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철저히 단절된 근래, 그나마 북한 지원의 명백을 잇고있는 것은 해외동포들 특히 한인 기독교계다. 그런데 북한은 돌연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를 억류했다. 그리고 3개월이 넘도록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않아 답답하게 속을 태우고 있다. 북한선교의 대부격인 임 목사를 구금한다는 것은 북 정권의 악수임에 틀림없다. 그의 억류는 북한 돕기에 찬물을 끼엊는 사건이 됐다. “그런다면 누가 어떻게 북 지원에 나서겠느냐”는 선교단체들의 비판과 활동중단이 뒤따른 것이다.
이렇게 냉각된 와중에, “그래도 중단해선 안된다, 그럴수록 속히 더 나서야 한다”는 교계움직임이 일고있어 주목된다.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처럼 크리스천들의 믿음과 선교열망은 ‘통일 준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선교단체 ‘모퉁이돌 선교회’가 지하교회 실상을 전하며 토론토에서 선교훈련을 가진데 이어 토론토 영락교회는 서울 영락교회 등과 공동으로 통일준비 사역훈련인 ‘So One(소원) 통일 선교세미나’를 5월15~17일 개최한다. 뒤이어 ‘기드온 동족선교회’가 북한의 동족구원과 지하교회 지원 등에 캐나다 동포들이 동참해 줄 것을 적극 호소하고 나섰다.
기드온선교회는 북한정권 간부가 16년이나 고통을 견디며 지하교회 확장에 노력하다 순교한 간증일기를 발굴해 책으로 펴내 큰 반향을 불렀다. 북의 혹독한 동토에 번진 지하교회는 영적해빙을 통한 북의 군열과 통일의 소망이라고 진단한다.
얼어붙은 북한 땅을 녹이고 동포들에게 자유를 안길 일이라면 무슨 수든 써야한다. 그래야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민족이 하나가 되어 열방을 호령할 때가 오지 않겠는가.


올해로 분단 67년이다. 남과 북이 갈려 총부리를 겨누고 이념과 언어와 문화와 생활이 단절된 이래 갈수록 괴리의 골은 깊어만 간다. 그 사이 수많은 대화와 협상이 있었고, 한 때는 통일의 기대가 부푼 때도 없지 않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최근에는 아예 그마저 끊기고 북이 핵개발에 틈만 나면 미사일을 쏘아대니 긴장파고가 오히려 높아만 간다. 젊은 층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응답 통계수치가 늘어가는 현실은 정말 가슴 아프다. 남과 북의 분단상황을 교묘히 활용하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외교적·군사적 손실과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를 분별한다면, 한민족 어느 누구도 통일을 간절히 원할지언정, 반대할 이유란 전혀 없을 터임에도, 그저 지금 안락하다는 이유로 현상에 안주하려는 속물적 단견에는 참 안타깝고 속이 쓰릴 뿐이다.
요즘 미-일의 밀착과 한국경시, 중-러의 연대와 미-중 대결 첨예화 와중에 한국 입지는 더욱 쪼그라들고 방향을 잃은 듯하다. 거기에 제어조차 못하는 북한의 잇단 돌출망동이 겹치니, 나라와 민족의 장래가 어찌될지, 마치 조선말의 위기를 보고있는 것 같은 걱정도 커진다.


어찌보면 진통제로 통증을 덮은 암환자에 비유될까. 세계적 경제강국을 자부한다고 위세를 부리지만, 속으론 모래 위에 궁성을 지은 것처럼 취약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 불안한 평화는 항상 주변 4강의 꽃놀이패에 그칠 뿐이며, 남북 균형이 깨져 단 한방이면 경제도 나라도 뒤뚱거린다. 그러니 통일 때까지 분단고통은 민족 최악의 아킬레스건이요 발전 저해요소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만일 통일이 이뤄진다면, 외교·군사부문 뿐만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 이르기까지 국력의 확장을 가져 올 시너지 효과는 헤아릴 수가 없다. 굳이 독일의 사례를 들지 않아도, 비용이 얼마에 이르건 어서 속히 통일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팔을 걷어 부쳐야하는 이유다.


