가 되려면 6주 동안 200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신호
또 대학생들은 성인에 비해 쉽게 좋은 친구 관계를 맺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한테 열심히 빠져들었다는 걸 뜻한다. 연구진은 “사귄 지 6주에서 9주 사이에 친구 단계가 격상된 사람들은 그 3주 동안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두배로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사에 참가한 어떤 신입생은 한 달 동안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1을 한 친구와 보내기도 했다.
친구가 되자고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같이 보내는 시간만으로 친구 관계를 평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홀 교수는 그러나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 친교 관계의 맥락도 중요하다. 홀 교수는 우정을 쌓으려면 친교의 공간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함께 일하는 사이라면 사무실에서 벗어나 바깥에서 점심이나 음료, 술을 마시라고 권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 곽노필 기자 >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

● 교회소식 2018. 5. 1. 19:45 Posted by SisaHan

은퇴목사회, 염광교회서 4월 모임


한인 은퇴목사회(회장 정태환 목사) 4월 정기모임이 지난 19일 오전 11시 염광교회(담임 이요환 목사)에서 열려 예배를 드리고 오찬과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이재철 목사 사회로 드린 예배는 한영길 목사의 기도에 이어 이요환 목사가 누가복음 9장 28~36절을 본문으로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 목사는 “교회 안에서, 또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예수님과 무관한 말이 들리고 또 그런 일들에 관심을 갖는 일이 많은데, 신앙인과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만 들리고 예수님만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면서 “오직 예수님만 보이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교회와 신앙인,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르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 가기를 소망한다”고 말씀을 전했다.

참석자들은 말씀을 들은 뒤 통성기도를 통해 나라와 교회, 그리고 회원 목사들의 건강을 위해 뜻을 모아 기도했다. 이어 특주 순서에 홍원표 집사가 색소폰 연주로 은혜를 전했다. 광고시간에는 양로원 요양 중인 김향순, 정동섭, 최기남 목사를 임원진이 심방한 것과 기도를 당부하는 등 정태환 회장이 전한 광고를 들은 뒤 김인철 목사(염광교회 원로)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염광교회 여전도회가 마련한 오찬을 함께하며 회원들이 친교를 나누었다.
한편 은퇴목사회는 5월 정례모임을 17일(목) 오전 11시 토론토 한인장로교회(담임 손명수 목사: 67 Scarsdale Rd. M3B 2R2)에서 가질 예정이다.

< 문의: 905-380-7966, 416-909-0059 >


크리스천들은 “주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있는 특권이 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의 한 지체요 기뻐하는 자 들이다. 크리스천의 의무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기에,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성화를 통한 구원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성도>로 부름 받은 자는 모름지기 이 이름대로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목회자)들의 훌륭한 설교는 훌륭한 선물로서 그 설교가 <영적>일 경우에는 더욱 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받게 되는 것이다. 교인들은 사역자들의 영적인 말씀 증거를 통하여 그들이 위로는 가지가 무성할 뿐 아니라, 아래로 뿌리가 깊히 박히게 하려는 뜻에서 이다. 제 아무리 독실한 성도라도 요지음 같이 뒤흔들리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견고하게 서 있을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견고케 서는 데는 <영적 은혜>가 큰 효험이 된다.

인간은 때때로 훌륭한 궤변가(詭辯家-sophist)이면서 동시에 불량한 크리스쳔일 수 있다. 곧 사변(思辯-DISCRIMINATION)에는 정확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허술하고 제멋대로 하는 말이다. 인간은 종교 문제의 논쟁에 있어서는 실력자 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능력에는 이방인 일 수가 있다. 그런고로 겉치레 지식은 겉치레 경건을 낳을 뿐이다(딤후 3:5). 겉치레 지식은 인간을 속일 수는 있어도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그럴수 없느니라. 겉모양이 능력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걸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마치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사람이다. “여호와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세례가 세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이며,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8-2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영적인 크리스천은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기를 낮추고 참으며 참사랑이 있다.

