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뻥 뚫린 원전 보안, 커지는 불신

● 칼럼 2014. 12. 26. 18:38 Posted by SisaHan

한국내 원자력발전소를 관리하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내부 문서가 해킹당해 연일 인터넷에 공개되고 있다. 문서를 해킹한 해커는 고리 1·3호기와 월성 2호기에 대한 사이버 테러까지 경고하고 있어, 국민 불안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최대한 신속하게 대응해 해킹 실상을 밝히고 범인을 검거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한수원의 안일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원전반대그룹’이라고 자처하는 한수원 전산망 해커는 15일부터 21일까지 무려 네 차례에 걸쳐 해킹한 자료를 인터넷에 올렸다. 첫날에는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전체 임직원 개인정보가 담긴 엑셀파일 등을 공개했다. 당시 해커는 원전 기밀을 유출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도 띄웠다. 그러나 한수원은 이틀이 지난 17일에야 정보 유출 사실을 알았다. 또 18일 2차로 월성·고리 원전 내부자료 등이 공개된 뒤에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면서 한수원은 “원전 설계도면과 같은 기밀서류가 유출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늑장 대응에다 사실 은폐라 아니 할 수 없는 행태다. 또 19일에 이어 21일에는 네 번째로 한수원을 조롱하는 글과 함께 원전 도면을 포함한 내부문서 4개의 압축파일이 공개됐다. 해커가 끊임없이 한수원을 조롱하며 협박을 가하고 있는데도 한수원은 뭐 하나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없는 양상이다.


한수원은 이번 해킹 사태 말고도 과거 원전 비리와 원전 가동 중단으로 전 국민의 원성을 산 바 있다. 지난해 원전에 시험성적표를 조작한 불량 부품을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 과정에서 뇌물 상납 구조가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그러고도 한수원은 원전의 잦은 고장과 내부의 허술한 보안의식이 끊임없이 도마에 올랐다. 9일에도 이미 악성코드 유포로 사이버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한수원은 안일한 대응만 계속했다.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해킹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해커는 ‘한수원 악당들은 원전을 즉시 중단하고 갑상선암에 걸린 1300여명의 주민과 국민에게 직접 사죄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이런 내용으로 보았을 때 해커가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차원에서 사이버 소동을 벌인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방식이 너무나 위험하고 자칫 사태가 잘못 진전되면 원전의 기밀이 알려져 2차, 3차 범죄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부는 서둘러 범죄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쿠바가 지난 17일 53년 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 합의를 발표했다. 두 나라 수교는 냉전 잔재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앞으로 북-미 관계 개선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환영한다.


양쪽 정상의 발언은 모든 나라가 새겨들을 만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고 밝혔다. 쿠바의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오랜 봉쇄정책이 실패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이다. 대북 정책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우리는 세련된 태도로 서로 다름과 공존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북한 지도부에 도움이 될 말이다.


두 나라의 결단에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우선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20년이 넘도록 쿠바 봉쇄를 고집해 국제사회에서 오히려 고립되는 처지가 됐다. 수백만명에 이르는 쿠바계 미국인의 분위기가 관계 개선 쪽으로 바뀐 것도 부담이었다. 혁명 1세대로서 2006년 권력을 승계한 라울 의장은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꾸준히 대미 관계 개선을 꾀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결단이다. 그가 점진적 관계 개선을 넘어서 국교 정상화까지 선언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남미계로 처음 바티칸 수장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양쪽 협상을 적극 중재한 것도 돋보인다.


이제 국제사회의 관심은 북-미 관계의 앞날에 쏠리고 있다. 오바마 정권 출범 이후 미국은 봉쇄 대상국 가운데 쿠바·미얀마·이란 등과 관계를 정상화하거나 협상을 벌이고 있어 이제 사실상 북한만 남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 쿠바와 달리 핵·미사일 등 안보 문제가 최대 걸림돌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가 많다. 하지만 이번처럼 양쪽의 발상 전환과 적절한 중재자가 전제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 정부 안에서 대북 대화론이 제기되는 것은 긍정적이다. 북한은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면서 유연한 대외관계를 추구해온 쿠바의 실용주의적 태도를 배워야 한다.


