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주년에 드리는 인사말씀]

“최고이기 보다 최선을 다하며 겨레의 혼 투영하는 균형잡힌 정보의 창, 
진실과 정성을 담아 가슴을 채우는 독자들께 인정받는 명품전통을 향해”

‘독재자의 딸’과 ‘민권변호사’의 백중 대결로 세계인의 주목을 끈 한국대선 이후 이른바 ‘멘붕(멘탈붕괴)’ 등 후유증이 번졌습니다. 가장 눈길을 모은 안타까운 현상은 SNS(사회관계망 서비스)를 달군 ‘국민방송을 만들자’는 서명과 50억 모금 운동입니다. 포털사이트에 한 시민이 제안한 ‘공정 보도를 위한 방송사 설립 청원운동’이 단 이틀 만에 5만 명의 동참자가 생겼고, 이후 계속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 청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공정한 방송사가 없는 것 같다. 공영기관이며 국민의 눈과 귀가 되었던 방송사들의 편향된 보도들은 국민들이 바른 판단과 합리적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단일 뿐….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주축으로 국민들이 만들어준 한겨레신문 같은 우리의 방송국을 세워보자” 
지난해 총선에 이어 대통령선거를 겪으며, 모든 방송과 다수 신문이 특정 당과 후보의 홍보 기관처럼 전락해버린 언론현실에 분노했던 시민들의 참 언론 여망이 분출한 것입니다. 
비단 정치·사회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쪽을 보면, 일례로 교계 신망을 떨어뜨린 단체와 유력 목회자들의 일탈을 외면하고 비호까지 한 언론이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직과 공의를 솔선수범해야 할 성직자들의 부조리를 지적하기는 커녕 아예 눈감은 일부 언론도 ‘사이비’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론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창이 작으면 세상이 작게 보이고, 창 유리가 흐리면 흐릿한 세상을 봅니다. 색유리가 끼워져 있으면 모두가 그 색깔로 보입니다. 대명천지 넓은 세상을 작고 흐릿하고 색유리가 끼워진 창으로만 보고 있다면, 그야말로 눈 뜬 장님 신세지요. 한정된 정보만 접할 수 있는 감옥살이나 다름없습니다. 창이 편협하고 비뚤어졌는데, 그 조망이 세상의 전체요 참 모습인 줄 알고 사는 것은 참 우매하고 불행한 일 입니다. 
횃불처럼 사회를 밝히는 곧고 바른 펜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창이 있는가 하면, 비수로 변해 찌르고 할퀴는 일그러진 창도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창을 설계할 철학이 필요하고, 냉철한 지성과 판단력이 요구되고, 따뜻한 가슴, 정직한 심장을 지녀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언론과 언론인의 필수 덕목들을 가르쳐 줍니다.
이민사회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맑고 깨끗하고 넓고 큰 창이 있어야 합니다. 기울고 비뚤어진 우물안 개구리 같은 창틀이 아니라, 바깥의 넓고 푸른 세상을 바르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진실의 창’ 말입니다. 
우리 한인들은 특히 주류사회 동화가 더딘 반면 모국 지향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바른 언로(言路)의 창은 더욱, 또 갈수록 절실하다고 믿습니다. 지구촌 위상에 걸맞는 정체성, 그리고 다민족 복합문화에서 자존을 세우는데 바탕이 될 겨레의 혼을 투영하는 창, 폭넓은 사고로 공동 선(善)의 구현을 뒷받침할 균형잡힌 정보의 창이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주변에서 자칭 최정상의 정론지이고, ‘최다·최대’ 라며 독자들을 유혹하는 ‘허세의 창’도 많이 접합니다. ‘최고의 창’을 향한 선의의 발로라면 탓할 일도 아니겠지만, 차분히 선별의 지혜로 따져보면 금세 허실이 드러날터이니 외화내빈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어느 덧 칠년 째, ‘겨레의 창, 정보의 샘’을 향해 땀을 쏟아 온 지면들을 돌아보며 시사 한겨레는 과연 최고를 향해 달려왔는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독자 분들을 작은 창틀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는지, 동포들의 눈과 가슴을 채워 줄, 맑고 곧고 선한 창으로 소임을 다해 왔는지-, 
부족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꿈과 현실의 벽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와 광고주와 동포들의 뜨거운 성원은 저희의 큰 빚이며 자산이고 새 힘과 용기입니다. 
그래서 7주년을 맞는 이 아침, 다시 묵묵히 나아가기를 다짐합니다. 
최고를 내세우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정성과 영혼을 담아 낸 명품의 창으로 독자들께 인정받는 시사 한겨레 전통을 만들어가자!…. 그렇습니다. 더욱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독자여러분 사랑,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분께 새해 평강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 김종천 (金鍾天) - 발행인 겸 편집인 >


