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분자 포착·얼음 존재 영구 음영지역 두 배 연구결과 나와

 

클라비우스 크레이터 [NASA, Moon Trek, USGS/LRO 제공]

 

달 표면에 지금까지 여겨지던 것보다 더 넓게 물이 존재해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26일 나란히 나왔다.

하나는 햇빛이 드는 달 표면에서 물(HO) 분자 분광 신호가 분명하게 포착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얼음 형태로 갇혀있을 수 있는 영구 음영(陰影) 지역이 기대했던 것보다 넓다는 것이다. 둘 다 달에서 물을 확보하는 것이 예상외로 쉬울 수 있다는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은 달 탐사 현장에서 식수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소를 분리해 로켓 연료로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다.

두 연구 결과는 모두 과학 저널 '네이처 천문학'(Nature Astronomy)을 통해 발표됐다.

네이처에 따르면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고더드 우주비행센터 연구원 케이스 호니볼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보잉 747기를 개조해 운영하는 '성층권적외선천문대'(SOFIA)의 달 관측 자료를 분석해 분명한 물 분자 분광 신호를 포착했다.

달 표면, 특히 남극 주변에서는 수화(hydration·水和) 흔적이 포착돼 보고된 바 있지만 3(마이크로미터) 분광 신호여서 물 분자인지 수소 원자에 산소가 결합한 수산기(OH) 화합물인지 분간이 안 됐다.

하지만 SOFIA가 달 남반구의 '클라비우스 크레이터'에서 관측한 6분광신호는 물 분자가 햇빛을 받아 가열될 때 나오는 것으로 수산기 화합물과 공유하지 않는 물 분자만의 신호로 확인됐다.

달 클라비우스 크레이터서 물분자 분광신호를 포착한 SOFIA

연구팀은 남반구 고위도 지역에 물 분자가 100~412 ppm 정도로 존재하며, 달 표면에서 증발하지 않고 토양 알갱이 사이에 보관된 것으로 추정했다.

호니볼 박사는 이날 NASA가 논문 공개에 맞춰 마련한 기자회견에 참석해 "물의 양은 토양 1에 약 350정도"라면서 물 분자가 분산돼 있어 얼음이나 물 웅덩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볼더 콜로라도대학 천체물리학 조교수 폴 헤인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혜성이나 운석을 통해 전달된 물이 얼음 형태로 보존돼 있을 수 있는 영구 음영지역인 이른바 '콜드 트랩'(cold trap)이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존재하며, 이전에 추정되던 것의 두 배가 넘는 약 15천 제곱마일(4)에 걸쳐 남, 북극 주변에 형성돼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연구팀은 NASA 달정찰궤도선(LRO) 자료를 검토하고 수치모델을 활용해 이런 결과를 제시했다.

연구팀은 콜드트랩이 작은 것은 지름이 1밖에 안 되는 것도 있으며, "우주비행사가 (얼음을 찾아 큰 충돌구의) 음영지역으로 깊이 들어갈 필요 없이 주변에서 1m짜리 음영을 찾아내 활용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남극 주변에 있는 대형 충돌구인 '샤클턴 크레이터'는 약 20에 걸쳐 있고 깊이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며 기온은 영하 150도까지 내려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 킬로미터에서 1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콜드트랩

연구팀은 달의 영구 음영지역이 실제 얼음을 가졌는지는 이번 연구에서 입증하지 못했으며,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주비행사나 로버가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헤인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가 맞는다면 식수나 로켓 연료, NASA가 물을 요구하는 모든 것에 더 쉽게 접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삼성 고위직 유언장 존재, 들어본 적 없다회장 유언장·유언은 거론 자체 금기

삼성·현대차·SK·LG·롯데·한진 별세 회장들 대부분 생전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유언장 부재상속·경영권 분란 흔치 않아 남긴 유언이 가족들간 분쟁 초래도

 

25일 타계한 고 이건희(78) 삼성전자 회장이 과연 유언장 혹은 유언을 남겼을까? 삼성그룹 전·현직 사장급 3명에게 물어보니, 유언장이나 유언에 대해 한결같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유언장을 만들어 남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6년 넘게 병상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유언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고, 2014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기 전에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뒀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는 얘기다. 재벌기업 회장들의 유언장이나 유언의 존재 여부는 가족의 일이라서 입에 담는 자체가 금기시되는 극비 사항이지만, 재벌 회장이 별세할 때마다 승계자 지목과 재산배분·상속 등을 둘러싸고 가족은 물론 그룹 안팎, 나아가 세간에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무런 의식 없는데 유언장을 쓸 수 있겠는가?”

