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7돌에… 독도가 화난다

● Hot 뉴스 2012. 8. 19. 20:03 Posted by SisaHan

▶어느 쪽이 문제냐… 축구 대일전 승리 뒤 박종우의 세레모니, 오른쪽은은 일제 욱일승천기 형상을 딴 일본선수들 유니폼.


대통령 방문·축구세레모니 소동‥일본의 생트집‥

조국 광복 67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우리 땅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이 재연되고 감정도 격화되며 ‘완전한 광복’이 아직 요원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0일 돌연 독도를 방문한 데 대해 일본이 서울주재 대사 소환과 재무장관 회담 취소 등 강하게 반발, 양국관계가 급냉한 데 이어,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전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팀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레모니’에 대해 IOC(국제 올림픽위원회)가 메달수여를 보류하고 FIFA(국제 축구연맹)를 통해 경위조사에 착수, 환호에 싸였던 국민감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 선수는 관중석에서 건네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종이를 들고 뛰었을 뿐임에도, 일본측이 정치적 행동이라며 IOC에 어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독도 감정’은 한층 더 에스컬레이드됐다.
그 와중에 대한축구협회는 일본축구협회에 ‘박종우 세레모니’를 해명하는 이 메일을 보냈고, 이를 받은 일본협회는 “한국 축구협회가 사죄와 재발방지 약속 메일을 보내왔다”고 언론에 공개 ,일본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한국 네티즌들은 “사실이라면 축구협회를 해산해야 한다”(이외수)는 등 격하게 축구협회를 비난하고 나섰다. 축구협회는 “유감표명과 재발이 없게 같이 노력하자는 것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IOC는 ‘정치적 행위’를 거론했지만, 박종우 해프닝과 비숫한 사건으로 1968 멕시코 올림픽 시상식에서 흑인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 두 선수가 미국국가가 연주될 때 검은 장갑을 끼고 주먹을 뻗어 메달이 취소된 적이 있을 뿐, 이번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이 검은 손수건을 상의 주머니에 꽂고 입장한 것과 영국축구대표팀 라이언 긱스가 영국국가를 부르지 않은 것, 호주 원주민 출신 복싱선수가 에보리진 국기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출전 한 것 등은 제재를 받지 않았다며 ‘정치적 표현’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관심대상인 일본 체조팀은 일제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 무늬를 사용한 유니폼을 입고 금·은메달을 땄어도 아무일 없었음이 드러났다. 욱일승천기는 유럽에서 금기시되는 독일 나치의 하겐크로이츠와 같은 성격이어서 제재함이 마땅하다는 중론이다. 일제 군대위안부 피해자 보금자리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14일 대한체육회를 방문해 IOC에 보내는 항의 서한문을 전달했다. 이들은 서한문을 통해 “IOC가 일본 제국주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입고 경기에 나선 일본선수는 묵인하고 고의성 없이 관중석에서 던진 종이를 들고 `독도 세리머니’를 펼친 한국 축구선수에 대해 정치적 행위 운운하며 제재를 논의하는 것은 차별적 탄압”이라고 항의했다. 또 “이미 한반도기를 통해 올림픽 개막식에 허용되었던 독도 표기를 새삼 정치적으로 해석해 제재를 논의한다는 것은 IOC와 FIFA의 일관성과 올림픽 정신에도 어긋난다”며 “IOC와 FIFA의 향후 결정을 지켜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독도 강공에 나선 이명박 대통령은 14일, 이번에는 일본 아키히토 국왕을 겨냥, 일제강점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며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언급, 일본을 더욱 격앙케 했다. 이같은 파열음 속에 한일간 외교는 당분간 마찰이 불가피해 보이며, 일본이 과거반성은 커녕 갈수록 회귀적인 태도여서 최근린국인 양국민간 감정의 골도 광복절이 거듭될 수록 더욱 깊어질 가능성이 크다.


[1500자 칼럼] 명의와 명 목사

● 칼럼 2012. 8. 14. 15:38 Posted by SisaHan
명 목사란 말이 어색하다. 그러나 명의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붙여보았다. 명의라면 중국의 편작을 따를 자 있을까? 이 달에 읽은 책 ‘신도림 역에서 공자를 만나다.’ 에서 편작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에게 두 형이 있었는데 모두 훌륭했으나 편작이 가장 유명했다. 어느 날 왕이 편작에게 물었다. 세 형제 가운데 누가 가장 뛰어난가? 편작이 대답하기를 큰형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이 그 다음이며 자신은 가장 떨어진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어째서 선생이 가장 유명한가 하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큰형은 병을 치료할 때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병의 원인이 될 요소를 치료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가 사전에 병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름이 나지 않았고 둘째 형이 병을 치료할 때는 증세가 나타나는 초기에 치료를 하기에 사람들은 그가 가벼운 병을 치료한 줄로 여기기 때문에 이름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요.
그런데 자신이 병을 치료할 때는 증세가 이미 심각해졌을 때이므로 자신이 경맥에 침을 놓고 피를 빼거나 피부에 약을 붙이는 대수술 과정을 보기에 제 의술이 뛰어나다고 여기기에 명성이 이렇게 전국에 퍼져나가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이라고 답했다.
 
