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누가복음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라는 예수님의 수사학적인 의문문을 접하면서 이번에는 특별히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황당하기도 하고 절망감마저 들게 했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재림에 앞서 세상의 영적 상태가 일반적으로 개선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식어져 희박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림 시에 진실한 믿음의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탄식의 말씀이기도 하다. 주님은 창세 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계시면서 몸소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이 시간에도 한치의 착오도 없이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틀림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 나셔서 갖은 박해와 고통과 질고 속에서도 세상에서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위해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기적으로 사역하셨으나 주님의 임재와 권능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가는 것을 보시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면에서 믿음이 부족한 여섯가지의 비유를 직접 말씀하신 누가복음 18장 전내용을 분석해 보면 먼저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여기서 재판장은 로마인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판사로 유추되며 유대인 소송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유대인 과부는 불신자이면서 이민족 재판장에게 까지 원한을 풀어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면 들어주리라는 믿음에 기어코 해결을 보았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믿는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뜻은 끈질기게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 보다는 하나님에의 믿음이 연약하여, 다시 말해 반신반의로 하나님께 요구조차도 하지않는 부족한 믿음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비유에서도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 믿고 세리를 멸시하는 부족한 믿음을 보였고 세리는 자기가 죄지은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죄인임을 인정하여 의롭다고 간주는 되었지만 죄를 짓는 세리에서 떠날 수 있는 큰 믿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린 아이들과의 믿음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부르실 때 아이들은 가식과 두려움 없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용납하시고 친절하게 대우한다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완전한 믿음이 없이 부족한 믿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는 어른들의 부족한 믿음을 지적한 것이다. 부자관리의 비유에서 관리는 예수님께 내가 어찌 하여야 영생을 얻겠나이까? 물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으며 구제도 하고 선행도 많이 하였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니 관리는 돈을 더 믿고 영생의 믿음을 경시하는 부족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다른 한 비유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방인들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고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 하셨으나 제자들은 이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얼마나 부족 한가를 알 수가 있다. 마지막 비유로 어느 맹인은 예수님이 많은 불구자와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은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받는 믿음에는 이르지 못한 믿음으로 그나마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8장을 부족한 믿음의 장으로 부르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한 점의 죄도 없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생애를 보내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계속 증거하고 계신데도 오늘날 믿음의 우리들조차 아직도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니?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중보기도 하시면서 재림하시는 그때에도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겠으니 참으로 우리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어떻게 맞이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믿음이 의심많은 ‘도마’와 무엇이 다른가? 오늘날에도 믿음이 점점 식어져 가고 있으며 실족까지 하고 있으니 믿는 자들에게는 가슴 아픈 한탄 뿐이고 전도의 대상인 불신자들에게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있으니 어찌 몸에 전율을 느끼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갖지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멀어지며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은혜는 오직 사랑으로 역사 하시는 믿음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 이승고 - 토론토영락교회. 장로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가 4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에서 특별 오찬을 함께 한 뒤, 박 대통령이 준비한 기념 선물을 살펴보고 있다.

4일 특별오찬서 “자국민 지지도 못받는 행동”
고노담화 검증·북-일 대화에도 우려 목소리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일 최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승인 등 재무장 움직임에 대해 “자국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면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검증한 것과, 북-일 대화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다만, 외교 관례상 오찬에서 주고받은 발언은 공동성명 등에 비하면 공식성이나 구속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분류된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이날 박 대통령과 시 주석 부부의 특별 오찬이 끝난 뒤 브리핑을 열어 “두 정상은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 태도가 계속되고 있고 (헌법해석 변경을 통해) 자위권 확대까지 추진하고 있어 우려스럽다는 점에 공감했다”고 밝혔다. 주 수석은 이어 “두 정상은 일본의 자위권 행사와 관련해 여러 나라에서 우려를 표명하고 있고, 일본 국민 절반 이상이 반대 중인 것을 주목했다”며 “일본 정부가 자국 국민 지지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걸 지양하고 평화헌법에 보다 부합하는 방향으로 방위안보정책을 투명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일본의 고노 담화 검증이나 북-일 대화에 대해서도 비교적 날 선 표현을 사용해 비판했다. 주 수석은 “일본이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 행동으로는 이를 훼손하고 폄하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양국이) 공유했다. 두 나라가 위안부 공동 연구와 사료 접근에 협력하기로 한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북-일 대화에 대해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건 이해가 가능하지만, 북한 핵을 이유로 부과된 제재가 잘못 다뤄지면 북핵 해결에 대한 국제 공조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주 수석은 설명했다.
 
이날 특별 오찬에서는 시 주석이 박 대통령에게 제안한 ‘종전 70주년, 광복 70주년 공동 기념식’에 대한 대화도 오갔다. 주 수석은 “어제 확대 정상회담 때 내년도가 2차대전 종식 70주년, 광복 70주년인데, 공동 행사에 대한 중국 쪽의 제안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오찬 자리에서 중국 쪽의 이런 제안에 대해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하려고 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주 수석이 전했다. 정부 당국자는 “중국 쪽의 공동행사 제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엔시엔디(NCND·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로 보면 된다”고 전했다.
 