26일 삼성 계열사 사장을 지낸 씨는 고 이건희 회장의 유언장 소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언장이 있다면 20145월 갑작스럽게 쓰러지기 전에 써뒀다는 말이 되는데글쎄. 순전히 상상과 가정일 거 같다. 그날 쓰러진 순간부터 그 이후에 지금까지 의식이 전혀 없었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데 유언장을 쓸 수 있겠는가?” 단지 추측과 풍문에 가까울 것이라는 얘기다. 6년 내내 명료한 의식이나 판단력을 잃은 위중한 상태로 와병 중이었던터라 병석에서 별도의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은 편이다. 다른 두명의 전·현직 계열사 사장도 유언장 존재 얘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씨는 고인의 의식 상태에 대해서는 서울삼성병원에 있을 때 고인이 병실 안 텔레비전 앞에서 휠체어 타고 있는 모습을 바깥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있었지만,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당시 운동 차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에는 1주일에 한번씩 회사에 나와 보고도 받고 점심도 회사에서 먹었다. 건강이 그렇게 왕성하던 차에 갑자기 쓰러졌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잘은 모르지만 그 전에 사전에 유언장을 써놓았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남긴 유언() 가족 분쟁 초래하기도CJ와 삼성의 갈등

재벌 회장의 유언장은 가까운 가신들은 물론 심지어 자식들까지도 작성돼 있는지조차 잘 모를 수 있고, 감히 입밖에 꺼내기도 어렵다. 이미 타계한 역대 재벌기업 회장들은 거의 대부분 생전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바깥에 알려져 있다. 유언장 문서보다는 유지혹은 유언의 형태로 장례 방식이나 가족 화합 메시지를 남긴 경우가 흔하다. 유언장 부재로 인해 자녀들간의 재산 상속·경영권 분란이 빚어지는 일은 많지 않은 편인데, 오히려 남긴 유언()이 가족들간 분쟁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77·타계 198711) 선대 회장은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린 장남 고 이맹희(2015년 별세) CJ그룹 명예회장(전 제일비료 회장)1993년에 남긴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유서를 만든 적이 없다. 아버지의 유언은 모두 구두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이병철 회장이 다섯 식구를 한자리에 모아두고 삼성 경영권을 셋째아들 이건희에게 물려준다고 선언했다고 기록했다. 이맹희 회장은 이 책에서 아버지가 후계구도를 밝힌 곳은 용인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라고 밝힌 뒤, “아버지는 폐암 수술차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날 밤 가족회의에서 건희의 후계를 처음 언급했다. 운명 직전에 누나, 누이동생, 건희, 내 아들 재현 등 5명을 모아두고 구두로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 이양을 유언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다만 이맹희 회장은 재산분배와 관련해선, ‘이 자리에서는 건희에게 삼성을 물려준다는 내용 이외에 삼성의 주식을 형제들간에 나누는 방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시도 있었다면서도, ‘가족들끼리의 이야기니만큼 더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기록했다. 이맹희 회장은 2012년에 이 회장을 상대로 약 1조원 가량의 상속분을 요구하는 이병철 차명재산 상속 소송을 제기하며 갈등한 적도 있다. CJ가 삼성에서 계열분리 뒤에도 삼성과의 갈등은 한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당시 재판에서 양쪽 모두 유언장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 적도 있다.

SK 고 최종현 회장 화장하고 사회에 기부하라유언 남겨

왕 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86·타계 20013)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유언장과 유언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별세 당시 여러 설만 무성하게 퍼졌다. 1992년 대통령선거 출마 직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가회동 자택의 개인금고 안에 보관해오면서 가끔씩 수정을 해왔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언장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고,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상태로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왕 회장은 운명하기 몇 시간 전부터 의식을 잃어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SK그룹 고 최종현(69·타계 19988) 선대 회장은 유언에 경영권이나 재산 상속 얘기는 남기지 않고, 그 대신에 시대를 앞선 유언으로 화장(火葬) 문화를 이끌었다. 고 최 회장은 폐암으로 갑자기 타계하기 전에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영권은 최태원 회장으로 별다른 다툼 없이 깔끔하게 이뤄졌고 지금까지 마찰 없이 그룹경영이 지속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201811월에 자신이 가진 SK지분 329만주(4.68%·9600억원어치)를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과 큰아버지인 최종건(1973년 타계) 창업주의 가족 및 4·6촌 등 친척 23명에게 증여했다. SK 쪽은 당시 최 회장이 20년 전 자신이 경영권을 승계한 데 따른 마음의 빚을 갚는 차원에서 가족들에게 지분을 증여했다고 설명했다.

