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21의 제3회 희망문화제에 참석한 회원과 지지자 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세월호 참사 주제 희생자 추모·유족돕기 성금 모금 등

캐나다 한인 진보네트워크 ‘희망21’이 주최한 제3회 ‘희망문화제’(Hope and justice cultural festival)가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12월13일 오후 블루어 한인타운 팔머스톤 도서관 소극장에서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래와 만화전시, 풍물공연, 영화상영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유가족 및 진상규명 돕기 성금 모금 등 뜻깊은 의의를 남기고 마쳤다.


이날 공연은 세월호 희생자 고 이보미 양이 생전에 불렀던 ‘거위의 꿈’ 노래에 맞춘 무용과 상여 소리로 시작, 바라연주, 사물, 태평소, 무용 등이 어우러져 참사로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기렸다. 이어 위정자들을 놀부에 빗대 풍자한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라는 민요곡, 랩, 그리고 풍물연주가 뒤이었다. 공연 말미에는 “아이에겐 안전이 없고, 청년에겐 일자리없고, 부부에겐 아이가 없고, 대한민국에 미래가 없다”는 외침과 ‘미래없는 조국에 해외 동포들이 달려간다’는 구호로 마무리, 모국 이슈에 더욱 관심을 갖고 참여를 제창했다.


공연에 이어 희망21 소개 영상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가 제작해 19회 광주 인권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세월호를 향한 기억투쟁’ 영화가 상영됐다. 이날 참석자들은 즉석에서 $700을 모금, 국민대책회의 미디어팀을 후원하기로 했다.
희망21은 “앞으로도 참사를 기억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까지 유가족 및 국내외 동포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


< hope21.ca@gmail.com >



사막의 은둔 수도자 안토니를 세상에 소개했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6?~373) 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모델입니다.
옥석은 옥석을 알아본다고 했나요? 아타나시우스는 은둔 수도자 안토니의 깊은 영성을 한눈에 알아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 둘은 전혀 다른 두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둘 사이에는 무엇인가 통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불교에서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있습니다. 이판은 수도를 하는 스님을 가르키는 말이고 사판은 세상 속에서 포교를 하고 사찰의 행정을 관장하는 스님을 말합니다. 안토니는 굳이 말하자면 수도를 하는 이판격이고 아타나시우스는 포교와 교회행정을 맡은 사판격입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은 달라도 많이 다른 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영적으로 혼돈스러웠고 신학적으로 논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에 환멸을 느낀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사막으로 나가 안토니 처럼 수도승이 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세상을 등지고 사막으로 나가기 보다는 세상안에서 신앙의 정도(正道)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적인 삶을 산 크리스천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 아타나시우스는 악을 직면하여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앙의 절개와 신학의 정도를 지켜낸 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로 당시 동방 최고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에 올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그후 46년간 다섯번의 파면을 당하였고 20여년 동안 은거와 도피의 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며 당시 만연했던 교회내의 이단사상들과 끝까지 싸워 그리스도의 신성을 교회에 정착시켰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진흙탕 싸움입니다. 영적으로 혼탁해 있고 신학적으로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교회에 돌을 던지며 비판을 합니다. 그리고 아예 교회를 떠나서 교회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느 누구하나 교회를 위해 기꺼이 돌을 맞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자리에서 큰소리 높이기를 원하지 돌맞는 자리에서 묵묵히 교회를 지켜나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타나시우스! 그는 그 진흙탕 싸움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함과 신학의 올곧음을 지켜낸 사람입니다. 교회를 향해 날아오는 돌을 맞고 억울하게 유배를 당해도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낸 사람이었습니다.
은둔 수도자 안토니의 영성이 혼돈과 황량함의 시대에 사막에서 피어낸 선인장이라면, 아타나시우스의 영성은 흙탕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토해낸 연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최봉규 목사 - 토론토 드림교회 담임목사 >



고국을 방문하고 홍콩의 둘째 집에 들렸다가, 아들이 마련해준 크루즈여행으로 싱가폴, 태국, 말레이지아를 들려 다시 홍콩에서 토론토까지 15시간의 비행 끝에 약 5주간의 여행을 마무리 했다. 여행 중에 만난 여러가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하여 배우고 느낀 점들이 참으로 많다. 동남아의 열기에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오니 토론토의 추위가 낯설다. 그러나 막상 토론토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토론토의 추위에 익숙해져 있다. 거기에는 추위에 비례한 난방시설이 탁월한 이유도 포함된다. 싱가폴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방문했을 때(11월 26,27일)는 섭씨 36도에서 38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부자 나라답게 어딜 가나 잘되어 있는 냉방시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국의 푸켓은 사정이 달랐다. 한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제법 잘 갖추어진 관광지가 되겠지만, 캐나다를 기준으로 한다면 미흡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찌는 더위와 습도는 견디기가 힘들고, 리조트를 제외한 지역의 무질서와 불결함이 불편했다. 또 하나는 가게와 가정집들 입구에 설치된 금빛으로 치장한 불상들이다. 분명, 복을 비느라 모셔(?) 두었겠지만, 그들이 복을 받고 사는지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복을 물질에 두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덤으로 물질의 축복까지 받아서, 세계의 갑부들이나 나라들도 모두 선진국 대열에 앞장 서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행은 견문을 넓혀 준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과 맞지 않는 옛 풍습을 고집하거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견문이 좁은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한국에서도 선진국 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과 후진국 여행을 주로 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자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지, 여러가지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임을 이번 여행에서도 확인을 한 셈이다. 페이스북에서 뜻밖에도 학교 후배되는 장로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장로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장로님은 선교에 뜻을 세우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일하면서 선교하겠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심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 장로님의 따님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신다. 사위가 의사 선생님이라는데, 이 따님 또한 변호사로서 부족함이 없지만 그래도 혼수문제가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한국실정이 실정인 만큼 예단 걱정을 하고 계셨는데, 사돈댁에서 너무나 힘든 예단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시편 119편을 암송해 올 것”이 예단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복받은 두 집안이 아닌가!! 장로님께서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기뻐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간증하셨다. 그런 예단을 요구한 사돈네가 부럽고,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이다.


진정한 ‘복’ 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한때,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기복신앙에 치우치던 시절이 있었다. 예수 믿으면 집사고 영주권 얻는다고 선전(?)하는 가정교회 사역원 이란 곳이 바로 이런 기복신앙을 이용한 속임수 인데도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이들이 ‘복’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복은, 하늘에서 내려주신 행복과 평화의 복이다. 값비싼 예물로 열쇠가 몇 개씩인지가 복의 저울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대로 살았기에 자녀들이 축복받고 성공하여,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행복이 아니겠는가? 예단 대신 말씀을 암송해 오라는 신랑 집안이나, 사재를 털어 선교에 나서겠다는 집안이 서로 사돈이 되었으니, 그 자손들이 번창하고 하늘이 내려주는 신령한 복으로 가득 채워질 것은 보지 않아도 이미 아버지께서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는 혼수나 예단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만약에 이런 것을 요구하거나 받기를 원하시는 가정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자손 대대로 복의 근원이 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예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