그동안 남북관계를 보면, 그래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던 시기에 통일의 기대가 높아졌다. ‘퍼주기’ 운운 억지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이 본격화 됐을 때 화해와 해빙의 기운이 번졌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든 북과 대화하고 소통의 문은 닫지 말았어야 한다. 설령 일부가 고대하고 장담하듯 북한 정권이 일거에 무너진다 쳐도, 소통과 협력의 통로가 뚫려있는 쪽이 훨씬 충격파와 후유증 수습에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북을 궁지로 몰아 ‘발악’을 유도하는 데만 몰두하고, 북녘동포를 도우려는 혹은 소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친북이니 종북으로 몰아 남한 내에서도 갈등과 적대의 벽을 쌓는 것은 지극히 멍청한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민족통일의 열망과 실행의 열정을 가진 많은 동포들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이젠 멈출 때가 되었다.


< 김종천 편집인 >



북한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의 파장이 길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12일 외교안보장관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점검했다. 최윤희 합참의장도 커티스 스캐퍼로티 한미연합사령관과 회동했으며,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다음주 서울 방문 때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북한의 동향을 엄중하게 분석하고 대응책을 점검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북한의 행동을 과대해석하는 일부의 움직임은 우려스럽다. 북한 군사동향의 실체와 의도를 냉정하게 읽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확 쏠려가는 것은 안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군당국에 따르면 북한의 시험발사는 실제 미사일이 아니라 모의탄을 물 위로 150미터쯤 솟구치도록 한 사출시험 수준이라고 한다. 실제 전력화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시간도 꽤 필요하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미국의 여러 군사전문가도 모의탄 1발 쏜 것을 두고 실전 배치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견해다.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가 한계에 부닥쳤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성급하다. 상황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일각에선 북한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시험했으니 우리도 잠수함 전력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대잠수함 헬기를 대거 확충하자거나, 심지어 우리도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맞서자고 한다. 북한이 위협을 늘린다면 우리도 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이 특정한 무기체계를 갖고 시위를 벌인다고 그때마다 북한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으로 춤을 추어선 안 된다. 안보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고 막대한 군사비만 낭비할 따름이다. 어느 나라든 미사일 같은 군사자원 개발은 숨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북한은 설익은 기술 수준에서 시험발사 장면을 공개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아마도 무력 과시를 통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거나 북한 주민들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등의 대내외적 선전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단절된 지난 몇년 새 북한이 이런 식으로 도발적 행동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이번 사출시험을 두고 갑자기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면 북한 강경세력의 무력시위 의도에 말려드는 효과만 가져올 수도 있다. 최고의 안보전략은 역시 강력한 대북 억제력을 유지하되 남북관계를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와 한반도 현안들이 풀려나간다면 북한도 군사적 위협 필요성을 덜 느낄 것이다. 6.15 공동행사를 비롯해 남북 사이에 약간의 사회문화 교류가 움트려는 참이다. 나아가 경제협력과 정치·군사적 주제로까지 남과 북이 대화 범위를 넓히는 게 시급하다.



검찰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한테서 1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사고 있는 홍준표 경남지사에 대한 소환조사를 마치고 형사처벌 수위 조절에 들어갔다. 검찰은 홍 지사에 대한 기소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나,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서는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물론 피의자에 대한 구속수사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치자금법 위반의 경우 금액이 2억원 이상인 경우에만 영장을 청구해온 전례 등에 비춰볼 때 불구속 기소가 온당한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 증인에 대한 홍 지사 쪽의 회유와 허위진술 강요 혐의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 태도를 보면, 검찰이 ‘봐주기 수사’ 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검은돈이 오간 사건에서 관련 증인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행위는 구속영장 청구의 중대한 사유가 된다. 그런데 홍 지사의 측근인 김아무개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은 돈 전달자로 지목된 윤아무개 전 경남기업 부사장에게 “돈을 (홍 지사의 보좌관에게) 준 것으로 진술하면 안 되겠느냐”는 등의 회유를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런 회유 정황이 담긴 녹음파일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검찰은 “주요 참고인에 대한 회유·무마 의혹 수사도 계속 진행 중”이라는 말만 할 뿐 뚜렷한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홍 지사의 지시 여부는 일단 제쳐놓고라도 측근들의 증거인멸 시도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박모 전 경남기업 상무 등 성 전 회장 측근들을 증거인멸 혐의로 잇따라 구속한 것과도 크게 대조된다. 검찰은 이들이 회사 자료를 폐기·은닉한 혐의가 있다며 수사초기 전격 구속했으나, 정작 돈을 받은 쪽 증거인멸 혐의에 대해서는 수사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검찰의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는 이완구 전 총리 측근들의 증거인멸 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홍 지사에 대한 사법처리 수위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 수사의 진로를 가늠하는 풍향계다. 리스트에 오른 인물 중 유일하게 돈 전달자와 전달 과정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증거인멸 혐의마저 있는 이 사건을 맥없이 처리할 경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정권 핵심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사건 수사가 성 전 회장 측근들만 감옥에 가고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은 거리를 활보하는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으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칼럼] ‘사회적 사망’과 사회건강