LG그룹 고 구본무(73·타계 20185) 회장도 1년간 투병하다가 연명치료를 거절하고 “50억원을 복지·문화·상록재단에 기부하라. 폐 끼치지 말고 번거롭지 않게 가족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912월에 세상을 떠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도 생전에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은 없다.

먼 훗날 발견된 유언장롯데 후계자 다툼

재벌 회장의 유언장이 먼 훗날에 느닷없이 발견·공개되는 일도 있다. 이미 두 형제간의 경영권 소송·다툼이 일단락된 롯데그룹의 경우 최근에 고 신격호(98·타계 20201) 명예회장의 유언장을 놓고 또다시 작은 다툼이 일었다. 롯데 쪽은 지난 6월 신격호 회장이 20여년 전인 20003월에 자필로 작성해 일본 도쿄 사무실 금고에 보관해놓은 유언장을 공개하면서 한국, 일본 롯데그룹의 후계자를 신동빈 회장으로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신격호 회장 별세 당시 유언장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는데, 최근 유품을 정리하고 치우다가 서랍 속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쪽은 유언으로서 법적 효력이 없다며 신동빈 회장을 후계자로 한다는 내용은 있지만 오래 전 이야기고, 지금은 상황이 크게 변했다고 주장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과 공영운 현대자동차 전략기획담당 사장(오른쪽)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에서 조문을 마치고 나서고 있다.

김우중(83·타계 201912) 전 대우그룹 회장도 별다른 유언장이나 유언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고, 멀리 거슬러 올라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59·타계 19817) 회장도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다.

대체로 볼때, 아버지 회장이 따로 남긴 유언이나 유언장이 없어도 경영권 갈등이 일어나는 건 흔치 않다. 큰형이 그룹 회장을 물려받는 장자 승계전통이 있고, 다른 가족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계열 분리로 독립하기 때문이다. 생전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을 경우 유족들이 상속세를 뺀 유산을 법정 상속비율대로 골고루 나누어 갖는 방식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반면, 유언이 자녀들간 불화를 간접적으로 초래하는 일도 빚어진다. 한진그룹 고 조양호(70·타계 20194) 회장은 유언으로 가족들과 잘 협력해서 사이좋게 이끌어 나가라고 했지만 유언장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불분명한유언이 3남매간 경영권·지분 상속을 둘러산 분란의 화근이 됐다는 평도 나온다. 한진그룹은 지금보다 한 세대 전인 창업주 고 조중훈(82·타계 200211) 회장의 유언장을 놓고도 형제들의 난을 겪은 바 있다. 조중훈 회장의 유언장에 대부분의 재산을 장남 조양호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인하학원·대한항공에 전액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들(조남호·조정호 회장)유언장은 조작됐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조계완 기자


칠레 산티아고 개헌 국민투표 현장 개헌” 78% 압도적 찬성

내년 4월 투표 제헌위원 선출, 2022년초 국민투표 새 헌법 승인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손소독을 하면서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피노체트 독재를 무력이 아니라 종이와 펜으로 몰아냈다. 오늘 다시 종이와 펜으로 나라를 바꾸게 됐다.”

25일 칠레의 헌법을 새로 만들지 여부를 묻는 역사적 국민투표의 현장에서 만난 세실리아 시푸엔테스(75) 할머니의 말이다. 할머니는 198810월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의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아니요를 선택했고, 이날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했다. 이날 국민투표에서 물은 다른 한가지 새 헌법을 쓰는 기구의 구성은 현 국회의원과 국민이 각각 50%씩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100% 국민투표로 새로 뽑는 구성을 선택했다. 할머니는 이 선택이 보다 공정한 칠레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가 넘어가면서, 세실리아 할머니가 투표한 수도 산티아고 프로비덴시아의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는 200m 이상 긴 줄이 늘어섰다. 이날 투표율은 50.83%를 기록해, 최근 두번의 대선 투표보다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99.8% 개표 결과, 새 헌법 제정 찬성이 78.27%, 반대가 21.73%였다. 제헌기구 구성방식 역시 국회의원·국민대표 각각 50% 구성이 21.01%, 국민대표 100% 구성이 78.99%로 집계됐다. 두개의 국민투표 문항에 투표자의 80%에 가까운 절대다수가 할머니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칠레 국민들은 이날 피노체트의 잔재였던 헌법을 4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기본권조차 돈이 결정피노체트의 망령 걷어낼 첫발

