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반 만에 후원 결실… 11월19일 토론토 첫 선, 내년 한국무대


원로 박재훈 목사(89)가 작곡에 심혈을 기울여 온 ‘오페라 손양원 목사’가 완성됐다.  
‘오페라 손양원’은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한국교회의 기념비적 인물인 순교자 손양원 목사(1902~1950)의 일대기를 김희보 목사가 쓴 가사를 바탕으로 박재훈 목사가 곡을 붙여 오페라 대작으로 만들었다. 오페라는 손 목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전남 여수에서 내년에 개최될 세계박람회 기념작품으로 5월 중 여수 오페라공연장 개관무대에 올려 전세계에 선보인다. 이에 앞서 토론토에서는 11월19일 저녁 한인장로교회에서 작품완성 감사예배를 겸한 갈라 콘서트로 첫 무대를 마련한다. 또 12월3일 큰빛교회, 12월8일 서울 영락교회에서도 한차례 공연하며, 내년 3월8일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 5회 공연으로, 또 전국 5대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관중을 만날 예정이다.
 
박재훈 목사와 ‘오페라 손양원 목사 제작 후원회’ (회장 박태겸 동신교회 담임목사)는 20일 더퍼린 서울관에서 회견을 갖고 작품 완성과 향후 공연일정 등을 발표했다.
박 목사는 이자리에서 “그동안 고심해오던 클라이막스 부분을 어제 밤 마지막으로 손질해 마무리 지었다”면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2년6개월 여 만에 작품을 완성하게 되어 기쁘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박 목사는 작품에 대해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에 앞으로 손양원 목사 같은 분이 많이 나오기를 간구하는 심정으로 작품에 매달려왔다”는 소망과 기대를 강조했다. 박 목사가 작곡한 ‘오페라 손양원’은 모두 2막으로, 악보가 모두 1백50 페이지에 달하며, 조만간 책자로 발간될 예정이다.

지난 2년간 제작후원을 주도해 온 박태겸 목사는 “한국교회가 세워지는데 캐나다 선교사들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역사성을 상기하며 손양원 목사님 오페라 제작이 큰 의의가 있다는데 뜻을 모아 후원운동을 시작했었다”고 전하고 “그동안 연로하신 박재훈 목사님의 건강과 영적인 뒷받침, 작품제작에 필요한 5만 달러 모금을 위해 기도하며 후원해 온 결실이 이뤄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태겸 목사는 후원에 모두 23개 교회와 6개 단체, 개인 18명이 동참해 지난해 2만5천 달러가 모아졌고, 올해도 연말까지는 목표액에 이를 것 같다고 밝히고 “그러나 앞으로 한국공연에 소요되는 8억~10억원 가량의 재원 충당이 문제여서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공연은 현재까지 여수시가 1억5천 만원, 오페라 공연장을 지은 GS칼텍스 측이 1억5천 만원 등을 약정한 상태로, 교계에서도 김장환 목사, 홍정길 목사 등이 적극 나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박 목사는 전했다.
 
한편 11월19일(토) 저녁 7시 토론토 한인장로교회(담임 손명수 목사)에서 열릴 작품 감사예배 및 갈라콘서트는 소프라노 한선영, 메조 소프라노 정인애, 테너 최재형, 바리톤 정윤재 씨가 출연하고 고선주 씨가 반주를 맡는다.

< 문의: 905-338-0191, 647-622-7678 >


한 달 전쯤 오랜만에 상담전화가 걸려왔다. 자녀 문제로 깊은 고민 중에 있는 한 어머니의 전화였고 그간의 상담경험으로 보아 오랜 시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하여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보통은 어머니 홀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정작 당사자인 자녀를 만나자고 하면 ‘애가 원치 않아서’, ‘누구도 만나기를 꺼려해서’, ‘도통 집에 있지를 않아 물어 볼 기회 조차 없다’ 고 한다. 그런데 이 분께서는 선뜻 아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신다.
 
가까운 맥도날드에서 만난 그는 평범한 10학년 남학생인데 마리화나(대마초)에 중독되어 있었다. 6학년 때부터 이미 담배를 시작했고 중학교 때는 술과 더불어 친구와 노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가능성이 많았던 이 학생에게 어느 날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고, 마땅한 답을 찾을 수가 없어 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친구들과 한참 놀 때 가졌던 질문이었고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상의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부모가 있었는데 사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고민을 이야기 할 대상이 아니었고 그런 관계는 이미 깨어진 지 오래였다. 친구 가운데는 누구도 그런 고민을 받아주고, 함께 풀어야 할 너무도 중요한 인생 숙제임을 일깨워 줄 만한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뭐 하러 공부하냐며 부모 좋은 일 시켜주는 거라 했다 한다. 더우기 그 때는 상위권이었던 성적이 하위권으로 쳐졌다. 그는 지금도 공부에 대해선 아쉽다고 했다. 그의 주변에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외로룸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게 당연하기에 어린 이 친구에게도 즐겁게 어울릴 대상이 필요했고 마리화나는 이제 정말 좋은 친구가 되어 일상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한 후 상쾌한 몸으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마리화나 한 대를 피우는 것이다. 1gram에 10불 이나 하는 것을 피우기 위해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서슴없이 이야기도 한다.
 