[1500자 칼럼] 새해, 새아침, 새날에…

● 칼럼 2013. 1. 4. 19:25 Posted by SisaHan
사람들은 한 해가 갈 때면 더욱 밝아진 거리에 흐르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왠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을 것 같아.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탄생의 의미를 전하던 거룩한 노래는 귓전에 맴돌아도 플라스틱 나무 위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나무 위에 매달린 꼬마전구들도 눈을 뜨기보다 감고 있다.
언제나 겨울은 춥고 길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기 시작할 때, 새해가 온다. 날마다 아침이 옴은 축복이지만, 우리가 또 아침을 맞이하기도 지쳤을 때 새해가 온다. 다시 새날을 맞이하라고…
사람들은 한해의 끝무리에서 그리고 시작하는 마당에서 흔히들 말하곤 한다. 지난 한해는 다사다난했다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부지런히 걷다가 이맘 때 쯤이면 멈추어 서서 돌아보며 말한다. 참 사건도 많았고 큰일도 많았지만 무사히 또 한해를 보냈다고. 이제 지난 한해를 뒤로 두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해야 한다고, 그리고 새해는 반드시 지난해보다 나아야 한다고. 아무도 내일의 일을, 내년의 일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난 해보다 나으리라고, 나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뜻깊은 희망과 소망의 계절에 ‘시사 한겨레’가 창간을 한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개인에게 있어 이민생활이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민지에 있어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라. 그동안 수많은 신문들, 주간지들이 탄생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소멸해갔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 동안 끊이없이 시사지로 자리매김을 하고 성장해온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민사회에서 신문의 역할이란 때로는 정보제공이나 오락을 떠나 너무 많은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의 방향제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독자가 읽고 싶은 글만 아니라 읽어야 하는 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7년 동안 꾸준히 한 걸음을 걸어온 시사 한겨레의 창간 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인사를 주고 받는다. 여기서야 누구나, ”Happy New Year!”라고 같은 말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말이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오래 전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누구나 말하곤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말은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다. 이 말이 좀 애매모호하기도 하지만 한국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사람들은 “부자 되세요.”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는 아마 이것이 한국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을까?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사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가치 기준이 경제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한국사회에서 이제 이 말은 욕이 될지도 모른다.
 
“대박나세요.” 영화나 출판 업계에서 자주 하는 말인데, 뭐든지 싹쓸이 하여 혼자 다 차지하라는 말처럼 들려 나는 왠지 씁쓸하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이 제일 좋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날마다 새벽이 옴은 축복이듯 지난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옴은 축복이다. 새해가 온다고 무엇 크게 달라질 것 없지만, 새해, 새 아침에는 내일보다 새 날이 왔으면 좋겠다. 어제, 오늘의 꼬리를 물고 그림자로 따라오는,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가 아닌, 세상 고통 물러가고 오는 새날이 아닌, 피해가던 세상 고통 껴안는 날. 내가 먼저 바뀌어 오는 새 날. 새날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하는 것 아닐까요?
동포 여러분 새해에는 ,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삭풍과 한파 속에서 새해 첫날이 밝았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자 새로운 5년의 출발이다. 선거의 승패를 뒤로하고 이제는 각자 대한민국 공동체의 안녕과 전진을 위해 스스로 할 바를 진지하게 성찰할 때다.

대한민국 공동체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명박 정권이 지난 5년 동안 저질러온 난장의 결과다. 민주주의의 보루가 돼야 할 검찰 등 공권력과 언론이 권력의 주구로 동원됨에 따라 민주주의와 인권은 퇴행을 거듭했다. 대기업·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은 1 대 99의 사회를 고착시켜 서민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지난 세밑에만 해도, 삶의 현장과 노동의 현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회의 외면을 견디다 못해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목숨을 끊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개발이란 미명 아래 파헤쳐진 산하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눈을 밖으로 돌려봐도 상황이 엄혹하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지속되는 체제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로켓을 개발하는 등 대결적 자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퇴행적인 극우정권이 등장해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아시아로의 귀환을 내세운 미국과 이 지역 패권을 노리는 중국 사이의 대결 역시 우리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다.

