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PC노회 임원들 및 당회원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전상규 목사 내외.


열린한마음교회 전상규 담임목사 위임예배 드려

열린 한마음교회 전상규 담임목사 위임예배가 10월25일 주일 오후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캐나다 노회(노회장 송영인 코너스톤교회 담임목사) 주관으로 많은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드려졌다.


먼저 드린 1부 예배는 노회 고영길 부서기(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사회로 당회서기 김석남 장로의 기도에 이어 노회장 송영인 목사가 디모데후서 1장 1~14절을 본문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송 목사는 “복음의 백가쟁명 시대이지만, 복음은 사도바울이 전한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며 십자가의 도, 즉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이 복음”이라고 강조, “단순히 환경개선과 세상개혁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지 않는 것은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목사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보냄받은 자리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성도의 임무이자 특권”이라며 “혼탁한 마지막 시대에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고 말씀을 전했다.


2부 위임예식은 노회장이며 위임국장인 송 목사 집례로 “교회 청빙서가 노회를 통해 전상규 목사에게 전달됐고, 그가 받을 의사를 표명했기에 노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목회를 전 목사에게 위임하려 한다”는 예식사를 하며 시작됐다. 취임서약에서 송 목사는 전 목사에게 담임목사 직무작정과 충성된 마음으로 목사의 직분을 다해 복음사역에 부합하도록 행할 것이냐는 등 3개항을 물어 전 목사는 오른손을 들고 이를 서약했다. 이어 열린한마음 성도들은 전 목사를 담임으로 맞아 교훈과 진리를 받고 치리에 복종하며 목회에 협력하고 뒷받침하기로 기립하여 회중서약했다. 송 목사는 전 목사의 위임을 선포하고 취임기도한 뒤 위임패를 증정했다.
권면은 임시당회장을 맡았던 박원철 목사(늘사랑교회 담임), 축사는 회록서기인 지근혁 목사(온세상교회 담임)가 전했다.


성도들이 마련한 화환과 선물을 전달받고 취임사를 한 전상규 목사는 골로새서 1장 24~29절을 인용하며 “사도 바울에는 한참 못미치는 사람이지만,교회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는 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전 목사는 “특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담임목사로써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며,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로 세워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목회소신을 밝혔다. 이날 예배는 김석남 장로의 감사인사와 광고, 595장 폐회찬송에 이어 부노회장인 최기정 목사(예본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쳤다.


< 문의: 416-510-8215 >



[평신도 글마당] 나이

● 교회소식 2015. 10. 30. 18:56 Posted by SisaHan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 갑니다. 어느사이 늦가을에 접어 들었습니다. 온통 세상은 예쁜 단풍으로 물들고, 각종 나무에는 귀한 열매가 주렁 주렁 열렸습니다. 서구에서는 생일날 나이가 한 살 더해 지지만 우리 동양에서는 한 해가 지나면 모두 다같이 한 살을 더하게 됩니다. 가을이 짙어가는 것을 보니 나이가 한 살 곧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이야기 하지만 나이가 한 살 더해 질수록 기대감이 더 커집니다. 내년이 기다려지고, 또 다음 해가 기다려집니다. 얼마나 더 멋있게 변해 있을까, 나의 모습을 그려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라마다 나이가 들어가는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음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우리들은 ‘나이를 먹었다’로 표현합니다. 영어는 직역하면 ‘얼마나 늙었느냐’ 아니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나이를 먹는다면 얼마까지 먹을 수 있을까요. 배가 고팠던 우리 민족의 한이 나이까지 먹는 걸로 표현 되었을까요? 아니면, 자기에게 주어진 나이를 다 먹으면 끝이 난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에서 말하는 old는 낡음이라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너무 낡아서, 아니면 너무 오래 되어서 결국 닳아 없어지는 인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스페인어에서는 나이가 들어감을 표현하는 동사가 tener, 즉, 가지다, 소유하다, 소지하다 로 표현 한다는 어느 페친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스패인어를 잘 모르지만, 이 동사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나는 60년을 소유하였다. 나는 80년을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 한다면, 우리들의 나이에 대한 개념이 확 뒤바뀌는 느낌이 듭니다. 나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코미디언이셨던 구봉서 장로님께서 “너희들 늙어 봤니? 난 젊어 봤다!”라고 하신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우린 나이가 세월따라 덧없이 많아진 것이 아닙니다. 흐르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려고도 해 보았고, 세월따라 흘려 보내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있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얻어진 지혜와 경험이 쌓여 아름답게 빛나는 가을빛과 같은 것입니다. 짙게 물든 가을의 잎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색상을 자랑하지만, 세월을 이겨낸 아름다운 빛 입니다. 다시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자 잎을 떨구어 내고 겨울잠을 자는 나무의 지혜를 봅니다. 경험은 지혜를 쌓게 합니다. 나이를 많이 소유한 만큼 우리가 가진 것이 더욱 풍성하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 입니까? 제가 환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될 줄도 꿈이나 꾸어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어느덧 눈 깜짝할 시간에 60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이 섭섭한 것이 아니요, 이젠 몇 해만 더 가면 70년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인생의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된 부자가 되려면, 값어치 있는것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자라 말하는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부자여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한 모든 성도들은 이미 진정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려주신 부를 잘못 관리하거나, 사용한다면 곧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시간들을 귀하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들은 행복한 부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더하여 질수록 가진 것이 많아지는 멋진 인생을…. 새마음으로 그려보는 행복한 가을날 오후 입니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변화를 바라는 사회