두 정상은 일본 우경화 문제 외에 한반도와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전날 ‘공동 성명’보다 진전된 공감을 이뤘다고 청와대가 전했다. 주 수석은 “두 정상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비정치 분야 등에서 변화를 촉진하는 게 좋겠으며, 북한이 국제사회에 나오도록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드레스덴 구상이 (변화를 촉진하는) 그런 일을 하자는 것”이라며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과 민생 인프라 지원 등으로 북한이 바깥도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는데, 북한이 핵에만 집착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석진환 기자>


[1500자 칼럼] 주고 싶은 한 마디

● 칼럼 2014. 6. 30. 17:10 Posted by SisaHan
차고 안을 정리 하다가 빈 맥주병 상자에 눈이 갔다. 평소 같으면 우선순위로 내어놓을 터이지만 오늘은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혹시 또 올지도 모를 그들을 위해 당분간 보관하기로 한다. 건조한 일상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간 그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함께 하리라는 마음에서다. 빈 맥주병으로 ……. 
몇 주 전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밀린 일들을 처리하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벨을 눌렀다. 나는 주말 아침의 여유를 깬 불청객을 어찌하랴 생각하며 마지못해 현관으로 갔다. 밖의 동정을 살피며 막 문을 열려는데 십여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급하게 지나가는 모습이 창으로 보였다. 안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아이는 빈집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아이를 돌려 세운 미안함에 황급히 문을 열었지만 그사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간 방향을 지켜보며 다시 올 지를 가늠하며 섰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경한 소리에 그 쪽을 보니, 까만 중형 트럭이 서행해 오고 있었고 흰 목장갑을 낀 백인 청년이 근엄한 표정으로 양쪽 주택들을 두리번거리며 뒤 따르고 있었다. 또한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여자 아이를 대동한 채 건너 집들을 들락거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른 시간에 그토록 의미심장한 행렬은 무엇이며 동네안의 술렁임은 또 무엇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곧이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 하듯 각양각색의 맥주병 상자를 실은 트럭이 집 앞을 서서히 지나갔다. 설마 이동식 맥주 판매대는 아닐테고 저건 뭐지? 하는 순간 호위무사 같던 그 청년이 벙글거리며 옆집에서 빈맥주병 상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제야 가가호호 돌며 빈 맥주병을 수거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유추해보니 얼마 전 다녀간 아이는 그들과 일행으로 빈병의 유, 무 혹은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는 전령인 셈이었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앉아 그들의 추이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꽤 많은 이웃들이 그들의 바람에 호응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상자를 트럭으로 직접 날라다 주기도 했다. ‘저런 사람들이 내 이웃이었던가’ 할 정도의 생소한 이들이 담소를 나누며 열의를 다하는 모습도 보였다. 주민들의 잔잔한 움직임은 썰렁하던 골목 안에 생기를 돌게 했다. ‘이것들을 비어 스토어에 가지고 가면 몇 푼 챙길 텐데’ 하는 소심형 주(酒)군의 셈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마치 운동경기장에서 파도타기 응원을 하는 것처럼 잠시 술렁였다가 가라앉고 다시 술렁이곤 하였다. 
고요한 휴일 아침을 흔드는 그들의 행위가 과히 밉지 않았음은 물론, 그토록 높은 호응을 이끌어 내는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 듯 박스를 출렁이며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기획성, 진정성, 차별성, 유연성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레 어울려서 빚어 낸 무채색 화병 같다는 생각을 했다. 
휴일을 반납한 채 두 가족이 이루고자 한 목표는 휴가 경비 조달을 위해서 혹은 그것보다 더 절실한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목표의 경중을 떠나 한결같은 자세로 다가서는 모습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건 저 할 탓에 달렸다.’ 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라면 무슨 일에서건 백발백중이라는 덕담과 함께.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보름 가까이 지루하게 끌어온 ‘문창극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 끝마저도 씁쓸하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사퇴의 변’은 비판과 원망, 변명과 핑계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결격 사유에 대한 성찰도, 자신 때문에 빚어진 나라의 혼란과 국정 공백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 사퇴 기자회견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총리 부적격자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문 후보자의 ‘국민 무시, 언론 폄하, 정치권 증오’는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언론을 향해서는 “진실을 외면한 보도”를 했다고 꾸짖었다. 국민 압도적 다수가 자신을 총리 부적격자로 결론 내린 게 단지 교회 강연 동영상 하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한 채 오직 ‘남 탓’ 하기에만 바빴다. 국민을 어리석은 존재로 얕잡아보는 그런 사람이 총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오싹할 정도다. 문 후보자가 국회를 향해 “법 절차에 따라 청문회를 개최할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한 대목은 더욱 어처구니없다. 엄밀히 말해 국회 청문회가 열리지 못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동의요청안을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문 후보자의 중도하차가 형식상으로만 ‘자진사퇴’일 뿐 실제로는 청와대한테 ‘등 떠밀린’ 결과라는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더욱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박 대통령을 대하는 그의 말투다. “저를 불러주신 분도 그분이고 거두어들일 수 있는 분도 그분”이라는, 주로 ‘신’한테나 쓰는 표현까지 동원했다. 박 대통령을 신으로 경배하고, 국민을 포함해 나머지는 모두 안중에도 없는 사람, 문창극 후보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박 대통령은 문 후보자의 중도하차에 대해 “국회 인사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검증을 해서 국민들의 판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지 않은 것이 박 대통령 자신이 임명동의요청안을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벌써 까맣게 잊은 듯하다. 새누리당에서까지 반대하는 사람을 총리 후보자로 잘못 지명한 것에 대한 후회나, 문 후보자와의 밀고 당기기로 국정을 하염없이 공백상태에 몰아넣은 데 대한 반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감독이나 남 탓만 하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박 대통령이 번번이 총리 지명에 실패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문제는 아무리 소를 잃어도 외양간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인사 책임자들을 문책하라는 요구가 새누리당에서조차 분출하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인사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쳐 외양간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호소 역시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박 대통령은 새 총리 후보자 물색에 들어갈 것이다. 그 기간도 지루하게 이어지겠지만 문제는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오만과 아집이 변하지 않는 한 인사 실패는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럴수록 국정운영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더욱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