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연대 박사와 함께 한 런던 패럴림픽 ‘성취상’ 후보들.


절망 딛고 선 감동 스토리 남기고…

11일 동안 166개 나라 4천310명의 선수가 경쟁했던 2012 런던 패럴림픽이 9일 폐막식을 끝으로 수많은 감동의 이야기를 남긴 채 2016 리우대회를 기약했다.
135명이 참가한 한국은 금메달 9개, 은메달 9개, 동메달 9개로 종합 12위에 올랐다.
폐막식에서 한국 최초의 장애인 여의사인 황연대 박사는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의 그레고리 하르퉁 부회장과 함께 시상자로 나서서 아일랜드의 육상선수 마이클 매킬럽과 케냐의 투척 육상선수 메리 자카요에게 ‘황연대 성취상’ 순금 메달을 시상했다. 
한편 이번 장애인올림픽에서는 후천적 장애를 떠안게 됐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넘쳤다.. 불행은 한순간에 닥친다. 치유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희망을 찾는다. 절망의 끝에서 스포츠가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동반자로 거듭났음을 입증했다

■…남아공 수영 선수 아치맷 하심(30)의 인생은 6년 전 송두리째 바뀌었다. 2006년 8월 아흐멧은 7살 아래 동생 타리크와 함께 케이프타운 앞바다에서 열린 인명구조원 시험에 참가했다가 오른 발목을 물어뜯겼다. 동생 쪽으로 다가가는 상어를 유인하려다가 당한 사고였다. 하심은 “한 발을 잃었지만 동생을 잃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동생을 구하기는 했으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 일으켜 세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수영이었다. 하심은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날 나탈리 뒤 투아(남아공 패럴림픽 여자 수영 선수)가 찾아와 수영을 권했다. 이전까지 장애인 스포츠라는 것을 몰랐는데 그때부터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정말 크나큰 공포였으나, 그는 꿋꿋이 이겨냈다. 접영과 자유형에 강한 하심은 남자 100m 접영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줌마 마틴 라이트(40·영국)는 2005년 7월7일 52명의 목숨을 앗아간 런던 지하철과 버스 자살 폭탄 테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으나 양쪽 다리를 잃었다. 라이트는 평상시 차를 몰고 회사에 출근했지만 이날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지하철을 이용하려다 참변을 당했다. 
남편과 3살 난 아들(오스카), 그리고 친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좌식 배구 코트에 나서는 라이트는 AP와 인터뷰에서 “올림픽 팬이었다가 패럴림픽 선수가 됐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표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아’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라이트는 “2005년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가족, 친구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운동하는 것은 현실화된 꿈”이라고 덧붙였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육상 선수 모하메드 카마라(18)의 삶은 내전으로 엉망이 됐다. 외신은 카마라가 4살 때 반군에 잡혔고, 이유도 없이 반군한테 오른팔을 잘리는 불운을 겪었다고 전했다. 튼실한 하체를 보유하고 있지만 한쪽 팔이 없어 스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도 힘차게 달리면서 어린 시절의 끔찍했던 기억을 지우고 있다. 내전 종료 후 최초로 패럴림픽에 참가한 시에라리온 선수인 카마라는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들 말고도 2005년 지뢰를 밟아 양쪽 다리를 잃은 말렉 모하마드(아프가니스탄), 2007년 이라크에 파병 중 한쪽 팔을 잃은 존앨런 버터워스(영국)가 출전했다. 버터워스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이유는 내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며 장애를 의지로 승화시켰다. 시에라리온의 카마라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장애를 떠안기도 한다. 물론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며 “장애인을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해 줘야만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 김양희 기자 >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피에타」까지…그의 삶과 작품들


초졸·청계천·구로공단 생활‥서른 파리유학 
비주류 도발에 영화계 논쟁, 작품‘극과 극’평가
상영관 배제 소외·무시…작은 영화 좌초 개탄 
외국선 상 휩쓸어,제작비 2억‘피에타’로 재 조명 