● 교회소식 2015. 10. 30. 18:51 Posted by SisaHan

이번 19일 치러진 선거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2011년 선거에서는 308개 의석 중 보수당이 166석, 신민주당이 103석, 자유당이 34석이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놀랍게도 자유당이 제3당에서 껑충 뛰어 집권당이 된 것입니다. 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지금 총리당선자의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의 후광을 입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자유당이 내건 표어였던 것이라고 봅니다. 많은 이들이 자유당이 내건 ‘변화‘라는 제시안이 먹혀들어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캐나다인들은 이 나라에 변화, 진정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전 미국의 선거에서도 오바마 선거진영에서 ’변화’를 주장하여 당선되었다고 보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현대 사람들은 변화를 원할까요? 지금의 삶에 만족이 없어서일까요? 사회에 문제가 많아서일까요? 아니면 너무 단조로워서 일까요? 보다 나은 세상, 아니면 더 즐거운 세상, 우리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바램이 변화를 바라는 욕구로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모든 상황도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게 됩니다. 인내, 기다림이라는 미덕은 변화의 바람 앞에 무력하게 된 것입니다. 10년을 집권했으니 새로운 맛을 보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가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변화를 맛보기 위하여 지도자를 바꿉니다. 아니면 외부적인 상황을 변화시켜 봅니다. 얼굴을 뜯어 고친다든지, 새 옷을 사서 입어 본다든지, 이사를 가보든지, 변화를 외부에서 찾는 현상을 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외부를 바꾸어 보아도 사람은 변화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세상이 좋은 세상으로 변화되려면 환경과 법, 그리고 외부적인 조건들을 바꾸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의 변화를 유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그 변화를 새롭게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실증을 느끼고 또 다른 변화를 원할 것입니다. 끝도 없는 욕구에 사람들은 시달릴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변화입니다.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참된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일어납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면 어떤 곳에 있어도, 어떤 집에 살아도, 어떤 일을 해도 기쁨과 만족함이 있습니다. 이제 2015년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2016년이 되면 또 새롭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자신에게 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강성철 목사 -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평신도 글마당] 기도밖에 없다

● 교회소식 2015. 10. 23. 15:28 Posted by SisaHan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상 만물 중에 제일 사악한 피조물이 인간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는 것도 사악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불순종하는 배은망덕한 피조물도 또한 인간이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발생 할 수가 있겠는가?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감히 거역하며 심지어는 도전까지 하면서 죄까지 지어 죄인이 된 사악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상대하시며 사랑까지 하고 계시니 이것 또한 역설적(paradox)이 아닐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셨을까? 성경에 보면 최초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을 부어 넣어 주셨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몸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성품이 착하고 죄도 없이 의로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같기 때문에 사랑하셨다. 따라서 인류 학자들은 인간의 천성설을 주장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죄인이 되었기에 그후 하나님은 더 이상 죄성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을 몸소 만들 수가 없으므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게끔 인간의 탄생의 권한을 인간에게 위임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밖에 없다.


인간들에 의해 태어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살펴보면 정신적 심적인 마음의 사랑과 그리고 육신적인 대단한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나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운동을 하다가 숲속 조그마한 나무에 접근하게 되었다. 어느새 조그마한 새 한마리가 겁도 없이 모자 쓴 내 머리를 부리로 부딪치며 계속 도전하기에 살펴 보니 숲 속에 둥지가 있어 조그마한 새 일 망정 새끼를 보호하는 육적인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달았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 하심이리라.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의 육적인 사랑은 새끼가 자립 할 수 있을 때까지이지만 인간들의 자식 사랑은 세상 생명이 끝날 때까지이다. 오직 기간의 차이뿐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식에 대한 인간의 사랑도 역시 기간의 차이가 있다. 인간의 자식 사랑은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현세뿐 아니라 내세까지 즉 사후 영혼이 영생 할 수 있도록 무제한의 기간이다. 사랑하는 방법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상고하게 된다.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되 절대로 강압적이 아닌 자유를 부여하여 자신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자신들 스스로가 깨닫게 인도하신다. 예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사건에서 아담 하와가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을 강압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권능이 있으시면서도 이미 사전에 말씀으로 명령하셨기에 그들의 자유 의사에 말기셨다. 자유의사로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통해 깨닫게 하실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속적인 시험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희생하시면서 까지도 인도하신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몸으로 사악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오셔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그 피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며 사망권세에서 승리하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 따른 확실한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까지도 자유의사에 맡기셨지만 이것까지 부인할 경우 하나님의 날 마지막 심판으로 영벌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경우 자기 자식이 계속 범죄하며 죄를 짓고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자식이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십자가 상에서 혹독한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면서 까지 자식을 위해 죽을 부모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장기간 자식과의 인연을 두절하거나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에 폭행과 폭언 등 불상사까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아무리 죄를 지어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 하시며 영혼을 사랑하시며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기를 원하고 계시다. 지금 이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 하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대화 하시기를 고대하고 계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으로 영이신 하나님과의 상통하는 길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이 기도를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용서를 받고 믿음이 성장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며 하늘로 연결되는 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통해 듣기도 하지만 영적 생명과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 아버지와 실제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티끌만큼도 못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교통하는 일보다 더 위대하고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기도밖에는 없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