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생이 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대자보는 철도파업 노동자 대량 직위해제, 밀양 송전탑 강행,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등으로 하 수상한 시절에 ‘모두들 안녕하신지’를 묻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뜨거운 호응이다. 전국 대학생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릴레이 대자보가 이어지면서 누적됐던 학생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양상이다.
대자보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학생들이 학원 밖의 정치·사회적 현안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대학생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외부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철도파업 노동자 대량 직위해제 등을 보면서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지속될 경우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해질 것임을 자각한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대자보 릴레이에 참여한 한 학생의 지적대로 “확실한 것은 불안한 사람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뭉쳐 서로를 지켜주어야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 ‘안녕하지 못한’ 대학생 300여명이 철도파업 노동자 집회에 참여한 것은 그런 연대의식의 발로다. 예비 지성인인 대학생들이 사회 부조리에 눈뜨고, 억압받는 약자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건강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 대자보 파문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 현실이 학생들 눈으로 보기에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잘못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파업에 참가했다고 8000명 가까운 노동자를 직위해제하고,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며 반대하는데도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고, 국가기관이 나서 대대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욱이 현 정권은 자신들한테 불리한 말만 하면 종북으로 몰아붙이고, 대통령 사퇴를 주장했다고 국회의원을 제명하겠다며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안녕하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정치권,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하는 기업들, 자식을 출세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부모 등이 모두 공범이다.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의 주장이 사실 왜곡이니 선동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들이 쏟아내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번 대자보 파문을 계기로 ‘모두가 안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성세대와 학생들이 힘을 합하길 기대한다.


북한이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의 전격적인 처형을 정당화하면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유일 지배체제 강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장성택 사형이 별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이전과 비슷한 공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 당국이 정통성 강화를 위해 동원하는 첫째 논리는 김정은의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이 하늘에선 수령의 피가 아닌 다른 피를 가진 인간은 숨 쉴 공기도 없다”며 ‘수령에 대해 감히 도전한다면 피를 나눈 혈육이라도 서슴없이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북한이 왕조시대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후진적 상태에 있음을 재확인할 뿐이다. 김정은 이외의 사람은 어느 때건 처형할 수 있다는 ‘공포정치의 수사’이기도 하다. 헌법에까지 독재를 규정한 나라이더라도 폭력을 남발해서는 정통성을 얻지 못한다. 이는 장성택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을 중단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김정은 정권은 앞으로 경제 활성화를 통한 정통성 강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장성택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그가 여러 경협 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이들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확대하려 할 것이다. 다른 개혁·개방 조처도 내각을 전면에 내세워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이런 시도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부감을 낮추지 못한다면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공식적으로 ‘장성택 처형은 북한 내부의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는 중국도 대북 경협을 확대할 동기가 약하다. 공포정치의 지속과 이로 인한 체제 불안은 경제 개선에도 족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북한의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경색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다수다. 군부를 중심으로 강경파의 힘이 커지는 듯한 상황임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분석이다. 북한이 체제 안정에 실패할 경우 내부 결속을 위해 대외 도발을 시도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길은 북한 자신을 위해서도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지금 북한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대외 관계 개선에 신경 써야 할 때다. 공포정치를 지속해선 안 될 또 다른 이유다.
 
김정은이 왜 장성택 처형을 감행했는지 그 구체적인 계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물론 장성택의 권력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김정은과 다른 권력자들의 불안감이 커진 게 주요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이런 모순에 공포정치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면 김정은 체제는 지구촌의 차가운 눈길을 피하기 어렵다.


[한마당] 당신들의 문학은 안녕한가요?

● 칼럼 2013. 12. 24. 19:33 Posted by SisaHan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이 ‘박정희의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원로작가 이제하의 소설 연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지난 9월에는 현직 대통령의 해묵은 수필을 들먹이며 몽테뉴와 베이컨 운운하는 황당한 아첨을 해 문학인들의 공분(公憤)을 사더니, 급기야 문학에서 ‘정치’를 추방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견작가 정찬이 정치적인 색채가 드러난다는 이유로 장편소설 게재를 거부당했고, 원로소설가 서정인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당했다는 소식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평생을 문학에 바쳐온 중견·원로 작가들이 황당한 이유와 부당한 권력 앞에서 수모를 당하며 감내해야 했을 절망감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앞서 분노가 치민다. 그동안 힘없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또 얼마나 많은 횡포를 부렸을까.
 
소설가 정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양숙진 주간은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시화된 작품을 다루지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가당착적인 논리일 뿐이다. 현직 대통령의 수필을 꺼내들고 소위 ‘박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은 ‘순수’이고, 과거의 독재정권을 비판하거나 그것과 맞서 싸운 역사적 과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모두 ‘정치’라는 것일까? 더구나 이제하의 소설에서 ‘유신’은 단순한 배경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서정인이 현실참여적인 작가로 분류되는가? 왜 한국의 ‘순수문학’은 항상 문학이 어떠한 정치적 경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권력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것일까? 이러한 ‘순수’가 시국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을 쓰지 못하게 한 일제 총독부의 ‘검열’이나 ‘창작지침’과 무엇이 다른가? 
문학의 ‘순수’는 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전달 수단이나 현실 정치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문학이 정치와 현실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순수는 ‘정치’가 아니라 ‘권력’과의 거리두기에서만 가능하다.
게재 거부의 이유를 묻는 이제하의 질문에 대한 편집장의 답변도 문제다. 사측에서 미래지향적인 소설, 밝고 명랑한 소설을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대문학>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잠시 관심을 갖고 주변을 돌아보라.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죽음과 고통만이 난무하는 시대, <현대문학>은 문학의 보편성이 이런 현실에서 눈을 돌림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가릴 화려한 포장지일 뿐이다. 
어둠의 시대에 밝고 명랑한 작품을 원한다는 것, 그것은 일제 말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명랑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어두운 시대에는 어두운 문학이, 죽음의 시대에는 죽음의 문학이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이 어둠과 죽음을 외면할 때, 문학은 지배논리를 강화하는 고급한 상품이 된다.
<현대문학>이 이제하·정찬·서정인의 소설에 ‘정치’라는 딱지를 붙여 게재를 거부하고 연재를 중단시킨 것은 단순한 편집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인들에게 자유 없는 문학과 영혼 없는 글쓰기를 요구한 권력의 작가 길들이기였다. 
<현대문학>은 문학인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 곧 작가들의 문학적 자존심과 문학의 존엄을 짓밟았다.
 
써야 할 것과 쓰면 안 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편집’이 아니라 ‘권력’이다. 또한 정치권력에 대한 아부는 설령 그것이 문학적으로 잘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문학이 아니다. 
이제 이 부당한 권력에 대해 작가들이 응답할 차례이다. 문학인들에게 감히 묻는다. 당신들의 문학은 안녕하신가요?
< 고봉준 문학평론가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2013년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입니다.
삶이 소중한 것은 인생이 유한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끝이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일 겁니다. 
유종의 미! 라는 말처럼, 마지막이 좋아야 참으로 좋은 것이라 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끝이 좋은 인생입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끝을 승리와 영광으로 장식해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살면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조금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일궈진 불평, 불만들... 바꾸어 생각해보면 또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감사보다 불평이 크게 보이는 데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을 찾아 헤아려 보면 수없이 많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빌립보서 4:11.12)
사도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감사를 택할 것인가, 불평을 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배웁니다. 
특히 신앙의 길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메아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에게 평강으로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2013년 또 한 해를 보내면서 감사의 마음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나의 하나님!

< 이부형 목사 - 시온성 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