칠레인들은 세실리아 할머니처럼 국민 스스로 만든 변화에 희망을 걸었다. 투표장에서 만난 호세파 오크만(29)은 지난해 10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뒤 대통령 퇴진과 새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몇달째 이어졌던 시위의 현장에 나갔다. 호세파는 폭력시위를 벌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수백만명이 변화를 요구했고, 이제 국민의 힘으로 권력을 되찾고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며, “현 헌법에 가로막혀서 하지 못하던 법률 개정 등 나라의 근본적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투표장 안내를 하던 파올라 발렌수엘라(33)나라의 미래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며 새로운 시대에 맞게 헌법을 바꾸도록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4살 아들을 데리고 투표장에 나온 로돌포 세풀베다(29)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의회와 정치권을 대신해 국민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실리아 할머니도 그동안 칠레가 살기 좋아졌지만 아직 모자란다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칠레를 바꿔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적 국민투표에 대한 설렘과 긍지도 느껴졌다. 친구와 투표를 하러 나온 알바로 파라오(45)칠레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남녀가 동수로 제헌위원에 참여하는 등 새 헌법에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 어두운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방식의 발전과 새로운 나라 건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계 존 콘트레사스(75) 할아버지도 기대를 걸었다. “오늘 칠레의 미래가 결정되고 그 결실을 맺을 것이라며 그동안 상처받았던 칠레가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날 투표 독려 티브이 광고는 201033인의 광부 구출과 2016년 아메리카컵 축구대회 우승 등 최근 칠레에서 있었던 환호의 순간을 내보내며, 역사적 순간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구글 첫 화면은 이날 역사적 국민투표를 기념해, 칠레의 국기와 투표함 모양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손소독을 하면서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군부독재 잔재, 수십년간 지배지금까지는 시장의 헌법이었다

하지만 이날 모두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마스크 밖으로 흰 수염이 길게 삐져나온 하이메 바르가라(72) 할아버지는 불필요한 일을 벌여서 원하지 않는데도 국민투표가 실시돼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새 헌법을 쓰겠다던 대선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떨어졌고 혼란은 필요 없다피노체트 때 만든 헌법이 문제라는데, 헌법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왜곡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비판했다.

할아버지도 1988년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에 반대했다. 할아버지는 당시는 피노체트가 15년이나 군사통치를 했으니, 민주주의 정부를 원했다헌법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해야 세금을 걷고 정부가 지원을 하지, 모든 걸 다 거저 주는 마법은 없다고 비판했다. 자신을 로베르토라고 밝힌 할아버지도 일부 정치세력이 무력으로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서 필요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돌아섰다. 이날 투표감독관으로 일하던 파블로 루이스(38)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을 새로 제정할지를 결정하는 의미 있는 투표에서 선거관리 업무를 맡게 돼 뿌듯하다면서도 지난해 이어진 시위와 혼란, 폭력 등에 반대한다. 새로운 헌법도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새 헌법 제정에 반대했다.

의견은 갈렸지만, 모두 빠짐없이 마스크를 썼다. 칠레 영주권자인 나도 아침 920, 제일 좋은 한국산 마스크를 골라 쓰고 투표소로 걸었다. 코로나19 탓에 투표소를 늘려, 투표소가 바뀌었다. 선관위 직원이 입구에서 나눠준 알코올 젤을 손에 바르고 학교로 들어섰다. 투표장 번호는 195V. 앞사람이 바깥으로 나온 뒤 들어섰다. 큰 거실 크기의 투표장에서 유권자 명단 앞에 신분증을 놓자, “(), 파란색 볼펜을 갖고 왔어요?”라고 물었다. 펜을 통한 전염을 막기 위해, 각자가 펜을 가져오라고 해서 미리 사왔다. 2장의 투표용지를 손에 들었다. 흰색 용지는 헌법을 새로 제정할지 말지를, 베이지색 용지는 헌법 제정 기구의 구성방식을 물었다. 기표소는 천으로 닫히지 않고 트여 있었지만, 투표감독관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칠레의 변화를 믿었다. ‘찬성칸과 국민대표 100% 구성 칸에 위에서 아래로 쭉 선을 그었다. 기표 뒤 투표용지를 접어 배부받은 스티커로 붙인 뒤, 2개의 투표함에 각각 넣은 뒤 신분증을 돌려받고 나왔다.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알코올 젤로 손소독을 하면서 들어가고 있다.