● 칼럼 2015. 5. 15. 18:42 Posted by SisaHan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이지테크 노조위원장이 4년간의 긴 부당해고·복직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박지만 회장은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 기본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포스코 사내하청회사인 이지테크에서 2006년 노조를 설립했지만, 회사로부터 금속노조 탈퇴를 요구받아 2011년에 해고당했다. 이후 부당해고 판결이 나긴 했지만 회사는 복직을 거부하며 또다시 해고했고, 법원은 그것을 부당해고라고 판결해 2014년 5월 겨우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그를 원래 일하던 곳이 아닌 공장 밖 사무실에서 1년간이나 일감도 주지 않은 채 고립시키다가 최근 또다시 정직 처리했다.


언제나 법은 멀고 해고조치는 너무 가깝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2명이 자살한 것을 비롯해서, KT, 삼성전자서비스 등의 기업에서 해고, 전직, 노조활동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살, 질병 등으로 생을 마감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노동계는 이들의 자살을 ‘사회적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아직 제대로 개념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는 노령, 지병 등 자연적 이유가 아닌 사회, 경제, 정치적 이유로 인한 사망을 ‘사회적 사망’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보고, 이번 이지테크 노조위원장의 자살은 노동계가 주장하듯이 “학대에 의한 살해”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사망에는 우선 산재사망자가 포함될 수 있고, 빈곤, 실직, 노조 탄압, 해고 등으로 자살한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산재로 인한 사망자는 10만명당 18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2014년 한해만 2165명이 사망했다. 약간씩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거의 세배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인한 사망을 훨씬 넘어선다. 즉 5.18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의 거의 10배, 이라크전쟁 미군 병사 사망자의 4배가 매년 한국의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한국의 자살률은 30여명(10만명당 자살자 수) 정도로서 거의 10년째 세계 최고 수준인데, 그중 상당수는 사회적 사망일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소득 수준과 자살 생각 간에 큰 함수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노인 빈곤층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봐서, 자살의 원인도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사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세계 최악이며, 따라서 한국은 사회 건강성이 매우 낮은 나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국의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불평등 사회일수록 사망률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불의가 결국 질병과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회가 상당수의 국민을 사형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보았다.
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군 복무 중 사고, 자살로 죽은 사람이 매년 1000명 이상이었다. 1953년에서 2005년까지 비전투상황에서 죽은 군인은 총 6만여명이었다. 결국 과거는 군대에서, 오늘날에는 일터에서 멀쩡한 청장년 수천명씩 죽어 나가는 한국은 가히 사회적 사망, 국민사형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망은 개인 단위로 고립된 상태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이나 정책적 배려를 받지도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꺼번에 300명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죽은 세월호 ‘참사’는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었다.


국가 경제력(GDP), 수출, 1인당 국민소득 등의 흔한 경제지표로만 보면 한국은 확실히 선진국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 사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고 심각하게 병든 나라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산재, 빈곤, 노조 탄압 등 사회적 불의로 매년 수천명 이상이 죽는 나라를 결코 선진국이라 말할 수는 없다. 국민들이 비자연적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낮은 나라, 즉 약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건강’, 생명존중을 새 사회발전 지표로 만들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