김기덕(52) 감독은 최근 몇년째 강원도 홍천 인근 산골에서 나무와 흙으로 직접 움막 같은 집을 지어 살아왔다. 그는 “태양전지를 설치해 최소한의 전기를 쓰고 있고, 밭에서 내가 먹을 만큼만 채소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화장실도 없다. 배설물은 고스란히 자신이 먹을 것들의 거름이 된다. 
우리 사회 주류 시스템이 그를 밀쳐내곤 했지만, ‘비주류 아웃사이더’라고 불린 그는 사회 바깥 구석에서 자기 스스로 ‘김기덕’을 키워왔다. 9일 폐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피에타>는 서울 청계천 공장들이 배경이다. 이곳은 15살 때부터 ‘기계밥’을 먹으며 삶을 버텨낸 어린 김기덕의 터전이었다. 
1960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공식 학력을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내고 만다. 비인가 농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 구로공단에서 단추공장·폐차장·전자공장들을 다니며 교과서 밖 세상을 배워갔다. 그의 가슴에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하던 ‘폭압적 가장’으로 남아 있고 이런 잔상은 그의 영화 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아버지 역시 계급화된 사회가 만든 “또 한 명의 피해자”라고 여기곤 했다. 
방위병으로 입대가 가능했는데도, 그는 5년여 복무하는 해병대 하사관을 지원했다. 제대 뒤 2년 동안 시각장애인교회에서 허드렛일을 돕던 그는 서른에 프랑스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그는 느닷없는 이 결단을 “그 시절 나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고 떠올린다. 최근 방송에 출연해 또래와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자신을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말이 유학이지, 길 위에서 전전하는 거리의 화가였다. 야외에 텐트를 치고 지내던 그는 특히 삶에 지친 이들의 인물화에 빠졌다. 그는 거리를 떠도는 집시들, 얼굴색이 검은 아프리카 이주민 청소부들의 얼굴을 그리며 그들과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 영화의 시작은 그림”이라고 말했는데, “그림이 나의 삶과,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파리에서 <퐁네프의 연인들> <양들의 침묵>이란 영화를 접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영화로 표현하는 ‘영상화법’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1993년 귀국한 그는 1995년 <무단횡단>이란 시나리오로 영화진흥위원회의 공모에 당선되고, <악어>를 통해 1996년 감독으로 데뷔한다. 어떤 감독 밑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다는 둥의 경력조차 없는 ‘별종 감독의 출현’이었다. 
학력이 변변치 않고 정식 영화 교육도 받지 않은 그의 작품은 철저히 무시받거나 극단의 논쟁을 낳았다. 그의 작품에 대해선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의 어정쩡한 반응이 아니라, 강력한 지지자와 혹독한 비판자들로 엇갈렸다. 그의 영화에 잔인한 폭력, 여성을 학대하는 성적 묘사들이 등장하자 “정신병적으로 문제가 있는 감독”이란 악평도 나왔다. 상업자본의 자금을 받지 못한 그의 영화는 저예산 탓에 영화적 만듦새가 헐겁다는 평도 따라붙었다. 작품 속 남자주인공도 부랑아(<악어>), 살인자(<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혼혈아(<수취인불명>), 포주(<나쁜 남자>), 사채업자 하수꾼(<피에타>) 등 ‘포악한 놈’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암울한 구석과 절망적인 인물들을 비추며 비극적인 사회에 대한 구원을 바라는 김 감독의 영화세계를 옹호하는 마니아층도 두터워졌다. 그의 작품에 오히려 “휴머니티가 짙게 담겨 있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외국 영화계가 그를 주목했다. 국내에서 그를 밀어내면, 외국 영화제가 그를 껴안고, 다시 국내 언론이 그를 쳐다보는 식이 반복됐다. 그는 “국내에선 내 영화를 외설로 보고, 외국에선 내 영화를 대중적인 영화로 보더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세 번째 연출작 <파란 대문>이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후 <섬>이 2000년 베네치아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세계적 영화제가 초청하는 감독 반열에 올랐다. 김 감독은 국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을 받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을 기점으로 해 억압과 폭력의 문제를 종교적 메시지로 풀어내며 대중과의 접점을 좁혀가는 변화를 보였다는 평이 많았다. 
2004년엔 세계 3대 영화제 중 두 곳에서 감독상을 타는 기염을 토했다.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빈집>으로 베네치아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2011년 자신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아리랑>으로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거머쥐며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하는 첫 한국 감독이란 기록도 세웠다. “외국에서 상을 많이 받아서 집에 진열하지 못하고 자루에 담아두고 있다”는 말은 그가 얼마나 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한다.
외국에서 낭보를 전해오는 와중에 그는 국내 영화 시스템과 곧잘 부닥쳤다. 한 편의 영화가 전국 상영관의 절반 이상을 싹쓸이하는 독과점 탓에 작은 영화들이 상영 기회를 잃고 좌초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는 영화다>(2008)의 흥행수익 배분이 부당하다며 대기업 투자·배급사와 소송전을 벌이는 곡절을 겪으며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순제작비 2억원에 못 미치고, 3주 동안 촬영한 <피에타>로 세계의 거장 감독으로 다시 우뚝 섰다. 국내 상업자본이 외면하고, 국내 영화계 인맥의 끈이 없던 그가 올해 베네치아의 황금사자상을 들어올린 것이다. 베네치아영화제 심사위원단과 외신들은 “<피에타>가 잔인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자비와 구원을 얘기하는 감동적이고 뭉클한 영화”라고 호평했다.
그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이제 나의 생각을 100% 동의받으려 하지 않겠다”며 삶의 태도가 바뀌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를 기다리지 않으며, 현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고 했다. 
<피에타>는 좀더 유연해진 김기덕이 지금 놓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 ‘현재의 비극’을 비추는 작품이다.