미국과 쿠바의 수교는 최근 협력보다 갈등이 부각되는 지구촌 분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북-미 수교 등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 그 출발점은 남북관계 개선과 6자회담 재개다.



매서운 겨울 한파 속에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결정과 동시에 정당 하나가 공중분해되었고, 국회의원 5석도 단번에 날아갔다. 반대 집회만 해도 처벌되니 입에 재갈까지 물렸다. 그 효과 면에서 유신 때의 긴급조치와 동급이다.
재판관 중 압도적 다수가 정당해산에 손을 들었으니 집행력 확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결정문의 설득력은 다른 차원이다. 논리의 승부와 진실의 전투는 가담 인원 다수로 판가름나는 게 아니다. 1명의 반대의견은 8명의 다수의견보다 훨씬 높은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
정당해산권을 헌재에 부여한 것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 달라는 것이다. 정당해산의 요건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라는 추상 문구다.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도 현저히 미흡한 요건으로 헌재의 판단에 맡겨놓은 것은, 헌재가 권력 남용을 않으리라는 높은 기대를 깔고 있다. 사법부 판결과 달리 3심도 아닌 단심으로 결판나기에 그 신중성의 요청은 더욱 엄중한 것이다.


헌재는 그런 요청에 제대로 부응했는가. 사실인정 부분에선 확실한 증명 대신 가설과 억측,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법원에서 유죄 입증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확정사실처럼 비약한다. 가설과 비약에 의한 허술한 사실확인을 토대로, 국가비상사태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판결문이라기보다는 공소장 같다.
김이수 재판관의 반대의견은 그런 성급한 논리비약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북한의 주장·용어에서 일부 유사점을 들어 “북한 추종성이 곧바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지적은 지극히 온당하다. 정당원의 일부가 저지른 일탈들이 개탄스럽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형사처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무슨 ‘주도세력’이 몇년간 몇만명을 꼭두각시인 양 조종해간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이러한 무리한 연결은 “부분을 갖고 전체를 매도”하는 것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사실 정치과정은 사법 판단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여러 과오를 노출시킨 통합진보당은 선거를 통한 유권자의 심판으로 축소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정치적 자유의 방파제가 되어야 할 헌재는 성급히 정치적 당사자의 일원인 양 처신하여, 국민의 정치인 선택과 정당심판권을 선제적으로 제약해버렸다. 헌재가 빼든 칼날은 이제 개별 정당의 명운을 넘어 정치권 전체를 옥죄고, 국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의 위축을 강요한다.


정당해산 결정은 법리 검토에 그치지 않고 정치 판단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통합진보당의 해체가 대통령의 의중에서 시발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선 과정에서 ‘다카기 마사오’로 상징되는 역린을 건드린 데 대한 치졸한 정치보복이란 의혹도 따라붙는다. 어쨌든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재판소를 이용하여 깔끔하게 차도살인을 한 셈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헌재는 권력의 칼춤을 대행한 데 지나지 않는다.
박한철 소장은 이 결정으로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불식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는 독선과 오만의 발로일 뿐이다. 심지어 2인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섬뜩한 적대감까지 여과없이 드러낸다. 왕조시대 의금부의 친국장인 듯 ‘대역행위’의 언급까지 덧붙였으니, 승자의 쾌감에 취한 나머지, 재판관이 지녀야 할 절제와 품위를 저버렸다.


헌재 결정에 대한 검증은 이제 대한민국의 주권자이자 최종심급자인 국민들의 몫이다. 정치적 타살을 초래한 사안일수록 국민과 역사의 심판은 더욱 예리해져야 한다. 재판 평가작업이 비교적 용이한 것은 김이수 재판관의 반대의견 덕분이다. 그의 의견을 독해해보면 미국 헌법사에서 홈스, 브랜다이스 등 ‘위대한 반대자들’(great dissenter)의 면면이 떠오른다. 엄청난 내외적 중압감을 홀로 감당하며 썼을 김이수의 반대의견은 민주주의의 학습 자료로 손색이 없다.
판결은 정권보다 더 오래간다. 역사적 심판 앞에, 다수의견은 갈수록 초라해질 것이다. 왕년의 진보당, 인혁당 재판이 그랬듯이 말이다. 독재와 독선으로 치닫는 정권 아래서, 이 반대의견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서 숨쉴 공간을 찾아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