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트레이닝 캠프 5월26~28일

YWAM 장막장이 사역(Tentmakers’ Ministry) 제21회 트레이닝 캠프가 5월26일(목) 저녁6시30분부터 28일(토)저녁 9시까지 노블톤의 YMCA Cedar Glen(13300 11th Concession Rd, Nobleton) 에서 열린다.
이번 캠프는  ‘다시 찾은 나의 정체성’(The Power of a New Identity)을 주제로 YWAM의 제자 훈련학교와 선교학교 및 상담학교 등의 강사로 활약하는 댄스니드 목사(사진)를 초청강사로 진행한다.

한글 번역본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로 널리 알려진 「The Power of a New Identity」의 저자이기도 한 댄스니드 목사는 LIFE Bible College를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 지역 교회들에서 목회하고, LA Teen Challenge’와 Jesus West Coast의 책임자로 섬겼으며, 재해 구조 단체인 ‘Hope Force International’과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Lionshare Leadership Group’의 창립 멤버다. 95년부터 2000년까지는 ‘Foursquare Missions International’의 유럽지구 코디네이터도 역임했다.
장막장이 사역은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견고한 안정감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의 정체성’를 발견하는 자리로 여러분을 초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캠프 등록비는 $200이다.

< 문의: 416-221-5975. www.tentmakersministry.org. tentmakersministryywam@gmail.com >


가정 회복과 치유, 하나님 사랑·섭리 되새겨
캐나다 10년의 결실‥아버지 영성과 사명 회복하는 은혜로움 충만

지난 4월 8일~10일 뉴브런스윅 주 Saint John에서 ‘센존 아버지학교’ 제1기가 은혜 가운데 성료되었다. 연초부터 아버지학교 캐나다 토론토운영위원회(위원장: 김민규 나이아가라 한인장로교회 장로)와 매리타임 지역(뉴브런스윅과 노바스코샤 일대 포함)의 사역자들, 특히 NB(뉴 브런스윅) 교회협의회(회장 윤수한 뉴브런스윅 한인교회 담임목사)와 협의 끝에 센존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참가한 37명의 지원자들은 네번의 만남(금요일 1회/토요일 2회/주일 1회)을 통하여 상처받은 가정의 회복과 치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섭리를 깨달으므로 말미암아 가정에서 존경받는 가장, 사랑받는 남편,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참 모습 등 진정한 아버지의 영성과 사명을 회복하는 귀한 기회로 모든 순서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다.

특별히 이번 집회를 위하여 토론토에서 ‘아버지학교 OB들’인 19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강사로 진행자로, 여러 모양의 섬김을 위하여 자바량으로 지원을 갔었는데 봉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이번엔 다른 어느 때 보다도 준비된 영혼들을 만져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감동적인 모임이었다”고 전체 진행을 맡았던 조충호 형제(디모데장로교회)가 전하였다.
네번째 모임에서 ‘아버지의 사명’을 주제로 강의를 맡았던 최규영 목사(토론토조이플교회 담임목사)는 다녀 온 소회를 말하기를 “정말 쎈 존(강한 지역) 이었는데, 여러분의 기도로 눈 녹듯이 녹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니, 감동이었습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민규 장로는 봉사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하여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인 줄 알기는 하지만, 이번에 또 우리의 믿음 없슴을 경험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 부르심에 순종하시는 여러분은 또 한번 하나님을 감동시키셨습니다. 다른 어느 때 보다 철저한 헌신이 필요했던, 도움이 있으리라는 기대에 조금은 실망하며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심에 순종하며 아무 불평 한마디 하지않은 형제님들, 그러한 형제님들의 순종으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이 생방송, 토론토 아버지학교의 앞날을 더 기대하게 됩니다.”

찬양팀장으로 헌신하였던 한상윤 장로(토론토 한인장로교회)는 시작 멘트에서 지난 10년의 캐나다 아버지학교를 회고하며 말하기를, “캐나다의 아버지학교는 지난 2001년 밴쿠버를 시작으로하여 2002년 캘거리, 2003년 토론토, 2006년 몬트리올, 2011년 센존에 이르기 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읍니다. 드디어 10년 만에 캐나다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이번 센존 아버지 학교가 열리는 것에 대하여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캐나다 최초의 도시인 센존에 캐나다에서 아버지학교가 시작된지 10년이 지난 후 이제 처음으로 열리는 캐나다 동부지역 아버지학교!!!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준비해 온 아버지 학교라 믿습니다. 이제 센존을 시작으로 하여 캐나다 동부지역에 이 아버지학교가 퍼져나가 가정과 교회를 회복시키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그 감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특별히 이번 모임중 3번째 주제인 ‘아버지의 영성’을 강의한 고영민 목사는 이날 모임에서 자그마치 9명의 결신자가 일어선 것을 보며 “캐나다 아버지학교 중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감사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찬양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변한다」는 아버지학교 표어 그대로, 이번 센존 아버지학교는 여러 가지로 감동을 안겨 준 인상 깊은 학교였다고 참여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그대로, 정말 가습 뿌듯하고 보람 있었던 행사였다.