< 송호진 기자 >


뉴질랜드 거주 리디아 고…LPGA 캐나다 오픈서 최연소 우승

뉴질랜드에 사는 한인소녀 리디아 고(15. 고보경)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최연소 우승’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아마추어 선수인 리디아 고는 26일 BC주의 밴쿠버 골프장(파72: 6천427야드)에서 열린 캐나다여자오픈 마지막날 4라운드에서 단독 선두로 출발, 5언더파 67타의 맹타를 휘둘러 합계 13언더파 275타로 올해 에비앙 마스터스 챔피언 박인비(24)를 3타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1997년 4월24일생(15세4개월2일)인 리디아 고는 이번 우승으로 지난해 9월 나비스타 클래식에서 16세의 나이로 정상에 오른 알렉시스 톰슨(미국)의 LPGA 투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또한 아마추어 선수로서는 다섯번째이자 1969년 조앤 카너(버딘스 인비테이셔널 우승) 이후 43년만의 우승이다.
아마추어 선수는 상금을 수령할 수 없어 우승상금 30만달러는 박인비가 차지했다. 박인비는 141만9천달러를 쌓아 스테이시 루이스(미국•130만1천달러)를 제치고 시즌 상금 랭킹 1위로 올라섰다.

LPGA 투어 ‘최연소 우승’이라는 새 역사를 쓴 아마추어 선수 리디아 고는 한국에서 태어나 6살 때인 2003년 부모와 함께 뉴질랜드로 건너가 11살 때 뉴질랜드 여자 아마추어 메이저대회에서 최연소 우승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 주목을 받아왔다.
리디아 고는 올해 1월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오픈에서 프로대회 세계 최연소 우승을 차지해 이름을 알렸고, 13일에는 US여자아마골프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 들어서도 안정된 경기력을 보여준 리디아 고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루이스, 한국여자골프의 간판 신지애(24.미래에셋)와 동반플레이를 펼쳤지만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리디아 고는 “이번 대회에 컷만 통과하자고 마음먹고 출전했는데 우승까지 하게 돼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파인허스트 스쿨에 재학중인 리디아 고는 “당분간 프로로 전향할 생각없고 대학에 가서도 골프를 계속하겠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한편 리디아 고의 우승에 현지 ‘할아버지 캐디’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져 화제다. 주인공은 대회가 열린 브리티시 컬럼비아(BC)주 코퀴틀람 밴쿠버골프클럽의 원로 회원인 브라이언 알렉산더(63).