만약 그가 가진 질문에 좋은 답을 해 줄 진정한 멘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변에 어린 자녀들을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행복해 하는 엄마들을 종종 본다.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얼마간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시에 저 엄마는 그의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궁금해 지기도 한다. 우리는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기에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쏟는다. 
그러나 이런 열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녀들이 지표 잃은 배처럼 방황하는 것을 보게 되고, 또한 감사할 줄 모르는 이 세대를 향해 배신을 느끼며, 안타까워 하며, 심지어 그들의 방황과 방탕을 고통스럽게 견뎌내는 부모들에게 해답은 무엇인가? 이젠 자녀들 만을 탓하기엔 오늘날의 부모들도 뉘우칠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무분별하게 해주었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줄 모르게 올바른 길잡이 역할을 못한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예전 어른들처럼 “네 아버지 만큼만 해라” 혹은 “네 어미 같기만 하라”는 이야기를 자녀에게 해주는 것을 듣기가 어렵다. 그만큼 가장 가까이에 있어 보고 배우게 되는 부모들이 좋은 멘토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음이다. 만약에 자녀에게 값을 주고 사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그건 진리와 지혜를 가르쳐 줄 귀한 멘토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앞서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뜻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자녀의 스승이 되려는 부모라면 자녀의 문제가 지금만 같지는 않으리라 여겨진다. 진정한 자녀의 멘토가 되는 것- 이것이 이 시대에 부모가 자녀를 지켜나갈 사명일 것이다.

<노득희 목사 - 바나바 성결교회 담임목사>


리비아의 과도정부는 지난 20일 숨진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주검 공개를 24일 중단하고, 그의 주검을 25일 사막에 비밀리에 매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전격적인 결정은 카다피의 불명확한 최후와 그의 주검 공개에 대한 논란과 우려가 커지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과도정부의 한 관리는 “카다피의 주검은 25일 사막 한가운데의 비밀 장소에서 이슬람 족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한 장례로 묻힐 것”이라고 밝혔다. 시르트에서 카다피와 최후를 함께 한 넷째 아들 무타심도 함께 묻힌다. 
이 관리는 이번 결정이 그의 주검이 그대로 두지 못할 정도로 부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카다피가 사로잡힌 뒤 과도정부군에게 두들겨 맞고 총에 맞아 숨진 점, 그의 주검을 냉동고에 보관하며 시민들에게 공개한 점에 대해, 국제인권단체들뿐 아니라 과도정부를 지원한 서방국가들조차 유감을 표시해왔기에 이를 의식한 조처로도 보인다.


포위망 속 빈 집 전전하며 쌀과 파스타로 연명
카다피 마지막 동행한 측근 NYT와 인터뷰, 수행원 10명…고향 땅서 고립

절대 권력을 누린 독재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버려진 가옥을 전전하며 사람들이 두고 간 쌀과 파스타로 연명했다. 무아마르 카다피와 함께 붙잡힌 리비아 인민수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은 22일자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시르테에 포위된 카다피 일행의 마지막 날들을 털어놨다. 다오 사령관은 리비아 정보부대이자 지원병 조직인 리비아 인민수비대를 이끌었던 카다피의 최측근이다.
 
그에 따르면 카다피는 수도 트리폴리가 과도정부에 함락된 지난 8월 22일 측근과 수행원 약 10명만을 데리고 거점 지역인 타르후나와 바니왈리드를 경유해 곧바로 고향 시르테에 도착했다. 니제르 행 혹은 남부 사막지대에 은신했다는 등의 추정을 뒤엎은 것이다. 시르테행은 4남 무타심이 외부의 예상을 역이용한 결정이었다. 
다오는 카다피가 외부의 예상과 달리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면서 그가 총 한 발 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대신 카다피는 외부와 거의 고립된 채 코란을 읽거나 전화 통화로 시간을 보냈다. 컴퓨터가 없기도 했지만 있었다 해도 전기가 자주 끊겼다.
카다피는 “왜 전기가 안 들어오는 거지?”, “왜 물이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와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위성전화뿐이었는데, 이를 이용해 지지자들에게 투쟁을 독려하는 육성 메시지를 시리아 방송사로 전달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 주위에서 권력을 이양하라고 설득했지만, 카다피는 “이 곳은 내 조국이다. 나는 1977년에 권력을 리비아 국민에게 모두 넘겼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카다피 본인은 퇴진 가능성도 열어뒀지만 아들 무타심이 특히 더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고 다오는 전했다.
한 번은 포탄이 카다피 일행의 거처에 떨어져 경호원 3명과 요리사가 부상해, 그 때부터 모두 직접 음식을 만들 수밖에 없게 됐다. 2주전 과도정부군의 포위망이 시르테 중심부까지 좁혀오자 카다피 부자는 주거지역인 ‘제2구역’에 있는 주택 2곳을 오가며 공격을 피해다녔다. 궁지에 몰린 카다피는 결국 인근에 위치한 자신의 생가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20일 새벽 3시를 출발시간으로 정했다.이날 혼란으로 출발이 지연되면서 차량 40대로 구성된 카다피 일행은 오전 8시에야 이동을 시작했고, 카다피와 최고사령관, 친척, 다오가 탄 도요타 랜드크루저는 30분만에 나토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파편을 맞고 정신을 잃은 후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는 다오는 “리비아에서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모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신문에 말했다.

한편 첫째 부인에게서 얻은 장남과 지금의 둘째 부인 사피아 파르카시에게서 6남 1녀 등 모두 7남 1녀인 카다피의 자녀 가운데 생존자는 절반뿐이다. 
부인과 장남 무함마드, 5남 한니발, 외동딸 아이샤는 지난 8월 알제리로 국경을 넘었다. 3남 사디는 지난달 니제르로 피신했으며,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2남 사이프 이슬람과 4남 무타심은 20일 시르트 함락 때 아버지와 운명을 함께했다. 6남 사이프 아랍은 지난 5월 나토의 트리폴리 공습 때 카다피의 손자 3명과 함께 숨졌다. 리비아 최정예 카미스 여단 사령관이던 7남 카미스는 8월 트리폴리 남부 외곽에서 리비아 과도정부군과 교전 중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