어질러진 난장을 정리하고 다시 전진하기 위해선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해야 한다. 물질 위주의 패러다임을 생명·생태 중심으로 바꾸고, 승자독식사회에서 성장의 과실이 고루 분배되는 공존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고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역시 절실하다. 대외관계에선 북한문제 해결에 우리의 주도적 역량을 강화해 한반도가 동북아 갈등의 진원지가 아니라 평화의 촉진자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모두 간단치 않은 과제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국민 모두가 혼연일체가 된다면 극복 못할 어려움도, 넘지 못할 산도 없다. 문제는 선거 결과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가 이념과 세대로 극명하게 나뉘어 있는 점이다. 이렇게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내지 않고선 한 치 앞으로도 전진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새누리당이 그들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을 포용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펴야 할 까닭이다.
대통합의 바탕은 이미 마련돼 있다. 박 당선인과 문재인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복지·평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 당선인은 심지어 시대교체를 슬로건으로 삼았다. 그만큼 공정하고 정의로운 공존의 시대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적 열망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박 당선인은 자신의 공약만이라도 진정성을 갖고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벌써 현실성을 들먹이며 공약 폐기를 주장하는 세력에 귀기울이거나 극우인사를 등용해 통합을 소망하는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새 정권이 경제민주화·복지·평화·대통합 등 공약을 제대로 구현하도록 추동하고 감시하는 일은 이제 야권의 책무가 됐다. 민주통합당 등 야권은 국민의 변화 욕구를 제대로 수렴해내지 못함으로써 또다시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함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환골탈태해야 야권에도 희망의 미래가 열릴 수 있다. 국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국민의 구체적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주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한민국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정치권에만 지울 수는 없다. 지난 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놀라운 열정으로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특히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졌던 20~30대는 안철수 현상을 통해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고, 투표를 통해 그 갈망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열망이 강렬했기에 좌절의 아픔도 그만큼 깊을 것이다. 하지만 떨어진 낙엽은 뿌리를 튼튼히 하는 거름이 된다. 좌절의 아픔을 새 정치에 대한 더 큰 책임감으로 승화시킨다면 아픔의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터 오를 수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민주진영은 분열함으로써 군부정권의 후예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뼈아픈 패배를 겪었었다. 당시 국민들은 그 아픔과 좌절을 딛고 민주언론 <한겨레>를 탄생시켰다. 올해 창간 25돌을 맞는 <한겨레>가 그동안 만들어주시고 키워주신 국민들의 뜻에 부합하는 언론의 길을 제대로 걸어왔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되돌아본다. 이제 부족한 점을 반성하면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민주주의의 보루인 비판언론의 책무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가 공존·상생하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데도 힘을 보탤 것이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믿음을 갖고.


[칼럼] 엠마오로 가는 길

● 칼럼 2013. 1. 4. 19:19 Posted by SisaHan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뒤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끝도 모를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 절망은 곧 죽음이었다. 예수의 죽음, 예수가 상징하던 구원의 죽음이었다. 이스라엘 민중에게 예수는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로마의 지배, 유대 종교 기득권 세력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예수는 종교적·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런데 그는 힘없이, 무참하게 죽었다. 고문을 당하고, 온갖 능욕과 모멸을 받으며 죽었다.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도망을 갔다.
엠마오로 가는 길. 예수를 따르던 두 사람이 예수 죽음 이후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어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이, 곧 죽음을 넘어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벌써 다섯명의 노동자, 노동활동가가 죽어갔다. 네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되었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 최강서씨는 노조 파괴와 158억원 손해배상소송이라는 악령 같은 고문에 시달려왔다. 선거 결과는 그런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이 좌절되었음을 뜻했을 터다. “박근혜 대통령 5년을 또…”라고 채 말도 끝내지 못했던 그의 유언은 끝 모를 그 절망의 깊이를 조금 헤아리게 할 뿐이다. 최강서씨만이 아니다. 대선 이후 목숨을 끊은 분들뿐 아니라 선거 전,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가족 가운데 스물세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선거 전 ‘죽음’의 경고를 여러 차례 했다.
“쌍용 해고노동자들이 지난 3년 동안 20명 넘는 사람이 죽었어요.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잡다가도 기력이 달리고, 지탱할 힘이 없는 것 같아요. 대선 결과에 따라서 죽을 사람이 더 있다고 느껴져요. 우리나라에서 밀려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번 선거는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은 아니라 하더라도 끝 모를 좌절과 절망을 느끼는 이들, 사회적 강자, 권력, 자본에 밀리고 쫓겨나 차가운 벌판에서 벌거숭이로 서 있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사법 고문의 대상이 되고, 평생의 일터에서 쫓겨나고, 갖은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이 주변에도 넘쳐난다.
 
그들에게 “유신 때는 끝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바위에 계란 던지는 심정으로 싸웠다. 희망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아니 그게 최소한 사람 사는 도리였기에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역량만 잘 키우면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보궐선거도 있고, 지자체 선거도 있고, 총선도 있고, 5년 뒤에는 또 대선도 있다”는 말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말이 지금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속만 뒤집어 놓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달리 할 말도 없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두 사람을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던 이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참담한 실패였다. ‘메시아 예수’의 모습은 찬란한 승자의 그것이 아니라, 죽음의 바닥에까지 떨어지는, 고난과 절망, 실패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렇게 바로 그 바닥에까지 이른 고난과 절망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그게 ‘메시아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모습이었다.
이제 절망과 좌절을 딛고, 희망의 씨앗을 다시 가꾸어 가야겠다. 그리고 그 희망의 출발은 함께 나누는 것, 특히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해고자들, 가진 자들과 강자들이 난폭하게 지배하는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 뿌리가 뽑힌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부족한 것을 서로 채워주고,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해고노동자를 위한 기금에 도움을 주고, 왜곡된 언론조건을 바꾸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있는 많은 독립언론들을 열심히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정말 죽지 말고 힘차게, 당당하게 살면서 이겨내는 일이다.

< 정연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