그는 골프 애호가이자 이 골프클럽 열성 회원일 뿐 직업 골프 캐디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대회 일주일 전인 지난 22일 우연히 고양고 인연이 됐다.
평소 딸의 캐디를 도맡아 오던 그의 엄마가 대회 장소에 밝은 현지 캐디에 대해 골프장에 문의를 해 왔다고 한다. 골프장 측은 자원봉사로 캐디를 지원해 놓은 상태였던 알렉산더에게 연락했고 양측의 만남으로 인연이 만들어졌다.
알렉산더는 “골프클럽에서 불과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으니, 연락을 받고 당장 달려간 것은 당연했다”며 “리디아 고와 엄마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즉석에서 캐디로 선택됐다”고 말했다.
리디아 고의 우승이 확정된 후 18번 홀 그린 뒤에서 만난 그는 “리디아의 우승은 나의 크나큰 즐거움이자 영광”이라고 감격했다.


감동을 남기고 폐막한 런던올림픽에서는 각국 메달리스트들의 눈물과 극복의 스토리가 세계인의 가슴에 잔영을 남겼다. 끔찍한 성추행 피해 경험을 극복한 미국의 육상 선수, 티베트인의 함성을 들으며 묵묵히 걸었던 중국의 경보 선수의 사연도 있다. 악몽 같은 과거와 싸워 이기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한 올림픽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은다. 

2012 런던올림픽을 장식한 인간승리의 스토리

■ 과거와의 싸움
“나는 ‘과거’가 아닙니다.”(I am not my past) 고교 2학년이던 켈리 웰스(미국)는 엄마의 약혼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큰 상처를 받았다. 당시 나이는 열여섯. 모든 사실을 엄마에게 털어놨지만 침묵할 뿐 아무런 조처도 없었다. 엄마에게마저 버림받은 듯한 상실감에 켈리는 집을 나왔다. 친구의 집에 머물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갈 즈음 엄마와 약혼자가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끔직한 사고 소식을 들었다. 뒤죽박죽된 삶 속에서 켈리는 달리기에 몰입했다. 가족과 관련된 얘기는 가슴속에 꽁꽁 묻어두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불의의 햄스트링(허벅지 뒤쪽의 근육과 힘줄)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이듬해 켈리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니 위로받고 싶었다. 켈리는 NBC에 “한동안 뛸 수 없게 되니까 다른 치유 방법을 찾게 됐다”고 털어놨다. 
만 서른살이 된 켈리는 런던올림픽 여자 허들 100m 결선에서 3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비가 흩뿌렸던 그날, 켈리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하게 웃었다. 두 눈에서는 빗물에 섞인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상식 직후 그는 “나로 인해 사람들이 희망을 보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는다면, 나의 삶은 아주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에게 ‘당신은 절대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 코치·친아버지에 당한 피해극복
미국 유도 역사상 첫 금메달을 안긴 케일라 해리슨(22)도 불행을 극복한 의지의 선수다. 13살부터 4년여간 열여섯 연상의 유도 코치 대니얼 도일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다. “처음에는 둘 사이의 비밀 같은 것이었어요.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지요. 나중에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해리슨의 친구에게 전해 들은 어머니의 고소로 도일은 법정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해리슨은 이후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성추행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일종의 금기 사항처럼 되어 있었어요. 유도 관련 사이트를 보면 ‘케일라가 사실을 말했는지 어떻게 알아?’, ‘걔는 몇살인데’라는 식의 댓글들이 있었죠. 그때부터 거울을 못 봤어요.”
하지만 해리슨은 유도장으로 돌아왔고,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해리슨은 인터뷰에서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스스로 피해자라고 규정해버리면 진짜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지옥에 사는 듯한 기분을 느껴도 용기를 가져야만 하고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고 당당히 외쳐야만 한다”고 했다. 
어릴 적 친아버지에게 당한 성적 학대를 딛고 여자 복싱 라이트급 60㎏에 출전했던 퀸 언더우드(29.미국)는 올림픽 첫 경기에서 졌다. “악몽 같은 나의 과거를 계속 얘기하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쥐구멍에 숨어 살지 말라고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변명으로 일관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USA 투데이는 “경기는 졌지만 퀸 언더우드의 투혼은 지지 않았다”고 평했다.
 