하루 종일 특별 생방송을 하던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8시 투표 마감 뒤 곧바로 개표 중계가 시작됐다. 새 헌법 제정에 찬성이 나올 때마다 브라보가 터져나왔다. 반대표가 나올 때는 ~” 야유가 흘러나왔다. 1988년 국민투표에서 1997년까지 피노체트의 집권을 연장할지 물었을 때, 54.7%아니요’, 43.0%에 투표해 민주화의 길을 선택했다. 32년 뒤 오늘, 훨씬 더 많은 칠레 국민들이 민주화 이후 민주화를 향한 새 헌법 제정을 선택했다. 그것도 불신받은 국회의원들을 제외하고,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새로운 대표가 헌법 제정의 주체가 되도록 했다. 그 길에서, 시위 현장의 도 더 이상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지난해 시위로 계엄령 선포 뒤 군바리라고 비난받던 군인들은 투표소 출입을 도왔다. 시위대를 무력진압한다고 짭새라고 욕먹던 경찰에게 대학생은 길을 물었고, 대학생은 군인의 안내대로 자전거를 세울 곳을 찾았다.

이날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한 국민들이 원하는 미래는 확실하다. 모두 공정하고 기본권이 보장되는 칠레를 말했다. 친구와 같이 투표한 알렉시스 리소(47)지금까지는 시장의 헌법이었다. 국민이 의료와 교육 등 기본권에 돈을 내고 경제적 수준에 따라 차별을 받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한다돈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고 말했다. 세실리아 할머니도 독재가 끝난 뒤 30년간 변화가 있었지만, 교육과 의료 등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더 나은 칠레를 기대했다.

한계 있지만 하나씩 정해나갈 것” ‘민주화 이후 민주화실현 갈림길

하지만,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한 이들도 그 한계를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새로운 헌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새 헌법의 내용을 놓고 갈등도 빚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걸고 토론하면서 국민들이 하나씩 정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 교육의 자유와 권리를 놓고 벌어진 토론은 다가올 합의의 어려움을 잘 보여줬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방식과 기관을 선택할 자유와 다양한 이념과 운영방식의 교육기관을 설립할 자유와 국가가 양질의 교육을 국민 모두에게 보장할 의무와 그 기본권을 보장받을 권리를 놓고 뜨거운 토론이 붙었다. “지금까지의 자유는 권리를 침해하는 자유였다는 비판이 눈길을 끌었지만, 앞으로 헌법에 담을 내용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모델과 그에 기인한 불평등뿐만 아니라, 구리 수출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국가재정 악화, 페소화 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 상승 등 대외적 요인까지 겹쳐 삶이 더 고단해졌다. 칠레대 사회학과 에마누엘 바로세트 교수는 22일 세미나에서 국민들은 지금 당장 큰 변화를 원하지만 헌법을 바꾼다고 모든 사회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탓에 정부의 재정여력은 더 열악해졌고, 불평등은 더 악화됐다.

이제 칠레는 내년 411일 투표에서 제헌위원 155명을 새로 선출한다. 9개월간 헌법을 새로 쓰고, 필요하면 3개월 더 연장된다. 이후 2개월 뒤인 2022년 상반기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이 다시 승인을 결정하게 된다. 202111월 대선과 맞물려, 내년 하반기 칠레는 더욱 뜨거운 논쟁이 달아오를 것이다. 칠레는 이날 1990년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의 잔재로 남았던 헌법을 역사 속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제 토론은 그 낡은 헌법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국가운영 모델을 어떻게 뜯어고치고, 지난 30년간 이루지 못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가 될 것이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이날 저녁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내다보자고 강조했다. 지난해 시위로 뜨거웠던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과 칠레 곳곳에서는 승리의 축포와 환호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