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바른 언어 생활

● 교회소식 2011. 8. 14. 14:13 Posted by Zig
[평신도 글 마당]

우리는 음악적인 전문성과 함께 훈련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념하는 교회의 조직을 ‘성가대’ 또는 ‘찬양대’라고 부른다. 
정확한 통계를 내 보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찬양대’라는 말 보다는 ‘성가대’라는 말에 더 익숙해져 있지않은가 싶다.  
그러나 간혹 ‘성가대’라는 말은 아예 잘못된 표현이니 ‘찬양대’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 주장의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성가대’라는 말은 일제시대 사용되던 일본식(?) 용어일 뿐만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이니 ‘찬양대’라는 용어가 보다 적절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그 외에도 “우리 말은 외국말과는 달리 존대어(尊待語)라고 하는 독특한 표현이 있는데 그냥 여늬 아이들 이름 부르듯 ‘예수’라고만 호칭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란 존대어을 사용해야 한다.”는둥,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꽤 많은 연구과제가 나올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중 ‘성전’ 이라는 낱말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구약시대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성전’이라는 용어가 교회 안에서 너무 남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과 ‘성소’, 그리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수 있는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던 곳인데 그런 ‘성전’이란 용어와 신약시대의 ‘교회’를 마구 혼용해서 쓰고있다는 주장이다. 
예를들면 ‘성전 건축’이란 말을 쓰는데 그것이 어떻게 ‘성전 건축’이냐는 말이다. ‘예배당 건축’ 또는 ‘교회당 건축’이라면 몰라도 ‘성전 건축’이란 말은 도무지 합당한 용어가 아니란다. 구약시대의 ‘성전’의 개념과 신약시대의 ‘교회’의 의미를 확연히 구분하여 사용하라고 그들은 주문한다.
이 주장들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찮다. 우선 그런 문제들은 본질적이 아닌 ‘비본질적(非本質的)’인 문제들이므로 그런 것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 이들의 주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우선 ‘성가대’라는 말부터 생각해 보자. “이 단어를 풀어 보려면 ‘성가’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 의미를 국어사전에서는 ‘예수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성부(천주), 성자, 성령(천신)을 찬송하는 노래’이고 이런 ‘성가’를 부르기 위하여 조직된 합창대’를 ‘성가대’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성가대’라는 말을 ‘찬양대’라는 말과 동의어(同意語)로 취급함을 볼 수 있다. 
‘성가대’라는 말이 단지 일본에서 온 용어이기 때문에 부적격한 용어라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명칭에 대해서는 “단순히 ‘예수’라고 부르는 것 보다는 ‘예수님’이란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어도 사도 ‘바울’을 ‘바울님’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리고 성경 어디를 보아도 모두 ‘예수’ 라고만 씌어있지 ‘예수님’이라고 씌어있는 곳은 없다. 
찬송가에서도 ‘예수’와 ‘예수님’이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지 ‘예수가…’라고 하는 등의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이런 경우엔 ‘께서…’라는 높임말 토씨를 써야한다...”
“‘성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예배당’과 동일하다. ‘성스러운 전당’이란 의미이며, 영어로는 ‘church’라고 표기한다.
 
영어성경에는 ‘temple’로 되어있는데 이 의미에는 ‘신전’ ‘사원’이라는 뜻 외에 ‘(그리스도교의) 교회당, (프랑스 기타의) 신교도의 예배소’ 등도 있다. 물론 구약시대의 제단과 성소. 지성소가 있던 ‘성전’과는 구별이 되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예배당’의 의미로 쓰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등등.
글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바른 언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복합문화 사회에서 그리고 시간을 아껴가며 살아야하는 바쁜 현대생활에서 바른말만 꼭 집어서 사용하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송필호 - 본 한인교회 장로>


동부신학교 9월 신입생 모집

● 교회소식 2011. 7. 31. 14:00 Posted by SisaHan

동부개혁장로회 신학교
2011가을학기 신입생 8월30일까지 모집

 

 

동부개혁장로회 신학교 캐나다분교(교장 장영춘, 분교장 정관일 박사) 2011 가을학기 신입생을 8월 말까지 모집한다.

모집학과는 목회학과, 선교학과, 여교역학과 등 주간 3개 학과와 신학과, 음악학과 등 야간 2개 학과이며, 편입생도 뽑는다. 수강과목은 조직 신학, 헬라어1,  하나님 나라와 OT, 고대 교회사, 선교학 개론, 공관복음, 옥중 서신, 소그룹 목회, 지혜서. 기독교 교육 등으로 91일 개강해 121일까지 강의한다.

원수접수는 오는 830() 오후 4시까지 노스욕 가든교회(260 Yorkland Blvd. M2J 1R7)에 있는 신학교 사무실에서 받는다. 입학시험과 면접은 91() 오후 4시에 실시한다. 개강예배와 오리엔테이션은 91일 오후6시로 예정돼 있다.

