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투사: 광복군 장교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시안에서 미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영원한 독립군 장준하 선생…되살아 난 ‘실족사’의혹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숨진 뒤 37년 동안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장 선생이 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 전 대통령과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다.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선생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된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 37년간 이어진 장준하 타살 의혹
장 선생 사망 당시 경찰은 장 선생이 1975년 8월17일 산악회원 40여명과 함께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경기도 포천시(당시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489m)에 올랐다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산행에 합류한 ‘김용환’이라는 인물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김용환은 장 선생이 출마한 총선 때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으나 산행 이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일행이 약사봉 샘물터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장 선생과 김용환이 따로 산길을 올랐다가 다시 일행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비탈에서 실족했다는 것이 당시 경찰의 발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졌는데도 체중 73㎏이던 장 선생의 신체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 때문에 생긴 상처로 보기 어려웠다는 점 때문에 당시부터 의문사 논란이 일었다.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4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 선생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했다’(<동아일보> 75년 8월19일치)는 기사가, 장 선생 사망 이틀 뒤에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던진 기사를 쓴 내외신 기자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가 곤욕을 치르거나 한국에서 추방됐다.
장 선생 타살 의혹은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에는 입소문으로 나돌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뒤 민주당이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다시 공론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의혹으로 머물러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목격자 김용환이 장 선생 사망 뒤 갑자기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실, 그의 일관성 없는 진술, 장 선생 주검에서 추락 흔적이 거의 없는 점 등을 들어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 독립투사·반독재투사 장준하
장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의 저서 <돌베개>를 보면,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 김희숙씨에게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성서 구절을 남겼다.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으면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는 귀띔도 남겼다. 그는 44년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그해 11월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김구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의 항복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50년대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며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잡지로 이끌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한-일 수교 협상이나 베트남 국군 파병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선생은 특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70여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협상 주도 세력을 비판했다. 베트남 국군 파병과 관련해선 1966년 방한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두고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장 선생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나라 밖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당선됐다. 72년 10월 유신 이후엔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장 선생이 숨진 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 박기용·권혁철 기자 >


법의학자들 타살의혹 제기
장준하 선생 유골 사진 공개 “추락으로 볼 수 없어”

37년 만에 장준하 선생의 유골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복수의 법의학자들이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서 주목된다. 의혹의 핵심은 머리뼈에 지름 6㎝ 크기로 선명하게 나타난 원형 골절 부위다. 거의 완벽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머리뼈 골절은 언뜻 보기에 망치와 같은 둔기로 맞은 흔적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다시 한번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법의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는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교실)는 “추락이 아니라 가격(에 의한 골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사건, 만삭 의사부인 사망 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에 법의학자로 참여했던 이정빈 명예교수는 “넘어졌을 때 하필이면 지름 6~7㎝짜리 망치 같은 것에 부딪힌 게 아니라면, (추락했다는) 산에 그런 (원형 골절을 입힐) 물체가 있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추락으로 인한 골절상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유골 사진을 살펴본 이 교수는 “(장 선생의) 머리뼈 골절 흔적은 망치처럼 모서리가 있는 물체가 아주 정통으로 수직으로 (머리에) 부딪혀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vs 야권 단일후보, 10월 판명

● COREA 2012. 8. 27. 15:18 Posted by SisaHan
12.19 대선 판도… 민주경선·안철수 출마 여부 최대 변수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됨에 따라 ‘박근혜 대 야권단일후보’로 예상되는 18대 대통령 선거의 구도가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야권의 최대 변수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때문이다. 
첫째,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후보가 겨루고 안철수 원장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다. 둘째, 박근혜 후보와 안철수 원장이 겨루고 민주당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경우다. 정당정치의 상식으로 보면 첫번째 경우가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선후보들에 대한 객관적인 지지율을 살펴보면 두번째 경우도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민주당이나 안철수 원장 어느 쪽도 각자 출마에 의한 ‘3파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4개월도 남지 않은 연말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경쟁자가 누가 될 것인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몇 가지 변수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야권단일후보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칠 핵심 변수가 여전히 불투명하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민주당 경선의 성공 여부다. 9월에 선출되는 민주당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안철수 원장을 넘어서면 12월 대선의 야권단일후보는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 원장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민주당 지도부가 최근 안 원장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민주당 후보 독려에 주력하는 데에는 이런 분석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문제는 민주당 후보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을 경우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 사정에 밝은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민주당이 자칫 상황에 계속 끌려다닐 수 있다”고 좀 다른 전망을 했다. 추석연휴가 지났는데도 민주당 후보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희박할 경우 민주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안철수 신당’을 만드는 정계개편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월 정계개편’설이다. 
이 소장은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지면 통합진보당 쇄신파와 시민사회, 학계는 물론이고, 총선 전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성식·정태근 전 의원 등도 가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 경우 민주당 의원들의 탈당 규모가 커지면 안철수 후보의 기호가 2번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이 소장은 내다봤다. 
대선 구도의 두번째 중요한 변수는 안철수 원장 본인의 출마 결심이다. 안 원장은 지난 7월19일 <안철수의 생각> 출판과 7월23일 텔레비전 방송 이후 별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책 서문을 통해 “앞으로 책임 있는 정치인의 역할을 감당하든, 아니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세상의 변화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계속하든”이라고 밝혔지만, ‘정치인’과 ‘지식인’ 중에서 어느 쪽이든 분명한 길을 선택했다는 정황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람을 모으는 흔적을 찾기 어렵고,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측근 인사들은 최근까지도 “아직도 안철수 현상과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가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안 원장의 최종 선택은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이 마무리되고 그 후보에 대한 여론의 평가가 나오는 추석(9월30일) 전후가 돼야 내려질 것 같다. 
야권의 대선후보 결정 구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변수도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경선 이후 외연확대를 위해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친박인사들에 둘러싸여 독선적 모습을 유지할 것인지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는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12월19일 대선을 앞두고 점점 더 악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난도 있다. 경제가 급격히 악화하면 정권교체 가능성이 부쩍 커진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성한용 선임기자 >


100$ 인종논란, 중은총재 사과

● CANADA 2012. 8. 27. 15:15 Posted by SisaHan

마크 카니 성명 “특정 인종 도안 본의 아녀”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가 20일 최근 불거진 100달러 신권 도안의 인종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카니 총내는 지난해 11월 발매된 100달러 신권의 뒷면 도안 중 현미경 관찰을 하는 여성과학자가 당초 아시아계 인물에서 변경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자 이날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도안의 초안은 캐나다 과학자가 최초로 발견한 인슐린 병 옆에서 아시아계 여성이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모습이었으나 내부 자문그룹의 검토 단계에서 아시아계 여성이 캐나다 인구를 대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시된 뒤 서양 여성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캐나다통신이 입수한 내부 자문그룹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고, 아시아계 단체의 반발과 비난을 샀다.
캐나다은행은 지난해 캐나다화 지폐 교체 작업 과정에서 도안 검토를 위한 8개 자문그룹을 운용했는데, 지난 2009년 100달러화 도안 초안에 대해 자문그룹 보고서는 “연구자가 아시아계로 보인다는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이는 기술 과학분야에서 아시아인들이 우수하다는 선입감을 표출한다는 견해가 있다”며 “아시아인이 화폐도안에 표시될 유일한 인종이어서는 안 되며 다른 인종이 함께 표시돼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은행측은 이를 받아들여 초안을 수정했으며, 인쇄된 최종 도안은 서양 여성의 인상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카니 총재는 “특정 개인을 묘사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인 것이 어느 특정 인종 집단을 대표하는 모습인 양 비쳐진 것은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며 “심려를 끼친 것에 사과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