편작의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말에 수긍을 하는 것은 진정한 명의는 겉으로 나타난 병의 증세를 따지고 처리해주는 것이 아니라 병의 뿌리를 알고 미리 예방해주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적어도 병의 상태가 초기에 이르렀다 생각하면 빨리 조처해주는 것이 훌륭한 명의가 아니겠는가? 편작이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병의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치료하는 것도 귀중하지만 근본을 미리미리 치료하고 예방하는 것이 진정한 명의라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영혼을 치료하는 명의는 누구인가? 앞에서 어색하게 써놓은 명 목사는 누굴까? 오늘날 속칭 대형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일까? 사자후를 토하면서 강단에서 명설교로 또는 대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는 저들이 명 목사일까?
 
가만 살펴 보면 대부분의 목사들이 부끄럽지만 편작처럼 나타난 증세를 가지고 치료의 방법을 제시하고 이렇게 살자 저렇게 살면 안 된다 하고 부르짖는 목사들이 아닐까? 그들도 결코 잘못되거나 훌륭하지 못한 목사는 아니다. 저들도 편작처럼 필요한 목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어떤 문제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예방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훈련시키며 또한 설교의 시간이 치료의 목적보다 병의 근원을 아예 뿌리 채 뽑겠다는 의욕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성도들을 훈련시킨다면 얼마나 훌륭한 영적 명의가 되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직 미련하여 그 근본적인 치료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냥 나타난 현상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냥 침을 발라주거나 고약으로 때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수술도 필요하고 때로는 독한 약도 먹여야 하겠지만 목회자들은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병이 생기지 않도록 몸을 보호하는 일이나 혹은 작은 일이 생겼을 때라도 미리미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몸을 보완하고 건강하게 해주는 그런 일에 더 큰 관심을 쏟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목회자들의 관심이 얼마나 치료를 잘 해주는 명의가 되었는가? 나에 대한 소문이 어떤가? 나는 많은 사람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있는가? 하는 일에 관심을 쏟으니 세상적으로 명의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글쎄?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지금 한국 정계에 ‘안철수 현상’은 마치 외계인의 습격과 같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익숙한 관념들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이다. 현실의 권력질서를 뒤흔드는 무서운 힘으로 엄습해오고 있다. 
이 외계인은 안철수 원장이 아니다.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수많은 시민들이다. 이들에게 정치인과 정당들은 외계인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인간의 말을 하고 심지어 인간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에 살면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 참다못한 인간들은 정치를 습격했다. 그들이 외계인이 되어 정치를 덮쳤다. 저비용 고효율의 한국판 점령운동이다. 
이처럼 정치와 시민이 서로에게 외계인이라는 것은 둘 사이에 쌍방적인 낯섦과 소외의 협곡이 놓여 있다는 뜻이다. 정당과 시민의 간극, 정당일체감의 약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많은 선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 저변에는 탈산업화, 개인주의화, 정보화, 네트워크화 등의 거대한 사회변동의 흐름이 있다. 시민들은 더 많은 주권, 더 투명한 권력, 더 친근한 정치를 원하고 있고,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정치현실과 충돌하고 있다.
 
이런 변화들은 각 나라의 전통과 제도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낳는다. 유연하고 역동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욕구가 정당정치로 부드럽게 반영된다. 반면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 소선거구제 등의 제도 구조로 인해 구석구석 승자독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경직된 체제다. 이런 환경에서 소수정당들은 득표율 부족으로 자연소멸하거나, 집안싸움에 몰두하는 자폐적 단체로 고립됐다. 
현재의 주어진 제도적 조건에선 양대 정당이 변화의 욕구를 반영해야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모두 다수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세상은 광속으로 변하고 있는데, 정치는 박정희·전두환 세력과 김대중·노무현 세력의 대결을 반복했다. 안철수 현상은 이제 역사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는 집단적 소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이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 때문에 생겼다는 단순한 해석은 지난 몇년간의 의미심장한 변화들을 놓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정당정치의 종언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본격적인 정당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시민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권력에 눈을 떴다. 정치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고, 시민권력이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이제껏 시민들이 선거정치에 이토록 열렬히 참여한 적이 없다.
 
민주당 역시 정당정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다. 민주당은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등, 한국 사회의 경제적 균열구조를 반영하는 일련의 정책노선들을 대폭 수용했다. 인적으로도 그동안 당 외부에 있던 유능한 정책통들을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으로 대거 영입했다. 차세대 정치계급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혁신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패러다임 이동의 결정적 문턱을 아직 넘지 못했다. 
안철수는 계승과 혁신이 함께 가는 이행을 위한 선택이다. 안철수가 운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안철수의 운명을 선택한다. 지금 안철수 원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2040세대’가 원하는 것은 성인도, 초인도, 의인도 아니다. 낡은 판을 흔들어 새 시대에 문을 열어줄 통로다. 그 문을 넘어 외계인들이 정치와 만날 때, 정치와 시민은 더 이상 서로에게 외계인이 아니다. 정당정치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당정치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를 위한 문턱을 넘는 것이다.

< 신진욱 -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