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총리후보 사퇴

● Hot 뉴스 2014. 6. 30. 16:35 Posted by SisaHan

현 정부들어 3번째… 보름간 혼란, 사과는 없어

식민사관과 극단적인 보수 성향 등으로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24일 자진 사퇴했다. 현 정부 출범 1년4개월째에 이제 두번째 총리를 뽑는데, 김용준, 안대희 후보자에 이어 벌써 세번째 후보자가 낙마했다. 이들 모두 청문회에 서보지도 못하고 사전 검증 과정에서 ‘중도하차’하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문 후보자는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제가 총리 후보로 지명받은 뒤 나라는 더욱 극심한 대립과 분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런 상황은 대통령께서 앞으로 국정 운영을 하시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며 “지금 시점에서 사퇴하는 게 박근혜 대통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혀 오로지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문 후보자는 국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안함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 2주간 국정 혼란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식민사관과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일본 극우파들이 그를 칭찬하는 등 한-일 관계에서 국가적 망신을 초래했다. 또 위안부 관련 협상에서도 우리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상처를 다시 한번 건드렸지만, 이날 회견에서 문 후보자는 이와 관련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국회의원과 언론, 그리고 여론 탓으로만 화살을 돌렸다.

 

28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동부전선 GOP(일반전초) 총기난사 사건 희생 장병 합동안장식에서 한 유족이 영정에 입맞춤하고 있다.

요리사 김 중사·백과사전 진 병장… “모두 잊지 않을게”

“소초원에게 요리를 해줄 만큼 자상했던 김영훈 중사와 뭘 물어보던 다 대답해주던 똑똑한 진우찬 병장, 마지막 작별인사도 하지 못해 미안하고 미안하다.”
28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율동 국군수도병원 의무사 연병장에서 엄수된 동부전선 GOP(일반전초) 총기난사 희생장병 합동영결식에서 고인들과 같은 소대에서 동고동락한 이준 중사가 조사를 읽어내려가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이 중사는 “웃음 많고 자상한 이범한 병장,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최대한 상병, 예의 바르고 의협심 강한 김경호 상병 모두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고 전우들을 떠올리며 북받치는 감정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유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사고 다음날부터 이곳을 지키느라 미처 구두를 준비 못 해 검은색 정장에 운동화 차림으로 이날 오전 8시 영결식장에 들어선 유족들은 고인에 대한 경례, 약력 보고, 추도사 등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슬픔을 참아냈다.
그러나 이 중사의 조사에 이어 헌화할 때에는 아들의 영전에 꽃을 바쳐야 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듯 제단에 고개를 묻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김 중사의 할머니는 밝게 웃는 손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려고 닿지 않는 영정을 향해 몇 번이고 손을 뻗다가 결국 부축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위패와 영정을 앞세운 장병들이 손자의 시신을 운구차로 옮길 때에는 “영훈아 어디가느냐”며 통곡하다가 쓰러져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 동료 장병들도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연신 눈가를 닦았다.
영결식이 끝나자 운구행렬은 헌병 오토바이 8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용히 수도병원을 빠져나갔다.
육군 제22보병사단은 이날 영결식에 이어 오전 10시 성남화장장에서 시신을 화장하고 오후 3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가질 예정이다.


정부군 1700명을 처형했다고 주장한 이라크반군 ISIL의 정부군 포로 공개사진.

중동 전체 질서 바꾸려다 이슬람주의 확산‥ 균형 붕괴

현재 이라크에서 조성되는 전쟁 위기의 뿌리는 깊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이라크를 둘러싸고 벌어져왔던 35년이나 된 전쟁의 연장이다.
이란에서 시아파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하자,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보수왕정 국가들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의 등을 떠밀었다. 이슬람주의와 시아파 확산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시아파 국가인 이라크에서 소수 수니파 출신으로 집권한 후세인도 걸프 일대를 휘어잡은 이란의 패권을 대체하는 꿈을 꿨다.
1980년 9월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 8월까지 계속됐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주역이던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1983년 이라크에 특사로 파견돼, 후세인을 직접 만나 양국 수교를 논의했다. 이라크는 이 전쟁에서 이란군과 쿠르드족 민간인에 대해서도 생화학무기를 사용했지만,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약 28만명이 사망한 현대에서 가장 긴 국가간 재래식 전쟁의 총대를 멨지만, 이라크에게 남은 것은 사우디와 쿠웨이트로부터의 빚 독촉이었다. 이라크가 반발하자 쿠웨이트는 국경지대의 유전 분쟁을 명목으로 이라크에 오히려 90억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했다. 이에 미국은 다국적군을 구성해 1991년 1월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몰아내는 걸프전을 감행했다.
걸프전에서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타도하지 않았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정학” 때문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후세인 정권 이후 대안이 없었고, 그 정권이 이슬람주의 확산과 이란 견제 등 중동의 세력균형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인 딕 체니 전 부통령은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후세인 정권 존속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걸프전 당시 미군의 사우디 주둔과 중동 땅에 대한 직접 침공은 수니파 이슬람주의 세력을 격분시켰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과 손잡고 소련을 격퇴하는데 협조한 오사마 빈라덴과 그의 알카에다는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계기로 사우디와 미국에 등을 돌렸고, 미국을 표적으로 한 성전을 선포했다. 2011년 9.11 동시테러는 그 정점이다.
9.11 테러 뒤 미국은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연계,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관련 증거가 없는데도 미국은 모른척했다. 이라크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이를 시작으로 중동 전체의 질서를 바꾸겠다는 ‘중동개조론’에 집착했다. 후세인 정권 타도 이후 미국은 후세인 체제 해체에만 집중해, 30만 이라크군 병력 등을 포함한 이라크 수니파 전체를 반미화시켰다.
처음에는 수니파가, 그 다음에는 과격 시아파가, 그리고 다음에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차례로 일어났다. 2006년 이라크 내란은 내전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병력을 증강하고 안정화 대책을 추진해, 이라크 내전은 소강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2011년말 서둘러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했다.
 
하지만 2011년 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국경을 맞댄 이라크 내전과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9.11테러 이후 된서리를 맞았던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은 이라크와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재기했다. 조직통폐합을 하며 세력을 키운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은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로 거듭났으며, 중동의 중앙부에서 알카에다와는 별개의 세력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지금 바그다드를 노리고 있다. 이란은 시아파 정부 보호를 위해 이미 이라크에 병력을 파견했다. 미국이 시리아 내전에서 타도하려는 바샤르 아사드 정권도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 격퇴에 이해를 같이한다.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15일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자신이 주도한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현재 이라크 위기를 야기하지 않았다며 “시리아에서 무대응에 따른 예상할 수 있는 악성 효과”라고 강변했다. 몰염치한 주장이다.
중동에서 이란과 이슬람주의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35년간 개입은 참담한 실패를 넘어, 재앙이 됐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더욱 확산됐다. 이란의 영향력도 더욱 커졌다. 중동의 세력균형은 무너졌으며, 이라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무정부 상태가 동심원처럼 퍼지고 있다.
< 정의길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