동부개혁 신학교는 북미 최대 한인장로교단인 미주 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의 신학교로, 박사 및 석사학위를 가진 강사진과 현 담임목사들이 강의한다. 목회학 석사(M.Div) 졸업생은 총회고시를 거쳐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으며,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 리폼드 신학교, 비브리칼 신학교 등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선교학 석사 졸업자는 총회 후원 및 파송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다. 또 여교역학과를 졸업하면 전도사로 사역하게 된다. 아울러 풀타임 수강생들에게는 각종 장학금과 함께 학생비자 등 혜택을 준다. 특히 KAPC 캐나다노회 소속교회 지원자들에게는 특별장학금을 지급한다. < 문의: 416-554-7495, 416-910-8795, http://www.reformedpse.ca >

 



밀알교회, 이유정 목사와 함께하는 찬양집회

좋은 씨앗 히트곡들 찬양과 간증의 은혜 넘쳐

 

 


허전하고 외로웠던 마음의 빈 공간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애정결핍으로 자라왔는데 하나님을 만난 후 세상 어디서도 경험못한 기쁨으로 채워주셨고, 삶믜 방향, 목적이 바뀌는 놀라운 변화를 주셨습니다.

밀알교회(담임 노승환 목사) 16일 저녁 마련한 찬양집회를 인도한 CCM의 가수 좋은 씨앗의 이유정 목사는 상처입고 넘어진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 치유되고 기쁨을 얻은 자신의 지난 세월을 간증하며  주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며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채우소서’ ‘선한 목자’ ‘오직 주만이등 자작 찬양곡을 들려주며 성도들과 은혜를 나눈 이 목사는 도피성 입대한 군부대 교회에서 찬송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455)를 부르며 눈물 흘릴 때 유정아 내게로 오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상처가 아물고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알게 됐다고 회상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보다 사랑하며 채워주시는 기쁨을 느꼈다고 소개, 방향이 180도 바뀐 삶의 변화를 간증했다.

이 목사는 좌충우돌하고 넘어지는 나를 왜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하실까 하는 의문은 나이 40에 아들을 얻고 확실히 깨달았다우리가 부족하지만 자녀로 인치하신 하나님은 끝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민교회에서 아픔과 상처가 많은 이들을 품고 격려하며 기쁨과 화목으로 채울 때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이라며 “ ‘넓게 열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 81:10)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과 소망, 사랑과 기쁨, 비전과 성령충만으로 채워주시기를 간구하자며 찬양곡 채우소서를 성도들과 함께 열창,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 문의: 416-226-4190 >

눈높이 


              목민장로교회 정훈태 장로

눈은 이마 밑과 콧등 위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높이가 다르다고 하니 보통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술시간에 선생님께서 칠판에 얼굴형태를 그리시고 가운데를 잡아 양쪽에 눈을 그리시자 모두 깔깔 대다가 차근차근 귀, , , 머리털을 그려 나가보니 얼굴이 되는 것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 눈은 얼굴 중앙에 위치해 있다 합니다. 버킹검 궁전의 휘장과 수많은 울타리 끝에 칠하여진 금빛에 매료 되었다가,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 보면 금이 금으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웬만한 크기의 금은 금도 아닙니다. 눈이 높아진 것입니다. 로랙스 시계 본점에 들렸다가 몇 만 불에서 십만 불이 넘는 시계를 계속 보고 있자니 몇 천불 짜리 시계는 시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이마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파리의 거리에서 정교한 조각들이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음에 감탄하여 조각품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다가 이태리 밀라노의 도우모 성당을 보고 난 후부터는 웬만한 조각품에는 카메라를 꺼내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간사한 우리의 마음 입니다.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은 지금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리며 보았던 알프스는 캐나다를 조금 낮추어 보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하지않는 청년들에게 눈이 높아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고보니 눈이 높아야 좋은지, 눈이 낮아야 좋은건지 저도 헷갈립니다. 물론 눈은 가운데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니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눈이 높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웃을 깔보는 듯한 느낌에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눈이 너무 낮아 아예 쳐다볼 생각도 없는 의욕상실증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눈 높이 하나에도 커다란 갈림길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이 옳은지를 갈구합니다. 사실 우리들이 스스로 자부하는 지식이나 지혜는 너무나 초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좀 모자란다 싶으면 낮추어 봅니다. 학벌, 명문, 학위, 그 무엇도 내가 제일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법 돈이 있다고 큰소리 쳐 보지만 이 세상에는 수많은 더 큰 부자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높이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진리의 눈은 우리들의 교만과 오만을 꾸짖습니다. 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한번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저도 소위 명품을 넘치게 보았더니 이제 명품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눈이 높아진 것이 아니요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세상 것에 눈이 어두워 세상 물결 따라 오르락 거리는 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웃을 섬기며, 삶에 힘들어 하는 이웃을 위로하며 도와 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사진기도 사람의 눈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합니다. 은혜로 우리에게 두개나 선물해 주신 우리의 눈 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 만으로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숨겨진 진리를 찾을 줄 아는 우리의 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옛 선비들은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았을 때는 그 눈을 물로 씻었다 합니다.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도 세상이 어둡다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던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아 달라던 그의 눈은 어떤 눈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