주님의 영이 없으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없다 우리 영혼의 틀(FORM)과 성향이 그리스도의 본보기(Pattern)에 일치해야 한다. <성도>들은 형제애에 가득한 사랑으로 형제들의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사역자들에 대하여는 하잘 것 없는 아첨과 입발림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와 그들 속에 있는 주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형제들과 타인에게 있는 장점과 칭찬할 만한 점들을 관찰해서 칭찬하는 데 있어 적극적 이어야겠다. 이것이 우리들이 현 세상에서 누리는 덕과 효용성에 대한 보상이자 타인들로 하여금 거룩한 선의의 경쟁에 나서게끔 하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능히 서로 권하는 자” (롬 15:14), 즉 특별한 은사인 <화술의 은사>가 필요하며 선함과 지식을 갖춘 자는 그들이 가진 것을 남들에게 효용이 되도록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충성된 <사역자>들이 그들의 일보다 자기 교우들의 은사와 은혜가 뛰어나게 좋은 걸 보는 것은 큰 위로가 되고 되어야 된다. 교우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권고할 수 있고 또 자발적이라면 얼마나 기쁘고 기쁘겠는가!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투철한 <영성>이 넘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 겠는가!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주 하나님의 받아들일 만한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성화받지 않은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참고 견디시며 위로하시는 주하나님이 <낙심>해 하는 자들을 곧장 위로해 주시는 주하나님 이심을 알자! 우리가 주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인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있게 된다. 조급해하고 투정대며 짜증내는 우울한 기질보다 화평을 잘 깨뜨리는 것도 없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진리에 입각해야 하고 마음에 화평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위에서 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한 마음”(롬15:6)이고 크리스천들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주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 하라고 배웠다. 마음이 하나되지 못한 곳에 입이 하나 될 리 없으며 이 둘이 서로 하나되지 않는 곳에 주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리 만무하다. 즉 화평한 공동체는 거룩한 성회이기에 기쁨이 넘치는 한목소리로 한 찬양의 합창이 나와야 한다. <신앙>의 비결은 우선 그리스도에게 돌아서서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이며 그 구원 능력을 확신하고 그를 신뢰하는 데 있다. 주님을 아는 자들은 주님을 신뢰 할것이다. “신뢰”는 어머니요 “노력”은 그 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 소망은 바램을 전제로 하여 주하나님께 드리는 바람이 곧 <기도>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목마름

● 교회소식 2018. 5. 1. 19:35 Posted by SisaHan

내가 신앙 생활하면서 살아 왔던 지난 수십년 동안의 한국 교회를 되돌아 볼 때, 가장 먼저 경험한 것은 교회마다 유행처럼 행했던 말씀 부흥회와 신유 집회이다. 그 후 한 때는 많은 진보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의식을 가지고 정치 참여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 교회와 신학교 안에도 정치 참여 구호와 현수막이 휘날렸다. 그리고 또 한 때는 제자훈련, 교회성장 세미나, 전도 세미나 등의 훈련 프로그램의 개최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후에는 시조를 쫓아 열린 예배가 유행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한국 교회는 맘몬주의, 양적 팽창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롤모델이 되는 교회, 목사, 평신도 지도자들을 찾아 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교회와 성도는 십자가 진리의 길을 따라가기 보다는 세속의 물결 속에 휩쓸려 세상의 부귀와 자랑과 영광을 쫓아 가고 있다.


이런 영적 어둠의 시대에 한국 교회와 이민교회에 영적 각성과 참된 부흥을 향한 목마름이 필요하다. 지금 교회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물결을 따라 성장주의, 팽창주의, 성공주의, 패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목사들은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는 선지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며 예배 의식을 진행하는 배부르고 타락한 제사장들이 되어 버렸다. 성도들은 헌신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즐거움과 필요를 채워주는 행사와 프로그램을 쫓아 교회를 다닌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대형교회로 몰려 든다. 결국 작은 교회는 점점 작아지거나 문을 닫고 대형 교회는 형식적인 신자들의 숫자만 늘어 간다. 이렇게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의 능력과 생명력을 상실한 채 편안함과 즐거움과 풍요로움에 취해 주님의 복음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이 시대의 어둠을 찬란하게 밝히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영적 각성과 참된 부흥에 대한 거룩한 부담과 갈망이 있어야 한다. 영적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작금의 기독교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목사로서 거룩한 슬픔을 느낀다. 또한 때로는 목사인 나 자신의 영적 무능함과 초라함에 더욱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룩한 슬픔과 자아 각성을 통해 나에게 새로운 영적 각성과 영적 부흥에 대한 거룩한 부담과 갈증을 주신다. 이것은 참된 교회됨의 회복에 대한 목마름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참된 신자됨에 대한 목마름이다. 초대 교회의 부흥을 가능하게 하였고, 종교 개혁을 가능하게 하였고, 청교도들의 순교의 신앙을 가능하게 하였던 참된 복음의 부흥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갈증이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과 주님의 사랑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사무치는 갈망이다. 자신의 부귀와 영광과 자랑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과 십자가 고난의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참된 부흥과 각성에 대한 열정이다. 이 어둠의 시대에 이러한 영적 목마름이 이 땅에 불같이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 박원철 목사 - 늘사랑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