■ 소말리아 귀국 목숨도 불안
런던올림픽 육상 경기 첫날 모하메드 파라(21)는 는 히잡을 쓰고 손과 발을 모두 옷으로 감싼 채 올림픽 스타디움을 달렸다. 여자 400m 예선에서 1위보다 30초나 뒤진 1분20초48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8만여 관중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파라는 남자 1500m에 참가한 모하메드 하산 모하메드(20)와 함께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유이한’ 소말리아 국적의 선수였다. 
동아프리카 소말리아는 1991년 이후 21년 동안 내전이 진행중이고, 총성이 하루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 한 유명 코미디언이 수도 모가디슈 라디오 방송국을 나서다가 암살을 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고 있다. 현실의 암담함에도 파라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파라는 “내전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도 모가디슈 거리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무장한 군인들을 피하기 위해 더 빨리 달려야 했고, 가끔은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로 오인 받아 총을 쏘겠다는 군인들의 협박까지 받았다”고 했다. 파라는 훈련한 모가디슈 거리를 ‘죽음의 도로’라고 표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203개 국기와 함께 소말리아가 함께 입장했다는 거예요. 그 자체로 성공한 거지요. 소말리아는 죽지 않았어요. 이렇게 살아있어요.” 
파라와 모하메드는 런던올림픽에서 소말리아를 ‘대표’했지만 그들이 귀국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암담하다. 무슬림인 파라는 신성한 라마단 기간에 경기에 출전해 협박을 받는 등 주위 시선이 곱지 못하다. “모하메드는 돌아가면 살기 어려울 것 같다고도 말하지요”라며 두려움을 표했다. 4월에 이미 소말리아의 올림픽조직위원장과 축구협회장이 자살폭탄 테러로 숨진 바 있다. 여러 정황상 망명설도 불거졌으나 이들은 부인했다. 올림픽 참가에 용기가 필요했듯,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용기가 필요한 그들이다.
 
■ 첫 출전 새 역사 불구 모욕
사우디아라비아 여자 대표로 첫 출전한 유도 선수 우즈단 알리 압둘라힘 샤히르카니(16)는 고국에서 냉대를 받고 있다. 경기 때 변형 히잡을 사용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녀는 IOC의 권고로 경기 동안 수영모자와 비슷하게 생긴 변형된 히잡을 착용했고, 예선 1차전에서 82초 만에 한판으로 패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몸에 붙는 의상을 착용해 남성들 앞에서 경기하는 것은 스스로와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샤히르카니는 속세의 덧없는 명예를 위해 내세를 위태롭게 하는 짓을 중단하라”는 사우디 내 보수파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에 샤히르카니의 아버지는 “딸은 세계적으로 사우디 여성사를 새로 썼다는 찬사를 받았으나 국내 보수파들로부터는 ‘창녀’라는 심한 욕을 듣고 있다”며 딸을 모욕한 이들을 고소할 뜻을 내비쳤다.
 
■ 조국잃은 아픔 가슴속 삭여
22살의 키 초에양(Kyi Choeyang)은 티베트 출신으로 최초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하지만 티베트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여자 20㎞ 경보 선수로 출전했다. 조국인 티베트가 아니라, 60여년간 티베트를 강점한 중국의 오성홍기를 가슴에 달고 뛰는 초에양. 선수명도 중국명인 선제체양(Shenjie Qieyang)이다. 마치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때 일장기를 달고 뛰는 모습과 겹쳐진다. 
외신은 이렇게 전했다. “중국 사람들은 힘내라는 뜻의 ‘짜여우’를, 티베트 사람들은 ‘기우크’라며 응원을 했다. 적대적인 두 나라 사람들은 다른 국기를 들고 똑같은 목표(승리)를 기원했다.” 
출발지에서 초에양은 티베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첫발에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초반부 2㎞를 따라 달리며 응원해준 망명 티베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메달을 딴 초에양은 “티베트 사람으로 처음 올림픽 메달을 따 영광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주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취재진이 (눈 덮인 산 위로 태양이 솟는) 티베트 국기를 보았냐는 질문에, 고개를 흔들며 대답을 거부했다.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