필자 : 윤기태 목사 (위클리프 한인사무국)

[1500자 칼럼] 노남석의 생활칼럼

● 칼럼 2011. 4. 26. 15:31 Posted by Zig
우유와 달걀

많은 사람들은 제가 음식먹는 모습을 보면서 “야~ 참 복스럽게 먹는다~!” 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어릴 때 나이드신 분들은 “밥을 복스럽게 먹어서 복받겠다!” 하셨습니다. 저의 형수님은 제가 ‘쩝쩝’소리를 내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삼촌은 정말 신사네!” 하면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무슨 음식이나 맛있게 먹어서 음식을 해주는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신이나서 음식을 해주었고 그러다 보니 음식솜씨가 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그런데 저의 아들들은 저의 밥먹는 모습을 보면서 질색(?)을 하는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가 가끔 찬밥을 우유에다 말아서 김치하고 먹는 것입니다. 그게 아이들에게는 못 마땅한 것 같았습니다. 오만상을 찌프리곤 했습니다. “아빠~, 제발 밥을 우유에다 말지 말아요!” “왜~ 어때서~” “그게 뭐예요?” “야~ 너희들은 Cereal을 우유에다 타서 먹지?” “……” “난 밥을 우유에다 말아서 먹는데 다를게 뭐냐?” “Oh~ boy~!” “그리고 아빠는 너희들 처럼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면 금방 설사를 해~” “……” “그래서 이렇게 밥을 말아서 꼭꼭 씹어 먹으면 침이 잘 섞여서 설사를 안한다구~!” “에~이구~~!” “좀 이상해 보여도 이해를 해줘!” “그럼 아빠 혼자서 있을 때만 하세요” “알았어~”

제가 어릴 때는 우유가 아주 귀했습니다. 저는 우유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6.25 동란 후에는 분유를 학교에서 도시락통에다 배급을 주었습니다. 배가 고픈 아이들은 손으로 분유를 움켜쥐고 입에 털어 넣으면 입주위는 온통 분유로 범벅이 되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변소(요즘엔 변소라고 하면 질색을 한다던데 그때는 분명히 변소였다)에 드나들기 바빴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분유를 밥 위에다 찌는 것이었습니다. 밥솥에서 쪄낸 분유를 과자처럼 깨물어 먹었습니다. 우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없어서 못 먹던 우유가 살이 찐다! Cholesterol이 많다! 하면서, 그 좋은 Milk fat을 몽땅 제거한 Skim milk를 저희도 마시고 있으니… 또 어떤 사람들은 피부에 좋다고 우유를 목욕통 속에 퍼붓고 목욕을 한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두번째는 아내가 방금한 따끈따끈한 밥을 접시에 퍼주면, 저는 냉장고에 가서 날달걀을 한개 꺼내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얼굴부터 찡그렸습니다. “아빠~ 또~?” “미안! 이 달걀에는 아빠의 어릴 때 추억이 담겨있으니까 너희들이 이해해라!” 접시에 담긴 밥을 약간 옆으로 밀어내고 가운데 공간을 만든 다음에 달걀을 깨서 넣습니다. 소금을 뿌리고, 옆에 밀어 놓았던 따끈따끈한 밥을 달걀 위에 덮고 정성스럽게 비빕니다. 그리고 나서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저의 생각은 어느듯 50년 전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불평을 해도 이해를 바랄 뿐 밥을 달걀에 비벼 먹는 습관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먹는 게 귀했던 시절에 달걀을 지져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오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저의 도시락 반찬은 항상 국물이 줄줄흐르는 김치였으니까요! 후에 누군가의 기발한 Idea에 의해서 구제품으로 나온 병에 든 음식(지금 생각해 보니 Baby food였던 것 같다)을 먹고 난 후에 병에다가 김치를 싸가지고 다녔습니다. 간혹 버스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의 가방을 무릎에다 받아주었는데, 그 때 잘못하면 김치 국물이 여학생의 치마에 흐르는 경우도 발생하곤 했었습니다. 너도 나도 모두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오가는 인정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달걀은 일년 중 생일 때나 아니면 죽도록 아플 때 한개 얻어 먹으면 다행이었습니다. 어쩌다가 달걀이 한개 생기면 동생들과 함께 밥을 모두 커다란 냄비에 넣고, 그 귀중한 달걀을 깨서 넣고 비비고 또 비벼서 노란 색갈이 골고루 섞인 다음에 누가 더 많이 먹을세라, 한 숟갈씩 차례로 돌아가면서 퍼먹었습니다. 밥알에 노란 색갈만 묻어 있으면 천하일미였습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동생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어머니는 따끈따끈한 달걀을 한개 제 손에 쥐어주시고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영양식이라고… 그러나 제 손에 쥐어주신 따뜻한 달걀은 음식이 아닌 보약(?)이었습니다! 아니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똑같았을텐데, 입시준비를 하는 저에게만 달걀을 주셔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우유에 밥을 말아먹고, 따끈따끈한 밥에 달걀을 비벼서 먹을 때, 저는 추억을 먹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에 사는 이 녀석들아~! 너희들이 애비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수필가 - 어진이의 이민수기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